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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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은은 당나라 말기의 문인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고 관직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만년에 권력자의 막료로 활동했다. 그는 솔직하고 풍자적인 시를 썼으며, 특히 "자견(自遣)"이 유명하다. 그의 시는 역사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신라의 문인 최치원과 교류하기도 했다. 조선의 정조는 그의 저서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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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 (당)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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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나은 (羅隱) |
본명 | 나횡 (羅橫) |
자 | 소간 (昭諫) |
호 | 강동생 (江東生) |
아버지 | 나수고 (羅修古) |
출생지 | 항주 신성 (당) |
출생일 | 기원후 833년경 |
사망지 | 항주 (오월) |
사망일 | 기원후 910년경 (76–77세) |
2. 생애
나은은 저장성 푸양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열 번이나 낙방하였다. 좌절을 겪은 그는 이름을 '은(隱)'으로 고치고 스스로를 '강동생(江東生)'이라 불렀다.
그는 오만한 성격이었지만, 전류는 그를 거슬려하지 않았다. 주전충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발탁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나은은 전당령(錢塘令), 진해군장서기(鎭海軍掌書記) 절도판관(節度判官), 염철발운부사(鹽鐵發運副使), 저작좌랑(著作佐郎), 사훈랑(司勳郎)을 거쳤다.
저서로는 《강동갑을집(江東甲乙集)》, 《회남우언(淮南寓言)》, 《참서(讖書)》, 《후집(後集)》이 있으며, 아들 새옹(塞翁)은 양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이 그림은 후에 북송의 손면(孫沔)이 소장하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과거 낙방
20세에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열 번이나 낙방하여, 이름을 은(隱)으로 고치고 스스로 호를 강동생(江東生)이라 하였다.[5]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순박하게 생겼지만 천박했다'(貌古而陋),[6] '촌스러운 말씨가 어그러졌다'(鄕音乖刺),[7] '재주를 믿고 사람들을 깔보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꺼리고 싫어했다'(恃才忽睨. 衆頗憎忌)고 기록되어 있다.중서문하평장사 정전에게는 문학을 좋아하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나은의 시를 즐겨 낭독했다. 정전은 딸의 애정 행각을 걱정하여 어느 날 나은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고, 딸은 커튼 뒤에서 손님을 엿보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다시는 그의 시를 읽지 않았다.[1]
2. 2. 관직 생활과 좌절
20세에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열 번이나 낙방하여, 이름을 은(隱)으로 고치고 스스로 호를 강동생(江東生)이라 하였다. 그의 성품은 '순박하게 생겼지만 천박했다'(貌古而陋)[5], '촌스러운 말씨가 어그러졌다'(鄕音乖刺)[6], '재주를 믿고 사람들을 깔보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꺼리고 싫어했다'(恃才忽睨. 衆頗憎忌)[7]고 기록되어 있다.관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함통(咸通) 11년(870년)에 호남(湖南)과 회주(淮州), 윤주(潤州) 등지를 돌며 관직을 얻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광계(光啟) 3년(887년)에 강동으로 돌아온 뒤 곤궁하고 빈한한 생활을 하다가 55세 때에야 전류의 막료(幕僚)가 되었다.
2. 3. 후량 급사중 임명과 죽음
나소위가 후량에 귀부한 뒤, 나은을 적극 추천하여 후량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았다. 이때 주군인 전류도 이미 주온(주전충)에게 신하를 칭하고 있었기에[8] 나은도 할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전당(錢塘)에서 향년 77세로 숨을 거두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나 급사(羅給事)라 불렀다고 한다.3. 작품 활동 및 평가
나은은 역사를 읊은 영사(詠史)가 많았으며, 풍자적이고 비꼬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서는 그의 시문을 "오래된 사당의 목상이라 해도 피해갈 수 없다"고 평했다.[9] 그의 시풍은 만당(晚唐)의 한 파에 속했으며, 민간의 구어(口語)를 다듬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대표작으로는 "자견(自遣)"이 있다.
