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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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즈치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1576년에 착공하여 1579년에 완공한 성으로, 교토와의 접근성, 비와호의 수운 활용 등 전략적 이점을 고려하여 아즈치산에 건설되었다. 일본 최초로 본격적인 천수각을 갖춘 성으로,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호화로운 장식과 종교적 요소를 갖추어 노부나가의 권력을 과시하고 통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혼노지의 변 이후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성터만 남아있지만,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되어 복원 모형과 유적을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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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치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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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위치 | 아즈치, 오미국, 일본 |
좌표 | 35.156022, 136.139361 |
종류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성 |
건축 시작 | 1579년 |
건축가 | 오다 노부나가 |
재료 | 돌, 나무 회반죽 벽 |
높이 | 7층 (42미터) (주 천수각) |
파괴 | 1582년 |
상태 | 돌 기초만 남음 |
통제 | 오다 씨 |
주둔군 | 5,000명 (민간인 포함) |
사건 | 아즈치 종교 토론 (1579년) |
각주 | 일본 특별 국가 사적지 |
별칭 | 야마지로 (산성) |
역사 | |
건설 연도 | 1576년 (덴쇼 4년) |
재건축 | 하시바 히데요시 |
소유 | 오다 씨, 아케치 씨 |
폐성 연도 | 1585년 (덴쇼 13년) |
유적 | 천수대, 구루와, 이시가키, 해자 |
문화재 지정 | 국가 특별 사적 |
복원 | 일부 이시가키, 오테미치 돌계단 |
2. 역사
오다 노부나가는 1576년부터 1579년까지 비와호 호숫가의 안토산에 천수각을 중심으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천하포무의 상징인 아즈치성을 축성하도록 명했다.[5]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직후, 아케치 미쓰히데 군대에 점령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인 불명의 화재로 소실되었다.[9]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들에 의해 잠시 사용되었지만,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폐성되었다.
1918년부터 아즈치성 보존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1926년에는 사적, 1952년에는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9년부터 2009년까지 20년간 발굴 및 정비 계획이 시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유물과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1992년 세비야 만국박람회에 아즈치성 천수각 일부(5·6층 부분)가 복원되어 출품되었으며, 현재는 안토성 천수각 노부나가의 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에 가깝고, 비와호의 수운(水運)을 이용할 수 있으며, 호쿠리쿠 가도에서 교토로 향하는 요충지라는 전략적 이점을 가진 안토산을 새로운 거점지로 선택했다.[2] 이는 "천하포무"(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아즈치성은 육각씨의 관음사성을 본보기로 삼아 총석벽으로 지어졌다. 기후성보다 당시 일본의 중앙 거점이었던 교토에 더 가까웠고, 비와호의 수운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호쿠리쿠 가도에서 교토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점이 부지 선정의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축성 총봉행(總奉行)은 다니와 나가히데가 맡았고,[6][9] 불사봉행(普請奉行)에는 키무라 타카시게가 임명되었다. 목수 동량(棟梁)에는 오카베 마타에몬이 임명되었으며, 縄張奉行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석봉행(石奉行)에는 니시오 요시츠구, 오자와 로쿠로사부로, 요시다 헤이나이, 오니시 모가, 와봉행(瓦奉行)에는 오가와 스케타다, 호리베 사나이, 아오야마 스케이치가 각각 임명되었다.
2. 2. 오다 노부나가 시대 (1576년 ~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비와호(琵琶湖) 기슭의 광대한 부지에 아즈치성(安土城)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이 성은 전면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5] 성 건설 책임자는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였으며, 1576년에 착공하여 1579년에 완공되었다.[6][9]아즈치성은 이전의 성이나 요새와 달리, 단순히 군사 시설로서의 목적뿐만 아니라, 노부나가가 경쟁자들을 감탄시키고 위압하기 위한 호화로운 저택으로서의 기능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즉, 방어력뿐만 아니라 화려한 장식, 번성하는 마을, 종교 생활까지 고려한 성이었다.
천수각(天守閣)은 지상 6층, 지하 1층의 7층 건물로, 방어 중심이라기보다는 성의 상징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는 일본 성에서 본격적인 천수각의 시작이었다.[5] 이 건물에는 접견실, 개인 방, 사무실, 보물 창고가 마치 왕궁처럼 들어서 있었다. 7층 모두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徳)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9]
아즈치성은 일본 최초의 망루형 천수각을 가진 성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최상층이 팔각형이라는 점에서도 독특했다. 또한 다른 천수각의 단색의 흰색이나 검은색과 달리 아즈치성 천수(天守)의 외관은 호랑이와 용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아즈치성은 이전 성곽 설계와 차별화되는 5가지 주요 군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 첫째, 성벽의 두께가 5.5~6.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 둘째, 돌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성벽은 거대한 화강암을 석회 없이 정교하게 맞춰 건설되었다.
