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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오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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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나오성 전투는 1576년과 1577년에 걸쳐 벌어진 전투로, 오다 노부나가와 우에스기 겐신 세력 간의 세력 다툼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1576년 우에스기 겐신은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노토의 나나오성을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주변 성들을 공격하는 데 그쳤다. 이후 1577년, 겐신은 재차 공격을 감행했고, 성 내부의 역병과 내분으로 인해 나나오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 전투 이후, 오다 세력은 우에스기 세력과의 테토리가와 전투에서 패배하고, 우에스기 겐신의 사망 이후 발생한 가문 내 분쟁으로 노토를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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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오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우에스기 겐신의 전투의 일부
시기1576년 - 1577년
장소나나오성, 노토국
좌표37°00′33″N 136°59′03″E
원인불명
영토 변화나나오, 우에스기 겐신에게 함락됨
결과우에스기의 승리, 노토 하타케야마 씨 멸망
교전 세력
교전 1우에스기 겐신의 군대
교전 2하타케야마 씨 군대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우에스기 겐신
지휘관 2쵸 츠구츠라
병력 규모
병력 120,000명
병력 215,000명 (군인 및 민간인)
관련 이미지
나나오성
나나오성

2. 발단

오다 노부나가우에스기 겐신겐키 3년(1572년)에 동맹을 맺었으나, 덴쇼 4년(1576년)에 겐신이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파기하면서 양측의 관계가 변화하였다.[1] 다케다 신겐호조 우지야스의 사망 이후 겐신은 엣츄와 카가의 잇코잇키를 주요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오다 가문의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대립하면서 겐신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었다.[2]

한편,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1574년에 하타케야마 요시노리가 가신에게 암살당하고, 뒤를 이은 하타케야마 요시타카마저 1576년에 사망하면서 내분이 발생하였다.[1] 어린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실권은 중신인 초 쓰구쓰라가 쥐고 있었다.[1] 우에스기 겐신은 노토의 안정을 위해 조조 마사시게를 다음 당주로 임명하려 했으나, 노토-하타케야마 씨족 구성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1]

2. 1. 오다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의 관계 변화

우에스기 겐신


겐키 3년(1572년), 오다 노부나가노부나가 포위망에 의해 오다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동쪽에서 압박해오던 다케다 신겐에 대항하기 위해, 신겐과 적대하던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을 맺었다.[1] 노부나가와 겐신은 잇코잇키와도 적대하고 있었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하지만, 겐키 4년(1573년) 4월 12일에 신겐이 서상 작전 도중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2년 전 호조 우지야스도 사망하여, 두 강적이 사라지자 겐신은 간토 방면보다 엣츄ㆍ카가의 잇코슈를 더 큰 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덴쇼 2년(1574년), 겐신은 간토에서 호조 우지마사와 싸운 후, 코즈케 마에바시성을 중심으로 한 간토를 키타조 다카히로ㆍ카게히로 부자에게 맡기고, 호쿠리쿠 방면으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오다가에서는 덴쇼 3년(1575년) 5월,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쳤다. 이어 8월에는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에치젠 침공을 명령해, 이시야마 혼간지의 시모츠마 라이쇼 등 1만 2천 명을 처형했다. 이에 이시야마 혼간지는 겐신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엣츄 토야마성의 카와다 나가치카에게도 잇코잇키 잔당의 구원 요청이 왔다.[2]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와 이해 충돌로, 덴쇼 4년(1576년) 2월, 겐신은 노부나가와 동맹을 파기하고, 5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로 겐뇨와 동맹, 반 오다 세력에 합류했다.

2. 2.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의 내분

1574년, 하타케야마 요시노리는 가신 유사 쓰구미쓰와 누쿠이 가게타카에게 암살당했다.[1] 요시노리의 동생인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가문을 이었지만, 1576년에 사망했다.[1] 요시타카의 어린 아들인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실권은 중신인 초 쓰구쓰라가 쥐고 있었다.[1] 우에스기 겐신은 노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이전에 하타케야마 가문에서 인질로 보낸 조조 마사시게를 하타케야마 씨족의 다음 당주로 임명했다.[1] 그러나 노토-하타케야마 씨족의 구성원들은 우에스기 가에 대항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며 겐신의 내정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1]

3. 전투 상황

1576년 우에스기 겐신엣추를 침공하여 나나오성을 공격하려 했다. 나나오성의 가신 조 쓰구쓰라는 2,000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겐신은 나나오성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 성들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쓰구쓰라는 항복하지 않았다.[1]