조선 정조는 나은의 《양동서(兩同書)》에 대해 "지론(旨論)이 많고, 천고의 인물을 품평한 것은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노담(老聃)과 공자를 끌어다 결론을 맺은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평가했다.[11]
신라의 문인 최치원과의 교류도 주목할 만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자신의 재주를 믿고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던 나은도 최치원에게는 자신이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줄 정도였다고 한다.[10]
3. 1. 주요 작품 및 특징
나은의 시는 역사를 읊은 영사(詠史)가 많았는데, 《당재자전(唐才子傳)》에는 나은의 글을 평해 '시문(詩文)은 무릇 풍자하고 비꼬는 것을 주로 삼아 오래된 사당의 목상이라 해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9] 그 시풍(詩風)은 만당(晚唐)의 한 파에 속했고, 민간에 나도는 구어(口語)를 다듬는 데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라의 문인으로서 당으로 유학하러 온 최치원과도 교류가 두터웠다.[10]조선의 정조는 나은에 대해 "《양동서(兩同書)》 10편은 내용 중에 지론(旨論)이 많다. 그가 말한 귀천(貴賤), 강약(强弱), 손익(損益), 경만(敬慢), 후박(厚薄), 이란(理亂), 득실(得失) 등 여러 편에서 천고의 인물을 품평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읽어도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게 한다."고 호평하면서도, "앞의 다섯 편에서 노담(老聃)을 끌어다 결론을 맺고 뒤의 다섯 편에서 공자를 끌어다 결론을 맺은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11]
나은은 솔직한 시와 풍자적인 재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는 "자견(自遣)"이다.
자견(自遣) | |
---|---|
得則高歌失則休 | 얻으면 크게 노래하고 잃으면 조용히 쉬어가며 |
多愁多恨亦悠悠 | 근심 많고 한 많은 이 세상, 그럭저럭 살다 가자 |
今朝有酒今朝醉 | 오늘 아침 술 생기면 오늘 아침 취하고 |
明日愁來明日愁 | 내일의 근심일랑 내일의 근심으로 남겨두자꾸나 |
3. 2. 최치원과의 교류
신라의 문인으로 당으로 유학 온 최치원과도 교류가 두터웠는데, 《삼국사기》에는 처음 최치원이 당에 왔을 때 평소 자신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게 여기며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던 나은도 최치원에게는 자신이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10]3. 3. 후대의 평가
나은의 시는 역사를 읊은 영사(詠史)가 많았는데, 《당재자전》(唐才子傳)에서는 나은의 글을 '시문(詩文)은 무릇 풍자하고 비꼬는 것을 주로 삼아 오래된 사당의 목상이라 해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라고 평했다.[9] 그 시풍(詩風)은 만당(晚唐)의 한 파에 속했고, 민간에 나도는 구어(口語)를 다듬는 데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한편 신라의 문인으로서 당으로 유학 온 최치원과도 교류가 두터웠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처음 최치원이 당으로 왔을 때, 평소 자신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게 여기며 쉽게 남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은도 최치원에게는 자신이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0]
조선 정조는 나은에 대해 "《양동서(兩同書)》 10편은 내용 중에 지론(旨論)이 많다. 그가 말한 귀천(貴賤), 강약(强弱), 손익(損益), 경만(敬慢), 후박(厚薄), 이란(理亂), 득실(得失) 등 여러 편에서 천고의 인물을 품평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읽어도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게 한다."고 호평하면서도, "앞의 다섯 편에서 노담(老聃)을 끌어다 결론을 맺고 뒤의 다섯 편에서 공자를 끌어다 결론을 맺은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11]
4. "자견(自遣)"
뤄 인은 솔직한 시와 풍자적인 재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는 "자견(自遣)"이다.
원문 | 해석 |
---|---|
得則高歌失則休 | 얻으면 크게 노래하고 잃으면 조용히 쉬어가며 |
多愁多恨亦悠悠 | 근심 많고 한 많은 이 세상, 그럭저럭 살다 가자 |
今朝有酒今朝醉 | 오늘 아침 술 생기면 오늘 아침 취하고 |
明日愁來明日愁 | 내일의 근심일랑 내일의 근심으로 남겨두자꾸나 |
5. 관련 사적
- 《구오대사》 권24, 〈양서〉24, [열전]14, 나은[1]
- 《당재자전》 권9[2]
- 심숭, 〈나 급사 묘지〉[3]
참조
[1]
서적
Jiu Wu Dai Shi
http://zh.wikisource[...]
[2]
문서
심숭, 〈나 급사 묘지〉
[3]
문서
지금의 중국 절강 성(浙江省) 여항
[4]
문서
지금의 중국 절강 성 동려(桐廬).
[5]
서적
《구오대사》 권24, 〈양서〉24, [열전]14, 나은
[6]
서적
《당어림》 권7
[7]
서적
《오대사보》 권1
[8]
문서
주전충은 후량을 세운 뒤, 예전 당 조정으로부터 '온전히 충성하라'는 뜻으로 받은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이름인 온(溫)을 사용했다.
[9]
서적
《당재자전》 권9
[10]
서적
《삼국사기》 권46, 〈열전〉6, 최치원
[11]
서적
《홍재전서》 권172, 〈일득록〉12, 인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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