- 셋째, 높은 중앙 탑 또는 '돈존'이었다. 이 탑은 적군에 대한 총기 사용을 위한 시야 확보를 높였다. 성의 설계도에는 돈존이 높이 40미터, 7층으로 표시되어 있다.
- 넷째, 불규칙한 형태의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내성은 침입자에 대한 방어력을 높였다.
노부나가는 비와호에서 100m 높이로 솟아 있는 아즈치야마(安土山)를 아즈치성의 위치로 선택했다. 이곳은 동쪽에서 교토(京都)로 이어지는 세 개의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2]
노부나가는 완벽한 조카마치(城下町)를 원했고, 그의 장군들을 위한 방어가 잘 된 집들과 조도슈(浄土宗) 불교 사찰인 조곤인(常照院), 그리고 호숫가 근처에 많은 서민들을 위한 집들을 지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577년 여름, 그는 주민들에게 세금, 건축 또는 운송 부과금, 유예 면제를 보장하는 시정 조례를 발표하고, 나카센도(中山道) 고속도로를 지나는 모든 여행자들이 마을에서 하룻밤 숙박하도록 강제하여 여관 주인들에게 사업을 가져다주었다. 1582년까지 이 마을의 주민 수는 약 5,000명에 달했다.[9]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같은 노부나가의 많은 강력한 정치적 손님들을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아즈치성에서는 1579년에 아즈치 종론(安土宗論)으로 알려진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니치렌슈(日蓮宗)와 조도슈(浄土宗) 불교 종파 지도자들 사이에서 열렸다.
1581년 우라본에(우란분절) 밤에 노부나가는 성읍의 집들이 불을 끄고 아즈치성을 등롱과 기타 장식으로 밝히게 하여 성을 떠나는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성이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곶 끝에 세워졌고 주변 지역이 아직 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었다.[7]
1582년 설날(음력)에 노부나가는 아즈치성 내부를 귀빈들에게 공개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성벽 일부가 무너져 부상자와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당시 노부나가는 다이묘(大名)와 그들의 가신들에게 각각 100문(화폐 단위)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관람 후 노부나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직접 돈을 받았다.[8]
2. 3. 혼노지의 변과 소실 (1582년)
1582년(덴쇼 10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한 뒤, 가모우 카타히데가 성에 남아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자결 후 가모우 카타히데와 가모우 우지사토 부자는 본거지 히노 성으로 노부나가의 처자 등을 안토성에서 옮겨 철수했다.[9] 그 후, 아케치 군이 안토성을 점령했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패한 후, 천수각과 그 주변 건물(주로 본마루)이 소실되었다. 소실 경위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불명확하다.혼노지의 변 이후에도 한동안 오다씨의 거성으로서, 노부나가의 적손 오다 히데노부가 기슈 회의 후 입성하는 등, 주로 니노마루를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하치만야마 성 축성을 위해 1585년(덴쇼 13년)에 폐성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안토쿠성 천수각과 그 주변 본마루 등의 건물은 야마자키 전투 직후 소실되었다. 다만, 소실된 것은 천수각과 본마루 등이며, 이후 오다 히데노부가 니노마루에 입성한 것처럼 성 자체는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다.

소실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아케치 미쓰히데 군이 패주하면서 방화했다는 설 (『히데요시시키』, 『타이코키』). 그러나 안토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6월 15일 (『케미쿄키』)이며, 그날 아케치 히데미쓰는 사카모토성에서 호리 히데마사의 군대에 포위되었다는 점[20], 또한 안토쿠성 수비를 맡았던 아케치 히데미쓰는 사카모토성에서 자결할 때, 미쓰히데가 소장하고 있던 명도와 다기, 서화를 히데요시 휘하의 호리 나오마사에게 인계한 후 사카모토성에 불을 지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누명으로 생각된다.[21]
# 미쓰히데 이후 이세국에서 진입한 오다 노부카쓰 군이 성과 저택에 방화하고 시가지에도 방화했다는 설.[20] 이것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보고서(예수회 일본 연보 추가)에 따른 것으로, 그 기록에는 "노부카쓰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아무런 이유 없이 방화했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소실된 것은 천수각과 본마루 주변뿐이므로 정확하지 않다.[20] 또한 오다 노부카쓰 군의 방화는 아케치 세력의 잔당 사냥을 위한 것이었고 그 불이 번졌다는 설도 있다.[22]
