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남호작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호작전은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이 남중국해를 통해 자원을 수송하려다 실패한 작전이다. 1945년 1월, 연합군의 통상파괴 작전으로 남방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 일본은 특공 수송을 감행했으나, 미 해군 잠수함과 항공기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월부터 3월까지 11차례에 걸쳐 소규모 선단을 투입했지만, 수송에 성공한 선박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남호작전의 실패로 일본의 남방 자원 항로는 사실상 폐쇄되었고, 전쟁 지속 능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남호작전
개요
명칭남호 작전
별칭남방 작전
로마자 표기Nan-gō Sakusen
영어 명칭Southern Operation
시기1941년 11월 ~ 1942년 5월
장소동남아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
필리핀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교전 세력
일본 제국일본 제국 해군
일본 제국 육군
연합군미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지휘관
일본 제국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군더글러스 맥아더
아치볼드 웨이블
결과
영향동남아시아에서 연합군 세력 약화

2. 배경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은 석유, 철광석, 천연고무, 등 다양한 자원을 남중국해를 통해 남방 점령 지역에서 본토로 수송했다. 특히 싱가포르와 일본 본토를 잇는 석유 수송 항로는 '히 선단'으로 불리며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에 연합군은 잠수함 등을 이용하여 해상 교통을 공격하는 통상파괴를 실시했다. 1944년 후반부터는 중국 대륙과 재점령한 필리핀을 거점으로 항공기를 동원해 남중국해 항로를 차단했다.[19]

1945년 1월 12일, 미 해군 제38 태스크 포스는 히86선단을 공격하여 호위 해방함 3척을 제외하고 모두 격침시켰다.[2] 같은 시기 히87선단도 홍콩 등지에서 공습을 받아 수송선 대부분을 잃었다.[2] 당시 일본은 대형 호송선단을 동원했지만 대규모 공습에 무기력했다. 미군 기동 부대가 남중국해까지 침입한 것은 일본의 남방 해상교통로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했다.[3][4]

1945년 1월,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타이완과 만주의 비축분을 합쳐도 100만 ㎘에 불과했다.[5]

3. 작전 경과

1945년 1월, 일본은 석유 등 중요 자원 수송을 위해 '특공 정신'에 입각한 '특공 수송'을 결정하고 남방 항로 유지를 시도했다.[6] 1월 20일, 대본영은 대해령 제37호를 발령하여 남방 자원 수송 작전 수행을 지시했다.[7] 대본영 육군부와 해군부는 '연료 및 중요 물자 긴급 환송 작전 실시에 관한 육해군 중앙 협정'을 체결했고,[1] 해군은 연합함대 지휘 아래 '남호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7] 남호 작전은 잔존 해군 함정을 이용한 강행 수송 작전인 '북호 작전'에 대응하는 명칭이다.

해상 호위 총사령부의 제1호위함대 주력 외에 제5함대, 제4항공전대, 제1항공함대 등 연합 함대의 잔존 전력도 호위 및 초계 강화에 투입되었다.[7] 지나 방면 함대는 해상 호위 총사령부 사령장관 지휘 아래 예하 부대를 두었다.[1] 육군 항공대도 상공 지원에 협력했다.

히86, 히87 선단의 피해를 교훈 삼아, 대규모 선단 대신 수송선 몇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선단을 구성하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호위 함정을 배치했다.[10] 수송선 자체에도 대공 기관총, 폭뢰 등 자위 병장을 탑재했다.

남호 작전 지원을 위해 AS1호 작전(2.22~3.12), AS2호 작전(3.13~3.17) 등 잠수함 소탕 작전이 실시되었다. 제102전대와 제931해군항공대가 이 작전에 참여했다.

3월까지 11차례에 걸쳐 탱커 30척이 보내졌으나, 대부분 격침되었다. '세리아마루' 등 일부는 수송에 성공했으나,[11] 3월 16일 남호 작전은 중지되었다.[8] 3월 19일, 마지막으로 히88J 선단이 싱가포르에서 출항했으나, 사이공행 3척을 제외하고 모두 격침되었다.[12]

4. 투입 선단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은 석유, 철광석 등 자원을 남중국해를 통해 남방 점령지에서 본토로 운송했다. 특히 싱가포르와 일본 본토 간 석유 수송로가 중요했으며, '히 선단'이 운항되었다. 연합군은 통상파괴를 실시했고, 1944년 후반부터 필리핀 재점령 후 항공기로 남중국해 항로를 차단했다.

