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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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1510년에 태어나 1560년에 사망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학문을 계승하여 호남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이황과 교류하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인종의 스승으로 세자 시절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인종 사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인후는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 사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장성 필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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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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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김인후 |
한자 | 金麟厚 |
로마자 표기 | Gim Inhu |
자 (字) | 후지(厚之) |
호 (號) | 하서(河西) · 담재(湛齋) |
시호 (諡號) | 문정(文正) |
생애 | |
출생일 (양력) | 1510년 8월 23일 |
출생일 (음력) | 1510년 7월 19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 자택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
사망일 (양력) | 1560년 2월 11일 (51세) |
사망일 (음력) | 1560년 1월 16일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 자택 |
학력 | |
학력 | 1540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
관직 정보 | |
직책 | 조선국 전라도 옥과현감 |
임기 | 1543년 12월 ~ 1545년 7월 |
정치 성향 | |
정당 | 무소속 |
종교 |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여흥 윤씨 부인 |
자녀 | 김종룡(장남), 김종호(차남), 딸 4명 (사위: 조희문, 양자징, 유경렴, 막내딸 요사) |
부모 | 아버지 김령, 어머니 옥천 조씨 |
친인척 | 사돈 이항, 사돈 진벽, 사돈 조임, 사돈 양산보, 사돈 유희춘 |
기타 정보 | |
분야 | 문신, 성리학자, 도학자, 사상가, 시인, 교육자, 정치가, 저술가 |
2. 생애
1510년(중종 5) 7월 19일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안음훈도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1519년(중종 14)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모재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을 배웠다.[1]
1522년(중종 17) 13세 때 《시경》을 탐독하였다.[1]
1526년(중종 21) 17세 무렵 면앙정 송순을 찾아가 뵙고 수업 하였다.[1]
1527년(중종 22)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다.[1]
1528년(중종 23) 19세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531년(중종 26) 22세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2]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이황과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3]
1536년(중종 31) 성균관에서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었다.
1543년(중종 38) 봄 2월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를 지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었다.[4]
1540년(중종 35) 겨울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다.[5] 1541년(중종 36) 여름 4월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다.[5]
1543년(중종 38)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인종이 춘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다.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소대(召對)를 자주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6]
1543년(중종 38)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데,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7]
1543년(중종 38)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청하여[8] 겨울 12월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9]
1544년(중종 39)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1545년(인종 원년) 여름 4월 중국의 사신 장승헌(張承憲)이 와서 국상을 조문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를 제술관으로 불렀다.
인종이 새로 왕위에 즉위하여 첫 정사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인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의 신원을 복원하였다.
1545년(인종 원년) 가을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병이 발작했다. 그래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여,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10]
1545년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吊申生辭)의 시를 지었다.[11]
1560년(명종 15) 음력 1월 16일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지 15년여 만에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여유롭게 세상을 떠났다.[14]
2. 1. 생애 초기
1510년(중종 5) 7월 19일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안음훈도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519년(중종 14)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모재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을 배웠다.[1]
1522년(중종 17) 13세 때 《시경》을 탐독하였다.[1]
1526년(중종 21) 17세 무렵 면앙정 송순을 찾아가 뵙고 수업 하였다.[1]
1527년(중종 22)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다.[1]
1528년(중종 23) 19세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531년(중종 26) 22세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2]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이황과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3]
1536년(중종 31) 성균관에서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었다.
1543년(중종 38) 봄 2월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를 지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었다.[4]
2. 1. 1. 출생과 가계
김인후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傳)의 둘째 왕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의 후예이다. 그의 5대조 '''김온'''(金穩)은 조선 개국원종공신 흥려군(興麗君)에 봉해지고 장성 학림사에 배향되었다.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는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와 사촌자매 지간인데 친가가 태종의 왕권강화 정쟁에 휘말려 화를 당하자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1510년(중종 5) 7월 19일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안음훈도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워 부친 참봉공의 사랑이 더 하였다.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5~6세 무렵부터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시(詩)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14년(중종 9)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눈여겨 보기만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얼마 후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하게 여겼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시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 그 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는「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1515년(중종 10) 6세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지구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다 들었는데, 기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겼다.