# 가모 부자가 노부나가의 가족을 데리고 안토쿠성을 피난할 때 성하 마을에 지른 불이 번졌다는 설.[23]
# 약탈 목적으로 난입한 산적이나 백성이 방화했다는 설.
# 낙뢰로 소실되었다는 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는 4번째 설을 제시하고 있으며[24], 아타타 공도 "야마자키 전투 후의 혼란 속에서 약탈에 들어온 산적들이 방화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21] 타카야나기 고토시는 2번째 노부카쓰 방화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히데요시시키』의 기사는 노부카쓰가 아직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에 작성된 것이므로,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히데미쓰에게 책임을 덮어씌운 것이 아닌가 고증하고 있다.[25] 3번째 설은 모리모토 마사히로에 의해 최근 제기된 설이지만, 이 설을 비평한 다니 류야는 모리모토가 전국 시대의 관습에 근거하여 만든 설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성 아랫마을에서 번졌다면 성내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어야 할 피열흔(불에 탄 흔적)이 주곽부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26]
참고로, 카에쓰노 분코의 「쇼운코사이슈이헨루이산」 중의 문서에, 덴쇼 6년 5월에 한 번 천수각이 붕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른 자료에는 그 기록이 없어 진위는 불명이다.
2. 4. 폐성 (1585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에도 아즈치성(安土城)은 오다 가문의 거성으로 잠시 기능했다. 노부나가의 적손 히데노부가 기슈 회의 후 입성하는 등, 주로 니노마루(二の丸)를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가 하치만야마성(八幡山城)을 축성하면서 1585년에 폐성되었다는 전승이 있다.[9]2. 5. 근현대
- 1918년(다이쇼 7년) 아즈치성 보존을 목표로 "아즈치 보승회"가 설립되었다.
- 1926년(다이쇼 15년) 1919년(다이쇼 8년)에 시행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에 의해 아즈치성터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1927년(쇼와 2년) 내무성(현 총무성)이 성터에 "아즈치성터"라는 비석을 세웠다.
- 1928년(쇼와 3년) 시가현이 사적 아즈치성터의 관리 단체로 지정되었다. 이후, 오테몬(大手門) 터 등에 표석을 세우거나, 니노마루(二の丸) 터를 복구하고, 성내 계단을 개수하였으며, 천수각·혼마루(本丸) 터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 1950년(쇼와 25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에 따라 '''사적 안토성터'''가 되고, 2년 후인 1952년(쇼와 27년)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1960년(쇼와 35년) 성터 수리에 착수하여 1975년(쇼와 5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8년(쇼와 53년) 안토성터 실측도(축척 1/1000)를 작성하였다.
- 1988년(쇼와 63년) 「제1회 특별사적 안토성터 조사정비위원회」가 개최되었다.
- 1989년(헤이세이 원년)부터 2009년(헤이세이 21년)까지 「조사정비 20년 계획」을 시작하였다.
- 1992년(헤이세이 4년) 세비야 만국박람회에 「천수각 지도」를 바탕으로 복원된 안토성 천수각 일부(5·6층 부분)가 출품되었다. 현재, 복원 천수각은 안토성 천수각 노부나가의 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 1999년(헤이세이 11년) 본마루 터에서 내리의 청량전과 같은 평면을 가진 건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시 노부나가의 사상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발견이다.
- 2005년(헤이세이 17년) 안토정의 프로젝트팀이 이탈리아의 로마로 건너가 「안토성之図」라고 전해지는 병풍 그림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오오노 도시아키가 모사한 미니 병풍 그림을 기증하고, 병풍 그림의 수색을 의뢰했다.
- 2006년(헤이세이 18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51번)으로 선정되었다.
- 2009년(헤이세이 21년) 조사정비 20년 계획이 종료되었다.
- 2024년(레이와 6년) 12월 21일 『레이와의 대조사』 결과, 천수대의 동쪽에 있던 본마루 부속대의 건물 규모가 밝혀졌다고 발표[18].

'''1989년부터 2009년까지 20년간 발굴 및 정비 계획'''이 시행되었다.
