장형 (1889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형은 188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경술국치로 학업을 중단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국민대학 설립에 참여하고, 건국실천원양성소 이사장, 단국대학교 설립 및 이사장으로 교육계에 헌신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1964년 74세로 별세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북로군정서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북로군정서 - 이범석
이범석은 조선 왕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으로, 청산리 대첩에서의 활약과 대한민국 건국 참여, 초대 국무총리 역임 등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과장된 서술 및 정치적 행보에 대한 논란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대한민국의 대종교인 - 조성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제국 육군 참위 출신인 조성환은 신민회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우익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대종교인 - 안호상
안호상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 정치인으로, 베를린 대학교 철학 박사 출신으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며 교육 제도 확립에 기여하고 민족주의 사상가로서 일민주의를 주창하며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으나 독립운동 참여와 일부 친일 활동 의혹 등 논란이 있다. - 결성 장씨 - 장덕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이었던 장덕수는 와세다 대학교 유학 중 조선인 유학생 단체를 이끌고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주필과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국내 지부 조직 등의 활동을 하였고,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암살당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 결성 장씨 - 장욱진
장욱진은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의 한국 화가로, 단순하고 순수한 화풍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표현하여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양주시에 장욱진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장형 (1889년)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889년 |
사망 | 미상 |
분야 | 독립운동 |
활동 | |
주요 활동 | 독립운동 자금 제공 군자금 조달 |
훈장 | |
건국훈장 | 독립장 (1963년) |
2. 생애
장형은 1889년(고종 26)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창익(張昌翼)은 진사 출신 유학자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이 패망하자 한의사로 전업하였다. 장형은 1905년 사서삼경을 마치고 고향의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를 졸업한 후, 1908년 서울로 유학하여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1]
1919년 3·1운동 후 북로군정서군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이극·안창하·이진산·전덕명 등에게 군자금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도 관여하여 1921년 워싱턴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 상정을 위해 국내 단체 대표 101명이 서명한 '한국인민치 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 太平洋會議書)' 제출에 참여했다.[2]
만주에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났고, 김두봉, 장도빈과 함께 손병희의 천도교에 가담했다. 1914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이듬해 원로원참의가 되었다.[4] 1909년 1월 15일 단군교는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중흥을 선포했고, 1910년 8월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청파호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여 만주에서 교세 확장에 주력,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했는데 장형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46년 국민동지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 사임하고, 임시정부 주도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이사장에 취임하고, 단국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다.[5][4] 1947년 11월 1일 정부 인가를 받아 11월 3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고, 1958년 백남학원(白南學院,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전신)을 인수하였다.
1963년 3.1절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1][5][6][7](참고 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1964년 74세로 별세하였다. 장지는 한남동 서울캠퍼스 내에 있었으나, 2007년 단국대학교 이전과 함께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 내로 조성되었다. 고은의 장편시 만인보에 등장한다.[1][5] 2009년 12월 30일 천안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세워졌다. 가로 3.15m, 세로 3.1m 크기의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3]
2. 1. 출생
장형은 1889년(고종 26)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창익(張昌翼)은 진사시를 거친 유학자였으나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선이 패망하자 한의사로 전업하였다. 장형은 1905년 사서삼경을 마치고 그해 고향의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를 입학, 190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민족의식이 강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1]2. 2. 독립 투쟁
1919년 3·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군에 속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으며, 이극·안창하·이진산·전덕명 등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도 관여했다. 1921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상정하고자 노력한 임시정부는, 국내 단체 대표 101명이 서명한 '한국인민치 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 太平洋會議書)'를 제출하여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 상정을 촉구했고, 장형도 이에 참여했다.[2] 2009년 12월 30일 항일 투쟁에 헌신한 장형 선생의 어록비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가로 3.15m, 세로 3.1m 크기의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3]
2. 3. 종교 활동
장형은 만주에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났다. 입학 동기생인 김두봉, 장도빈과 함께 손병희가 세운 천도교에 적극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의식이 강했던 장형은 1914년 대종교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가 되었다.[4]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교단의 중흥을 선포한 단군교는 1910년 8월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청파호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여 만주를 무대로 교세 확장에 주력,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는데 장형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2. 4. 광복 후
1946년 국민동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임하고,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주도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단국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계 전반에 걸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5][4]1947년 11월 1일 정부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아 같은 해 11월 3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58년 백남학원(白南學院,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전신)을 인수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6][7](참고 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2. 5. 최후
1963년 3.1절에 항일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1][5] 1964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장지는 한남동 서울캠퍼스 내에 마련되었지만, 2007년 단국대학교가 이전하면서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 내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고은의 장편시 만인보에 등장인물로 수록되어 있다.[1][5]3. 신익희와 토지 5만 평
장형은 해방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 설립에 참여,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신익희와 함께 이사장으로 국민대학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1947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장형은 신익희의 행동을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장형은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로부터 50000평의 토지를 기증받았다.[9] 이를 기반으로 장형은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 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4.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
1947년 김구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장형은 당시 교육계에 투신하고 있었으며, 김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그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였다. 장형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이사장으로서 재정적 지원을 하고, 소장 김구와 함께 운영에 참여하였다.[11]
건국실천원양성소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해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1947년 3월 설립된 양성소는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 장형으로 출발하였다.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 기간은 제1기가 2개월, 제2기부터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 내용은 독립운동사, 정치, 경제, 법률, 헌법, 역사, 선전, 민족문화, 국민운동, 철학, 약소민족문제, 농촌문제, 협동조합, 사회학, 공산주의 비판, 여성문제 등과 특별 강의였다.