1517년(중종 12년) 8세 때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숙부 돈후재 조원기(趙元紀)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기며 더불어 시를 짓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 천하문장((長城神童 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1518년(중종 13) 9세 때 복재 기준(奇遵)이 남녘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의 이름을 듣고서 데려다 보고 칭찬을 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사필(內賜筆)」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고 보배로 삼았다.
2. 1. 3. 혼인과 가정 생활
1523년(중종 18) 14세에 진안 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딸 여흥 윤씨(驪興 尹氏)에게 장가들었다. 1524년 이듬해 큰 아들 종룡(從龍)이 태어나고 이후 4녀를 두었다. 1537년(중종 32) 둘째 아들 종호(從虎)가 태어났다.2. 1. 4. 수학
1519년(중종 14)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모재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을 배웠는데, 모재는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일컬었다.[1]1522년(중종 17) 13세 때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을 탐독하였다.[1]
1525년(중종 20) 16세 때 서포 곽열(郭說)의 일기에 하서는 총명하고 숙성하여 십오육 세에 이름이 한 도에 가득하였다. 가친(家親. 곽희영)이 호남에 가셔서 영은사(靈隱寺)에서 글을 읽는데 하서도 역시 와서 그 절에 깃들어 한문(韓文)을 읽었었다. 수 일을 있다가 하서는 돌아간다고 말하므로 선친이 묻기를 「수일 사이에 한문을 다 읽었단 말인가.」하니, 하서는 웃으며 하는 말이 「대강은 짐작하여 능히 외울 만은 하다.」하므로 선친은 한 권을 뽑아내어 물은 즉 어느 대문이고 다 통달하여 진작 외워둔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다른 권을 마구 뽑아 시험하니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선친은 크게 기특히 여겼다고 기록하였다.[1]
1526년(중종 21) 17세 이 무렵 담양의 면앙정 송순을 찾아가 뵙고 수업 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1]
1527년(중종 22)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는데, 신재는 그에게 탄복하여 매양 추수빙호(秋水氷壺)라 일컬었다. 또 이 무렵 나주 목사로 좌천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눌재 박상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1]
전라남도 장성군 출신. 처음에는 송순에게 배우고, 최산두와 김안국에게 입문했다. 1531년에 과거의 사마시에 급제, 이황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했다. 1540년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홍문관 정자를 지냈다. 1543년에 박사 겸 시강원 설서로 승진했다. 세자(후일의 인종)의 보도를 맡아 은총을 받았다.[1]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1]
저서로는 「홍범섭시작괘도」, 「천명도」, 「대학강의발」, 「효경간오발」, 「하서집」, 「백총초해」 등이 있다.[1]
2. 1. 5. 학문 연구와 학맥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문을 잘하여 명성이 전역에 떨쳤으며, 기묘 사림들인 조원기·기준·송순·박상 등의 아낌을 받고,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최산두에게 수학하였는데 그들은 기묘년(1519년) 에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4]또한 그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같이 배웠는바, 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직계 인물이므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다. 따라서 조광조와는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로 후대 사림들로부터 학문과 덕행의 사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김정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문신으로서 처음으로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개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신원 복원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1528년(중종 23) 19세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월 칠석(七夕)날을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이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홍문관 대제학 이행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그때 지은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다.
1531년(중종 26) 22세 성균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이 있다.[2] 이듬해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셨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퇴계와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후일 퇴계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3]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휴암 백인걸·임당 정유길·금호 임형수·미암 유희춘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 성균관에서 스승 신재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가마(加麻)를 하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
1539년(중종 34)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 등을 차출하여 이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하였다.
1543년(중종 38) 봄 2월에 스승 모재 김안국(金安國)의 부음을 듣고 가마(加麻)를 하고, 이후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전라남도장성군 출신. 처음에는 송순에게 배우고, 최산두와 김안국에게 입문했다. 1531년에 과거의 사마시에 급제, 이퇴계와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했다.