년도 | 주요 내용 |
---|---|
1989년(헤이세이 원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 저택 터에서 건물터 5동을 발견하였다. |
1990년(헤이세이 2년) | 환경 정비의 기본 구상을 수립하였다. 도요토미 저택 터에서 망루 문 터를 발견하였다. 136미터에 걸쳐 오테미치(大手道)의 초기 노선을 확인하였다. |
1991년(헤이세이 3년) | 마에다 도시이에 저택 터에서 건물 4동과 목제 수로를 발견하였다. 쿠로가네몬(黒金門)에 이르는 오테미치의 전체 노선을 밝혔다. |
1992년(헤이세이 4년) | 환경 정비 공사에 착수하였다. |
1993년(헤이세이 5년) | 오테몬(大手門)과 그 동서쪽으로 이어지는 석축 터를 발견하였다. 동가문서(東家文書)를 조사하여 옛 아즈치 성하의 그림을 다수 발견하였다. |
1994년(헤이세이 6년) | 옛 소켄지(摠見寺) 경내지를 조사하여 초기 가람 배치를 명확히 하였다. 소켄지의 높은 축대를 해체하여 초기 오테미치를 발견하였다. |
1995년(헤이세이 7년) | 묘묘바시구치(百々橋口) 도로 및 주곽부 주변을 둘러싼 순환 도로를 조사하였다. |
1996년(헤이세이 8년) | 나가테미치(搦手道) 조사에 착수하였다. 미곡 창고 부근에서 금박을 입힌 샤치호코(鯱)기와를 발견하였다. |
1997년(헤이세이 9년) | 나가테미치의 전체 노선을 밝혔다. 부엌 터에서 배수구와 가마솥, 장식 금구를 발견하였다. |
1998년(헤이세이 10년) | 천수대 아래에서 소실된 건물과 함께 다수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건축 금속품, 십능(十能)·괭이, 화기, 금박 기와, 벽토 등과 나가테구치(搦手口) 호반에서 목간, 거의 완형에 가까운 금박 기와 등을 발견하였다. 오테미치의 정비 공사가 완료되었다. |
1999년(헤이세이 11년) | 본마루(本丸) 터에서 세이료덴(清涼殿)과 같은 평면을 가진 건물터를 발견하였다. |
국토교통성 국토지리원 [https://mapps.gsi.go.jp/ 지도·항공사진열람서비스]의 항공사진을 기반으로 작성
3. 건축적 특징
스테레오 사진은 여기]]
아즈치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1576년부터 1579년까지 기후성보다 교토에 더 가깝고 비와호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아즈치 산에 축성한 성이다. 호쿠리쿠 가도에서 교토로 향하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우에스기 겐신등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10] 다니와 나가히데가 총책임, 하시바 히데요시등이 건축에 참여했다.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로, 천수각(현지에서는 '천주'라고 표기)의 높이는 약 32미터였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소실되어 현재는 석벽 등 일부 유구만 남아있지만, 루이스 프롤이스 등의 기록을 통해 소실 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11]
아즈치성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 인물들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10] 이는 노부나가의 사상이 전장 전술에서 왕국 통치와 전반적인 평화와 질서 확보라는 책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11]
1989년부터 20년간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 저택, 마에다 도시이에 저택, 본마루 고텐 등 당시 상황이 밝혀졌다. 2026년 아즈치성 축성 450년을 맞아 천수각 복원을 포함한 재건 안을 검토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17][18]
아즈치성의 본마루어전은 천황을 맞이하기 위한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3. 1. 혁신적인 구조
아즈치성은 일본 최초로 본격적인 천수각을 갖춘 성곽으로, 이후 일본 성곽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노부나가의 천하통일 사업)를 상징하며, 한눈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아즈치성을 축성하였다.[10]
이때까지의 성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화려하고 호화로운 성이었다고 추측된다. 성의 외관은 육각씨의 관음사성을 본보기로 총석벽으로 불사되었으며, 여기서 갈고 닦은 축성 기술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잇따라 일본 전국에 축성된 근세 성곽의 모범이 되었다. 불사를 담당했다고 알려진 석벽 직인 집단 아노슈는 그 후, 전국적으로 성의 석벽 불사에 종사하여, 석벽을 사용한 성은 전국에 퍼져나갔다.[11]
