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 포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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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부나가 포위망은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대항한 세력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며 권력을 잡은 노부나가는 덴추 고오키를 통해 요시아키를 통제하려 했으나, 요시아키의 반발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1570년 아사쿠라, 아자이 연합과의 전투에서 아자이의 배신으로 위기를 겪었으나, 이후 반 오다 세력과의 화해를 통해 제1차 포위망을 벗어났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다케다 신겐 등과 연합하여 제2차 포위망을 구축했으나, 신겐의 사망과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와해되었다. 1576년 요시아키는 모리 데루모토 등과 함께 제3차 포위망을 형성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강력한 대응과 내부 분열로 실패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면서 포위망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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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 포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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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노부나가 포위망 |
별칭 | 반(反) 오다 노부나가 세력 동맹 |
로마자 표기 | Nobunaga Hōimō |
주요 관련 인물 | 오다 노부나가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신겐 모리 데루모토 혼간지 겐뇨 |
배경 | |
원인 | 오다 노부나가의 급격한 세력 확장 및 강압적인 정책 |
종교적 배경 | 혼간지를 중심으로 한 불교 세력의 반발 |
정치적 배경 | 기존 세력들의 오다 정권에 대한 위기감 및 견제 |
경제적 배경 | 오다 정권의 상업 정책에 대한 불만 |
주요 세력 | |
주도 세력 | 아자이 가문 아사쿠라 가문 다케다 가문 모리 가문 혼간지 |
협력 세력 | 롯카쿠 가문 사이카 슈 이시야마 혼간지 |
전개 과정 | |
제1차 포위망 | 1570년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거병으로 시작 다케다 신겐의 참전으로 확대 노다성·후쿠시마성 전투 |
제2차 포위망 | 다케다 신겐 사후, 다케다 가쓰요리가 포위망 유지 나가시마 잇코 잇키 미카타가하라 전투 |
포위망 약화 | 다케다 가쓰요리의 정책 실패 및 세력 약화 오다 노부나가의 적극적인 외교 및 군사적 대응 |
포위망 해체 | 나가시노 전투 이후, 다케다 가문의 쇠퇴 아자이 가문, 아사쿠라 가문 멸망 혼간지의 항복 및 이시야마 전투 종결 |
결과 및 영향 | |
결과 | 오다 노부나가 세력의 강화 및 천하통일 기반 마련 |
영향 | 전국 시대 판도 변화 및 오다 정권의 안정화 |
주요 전투 | |
주요 전투 목록 | 노다성·후쿠시마성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덴쇼 잇코 잇키 이시야마 전투 |
2. 발생 경위
에이로쿠 11년(1568년) 2월 8일, 미요시 산닌슈・아와 미요시 가문과, 마쓰나가 히사히데・미요시 요시쓰구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미요시 산닌슈 측의 추천으로 아와 공방・아시카가 요시히데가 제14대 세이이 대장군(장군)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는 이에 반발하여, 같은 해 9월,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상락을 달성했고, 같은 해 10월 2일, 미요시 산닌슈와 아와 미요시 가문의 군세를 아와로 몰아냈다. 한편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요시쓰구는 오다 가문에 항복했다. 10월 18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제15대 쇼군으로 취임했고, 이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는 장군의 후견인으로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1월, 미요시 산닌슈와 미요시 쇼간이 이즈미에 상륙, 같은 달 5일 혼코쿠지의 아시카가 요시아키, 아케치 미쓰히데를 급습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 미요시 요시쓰구, 셋쓰국의 이타미 치카오키, 이케다 가쓰마사, 아라키 무라시게 등의 원군에게 패배하여, 다시 아와로 도망쳤다 (혼코쿠지의 변).