2. 2. 관료 생활
1540년(중종 35) 겨울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다.[5] 1541년(중종 36) 여름 4월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다. 함께 뽑힌 12사람과 더불어 계(契)를 닦고 이름을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이라 했다. 이들과는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하였다.[5] 겨울 10월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전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 1542년(중종 37) 가을 7월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청요직 홍문관 저작에 승진되었다.1543년(중종 38) 1월 동궁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지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그해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인종이 춘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다.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소대(召對)를 자주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6] 그가 입직해 있을 때에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또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나타내 보인 적이 없었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을 하사하여 뜻을 비치고, 눌러 그에게 명하여 화축(畵軸)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그 시가 아래와 같았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다 정미(精微)롭고,
:굳은 돌은 벗인 양 범위 안에 들어 있네.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지으사,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시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이후에도 『주자대전』 한 질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6] 이와 같은 인종의 그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충성심으로 굳고 깊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 일화는 군신 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6]
1543년(중종 38)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데,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7]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1543년(중종 38)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청하여[8] 겨울 12월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9]
1544년(중종 39)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1545년(인종 원년) 여름 4월 중국의 사신 장승헌(張承憲)이 와서 국상을 조문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를 제술관으로 불렀다.
인종이 새로 왕위에 즉위하여 첫 정사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인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의 신원을 복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기약하며 전국의 선비를 모으고, 모두 그에게 인종의 경연의 보도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그는 세상의 기미가 반(反)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더 이상 조정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에 인종이 자주 환후가 있음을 보고 그는 약 제조 논의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는데, 약원에서 그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는 부모님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2. 2. 1.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
1543년(중종 38)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데,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7]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1543년(중종 38)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청하여[8] 겨울 12월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9]
2. 2. 2. 인종 즉위 및 제술관
1544년(중종 39)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1545년(인종 원년) 여름 4월 중국의 사신 장승헌(張承憲)이 와서 국상을 조문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를 제술관으로 불렀다.인종이 새로 왕위에 즉위하여 첫 정사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인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의 신원을 복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기약하며 전국의 선비를 모으고, 모두 그에게 인종의 경연의 보도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그는 세상의 기미가 반(反)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더 이상 조정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에 인종이 자주 환후가 있음을 보고 그는 약 제조 논의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는데, 약원에서 그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는 부모님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2. 3. 사직과 은거
1545년(인종 원년) 가을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병이 발작했다. 그래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여,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10]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1545년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吊申生辭)의 시를 지었다.[11]
1547년(명종 2) 봄에 성균관 전적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공조정랑으로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길을 가다 병으로 사(辭)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되었다.[11]
체직 다음날 18일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로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11]
1549년(명종 4)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 7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임명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병이 났다고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여 견디기 어려운 실정을 간절하게 아뢰며 나아가지 않았다.[11]
1554년(명종 9)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에 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0월에 명종은 본도 감사에게 특명을 내려 「식물을 제급케 하고,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글을 올려 사양했다. 이와 같이 그는 조정의 부름에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11]
1555년(명종 10)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며 그들을 불려 강론에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11]
사관은 "김인후는 재행이 있으나 영진하는 것에 마음에 두지 않고,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담담하였는데, 만년에 성리학을 좋아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이 많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으니, 억지로라도 올라오게 하여 진현하고 강론하는데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유신 이황·김인후 등을 등용하여 논사하는 위치에 두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시골로 퇴거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크게 잘못된 정사가 아니겠는가?.라고 논한다.[11]
2. 3. 1. 인종에 대한 절의
1545년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吊申生辭)의 시를 지었다.[11][유소사(有所思)]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 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을 반도 다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르는 흐르는 물처럼 잊혀지련만.
한창 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더냐, 아직도 죽지 목해 살아 있다오.