높은 중앙 탑(천수각)은 총기 사용에 유리한 시야를 확보해 주었다. 성벽은 거대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어졌으며, 그 두께는 5.5m~6.5m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성내의 길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되도록 좁고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아즈치성은 본마루 정문(大手門)에서 이어지는 길의 폭이 6m나 되고, 약 180m나 직선으로 이어진다. 또한, 농성을 위한 우물(井戸)이나 무사주행, 낙석(石落とし)과 같은 시설도 현저하게 부족하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아즈치성은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정치적 기능을 우선시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3. 2. 독창적인 디자인
오다 노부나가가 축조한 아즈치성은 그 이전의 성들과는 확연히 다른 독창적인 디자인을 자랑했다. 특히 천수각(天守閣, 현지에서는 '천주'라고 표기)은 최상층이 팔각형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2] 다른 성들의 천수각이 흰색이나 검은색의 단색이었던 것에 비해, 아즈치성 천수각은 호랑이와 용 등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내부에는 중정(中庭, 건물 안의 뜰)이 있었는데, 이는 예수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2] 1976년 일본 건축사학자 나이토 아키라(内藤昌)는 천수각 높이가 46미터이며 꼭대기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팔각형 전망대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지하층에서 4층 천장까지 이어지는 중정이 있었고, 중정 바닥 중앙에는 스투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2] 그러나 또 다른 일본 건축사학자 미야카미 시게타카(宮上茂隆)는 나이토의 이론이 충분한 문서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2]
3. 3. 종교적 요소
아즈치 성 천수각(天主)의 초석은 중앙부 하나만 빠져 있는데, 발굴 조사 결과 중앙에 초석이 빠진 흔적은 없었다. 그 구멍에서는 불에 탄 천수각의 일부로 보이는 숯과 함께 항아리 조각 파편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발굴 당시 추측으로는 이 구멍 위에 불교의 탑이 있었고, 구멍에는 사리 용기인 항아리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
성곽 내에는 총견사(摠見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는 성곽 중심부에 사찰이 위치한 유일한 사례이다.
3. 4. 방어 시설의 부족
아즈치성은 군사적 거점보다는 정치적 기능을 우선시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방어 시설이 부족한 편이다. 본마루 정문(大手門)에서 이어지는 길은 폭이 넓고 직선으로 뻗어 있어,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 또한, 우물이나 무사주행(武者走り)과 같은 방어 시설도 다른 성들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하다.[16]
4. 현대의 아즈치성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의 혼노지의 변 이후 소실된 아즈치성은 현재 석벽 등 일부 유구만 남아있지만, 루이스 프롤이스 등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192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52년에는 특별사적으로 승격되었다.
- 1918년: 아즈치성 보존을 위한 '''아즈치 보승회''' 설립.
- 1927년: 내무성이 성터에 "'''아즈치성터'''" 비석 건립.
- 1928년: 시가현이 관리 단체로 지정되어 오테몬(大手門) 터 등에 표석 설치, 니노마루(二の丸) 터 복구, 성내 계단 개수, 천수각·혼마루(本丸) 터 발굴 조사 실시.
- 1960년 ~ 1975년: 성터 수리 진행 및 1978년 실측도 작성.
- 1988년: 「'''제1회 특별사적 아즈치성터 조사정비위원회'''」 개최.
- 1989년 ~ 2009년: 「'''조사정비 20년 계획'''」 실행.
- 1992년: 세비야 만국박람회에 복원된 아즈치성 천수각 일부(5·6층 부분) 출품. 현재 안토성 천수각 노부나가의 관에 보관, 전시.
- 1999년: 본마루 터에서 내리의 청량전과 같은 평면을 가진 건물 발견.
- 200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안토성之図'''」 병풍 그림 수색 실패. 로마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모사 미니 병풍 그림 기증 및 수색 의뢰.
- 2006년: 일본 100명성(51번) 선정.
- 2024년 12월 21일 『레이와의 대조사』 결과, 천수대의 동쪽에 있던 본마루 부속대의 건물 규모가 밝혀졌다고 발표[18].
; 교통편
- 서일본여객철도(JR 서일본) 비와호선(동해본선) 안토역 하차 후 도보 20분.