겐신은 나나오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성 이름위치비고
쿠마키성카시마군 나카지마마치 야치
쿠로타키성스즈시 쇼인마치 카와지리
토기성하쿠이군 토기마치 야와타
조가네야마성하쿠이군 토기마치
아와성하쿠이시 야나기타마치 아와나나로
코메야마성호우시군 야나기타무라 코쿠미쓰마키노 카즈사노스케



나나오성은 고립되었으나, 쓰구쓰라 등은 견고한 성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1]

겐신이 에치고로 돌아가자, 나나오성의 하타케야마 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구마키성은 하타케야마 가신 갑斐庄親家의 모략으로 함락되었고, 도미쿠성에도 하타케야마 가신 杉原和泉를 총대장으로 하는 군대가 쳐들어왔다. 아나미즈성을 탈환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1577년, 겐신은 나나오성을 지원하던 외곽 요새들을 함락시킨 후 두 번째 공세를 시작했다. 조 쓰구쓰라는 주민들에게 저항을 요청했고, 약 15,000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성에 집결했다.[1] 쓰구쓰라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성은 수비대 내의 질병으로 인해 함락되었다. 유사 쓰구미쓰는 조 쓰구쓰라를 살해[1]하고 겐신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2]

겐신이 다시 출병하자 쓰구쓰라는 아들 나가 쓰라타쓰를 아즈치성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요청을 승낙하고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오다 군을 파견했다. 겐신은 오다 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가가의 잇코슈(일향종) 총령 시치리 요리치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오다 군의 진군을 방해하려 했다.

나나오성은 견고했지만, 농성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 안에서 역병이 발생하여 어린 군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를 포함한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궁지에 몰린 쓰구쓰라는 겐신에게 잇키(반란)를 일으키도록 선동했으나, 겐신에 의해 사전에 봉쇄되었다. 유사 쓰구미쓰는 겐신의 부름에 응해 동료들과 결탁하여 내응하려 했다. 이들은 친 노부나가파인 쓰구쓰라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항전해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9월 15일, 유사 등은 성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열고 우에스기 군을 불러들였다. 이 반란으로 쓰구쓰라와 그의 아들 등 나가 일족 100여 명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3. 1. 1차 나나오성 전투 (1576년)

1576년, 우에스기 겐신은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엣추를 침공하여 나나오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나나오성의 가신 수장인 조 쓰구쓰라는 2,000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겐신은 나나오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대신 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지원 역할을 하는 주변 성들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구쓰라는 요새에서 항복을 거부했다.[1]

오다 노부나가


이에 대해 노토 하타케야마 가신들은 겐신의 개입을 싫어하여 대결 자세를 분명히 했다. 나나오성 안에서는 원로 신하 수석인 나가 쓰구쓰라 이하 2,000명의 병력으로 농성전을 결정했다. 쓰구쓰라가 나나오성의 오테구치, 누쿠이 카게타카가 코후다니, 유사 쓰구미쓰가 케오토시구치를 각각 지키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쓰구쓰라는 겐신의 배후를 교란하기 위해 카사시 마을, 츠치카와 마을, 나가우라 마을 등의 영민들에게 잇키를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겐신도 과거 잇코잇키에 시달린 경험이 있어 잇키에 관한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고, 이것들을 모두 진압한 후 나나오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나나오성은 하타케야마 요시무네에 의해 축성된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성의 규모도 넓어 카스가야마성에도 필적하는 견고한 성이었기에, 겐신도 공격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나나오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그 지성군으로 공격의 방향을 돌렸다.[1]

겐신은 나나오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성 이름위치비고
쿠마키성카시마군 나카지마마치 야치
쿠로타키성스즈시 쇼인마치 카와지리
토기성하쿠이군 토기마치 야와타
조가네야마성하쿠이군 토기마치
아와성하쿠이시 야나기타마치 아와나나로
코메야마성호우시군 야나기타무라 코쿠미쓰마키노 카즈사노스케



나나오성은 고립되었으나, 견고한 성을 믿는 쓰구쓰라 등은 항복하지 않았다.[1]

3. 2. 하타케야마 군의 반격

겸신일본어(謙信)이 에치고일본어(越後)로 귀국하자, 나나오성에 있던 하타케야마 군은 즉시 반격을 시작했다. 구마키성은 하타케야마의 가신인 갑斐庄親家의 모략에 유인된 斉藤帯刀가 배신하여 함락되었고, 나나스기 고덴지(七杉小伝次)는 자결했으며, 산보지 헤이시로(三宝寺平四郎)와 나이토 히사야(内藤久弥)는 전사했다. 도미쿠성에도 하타케야마의 가신인 杉原和泉를 총대장으로 하는 군대가 쳐들어와 아이우라 나가토(藍浦長門)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또한, 즈즈키 렌(続連) 자신도 자신의 거성이었던 아나미즈성을 탈환하기 위해 출진하는 등, 하타케야마 군은 우에스기 유수 부대에 공세를 가했다.