1945년 1월 12일, 히86선단이 미 해군 제38 태스크 포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비슷한 시기 남하하던 히87선단도 큰 손실을 보았다. 이는 일본의 남방 해상교통로에 위기가 왔음을 의미했다.

1945년 1월, 일본은 석유 수송을 위해 '특공 수송'을 결정하고, 대본영은 '남호 작전'을 계획했다. 연합함대는 남방 동맥 수송로 호위 강화 작전을 발령했다. 부족한 탱커를 대신해 손상된 선박을 수리하여 투입했다. 제1호위함대 외 제5함대, 제4항공전대 등 잔존 전력도 투입되었다. 육군 항공대도 지원했다.

히86, 히87 선단의 전훈을 참고하여, 대규모 선단 대신 소규모 선단을 구성하고, 수송선에 대공 기관총 등 자위 병장을 탑재했다. 또한, 남호 작전 지원을 위해 2월 22일부터 3월 12일까지 'AS1호 작전', 3월 13일부터 17일까지 'AS2호 작전'이 실시되었다.

3월 중순, 해상 호위 총사령부는 오키나와 전투가 임박하자 남호 작전 중지를 건의했다. 3월 16일, 대본영 해군부는 작전 중지를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편성된 히88J 선단은 큰 피해를 입고 작전은 종료되었다.

4. 1. 오오우치 겐지에 따른 11개 선단

오오우치 겐지에 따르면, 3월까지 11차에 걸쳐 선단으로 탱커 30척이 보내졌지만, 대부분은 도중에 격침되었다. 하지만 세리아마루처럼 17,000킬로리터의 항공용 가솔린 수송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고, 3월 27일에 도쿠야마항에 입항한 고지마마루까지 6척이 임무를 완수했다.[11]

4. 1. 1. 히88A 선단

1월 20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2월 7일 모지에 도착했다. 탱커 '세리아마루' 1척이 항공용 가솔린 17,000t을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호위함으로는 구축함 2척(상자크까지), 제41호 해방함, 205호 해방함(상자크부터 상하이까지), 가사토 해방함(5일부터), 오키나와 해방함(진해부터), 사쿠라 구축함, 가시 구축함(상하이부터)이 참여했다.[10]

4. 1. 2. 히88B 선단

1월 28일 싱가포르를 출항한 히88B 선단은 1월 31일 소멸되었다. 이 선단은 탱커 '다이에쓰마루', '엔기마루', 화물선 '신주마루'(상자크까지)로 구성되었다. 미 잠수함 보아피쉬의 공격으로 '다이에쓰마루'와 '엔기마루'가 침몰하였다. 호위함은 해방함 노미, 제60호(사이공부터), 초계정 제104호 초계정, 구축정 제20호 구축정이었다.

4. 1. 3. 히88C 선단

ヒ88C일본어 선단은 1945년 1월 31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2월 27일 모지에 도착했다. 이 선단에는 탱커 '엔초마루', '오에야마마루'와 화물선 '세이카와마루'(저우산 군도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2월 12일 공습으로 '세이카와마루'가 손상되었다.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간주, 미야케, 소해정 제20호 소해정이 포함되었다.[8]

4. 1. 4. 히88D 선단

2월 4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2월 8일 사이공에 도착한 후 해산한 히88D 선단은 탱커 '엔겐마루', '다이교마루', 화물선 '치세이마루'로 구성되었다. 미 해군 잠수함 팜파니토, 가비나의 공격으로 '엔겐마루', '다이교마루'가 침몰했다.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야쿠, 13호, 31호가 있었다.[12]

4. 1. 5. 히88E 선단

2월 11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3월 9일 모지에 도착하였다. 탱커 '엔게이마루', '신유마루'와 호위함 해방함 132호, 초계정 제104호 초계정, 구축정 제63호 구축정으로 구성되었다.[1]

4. 1. 6. 히88F 선단

1945년 2월 11일 싱가포르에서 출발하여 3월 8일 모지에 도착한 히88F 선단은 수송선 '에이마루'와 '후쿠에이마루'로 구성되었다. 2월 14일 홍콩 해역에서 공습으로 해방함 '노미'가 손상되었다.[1]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노미(홍콩까지), 60호(홍콩부터), 제34호 소해정이 포함되었다.