이러한 아시카가 씨 - 오다 씨와, 아와 미요시 씨 - 미요시 산닌슈와의 대립과는 별개로, 같은 해 1월, 오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덴추 고오키를 내렸다. 내용은 노부나가가 옹립한 요시아키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요시아키는 각지에 밀서를 보내는 등, 이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신하인 노부나에게 묶이는 것을 싫어한 요시아키와, 통제하려 하는 노부나 간의 대립은 심화되어 가게 된다. 다만, "노부나가가 옹립한 요시아키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사료적인 근거는 없고, 어디까지나 무로마치 막부의 재건을 위해 요시아키와의 합의하에 발행된 것이라는 반론이 최근 잇따라 나오고 있다[1][2][3]。
에이로쿠 12년 2월, 하리마의 아카마쓰 마사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8월부터 9월에 걸쳐 요시아키・노부나가가 파견한 이케다 가쓰마사, 벳쇼 야스하루가 우라가미 무네카게를 공격한다. 동시에, 몰래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우키타 나오이에도 우라가미 무네카게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시아키・노부나가 세력은 하리마의 성을 몇 곳 함락시키자마자 바로 철수했고, 반대로 우라가미 무네카게는 노부나가 측의 아카마쓰 마사히데의 다쓰노 성을 몰아붙여, 11월에는 마사히데가 항복, 우키타 나오이에 또한 그 해 안에 무네카게에게 사죄하고 우라가미 가문의 산하로 돌아갔다.
2. 1.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 추락과 오다 노부나가의 부상
에이로쿠 11년(1568년) 2월 8일, 미요시 산닌슈・아와 미요시 가문과, 마쓰나가 히사히데・미요시 요시쓰구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요시 산닌슈는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14대 쇼군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이에 대항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교토에 입성하여 10월 18일에 15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오다 노부나가는 쇼군의 후견인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1569년 1월, 미요시 산닌슈와 미요시 쇼간이 이즈미에 상륙, 혼코쿠지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를 급습하였으나, 호소카와 후지타카, 미요시 요시쓰구, 셋쓰국의 이타미 치카오키, 이케다 가쓰마사, 아라키 무라시게 등의 원군에게 패하고 다시 아와로 도망쳤다(혼코쿠지의 변).
이러한 상황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덴추 고오키를 발표했다. 이는 노부나가가 옹립한 쇼군 요시아키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목적이었으나, 요시아키는 각지에 밀서를 보내는 등 이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리하여 형식적으로는 신하였던 노부나가에게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그를 통제하려는 노부나가 사이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었다. 다만, "노부나가가 옹립한 요시아키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사료적인 근거는 없고, 어디까지나 무로마치 막부의 재건을 위해 요시아키와의 합의하에 발행된 것이라는 반론이 최근 잇따라 나오고 있다[1][2][3]。
같은 해 2월, 하리마의 아카마쓰 마사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8월부터 9월에 걸쳐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명으로 파견된 이케다 가쓰마사, 벳쇼 야스하루가 우라가미 무네카게를 공격했다. 동시에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우키타 나오이에도 우라가미 무네카게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아키 ・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하리마의 성 몇 곳을 함락시킨 뒤 곧바로 퇴각했고, 오히려 우라가미 무네카게는 노부나가 측 아카마쓰 마사히데의 다쓰노 성을 공격했다. 11월에 마사히데가 항복하고 우키타 나오이에도 그 해 안에 무네카게에게 사죄하고 우라가미 가문의 산하로 돌아갔다.