강사진은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지청천, 나재하, 김성주, 김경수, 최호진, 김정실, 양주동, 민영규, 엄상섭, 엄항섭, 김학규, 설의식, 김기석, 이상조, 주석균, 홍병선, 김하선, 김석길, 안재홍, 정인보, 황기성, 이인, 김활란, 김법린, 박순천, 이은상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1947년 7월 이후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며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가, 부총재가 되었다. 장형은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김구를 '배신'했다고 여겨 그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었다.[11][12][13]
5. 단국대학 설립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장형은 1947년 11월 3일 단국대학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14][15] 장형은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하며 조희재 여사의 부군인 박기홍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이들은 지사적 신의를 바탕으로 육영사업에 대한 뜻을 함께 하였고, 조희재 여사의 사재와 독지가들의 기부로 대학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단국대학교의 창학 정신은 설립자 장형의 민족애와 조국애를 근본으로 한다. 장형과 박기홍의 유지를 받든 조희재 여사는 대학의 기본 정신을 민족애와 조국애에 두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들은 민족 정통성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그 중심에는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있었다. 장형은 대종교의 정신을 지키며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했다.
광복 이후 민족 분단의 비극을 겪은 장형은 젊은이들에게 민족 동질성을 교육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명을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에서 따온 "단국(檀國)"으로 정하고,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했다. 단국대학교는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구국, 자주, 자립(救國, 自主, 自立)을 구체적인 정신으로 삼았다. 이는 민족 정통성에 의한 나라를 세우고 지키겠다는 신념, 투철한 주인 정신, 자립적인 인물 육성을 위한 것이었다.
장형은 단국대학교의 설립일을 1947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였다.
6. 가족
- 아들: 장충식
- * 손자: 장호성
6. 1. 아들 장충식
장충식은 중국 천진(天津)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중재(中齊)이며, 단국대학교 학장, 총장, 이사장을 역임하였다.[1]6. 1. 1. 손자 장호성
장충식의 아들이자 장형의 손자인 장호성은 단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1]참조
[1]
뉴스
단국대, 개교 6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http://news.unn.net/[...]
대학신문
2013-08-01
[2]
뉴스
독립운동가가 세운 국내 유일의 민족사학 자부심
http://www.dhnews.co[...]
대학저널
2012-12-03
[3]
뉴스
독립기념관에 장형 선생 어록비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9-12-29
[4]
뉴스
중앙일보 칼럼-도올 고함(孤喊), 미션 임파서블 《한한대사전》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10-06-01
[5]
뉴스
백범과 나의 아버지
http://www.econotalk[...]
경제풍월
2013-08-01
[6]
뉴스
장형(張炯)
http://people.aks.ac[...]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2011-05-15
[7]
웹사이트
결성장씨(結城張氏) 카페
http://cafe.daum.net[...]
[8]
논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0
[9]
문서
1953년 화폐개혁 당시의 가치로 1억환이며, 넓이 단위로는 264만 제곱미터로 79.86만 평, 약 80만 평을 의미함(네이버 단위변환)
[10]
뉴스
“독립정신 계승한 단국대, 명문사학의 길을 걸어오다”
http://www.dhnews.co[...]
대학저널
2013-08-05
[11]
뉴스
「建實(건실)」解散(해산)
경향신문
1949-08-25
[12]
뉴스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경향신문
1949-09-25
[13]
뉴스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http://news.koreanba[...]
대한변협신문
2015-02-09
[14]
문서
백남(白南)은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박사(1914~2008)의 아호이다.
[15]
뉴스
한양대, 백남 김연준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개최
아시아투데이
2014-10-2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