4. 1. 7. 히88G 선단

2월 14일 싱가포르에서 출항한 히88G 선단은 이후 히88H 선단에 합류했다. 이 선단에는 탱커 '제1야에이마루', '제2다카사고마루', '제30난신마루'(상자크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2월 23일 공습으로 호위 구축함 '제35호 구축정'이 침몰했다.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31호, 구축정 제20호 구축정, 제34호 구축정, 제35호 구축정이 있었다.[1]

4. 1. 8. 히88H 선단

2월 16일 싱가포르를 출항한 히88H 선단은 3월 17일 로쿠렌 섬 정박지에 도착했다. 이 선단은 탱커 '에이쇼마루', '닛츠쿠마루', '호난마루'(상자크 행), '제1야에이마루', '제2다카사고마루'(이상 히88G 선단)로 구성되었으며,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야쿠, 13호, 구축정 제20호 구축정이 포함되었다.[12]

항해 도중, 2월 22일 미 잠수함 베쿠나의 공격으로 '닛츠쿠마루'가 침몰했고,[12] 2월 23일에는 미 잠수함 해머헤드의 공격으로 해방함 '야쿠'가 침몰했다.[12] 3월 1일에는 공습으로 '에이쇼마루'가, 3월 3일에는 '제1야에이마루'가 각각 침몰했다.[12]

4. 1. 9. 히88I 선단

3월 5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이후 히88J 선단에 합류하였다. 이 선단은 탱커 '야마구니마루', '호센마루', '제6다카사고마루', '제21난신마루', 화물선 '제2후시미마루', 특설 구축정 '카이난마루', 상자크 행 수송선 1척으로 구성되었다. 호위함으로는 구축정 제9호 구축정, 제33호 구축정, 부설정 다테이시가 있었다.

3월 20일, 미 잠수함 블레니의 공격으로 '야마구니마루', '호센마루', '제21난신마루'가 침몰하였다.[12] 3월 21일에는 미 잠수함 바야 및 B-25의 공격으로 '카이난마루', '제2후시미마루', '제6다카사고마루', 부설정 다테이시, 구축함 '제33호 구축정'이 침몰하였다.[12]

4. 1. 10. 히88J 선단

1945년 3월 중순, 해상 호위 총사령부는 오키나와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하여 남방 항로를 통한 수송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남호 작전의 중지를 건의했고, 대본영 해군부는 3월 16일 대해지 제511호를 발령하여 작전 중지를 명령했다.[8] 마지막으로 남방에 남아 있던 가동 선박을 모아 히88J 선단(수송선 7척, 호위 함정 9척)을 편성하여 3월 19일 싱가포르에서 출항시켰다.[12] 그러나 사이공으로 향하던 3척을 제외하고, 3월 29일까지 수송선은 모두 격침되고 해방함 3척도 침몰하는 피해를 보았다.[12]

4. 1. 11. 히96 선단

2월 22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3월 13일 모지에 도착한 히96 선단은 탱커 '고시마마루', '후지야마마루', '아마토마루'로 구성되었다. 2월 27일 미 해군 잠수함 블레니의 공격으로 '아마토마루'가 침몰했고, 3월 1일 B-29의 폭격으로 '고시마마루'가 손상되어 홍콩으로 회항했다.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이나키, 8호, 66호, 81호가 있었다.[11]

4. 2. 전사총서에 따른 15개 선단

전사총서에 따르면, 1월 20일부터 3월 16일까지 중요 자원 수송을 위해 15개 선단이 편성되어 총 45척의 수송선과 50척의 호위함이 항해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수송선 20척과 호위함 4척이 손실되었다.[8][1]