백주는 옛 물가에 있고, 남산엔 해마다 고사리가 돋아나누나.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1547년(명종 2) 봄에 성균관 전적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공조정랑으로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길을 가다 병으로 사(辭)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되었다.[11]
체직 다음날 18일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로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11]
1549년(명종 4)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 7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임명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병이 났다고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여 견디기 어려운 실정을 간절하게 아뢰며 나아가지 않았다.[11]
1554년(명종 9)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에 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0월에 명종은 본도 감사에게 특명을 내려 「식물을 제급케 하고,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글을 올려 사양했다. 이와 같이 그는 조정의 부름에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11]
1555년(명종 10)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며 그들을 불려 강론에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11]
사관은 "김인후는 재행이 있으나 영진하는 것에 마음에 두지 않고,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담담하였는데, 만년에 성리학을 좋아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이 많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으니, 억지로라도 올라오게 하여 진현하고 강론하는데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유신 이황·김인후 등을 등용하여 논사하는 위치에 두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시골로 퇴거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크게 잘못된 정사가 아니겠는가?.라고 논한다.[11]
2. 4. 생애 후반
을사사화 이후 김인후는 성리학 연구, 시문학 활동, 후학 양성에 힘썼다.전라남도장성군 출신으로, 처음에는 송순에게 배우고, 최산두와 김안국에게 입문했다. 1531년 과거 사마시에 급제하여 이퇴계와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했다. 1540년 급제 후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 정자를 지냈다. 1543년 박사 겸 시강원 설서로 승진하여 세자(후일의 인종)의 보도를 맡아 은총을 받았다. 1544년과 1555년 중종과 인종이 잇따라 붕어하자, 복상 중 병을 얻어 벼슬을 버리고 명종의 소명도 사양하고 주자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저서로는 「홍범섭시작괘도」, 「천명도」, 「대학강의발」, 「효경간오발」, 「하서집」, 「백총초해」 등이 있다.
2. 4. 1. 성리학 연구
을사사화 이후 은둔한 그는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 실천하니 만년에는 학문의 경지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깊었다. 그의 학문 기조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2]1547년(명종 2) 이 때에 중국의 학술이 크게 무너져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을 숭상하고 참으로 주자(朱子)를 아는 자는 적었다. 그래서 그는 시를 지어 문인 기효간(奇孝諫)에게 제시하였다.
그는 문자가 생긴 이래로 여러 성인들이 표준을 세워 왔으나, 공자(孔子)가 없었으면 여러 성인의 도가 전하지 못했을 것이요, 공자(孔子) 이후로 주자(朱子)가 없었으면 공자(孔子)의 도가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라 하였다. 공자(孔子)·주자(朱子) 두 부자의 사업과 공렬은 천지의 사이에 우뚝하고 빛나서 여러 성인이나 현인들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詞)와 시에 이를 나타내어 후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1549년(명종 4) 봄 2월 순창군 쌍치면 점암촌에 은거하면서 《주자대전》 중에서 《대학 강의》를 얻어 보고 《대학 강의》 발문을 지었다. 또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를 그려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논의에 퇴계 이황도 적극 참여했는데,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의견과 해설의 정밀함에 대해 깊이 공경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四七 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1552년(명종 7) 양산보(梁山甫)가 《효부》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시운을 따라 글을 지었는데, 송순이 직접 생각을 정리하여 원 글의 뒤에 품평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6년(명종 11)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심학'(心學)으로써 당시 숭상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讀周易詩)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단번에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그의 시에 화답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1557년(명종 12) 《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西銘)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서 읽기를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와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가르침을 내렸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은 잃어버려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 7월에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찾아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10월 기대승이 문과에 급제하고, 그해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던 중 일재 이항(李恒)에게 들러 전에 의논하던 《태극도설》을 재 강론했는데, 이항이 「태극(太極) 음양(陰陽)이 일물(一物)」이라고 주장하고, 기대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여 종일 토론하였으나 의론이 귀결되지 못했다. 이에 기대승이 그를 찾아와 뵙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묻자 그는 기대승의 의견이 맞다고 하며, 기대승과 하루 종일 강론하다 파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 및 그에게 강의하고 질문한 것이 왕복으로 묶어 수백 언 이었는데 퇴계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소재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1559년(명종 14) 일재 이항이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는 뜻의 글을 극론하여 고봉 기대승을 통해 글로 보내자, 그는 일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였다.
그해 겨울 고향에 내려와 있던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의 설을 강론하는데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물흐르듯 막힌바 없이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정암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바탕으로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인심이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고 주장 하자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후 퇴계와 고봉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소재의 설을 적극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유실되어 전하지 못한다.
1560년(명종 15) 정월 그는 세상을 버렸다. 3월 후학 기대승이 삼가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영전에 전(奠)을 올렸다.[13]
1560년 8월 고봉은 그동안 그에게 이와 같은 소득을 얻어 「사칠설」(四七說) 및 「장서」(長書)를 저술하여 퇴계에게 받들어 드렸던 것이며, 이후 퇴계와 더불어 사칠 호발의 시비에 대해 왕복 변론한 것이 자못 수 만 자에 달했으니,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구별한 것이었다. 고봉이 퇴계에게 질문하자 퇴계도 『담옹(하서의 별호)이 비록 적적하게 두어 마디 말을 했으나, 역시 이미 그 말의 본 뜻이나 내용을 보았다 하겠다.』고 하였다.
