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질 (14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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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질(1496년)은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시대 인물이다. 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부모의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효심을 실천했다. 그의 효행은 널리 알려져 1546년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과 교류했다. 저서로는 《영모록》과 《육사자책설》이 있으며, 전라도 무장의 도암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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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 (1496년) | |
---|---|
김질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안동 김씨 |
자 | 자고(子固) |
호 | 묵재(默齋) |
시호 | 충간(忠簡) |
생애 | |
출생 | 1458년 |
사망 | 1521년 (64세)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
관력 | |
관직 | 영의정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승규 |
어머니 | 정부인 안동 권씨 |
배우자 | 정부인 평산 신씨 |
아들 | 김안국, 김정국, 김희국 |
평가 | |
주요 업적 | 훈구파 세력 견제 |
사후 평가 | 청백리 녹선 |
김질 (金 질) | |
기본 정보 | |
출생 | 1496년 |
사망 | 미상 |
본관 | 강릉 김씨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김취 |
아버지 | 김전 (1458년) |
어머니 | 남양 홍씨, 홍치의 딸 |
2. 생애
천성이 온순하고 단정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양친을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1508년 모친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부인마저 멀리하였다.[2]
홀아버지도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직접 흙짐을 져서 분묘를 만들고, 부친이 생전에 좋아한 꿩고기를 매년 제사상에 바쳤다고 한다.[2] 한번은 제사상에 올릴 꿩고기를 구하지 못하여 낙심하자 꿩이 부엌으로 날아들었다고 한다. 또 제사에 쓸 간장을 쥐가 흐려놓아 종일토록 통곡하였더니, 밤새 쥐들이 장독 아래에 떼지어 죽어 있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어느 겨울날 밤 눈이 펄펄 내려 한길 높이로 쌓였지만 오직 여막 둘레에는 한점 눈비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도에 감복하여 묘소가 있는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불렀다 한다.
하서(河西) 김인후는 그의 인물됨을 높이 사서 그가 살던 전라북도 고창 집을 영모(永慕)라 이름지어 현판했고, 미암 유희춘은 무장현감으로 부임해 영모당(永慕堂)에 기(記)를 써주었다. 송천(松川) 양응정과 고봉 기대승과도 교유하였는데 그들은 김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효행이 널리 알려져 1546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전라도 무장(茂長)의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다.
3. 저서
4.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김언룡(金彦龍) | 안변부사 |
조부 | 김을만(金乙萬) | 통례원 통찬 |
부 | 김복중(金福重) | 통례원 찬의 |
모 | 광주 이씨 | 주부(主簿) 이원경(李元經)의 딸 |
고조부 | 김종한 | 부령 |
증조부 | 김귀덕 | 좌랑 |
종증조부 | 김礩 | 김종한의 형제 김종숙의 아들 |
친척 | 김자점 |
5. 평가
김질은 온화한 성격으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150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는데, 밤사이 길을 덮을 만큼 눈이 내렸지만 움막 주변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1] 이후 사람들은 그곳을 제청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직접 흙을 날라 무덤을 만들었으며,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꿩고기를 매년 제사상에 올렸다고 한다.[1] 제사에 올릴 꿩고기를 구하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제사에 쓸 간장에 쥐가 빠져 슬퍼하자, 하룻밤 사이에 쥐들이 된장독 밑에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설도 있다. 기대승, 양응정 등과 교류했으며, 김린후는 그의 인품을 높이 사 그가 살던 집을 영모당(永慕堂)이라고 이름 지었다.[1]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으며, 전라도 무장의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성명(姓名)
http://www.shinjongw[...]
[2]
웹인용
성명(姓名)
https://web.archive.[...]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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