아래 표는 그 중 일부 선단의 정보를 요약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

선단명출발일도착일구성피해호위함
히90 선단1945년 2월 15일3월 4일유조선 에이요마루, '니치난마루'2월 20일 에이요마루 침몰 (가비나 공격)해방함 8호, 32호(가나에서), 52호
히92 선단2월 18일3월 11일유조선 토조마루, '제2건천마루'2월 22일 제2건천마루 침몰 (기뢰 접촉), 2월 25일 쇼난 침몰 (호 공격)해방함 쇼난, 야시로(8일부터 한반도 서안까지), 25호
히94 선단2월 23일3월 14일유조선 토아마루, 급유함 '바리'3월 3일 바리 침몰 (기뢰 접촉)해방함 18호(3월 1일부터 율림까지), 63호, 207호, 부설정 신아이자키(율림에서부터)
히98 선단2월 27일3월 5일 (소멸)유조선 료에이마루, '파렘반마루'3월 4일 파렘반마루 침몰 (바야 공격), 3월 5일 료에이마루 침몰 (바쇼 공격)해방함 1호(산자크에서부터), 69호, 130호, 134호


4. 2. 1. 히90 선단

1945년 2월 15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3월 4일 모지에 도착한 히90 선단은 유조선 '에이요마루'와 '니치난마루'로 구성되었다.[8] 2월 20일 미 해군 잠수함 가비나의 공격으로 '에이요마루'가 침몰하였다.[8]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8호, 32호(가나에서), 52호가 참여했다.[8]

4. 2. 2. 히92 선단

2월 18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3월 11일 모지에 도착했다. 유조선 '토조마루'와 '제2건천마루'로 편성되었다. 2월 22일 기뢰와 접촉하여 '제2건천마루'가 침몰했다.[1] 2월 25일 미 잠수함 호의 공격으로 해방함 쇼난이 침몰했다.[1] 호위함은 해방함 쇼난, 야시로(8일부터 한반도 서안까지), 25호였다.[1]

4. 2. 3. 히94 선단

2월 23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3월 14일 모지에 도착하였다. 유조선 '토아마루'와 급유함 '바리'로 구성되었으며, 3월 3일 기뢰 접촉으로 '바리'가 침몰하였다.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18호(3월 1일부터 율림까지), 63호, 207호, 부설정 신아이자키(율림에서부터)가 있었다.[1]

4. 2. 4. 히98 선단

히98 선단은 1945년 2월 27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3월 5일 소멸한 선단이다. 유조선 '료에이마루'와 '파렘반마루'로 구성되었다. 3월 4일 미 잠수함 바야의 공격으로 '파렘반마루'가 침몰했고, 3월 5일 미 잠수함 바쇼의 공격으로 '료에이마루'가 침몰했다. 호위함으로는 해방함 1호(산자크에서부터), 69호, 130호, 134호가 있었다.

5. 결과 및 영향

남호 작전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났다. 오오우치 겐지에 따르면 30척 중 6척[11], 전사총서에 따르면 37척 중 10척만이 수송에 성공했다. 일본의 남방 자원 항로는 사실상 폐쇄되었고, 이후 태평양 우회 항로나 이호 제351 잠수함 등 잠수함을 이용한 수송이 시도되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1945년 히 선단에 의한 석유 수송량은 총 17만 킬로리터(원유 환산 16만 8천 톤)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은 비축 석유, 국내산 석유, 인조 석유, 송근유 등 대체 연료에 의존하여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남호 작전의 실패는 전반적으로 일본의 전쟁 지속 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叢書79中国方面海軍作戦(2)
[2] 서적 叢書54南西方面
[3] 서적
[4] 서적 叢書54南西方面
[5] 서적
[6] 서적
[7] 서적 叢書54南西方面
[8] 서적
[9] 서적 叢書54南西方面
[10] 서적
[11] 서적
[12] 문서
[13] 간행물 제63호 해방함 전시일지
[14] 간행물 제63호 해방함 전시일지
[15] 간행물 제63호 해방함 전시일지
[16] 간행물 제63호 해방함 전시일지
[17] 서적
[18] 서적 SS-241, USS BASHAW
[19] 서적
[20]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