1566년(명종 21) 그런데 고봉 기대승은 그 동안 그를 통해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이후 한결같이 퇴계 이황의 설을 따르니, 논리적 일관성을 잃어버려 앞뒤가 갈라져서 두 사람이 말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고 왕복서」이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도덕 사회를 이룩하려는 데 그 뜻을 두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일찍이 도를 안다고 자처하지 않았으며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겼다.
- 서경덕의 돈오의 첩경에 흐르는 폐해를 비판한 것.
- 이항이 도기(道器)의 구분을 혼합하여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로 한 것을 오류로 배척한 것.
- 노수신이 라흠순의 설을 주로 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체용(體用)의 관계에 있다고 논변한 것.
- 기대승의 질문에 답하여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의 비판의 요점을 설파하고,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이기일도설의 원류를 이룬 것.
2. 4. 2. 시문학 활동
성장하여 시문을 지으면 맑고 화려하고, 고상하고 빼어나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으며,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가 뜻하는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지 않았다.일찍이 화순 동복의 최산두 문하를 출입하면서부터 시문학 방면에도 이름을 얻었는데, 이후 서울에서 글 잘 짓기로 이미 이름이 들어났으며, 낙향해서는 당시 전라도 일대에 덕망 있는 사림계 인사들과 교유를 하였는데, 특히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는 도의 지교를 맺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면앙정을 중심으로 당대 유명한 인사들인 송순, 임억령, 김윤재, 김성원, 기대승, 정철 등의 문사들과 담양의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의 누정을 중심으로 호남 시단을 형성하여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가 쓴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및 그 밖의 여러 율시 등은 누정 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칭송 받았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2. 4. 3. 후학 양성
1546년(명종 원년) 4월에 《효경간오》의 발문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미암 유희춘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읍에 들러 주자의 《효경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이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뿐이었다.1548년(명종 3) 봄 어버이를 모시고 처향(妻鄕)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였다. 이곳에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제자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조희문(趙希文) 등과 더불어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컫는다. 또 상류에는 낙덕암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낙향해서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이다. 이듬해 10월 부친 참봉공 상을 당하여 12월에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맥동 원당골에 장사하였다.
[자연가(自然歌)]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사오리.
1549년 10월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장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도들에게 전심하여 순순히 가르침을 베풀되, 반드시 ≪소학≫을 먼저 읽히고 다음에 ≪대학≫을 읽히는데, 한결같이 주문공의 성법(成法)을 따랐다. 그의 두 아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역시 ≪소학≫을 10년이나 읽도록 하며 딴 책으로 바꾸어 주지 않았다.
제자로는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인 변성온(卞成溫) · 기효간(奇孝諫) · 조희문(趙希文) · 양자징(梁子徵) · 정철 · 오건(吳健) · 남언기(南彦紀) · 노적(盧適) · 윤기(尹祈) · 신각(申覺) · 서태수(徐台壽) · 이지남(李至男) · 김종호(金從虎) · 안증(安璔) · 김제안(金齊顔) · 양산해(梁山海) · 박원순(朴元恂) 등이 있다.