2. 2.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의 갈등 심화
에이로쿠 11년(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을 달성하고, 요시아키는 제15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덴추 고오키(殿中御掟)를 발표하여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였다.[1][2][3] 이에 요시아키는 각지에 밀서를 보내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며 반발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신하였던 노부나가에게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그를 컨트롤하겠다는 노부나가의 사이의 대립은 심각화되어갔다.[7]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17개 조로 이루어진 힐문서를 보냈고, 양측의 대립은 결정적인 것으로 흘러갔다.[8]
3.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
3. 1. 반(反) 오다 세력의 결집
겐키(元亀) 원년(1570년) 4월,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공격하기 위해 에치젠으로 원정을 떠났으나,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철수했다. (가네가사키 전투)[3]6월, 노부나가는 노슈가와라 전투에서 롯카쿠 요시카타 ・ 요시하루 부자를 격퇴시켰다. 6월 말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 ・ 아사쿠라 군을 격파하고 오미 남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3]
그러나 미요시 산닌슈의 미요시 나가요시와 내통한 아라키 무라시게가 주군을 추방하고, 미요시 산닌슈가 셋쓰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노부나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셋쓰로 원정하여 노다성·후쿠시마성 전투를 벌였다. 이 와중에 이시야마 혼간지의 겐뇨가 미요시 산닌슈를 지원하여 오다 군을 공격했고,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비와호 서안을 남하하여 오다 군과 교전, 모리 요시나리와 노부하루가 전사하였다.[3]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이끄는 아와 ・ 사누키 군세가 효고에 상륙하여 야마시로를 향해 진군하는 등 오다 가문은 각지에서 궁지에 몰렸다. (시가의 진)[3]
1570년 10월 30일, 오다 노부나가는 혼간지 겐뇨와 화목하고, 11월에는 롯카쿠 요시카타 ・ 요시하루 부자와도 화목하였다.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중개로 시노하라 나가후사와도 화목이 성립되었다.[3]
3. 2. 주요 참전 세력 및 와해
1570년 4월,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영지인 에치젠을 공격했으나,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퇴각해야 했다.(가네가사키 전투) 6월, 노부나가는 노슈가와라 전투에서 롯카쿠 요시카타를 격파하고, 아네가와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여 오미 남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그러나, 미요시 산닌슈가 셋쓰에서 다시 봉기하고, 이시야마 혼간지의 겐뇨가 이에 가담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비와 호 서안을 따라 남하하고,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이끄는 아와・사누키 군세가 효고에 상륙하는 등 각지에서 오다 가문을 압박했다. 히에이 산 엔랴쿠지는 아자이, 아사쿠라 군을 지원하며 노부나가와 대립했다.
1570년 10월 30일, 오다 노부나가는 혼간지와 화친을 맺었다. 11월에는 롯카쿠 요시카타 및 미요시 산닌슈, 시노하라 나가후사와도 화친을 맺었다. 12월에는 조정과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를 통해 아자이, 아사쿠라와도 강화를 성립시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
4. 1.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반(反) 노부나가 활동 강화
겐키 2년(1571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자 아자이 씨, 아사쿠라 씨, 미요시 씨, 이시야마 혼간지, 엔랴쿠지, 롯카쿠 씨, 다케다 신겐 등에게 고나이쇼(御内書)를 보내 반(反) 노부나가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4]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방해를 배제하고자 나가마사의 중신 이소노 가즈마사를 꾀어 사와야마 성을 함락시키고 오미 남부 지배를 확고히 했다. 또한, 나가시마 잇코 잇키를 공격하고, 히에이 산 엔랴쿠지를 불태우는 등 반 오다 세력을 진압했다.[5]
같은 해 5월,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이끄는 아와 ・ 사누키 군세가 우라가미 무네카게, 우키타 나오이에의 요청으로 비젠 고지마에 상륙하여 모리 씨를 격퇴했다. (혼타 성 전투) 6월 12일,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시노하라 나가후사 토벌의 어내서를 보내, 모리 ・ 오다 ・ 쇼군 요시아키가 아와 미요시 ・ 우라가미 가문에 대항해 함께 싸울 것을 알렸다.