; 이용 정보
- 입장료 (총견사 징수):
- * 어른 700JPY
- * 어린이 200JPY (유아 무료)
- 총견사 본당 특별 관람: 1000JPY (2009년 4월부터 일요일, 공휴일 개방, 우천 시 휴관)
- 일본 100명성 스탬프 랠리 스탬프 설치 장소
- * 시가현립 안토성 고고학 박물관 (9:00~17:00 개관, 월요일 휴관)
- * 안토성 천수각 노부나가의 저택(문예의 고향) (9:00~17:00 개관, 월요일 휴관)
- * 안토성곽자료관 (9:00~17:00 개관, 월요일 휴관)
4. 1. 유적 및 복원
현재 아즈치성터에는 석벽 등 일부 유구만 남아있다.[13] 시가현은 1989년부터 20년간 아즈치성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오테미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저택 터, 마에다 도시이에 저택 터 등을 발견하고 정비하였다.[16]
이세 센고쿠 마을(伊勢戦国時代村)에는 그림과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아즈치성 천수각의 근사한 복원 모형이 세워져 있다. 원래 성터 근처에 있는 노부나가의 저택 박물관에는 천수각 최상층의 실물 크기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20년 동안 조사가 실시된 것은 사적 지정 면적의 약 20%(17ha)에 그쳤지만 시가현의 재정 사정으로 사업 지속에는 이르지 못하고, 전역의 조사(50년에서 100년 필요하다고 여겨짐)는 장래에 맡겨지게 되었다.[16]
그 후, 시가현은 2026년의 아즈치성 축성 450년을 향해, 천수각의 복원을 포함한 재건 안을 검토하기 위한 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레이와의 대조사」를 실시하고 있다.[17] 초년도인 2024년 12월 17일, 천수대의 동쪽에 있는 「본마루 취부대」에 있던 건물의 규모(동서 약 9.5m, 남북 약 17.5m로 추정)가 판명되었다고 발표했다.[18]
천수각, 본마루 고텐, 망루, 문, 토벽의 복원 계획은 없다.
4. 2. 아즈치 병풍
오다 노부나가는 가노 에이토쿠에게 아즈치성과 그 주변 마을을 그리게 한 6폭의 접이식 병풍(아즈치 병풍)을 제작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게 선물했다.[12] 이 병풍은 한때 바티칸 소장품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행방불명되었다.[12]4. 3. 대중문화 속의 아즈치성
2009년 영화 《불타는 하늘 아래의 성(火天の城, ''Katen no Shiro'')은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타나카 미쓰토시(田中光敏)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아즈치성의 건설을 다루고 있다.[14]5. 지성(支城)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성을 방어하기 위해 비와호 주변에 주요 가신들의 거성을 배치했다.[29]
성 이름 | 담당 무장 | 역할 |
---|---|---|
사카모토성 | 아케치 미쓰히데 | 킨키·산인 방면군 (혼원사 등에 대항), 가메야마성도 담당 |
나가하마성 | 하시바 히데요시 | 중국 방면군 (모리씨에 대항), 히메지성도 담당 |
오오구치성 | 쓰다 노부스미 | 오사카의 대관 겸임, 안토성과 위의 두 성으로 비와호를 가로질러 사각형 형성 |
사와야마성 | 다니와 나가히데 | 나카센도 억제, 북오미·와카사 지배 거점 |
기후성 | 오다 노부타다 | 코신 방면군 (다케다씨에 대항), 가와지리 히데타카가 보좌 |
키타노쇼성 | 시바타 가쓰이에 | 호쿠리쿠 방면군 (우에스기씨에 대항) |
고베성 | 오다 노부타카 | 난카이 방면군 (고야산 및 나가소네부씨에 대항), 다니와 나가히데가 보좌 |
마쓰가시마성 | 오다 노부카쓰 | 도카이 방면군 (이마가와씨 및 일향일기에 대항), 도카와 이에야스와는 별동군으로 일향종도 진압 담당 |
안노쓰성 | 오다 노부카네 |
6. 평가 및 의의
아즈치성은 일본 성곽 건축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시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은 오다 노부나가의 권력을 상징하며,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6]
1582년(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실되었지만, 선교사 루이스 프롤이스 등이 남긴 기록을 통해 소실 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아즈치성은 육각씨의 관음사성을 본보기로 삼아 석벽으로 축조되었으며, 최초로 석벽 위에 천수각을 올린 성이다. 여기서 발전된 축성 기술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일본 전국에 축성된 근세 성곽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축성을 담당했다고 전해지는 석공 집단인 아나타슈(穴太衆)는 이후 전국적으로 성의 석벽 축조에 참여하여, 석벽을 사용한 성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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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祭りから見えてくる…新暦が分断した「お盆」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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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土城の全容解明は後世に 08年度で調査終了、史跡の8割残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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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の威容”安土城の実像探る「令和の大調査」で浮かび上がった信長と秀吉の天下人への思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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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土城建物の規模判明 滋賀県「令和の大調査」 天主に隣接 重要施設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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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原 名城天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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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累世記事
藤堂家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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