2. 5. 최후
1560년(명종 15) 음력 1월 16일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지 15년여 만에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여유롭게 세상을 떠났다.[14]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기운이 평화롭지 못하여 약물을 들면서 집안사람에게 다음 날이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주를 갖추고, 자녀들로 하여금 사당에 제물을 올리도록 하라고 일렀다.[14]
15일 보름날에는 병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며 꿇어앉아 제사의 시각을 기다리면서 자녀들에게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다운 굳은 절개와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다.[14]
조정에 부음을 아뢰자 명종이 부의를 보내도록 특명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3월에 장성현 대맥동 원당산 부모 산소 아래 자좌 오향 벌에 장사지냈다.[14]
그는 평소 《가례》에 유념하여 상례와 제례를 더욱 삼갔으며, 시제와 절사를 당해서는 비록 앓는 중이라도 반드시 참석했고, 시속의 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를 뒤로 했다.[14]
3. 사상과 업적
그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으며,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자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15] 도학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중종 때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으로,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15] 이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기묘사화는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호남에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15]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면서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고,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15]
김인후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았다.[15] 도학, 문장, 절의가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학문과 정신이 그러했음을 말해주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15]
그의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데 있다.[15] 그가 만든 「천명도」는 그러한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었다.[15] 그는 서경덕의 돈오의 첩경에 흐르는 폐해를 비판하였고, 이항]]/이항 (1499년)한국어이 도기(道器)의 구분을 혼합하여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로 한 것을 오류로 배척했다.[15] 또한
3. 1. 도학(道學)
그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으며,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자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15] 도학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중종 때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으로,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15] 이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기묘사화는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호남에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15]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면서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고,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15]
김인후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았다.[15] 도학, 문장, 절의가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학문과 정신이 그러했음을 말해주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15]
그의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데 있다.[15] 그가 만든 「천명도」는 그러한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었다.[15] 그는 서경덕의 돈오의 첩경에 흐르는 폐해를 비판하였고, 이항]]/이항 (1499년)한국어이 도기(道器)의 구분을 혼합하여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로 한 것을 오류로 배척했다.[15] 또한
3. 2. 성리학 이론
김인후는 서경덕의 돈오의 첩경에 흐르는 폐해를 비판하였다. 이항이 도기(道器)의 구분을 혼합하여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로 한 것을 오류로 배척하였다. 노수신이 라흠순의 설을 주로 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체용(體用)의 관계에 있다고 논변하였다. 기대승의 질문에 답하여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의 비판의 요점을 설파하고,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이기일도설의 원류를 이루었다.3. 3. 절의(節義)
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김인후의 의리는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여 임진왜란 임란 의병, 구한말 의병, 광주 학생 항일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16]3. 4. 문장(文章)
그의 문장(文章)은 도(道)를 싣는다고 평가받는다. 도(道)는 하늘의 마땅히 그러한 바를 따르는 것으로, 문(文)은 그와 같은 도(道)를 실현하는 실체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장(文章)이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도가 그만큼 깊었음을 말한다. 그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의 문장을 따르게 되었다.[17]4. 평가
김인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당대 및 후대의 여러 인물들이 그의 학문, 인품, 절의를 높이 평가했다.
- 박상: 어릴 적 김인후를 보고 "잘 마칠 것"이라 예견했고, 이는 적중했다.
- 조원기: 전라 관찰사 시절 김인후의 재주와 글 솜씨를 칭찬하며 "장성(長城)의 기동(奇童)이요, 천하의 문장"이라 칭송했다.
- 기준: 김인후를 '기동(奇童)'이라 칭하며 인종의 신하가 될 것이라 예견하고 '내사필'을 선물했다. 훗날 김인후는 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 김안국: 김인후에게 『소학』을 가르치며 "나의 소우(少友)"라 칭하고,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극찬했다.[18]
- 최산두: 김인후와 학문을 논하며 "추수 빙호(秋水 氷壺)"와 같다고 평했다.
- 이황: "평생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 회고했다.
- 정철: "동방에 출처(出處) 바른이 없는데, 유독 '담재옹'(湛齋) 이 한 분"이라 칭송했다.
- 이이: "그 출처(出處)의 바름이 해동(海東)에는 그와 더불어 짝할 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 김장생: 김인후의 경학(經學)과 절개를 높이 평가했다.
- 안방준: 김인후를 "청수부용, 광풍제월(淸水芙蓉, 光風霽月)"이라 칭송했다.
- 양응정(梁應鼎): "오늘날의 안자(顔子)"라고 평가했다.
- 송시열: 1682년 신도비문에서 김인후를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인물로 칭송했다.[19]
- 정조: 1796년 문묘 종사 교지에서 김인후의 학문, 기상, 《대학》과 《서명》에 대한 이해를 높이 평가하며, "조선 개국 이래 도학(道學)·절의(節義)·문장(文章)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 뿐"이며,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라고 극찬했다.
