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도시유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난부 도시유키는 난부 도시타케의 장남으로, 시로이시 번과 모리오카 번의 지사를 역임했으며, 1884년 백작 작위를 받았다. 1869년 시로이시 번 지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모리오카 번 지사로 전임했다. 1870년 지사직을 사임한 후 화족 난부가의 호주로 남았으며, 금록공채를 받았고, 1884년 화족령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 1903년 사망했으며, 장남 난부 도시카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막말 모리오카번 사람 - 오시마 타카토
오시마 타카토는 일본 모리오카 출신의 근대 제철 기술자로, 란학 및 채광 기술을 습득하여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를 완성하고 일본 광업계 발전에 기여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로 불린다. - 막말 모리오카번 사람 - 니토베 이나조
니토베 이나조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농학자이자 교육자, 외교관, 국제연맹 사무차장으로, 『부시도: 일본의 영혼』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식민지 정책 옹호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모리오카번주 - 난부 시게나오
난부 시게나오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모리오카 번의 2대 번주이며 모리오카성 축성을 완성하고 산킨코타이 지각으로 처벌받았으며 네덜란드 선박 승무원을 심문하기도 했다. - 모리오카번주 - 난부 유키노부
에도 시대 모리오카 번 제5대 번주 난부 유키노부는 가즈노 금산 생산량 감소와 흉년으로 악화된 번 재정을 재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기근 속에서 유교에 심취했으며, 포술과 승마에 능하여 각 분야의 새로운 유파를 창시했다. - 난부씨 - 모리오카성
모리오카성은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 위치한, 기타카미강과 나카쓰강 합류 지점의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연곽식 평산성으로, 난부 씨의 거점으로서 무로마치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를 지니며 현재는 이와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난부씨 - 모리오카번
모리오카번은 난부씨가 700년 가까이 통치한 번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인정받아 조카마치를 건설했으나, 보신 전쟁 패배 후 영지 몰수와 재정난을 겪다 폐번되었다.
난부 도시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작위 | 백작 |
휘 | 히코타로 (幼名) 고키 (初名) 도시유키 (利恭) |
묘소 | 도쿄도분쿄구오쓰카고코쿠지 |
가문 | 난부 씨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가이노카미 종3위 정3위 |
섬긴 왕 | 메이지 천황 |
옛 봉역 | 이와키국시라이시번 무쓰국모리오카번 |
생애 | |
출생 | 1855년 11월 18일 |
사망 | 1903년 10월 19일 |
아버지 | 난부 도시히사 |
어머니 | 와시코 (도쿠가와 나리아키, 미토번 번주의 딸) |
배우자 | 정실: 다테 무네나리의 여섯째 딸, 테루 계실: 미조구치 나오히로의 일곱째 딸, 이쿠히메 계계실: 아사노 모치아키라의 딸, 기쿠코 |
자녀 | 난부 도시나가 난부 도시준 요코 야스코 |
경력 | |
모리오카 번주 (15대) | 1868년 ~ 1868년 |
시라이시 번 지사 | 1869년 ~ 1870년 |
모리오카 번 지사 | 1870년 ~ 1871년 |
난부 종가 당주 (41대) | 1868년 ~ 1903년 |
난부 백작가 당주 (1대) | 1884년 ~ 1903년 |
2. 약력
난부 도시유키는 1848년 제14대 번주 난부 도시타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이름은 히코타로(彦太郎), 처음 이름은 고키(剛毅)였다. 1863년 9월 막부에 장부계를 제출하였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아버지 도시타케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동조하여 정부에 반역했기 때문에, 정부군에 항복한 후 11월에 관위가 박탈되었고, 12월 7일에 성지 수거되었다.[1]
그러나 12월 17일에는 도시타케의 아들 도시야스에게 이와키 국시로이시 번 13만 석이 하사되어 가명 재흥을 허락받았다.[1] 1903년 10월 9일에 사망했으며, 작위와 가독은 장남 도시카가 상속했다.[4]
2. 1. 시로이시 번지사 및 모리오카 번지사
1869년 6월 18일, 판적봉환으로 시로이시 번지사에 취임했다.[1] 같은 해 6월 28일, 종5위하·가이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개인 재산인 가록은 현미로 6858석이었다.[2] 같은 해 7월 21일, 구 영지 모리오카로 복귀하여 리쿠추 국 모리오카 번 지사로 전임했다.[1]1870년 7월 10일 이전에 번 지사를 사임하고 군현 제도로 복귀할 것을 청하는 상표를 제출했고, 같은 날 이 상표가 가납되어 지사에서 면직되었다.[1] 도시야스는 번 지사 사임 후에도 1903년 사망할 때까지 화족 난부가의 호주로 계속 남았다.[4]
2. 2. 화족 백작
1884년 7월 7일 화족령에 의해 화족이 오작제로 되면서 구 중번 지사[2]로서 백작에 서임되었다[1].1876년 금록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공채 액수는 238183JPY (화족 수급자 중 27위)였다[3].
3. 영전
4.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난부 도시타카 | 1827년 - 1896년 |
어머니 | 미야 시즈코[6] | |
정실 | 히로 | 다테 무네나리의 여섯째 딸, 이후 이혼 |
계실 | 이쿠히메 | 미조구치 나오히로의 일곱째 딸 |
계실 | 기쿠코 | 1856년 - 1902년, 아사노 모치아키의 딸, 아사노 나가쿠니의 친동생 |
장남 | 난부 도시나가 | 1882년 - 1905년 |
차남 | 난부 도시스미 | 1884년 - 1930년 |
장녀 | 난부 요코 | 모리 모토히데의 부인 |
차녀 | 난부 교코 | 시마즈 히사이의 부인 |
참조
[1]
서적
用語南部盛岡藩辞典 (Yogo Nanbu Morioka-han jiten)
Toyo Shoin
[2]
간행물
官報 第6085号
1903-10-12
[3]
간행물
官報 第307号「叙任及辞令」
1884-07-08
[4]
간행물
官報 第3893号「叙任及辞令」
1896-06-22
[5]
간행물
官報 第5688号「叙任及辞令」
1902-06-21
[6]
서적
『武将・宇都宮公綱の遠孫 教育一家として岩手に根をおろした宮一族』
東光出版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