3. 3. 2차 나나오성 전투 (1577년)

1577년, 우에스기 겐신나나오성의 지원을 받던 외곽 요새들을 함락시킨 후, 두 번째 공세를 시작했다. 조 쓰구쓰라는 모든 주민들에게 저항할 것을 요청했고, 약 15,000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성에 집결했다.[1] 성은 가을까지 버텼으며, 그 무렵 쓰구쓰라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응답하기 전에 성은 함락되었는데, 이는 수비대 내의 질병 때문이었으며,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유사 쓰구미쓰는 조 쓰구쓰라를 살해[1]하고 겐신에게 성문을 열어주었으며, 이는 성의 함락에 크게 기여했다.[2] 이로 인해 노토의 하타케야마 씨는 우에스기 씨에게 충성을 바꿨다.

겐신이 재출병하자 위기감을 느낀 쓰구쓰라는 아들 나가 쓰라타쓰를 아즈치성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요청을 승낙하고, 8월 8일에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오다 군을 노토에 파견했다.

겐신은 8월 9일에 오다 군이 에치젠으로 출병한 것을 알고, 가가의 잇코슈(일향종) 총령인 시치리 요리치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장을 보내 오다 군의 진군을 방해해 줄 것을 요청하고, 세키도산에 본진을 두고 나나오성 공략을 서둘렀다.

나나오성은 견고했지만, 농성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 안에서 역병이 발생하여 하타케야마 군 병사들은 전투가 아닌 역병으로 죽는 자가 잇따랐다. 어린 군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도 농성 중에 역병으로 사망했다. 궁지에 몰린 쓰구쓰라는 겐신에게 잇키(반란)를 일으키도록 선동했으나, 겐신에 의해 사전에 봉쇄되어 나나오성은 함락 직전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친 겐신파였던 유사 쓰구미쓰는 겐신의 부름에 응해, 동료인 누쿠이 가게타카와 미야케 나가모리 형제 등과 결탁하여 내응하려 했다. 이들은 친 노부나가파로서 실권을 빼앗은 쓰구쓰라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항전해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9월 15일, 유사, 누쿠이, 미야케 등은 성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열고 우에스기 군을 불러들였다. 이 반란으로 쓰구쓰라와 그의 아들 나가 쓰라쓰라 등 나가 일족 100여 명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나가 일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러 간 쓰라타쓰와, 쓰구쓰라의 막내 아들이었다. 이렇게 나나오성은 겐신의 손에 떨어졌고, 노토도 완전히 겐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4. 전투 이후

그 무렵, 오다의 원군을 이끄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군세는 진군이 더뎠다. 잇코잇키 때문에 가가에서 진군을 방해받은 것도 있지만, 8월 17일에 이시야마 혼간지를 포위하고 있던 야마토마쓰나가 히사히데・야스미치 부자가 전선을 이탈하여 거성인 시키산성에 틀어박히는 모반을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도 본대를 이끌고 호쿠리쿠 출병을 계획했지만, 히사히데의 설득과 토벌이 급선무가 되어 호쿠리쿠 출병은 중지되었다.[1] 또한, 가가에 출병한 오다 군 내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가 작전상 대립을 일으켜 히데요시가 무단으로 귀국하는 사건도 발생했다.[2] 이 때문에 오다 군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9월 23일 테토리가와 전투에서는 승세를 몰아 가가로 진군한 우에스기 군에게 공격받아 대패했다.

이후 노토는 잠시 우에스기 세력 하에 있었지만, 덴쇼 6년(1578년) 3월 겐신이 사망한 후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 오타테의 난이라는 내분이 발생했다. 노토 국내의 반 우에스기 세력이나 히다를 통해 엣추로 쳐들어온 오다 세력에게 압박받아, 결국 노토는 노부나가의 손에 돌아갔다.

참조

[1] 웹사이트 日本の城がわかる事典「七尾城」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8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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