같은 해 6월 11일,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이끄는 군세가 다시 기나이에 상륙하여 하타케야마 아키타카의 다카야 성을 공격했다. 8월 말에는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와 이케다 도모마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 측의 이바라키 시게토모, 이타미 지카오키, 와다 고레마사를 공격하여 시게토모와 고레마사를 죽였다. 이케다 군은 이바라키 성, 고리야마 성을 함락시키고 와다 고레나가가 농성하는 다카쓰키 성을 포위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 ・ 히사미치 부자, 미요시 요시쓰구가 시노하라 나가후사와 동맹을 맺고 포위군에 가담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다카쓰키 성의 성하 마을(조카마치)을 이틀 밤낮에 걸쳐 불태워 파괴했다고 한다. 3개월 후, 오다 노부나가가 9월 9일에 사쿠마 노부모리를,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9월 24일에 아케치 미쓰히데를 파견하자 아라키 무라시게 등은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시라이가와라 전투)
겐키 3년(1572년) 윤1월 4일에는 다카야 성에서 미요시 가문과 내통하고 있던 유사 노부노리에 의해 하타케야마 아키타카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몬인 일기』)
4. 2. 다케다 신겐의 참전과 노부나가-요시아키 관계 파탄
1572년 윤1월 4일, 다카야 성에서 미요시 가문과 내통하던 유사 노부노리에 의해 하타케야마 아키타카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3월, 오다 노부나가는 기타오미 방면으로 출진하여 아자이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 성을 포위했다. 같은 해 5월,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요시쓰구가 가타노 성을 공격하자,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시바타 가쓰이에 등을 원군으로 보냈다.같은 해 7월, 노부나가는 기타오미에 재차 출진하여 도라고젠 산 요새를 쌓아 오다니 성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강화했다. 8월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가신 마에나미 요시쓰구와 도미타 나가시게가 오다 군에 항복했다. 9월,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다케다 신겐을 통해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화목 교섭을 추진했으나, 성사 여부는 불분명하다. 10월,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17개조의 힐문서를 보냈고, 양측의 대립은 결정적으로 치달았다. 같은 달, 미야베 게이준이 기노시타 히데요시의 계략으로 노부나가에게 투항했다.
1572년 10월, 다케다 신겐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를 침공하고, 12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노부나가 포위망이 강화되었다. 한편, 신겐의 거병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1573년 2월,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신겐과 연대하여 노부나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거병했지만,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교토에서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했다.
1572년 12월,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아와지로 돌아가 금제를 발급했고, 그의 아들 시노하라 나가시게는 야마시로 야마자키의 리큐하치만궁에서 금제를 발급했다. 또한 야마시로 요도 성도 이와나리 도모미치의 차지가 되었다.
4. 3. 주요 참전 세력 및 와해
1571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방해를 배제하고 사와 산성을 함락시켜 오미 남부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으며, 히에이 산 엔랴쿠지를 화공으로 불살라버리는 등 반 오다 세력을 진압했다. 같은 해,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이끄는 군세가 모리 씨를 격퇴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시노하라 나가후사 토벌을 명했다. 하타케야마 아키타카와 마쓰라 히카루는 가신에게 암살될 때까지 미요시 세력의 항쟁을 계속했다.1573년 1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군의 승전 소식을 접한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와의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거병했다. 노부나가는 교토로 출병하여 요시아키를 공격했으나, 천황의 칙명으로 강화를 맺었다. 같은 해 4월, 다케다 신겐이 병으로 사망했다. 7월, 요시아키가 다시 거병하여 마키시마 성에서 농성했으나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교토에서 쫓겨났다.(무로마치 막부 멸망)
1573년 8월,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자결하면서 아자이 씨와 아사쿠라 씨는 멸망했다. 11월에는 미요시 요시쓰구가 자결하고,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항복하면서 포위망은 와해되었다.
이후에도 혼간지 세력은 겐뇨의 지도 아래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농성하며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대립 자세를 강화했다. 1574년에는 에치젠 잇코잇키가 발생하여 에치젠을 점령하는 등 호쿠리쿠에서 강대한 지반을 쌓았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1574년 9월에 나가시마 잇코잇키를, 1575년 5월 무렵까지 에치젠 잇코잇키를 모두 진압하고 혼간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중앙의 노부나가 포위망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데루모토의 비호 아래 빈고국 도모로 옮겨졌다.