-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의 대표적 이론으로, 이(理)와 기(氣)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한국 유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조선 중기 도학자로서,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학덕은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 후대 사림들은 김인후의 인종에 대한 절의(節義)와 출처([出處)의 올바름을 높이 평가했다.
- 조선 중기 성리학 이해를 심화시키고 사림 정치의 기반을 다진 도학자이자 실천적 지성의 대표 인물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20]
5. 저서와 작품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도수에도 정통하였다. 태극에 관한 이론도 깊어 『천명도』를 완성하였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잃어버려 많지 않다.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며,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 《하서집》(河西集)
-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 《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
- 《가례고오》(家禮攷誤)
- 《천명도》(天命道)
- 《백련초해》(百聯抄解)
6. 가족 관계
고조부는 충좌위 중령사정 김달원(金達源)이고, 고조모는 판사재시사 춘경(春景)의 딸 서흥 이씨(瑞興 李氏)이다. 증조부는 사온서 직장 김의강(金義剛)이고, 증조모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다. 조부는 금구훈도 김환(金丸)이고, 조모는 직산 김씨(稷山 金氏)로 세자좌사경 김지효(金知孝)의 손녀이자 김석숭(金石崇)의 딸이다. 아버지는 의릉참봉 김영(金齡)이고, 어머니는 훈도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玉川 趙氏)이다.
부인은 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딸 여흥 윤씨(驪興 尹氏)이다. 장자는 김종룡(金從龍)이고, 며느리는 일재 이항(李恒)의 딸 성산 이씨(星山 李氏)이다. 손자는 경기전 참봉 김중총(金仲聰)이고, 손부 태인 박씨(泰仁 朴氏)이다. 계자는 자여찰방 김종호(金從虎)이고, 며느리는 승지 진벽(晉璧)의 딸 남원 진씨(南原 晉氏)이다. 손자는 선교랑 김남중(金南重)이고, 손부는 행주 기씨(幸州 奇氏)와 함풍 이씨(咸豊 李氏)이다.
딸은 홍문관 교리 조희문(趙希文), 현감 양자징(梁子澂), 찰방 유경렴(柳景濂)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요사(夭死)한 딸이 하나 있었다.
7. 추모와 상훈
김인후는 1564년(명종 19) 옥과 영귀정사, 1570년(선조 3) 순창 화산사, 1590년(선조 23)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1668년(현종 9)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고, 1669년(현종 10)에는 『문정(文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을 일러 '문'(文)이요, 관락영종(寬樂令種)을 일러 '정'(靖)이라」는 의미였다.
1796년(정조 20)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고, 대광보국 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되고, 부조(不祧)를 명 받았다. 같은 해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고쳤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以正服人)을 '정'(正)이라 이른다」는 의미였다.
장성 필암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나 한국 전쟁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75년 4월 2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에 지정되었고,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필암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그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가 열리고 있다.
8. 기타
김인후는 조선 유학사에서 호남의 유학자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2007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2번의 기획 전시와 유교 전시를 열었다.
9. 관련 문화재 및 시설
장성 필암서원, 장성 김인후 신도비, 장성 김인후 난산비,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은 김인후와 관련된 문화재이다.[28][29] 필암서원 문적 일괄 또한 김인후와 관련이 있다. 옥과 영귀서원과 순창 어암서원, 순창 훈몽재 유지, 순창 낙덕정도 김인후와 관련되어 있다.[30][31]
광주광역시에는 김인후의 호를 딴 「하서로」가 있으며, 전라남도에는 하서대로가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어린이대공원 (광주) 내에는 김인후의 동상과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를 지은 「묵죽도」, 도학 사상을 집약 도해한 「천명도」 및 한시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아홉 점이 새겨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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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눌재 박상의 김인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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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의 김인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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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김인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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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의 스승을 위한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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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당수계록 1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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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왕 인종의 참모,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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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기묘사화 명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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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의 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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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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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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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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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사화와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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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도 저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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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의 김인후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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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의 자녀 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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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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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때 즉석 시 짓던 신동… 각별했던 인종 죽자 벼슬도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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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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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찬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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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신문화, ‘동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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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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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종사교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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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종사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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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의 관계망을 통해 본 16세기 호남유학
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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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호남 선비정신, 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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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길에서 만난 하서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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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전설과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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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 도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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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도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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