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노부오키 (16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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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부 노부오키는 1678년에 태어나 1707년에 사망한, 모리오카 번의 다이묘이다. 그는 1701년에 아버지 난부 유키노부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으며, 유학에 경도된 아버지의 정책을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흉작과 겐로쿠 대지진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이복 동생 난부 토시모토가 양자가 되어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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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 노부오키 (167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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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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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난부 노부오키 (南部信恩) |
출생 | 1678년 11월 6일 |
출생지 | 에도 |
사망 | 1707년 12월 31일 |
사망지 | 에도 |
국적 | 일본 |
직업 | 모리오카번 다이묘 |
재임 기간 | 해당사항 없음 |
이전 | 난부 유키노부 |
이후 | 난부 도시모토 |
배우자 | 모리 쓰나모토의 딸 |
자녀 | 난부 도시미 |
아버지 | 난부 유키노부 |
생애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초기 이름 | 히사노부 (久信), 노부오키 (信恩) |
관위 | 종5위 하 비젠 국 수 |
가문 | |
씨족 | 난부 씨 |
부모 | 아버지: 난부 유키노부 어머니: 이와이 요시로의 딸, 자온인(慈恩院) |
형제자매 | 사네노부 노부오키 도시미치 아오야마 유키토시 정실 마키노 히데시게 정실 난부 나오마사 정실 아야히메 마쿠코 |
정실 | 모리 쓰나모토의 딸, 마수인(真寿院) |
측실 | 구로사와 씨의 딸, 조치인(浄智院) |
자녀 | 도시미, 나가이 나오키 정실 |
양자 | 도시미치 |
기타 | |
주군 | 도쿠가와 쓰나요시 |
2. 생애
엔포 6년(1678년) 9월 22일, 에도 아소 저택에서 제4대 번주 난부 유키노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겐로쿠 14년(1701년) 5월 1일, 형 사네노부가 사망하면서 유키노부의 적자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어전했으며, 7월 25일에는 모리 쓰나모토의 딸과 결혼했다. 12월 18일, 종5위하 비고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2. 1. 가독 상속
겐로쿠 15년(1702년) 11월 27일, 아버지 난부 유키노부가 사망하면서 가독을 이었다.[1] 이듬해(1703년) 4월 15일, 처음으로 영지로 들어갈 휴가를 얻었다.[1] 같은 해, 아버지가 유교에 경도되어 중용했던 유신들을 선대의 유언을 명분으로 단죄하고, 유학 경향 책략의 폐해를 바로잡았다.[1] 그러나 같은 해 영내에 흉작이 발생하고, 에도에서는 겐로쿠 대지진이 일어나 에도 번저가 모두 파괴되면서 번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1]2. 2. 번정 개혁 시도와 좌절
1703년 (겐로쿠 16년), 유키노부가 유교에 경도되어 중용했던, 번주 폐립에까지 개입한 유신들을 선대의 유언을 명분으로 단죄하고 유학 경향 책략의 폐해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같은 해 영내에 흉작이 발생하고, 에도에서는 겐로쿠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에도의 번저가 모두 파괴되어 번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1]2. 3. 사망
호에이 4년(1707년) 12월 8일에 30세로 사망했다.[1] 이복 동생 도시모토가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했으며, 노부오키 사후에 실자인 도시미가 태어나 도시모토의 양자가 되었다.[1]3. 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난부 유키노부 |
어머니 | 자은원 - 이와이 요이치로의 딸 |
정실 | 진수원 - 모리 쓰나모토의 딸, 전 남편은 모리 나가나리 |
측실 | 죠치인 - 구로사와 씨 |
측실 | 레이코인 - 니토베 씨 |
차남 | 난부 도시미(1708년 - 1752년) |
딸 | 나가이 나오토키의 정실 |
양자 | 난부 도시모토(1689년 - 1725년) - 난부 유키노부의 넷째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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