5. 제3차 노부나가 포위망
덴쇼 원년(1573년) 말, 포위망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러나 겐뇨가 이끄는 혼간지 세력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서 농성하며, 각지의 일향종(一向宗) 문도들을 결집시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대립을 강화했다. 덴쇼 2년(1574년) 1월에 발생한 에치젠 잇코잇키(越前一向一揆)는 5월까지 에치젠을 점령, 가가를 포함한 호쿠리쿠(北陸)에서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반 나오마사(塙直政)에게 포위하게 하고, 덴쇼 2년 9월 나가시마 잇코잇키를, 덴쇼 3년(1575년) 5월에는 에치젠 잇코잇키를 진압하여 혼간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다케다 신겐 사후, 다케다 가쓰요리는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압박했다. 특히 다카텐진 성(高天神城)이 함락되며 이에야스는 고전했다. 그러나 덴쇼 3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에 패배, 이와무라 성(岩村城)과 후타마타 성(二俣城)을 잃고 중앙의 노부나가 포위망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교토에서 추방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미요시 요시쓰구가 있는 와카에 성(若江城)으로 이동 후, 이즈미의 사카이(堺), 기이(紀伊)의 오고쿠지(興国寺) 등을 거쳐 덴쇼 4년(1576년) 모리 데루모토를 의지, 빈고의 도모(鞆)로 옮겨졌다.
5. 1. 반(反) 노부나가 세력의 재결집
1576년(덴쇼 4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데루모토의 비호를 받으며 혼간지, 스즈키 씨, 다케다 씨, 모리 씨, 우키타 씨, 우에스기 씨, 마쓰나가 씨 등과 연합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을 재구축했다.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군으로서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어내서를 보내 규합하는 데 힘썼다.우에스기 겐신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혼간지와 강화하고 모리 데루모토와 동맹을 맺어,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이 파기되었다. 겐신은 엣추국에서 노토국으로 침공을 개시하고, 모리 데루모토는 이시야마 혼간지에 해상 보급을 시도, 무라카미 모토요시가 오사카 만 기쓰가와 하구에서 오다 수군을 격파했다.(제1차 기쓰가와 전투)
이러한 요시아키의 움직임은 노부나가의 산하 세력에 동요를 주어, 하타노 히데하루, 야마나 스케토요 등이 반기를 들었다.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가가 잇코잇키 진압과 호쿠리쿠 지방 침공에 보냈다.
5. 2. 오다 노부나가의 대응과 포위망의 와해
오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압박하고, 시바타 가쓰이에를 보내 가가 잇코잇키를 진압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덴쇼 4년(1576년) 4월, 아케치 미쓰히데등을 중심으로 하는 군세가 덴노지 방면을 공략하려 했으나, 미쓰데라 전투에서 반 나오마사가 전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가 덴노지 요새에 농성하는 결과가 되었다. 덴노지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의 진두지휘로 혼간지 군을 밀어냈지만, 노부나가 자신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사쿠마 노부모리를 혼간지 포위군의 주장으로 임명하고 작전을 포위전으로 전환했다.한편, 시바타 가쓰이에는 에치젠에서 가가로 침공, 가가 잇코잇키는 조직적인 반격을 하지 못한 채 오다 측이 우세하게 되었다. 우에스기 겐신이 이시야마 혼간지와 강화하면서 노부나가와의 동맹이 파탄되고, 무라카미 모토요시 등이 제1차 기즈가와구치 전투에서 오다 측 수군을 격파하고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한 보급에 성공했다. 겐신은 나나오 성을 포위했지만, 이듬해 에치고 국이 고호조 씨의 침공을 받아 철수했다. 노부나가는 기슈 정벌을 실시하여 사이가슈를 형식적으로 항복시켰으나,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모반을 일으켜 시기가 산성이 함락되었다.
덴쇼 6년(1578년) 3월, 우에스기 겐신이 병사하고 오타테의 난이 발생, 우에스기 씨는 호쿠리쿠 방면에서 대폭 후퇴했다. 아카이 나오마사도 병사하면서 단바 방면에서도 오다 세력이 우세해졌다. 아라키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켜 아리오카 성에 농성하였으나, 다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기요히데등이 항복하고 아리오카 성 전투가 시작되어 이시야마 혼간지로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제2차 기즈가와구치 전투에서는 오다 측이 승리했다.
1579년, 아라키 무라시게는 아리오카 성에서, 벳쇼 나가하루는 미키 성에서 오다 군세의 포위 아래 놓였고, 이시야마 혼간지도 고립이 심화되었다. 하타노 씨의 야가미 성, 아카이 씨의 구로이 성이 함락되고, 아라키 무라시게가 도망친 후 아리오카 성도 함락되었다. 우키타 나오이에가 오다 측에 붙으면서 벳쇼 나가하루의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1580년 1월, 미키 성이 함락되고 벳쇼 나가하루가 자결, 윤3월에는 겐뇨가 이시야마 혼간지를 노부나가에게 넘기고 강화에 합의하여, 이시야마 전투가 종결되면서 제3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1582년 3월, 다케다 가쓰요리가 고슈 정벌에서 자결하고, 모리 데루모토와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 뒤 5월,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면서 포위망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5. 3. 주요 참전 세력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전한 주요 세력은 다음과 같다.- 스즈키 씨: 1577년 노부나가에게 항복했으나 곧 반기를 들고 저항했다. 1580년 혼간지가 전선을 이탈하면서 친오다파와 반오다파로 분열되었고, 일부는 오다를 따랐다.
- 마쓰나가 히사히데: 1577년 노부타다에게 패하고 자결하여 일족과 함께 멸망했다.
- 우에스기 겐신: 1578년 병사했다. 이후 가게카쓰가 뒤를 이어 가가, 노토에서 철퇴했지만, 이후에도 저항을 지속했다.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갔다.
- 아카이 나오마사: 1578년 병사했고, 남은 아카이 씨는 구로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흩어졌다.
- 하타노 히데하루: 1579년 항복 후 처형되어 일족과 함께 멸망했다.
- 나이토 사다카쓰: 1578년 본거지 야기 성이 함락되었다.
- 우쓰 요리시게: 1578년 본거지 우쓰 성이 함락되었다.
- 아라키 무라시게: 1579년 아리오카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훗날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 우키타 나오이에: 1579년 항복한 이후 친오다 세력으로 존속했다.
- 벳쇼 나가하루: 1580년 자결했다. 멸망했으나 일족은 살아남아 오다를 따랐다.
- 혼간지: 1580년 강화하고 이시야마 혼간지를 넘겨주었다.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갔다.
- 야마나 씨: 1580년 스케토요가 병사하고 아키히로가 항복한 후, 일족과 함께 친오다 세력으로 존속했다.
- 간 미치나가: 1581년 하시바 히데요시와 이케다 모토스케에게 이와야 성을 공격받고 기이 등지로 잠복했다.
- 다케다 가쓰요리: 1582년 자결하여 멸망했지만, 일족은 살아남아 우에스기 씨를 따랐다.
- 아시카가 요시아키: 모리 데루모토와 함께 항쟁을 지속했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정권이 성립되자 1588년 쇼군직을 조정에 반납했다.
- 모리 데루모토: 하리마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항쟁을 지속했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갔다.
- 무라카미 다케요시: 모리 씨와 함께 항쟁을 지속했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갔다.
- 무라카미 요시미쓰: 모리 씨와 함께 항쟁을 지속했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갔다.
6. 노부나가 포위망 이후
7. 평가 및 영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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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室町幕府と織田政権との関係について -足利義昭宛の条書を素材と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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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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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織田信長と足利義昭の軍事的関係について
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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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足利義昭の大名交渉と起請文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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戎光祥出版
[6]
서적
信長公記 巻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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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公記 巻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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