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니시자와 히로요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1920년에 태어난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1936년 해군에 입대하여 비행 훈련을 받았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쓰비시 A6M 제로 전투기를 조종하며 뉴기니, 과달카날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는 1944년 필리핀에서 가미카제 공격을 호위하다가 미 해군 전투기에 격추되어 사망했다. 니시자와는 100기 이상의 격추 기록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전후에는 미일 양국에서 에이스 파일럿으로 평가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에이스 전투조종사 - 무토 가네요시
    무토 가네요시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하며 '시덴' 전투기를 조종해 "하늘의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구레 공습에서 전사했다.
  •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에이스 전투조종사 - 이와모토 데쓰조
    이와모토 데쓰조는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뛰어난 공중전 실력과 8,000시간 이상의 비행 시간을 기록한 숙련된 조종사였으나, 전후 공직 추방 후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항공기 격추로 죽은 비행사 - 이탈로 발보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국가 파시스트당의 주요 지도자, 로마 진군 주도 4인방 중 한 명, 이탈리아 왕립 공군 건설,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을 지냈다.
  • 항공기 격추로 죽은 비행사 - 무토 가네요시
    무토 가네요시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하며 '시덴' 전투기를 조종해 "하늘의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구레 공습에서 전사했다.
  •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사망자 -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출생하여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만 공격을 지휘한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며,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하고 해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사망자 - 고토 아리토모
    고토 아리토모는 일본 제국 해군의 수뢰전술 전문가로 함장 및 함대 사령관을 역임하며 제1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나, 사보섬 해전에서 아군 오인으로 전사 후 해군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군사적 능력과 아군 오인 공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니시자와 히로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히로요시 니시자와
본명니시자와 히로요시 (西澤 広義)
로마자 표기Nishizawa Hiroyoshi
별칭라바울의 마왕, 사쿠라 암살자, 최강 격추왕
출생1920년 1월 27일
출생지일본 나가노현 가미미노치군 오가와촌
사망1944년 10월 26일 (24세)
사망지필리핀 민도로섬 상공
신장180cm
군사 복무
소속대일본제국 해군
복무 기간1936년 - 1944년
최종 계급중위 (사후 추서)
참전제2차 세계 대전
뉴기니 전역
솔로몬 제도 전역
필리핀 전역 (1944) KIA
소속 부대지토세 해군 항공대
제4 해군 항공대
다이난 해군 항공대
제253 해군 항공대
제203 해군 항공대
묘소
묘소알려지지 않음

2. 초기 생애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1920년 1월 27일 나가노현의 산골 마을에서 미키지 니시자와와 미요시 니시자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케'' 양조장의 관리인이었다.[4] 1934년 미나미오가와 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오카야생사 공장에 취직했다.

1936년 6월,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 모집 광고를 보고 시험을 쳐서 요코스카 항공대의 을종 비행 예과 연습생 제7기(204명)에 합격, 해군 4등 항공병으로 임관했다. 1939년 3월 비행 훈련 과정을 71명 중 16등으로 졸업했다. 졸업후 오이타 해군 항공대에서 무토 킨요시 1공조에게서 95식 함상 전투기와 96식 함상 전투기를 배웠다. 전쟁 전 그는 오이타, 오무라, 스즈카 해군 항공대에서 복무했다. 1941년 10월, 그는 일등 비행병의 계급으로 치토세 항공대로 전출되었다.[4]

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쇼와 16년) 10월 1일 지토세 해군 항공대에 배속되어 태평양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을 받았다. 사이판, 루오토로 이동하여, 1942년(쇼와 17년) 2월, 트럭 섬에서 라바울로 진출했다. 2월 3일 밤, 초승달이라 시야가 좋지 않은 가운데, 96식 함상 전투기로 쌍발 비행정을 요격하여 처음으로 격추를 보고했다. 그러나 호주 공군의 기록에 따르면, 이 PBY 카탈리나 비행정은 피탄되면서도 기지로 귀환했다.

2월 10일, 제4항공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거듭하여 단독 격추 7기, 협동 격추 5기를 보고했다. 1942년 4월 1일, 타이난 해군 항공대(대남공)에 배속되었다. 제25항공전대가 신설되어 사공의 전투기대의 인원, 기재가 대남공에 흡수되었다. 1942년 5월 1일, 모레스비 공격에서 전투기 1기 격추를 보고했고, 7일에는 전투기 2기 격추를 보고했다. 그 후에도 전투를 거듭했다. 5월 27일, 모레스비 공격에서 전투기 1기 격추를 보고했다. 전후, 사카이 사부로는, 당시 오타 도시오와 니시자와 히로요시와 함께 대남공의 삼우(三羽烏)라고 불리며, 이 때 3명으로 중대에서 이탈하여, 무단으로 포트 모레스비의 세븐마일 비행장 상공에서 3명으로 3회 연속 편대 공중제비를 실시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귀환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 행동 조서에 의하면, 사카이가 주장하는 5월 27일은 모레스비 상공에서 교전 후, 11시 30분에 전기가 라에에 귀착하고 있으며, 사카이가 다른 저서에서 주장한 6월 25일에는 오타가 출격하지 않았다. 그 외의 날도 합하여 일본에서도 연합군에서도 사카이들이 별도 행동을 취한 기록은 없다. 1942년 8월 7일, 니시자와는 과달카날 섬 공격에 참가하여 격추 6기를 보고했다. 같은 전투에서 부상당한 사카이 사부로가 내지로 귀환했기 때문에 니시자와가 선임 하사관이 되었다. 1942년 10월 21일, 니시자와는 격추 30기를 전군에 포고되었다.

솔로몬 제도 상공을 비행하는 니시자와 히로요시의 영식 함상 전투기(A6M3)(1943년)


솔로몬 해역 상공을 비행하는 영식 전투기 22형. 니시자와 히로요시 탑승기라고 하는 문헌도 있지만 촬영자인 요시다 하지메에 의하면 누구인지 알 수 없다.(1943년 5월 7일)


1942년 11월 1일, 대남공은 제251해군항공대로 개칭되었다. 부대 손실이 커서 재건을 위해 도요하시로 귀환했고, 생환한 탑승자는 니시자와를 포함해 십수 명이었다. 1943년(쇼와 18년) 5월 10일, 라바울에 재진출했고, 니시자와는 오시부치 타카시 중위의 전투 교육을 맡게 되었다. 6월부터 러셀 섬 주변의 작전에 종사했지만, 6월 말에 연합군은 렌도바 섬에 상륙했기 때문에, 251공은 라바울, 부인의 기지에서 출격하여 소모되어 갔다. 8월 1일, 렌도바 섬 상공의 두 차례에 걸친 공중전에서 8기를 공동 격추를 보고했다. 또한, 니시자와를 소대장으로 하는 4기는 F4U 콜세어 4기와 교전, 니시자와 단독으로 3기 격추, 부하가 1기 격추를 보고하고 있다. 라바울 이임 시 오카모토 하루토시에게 "86기 격추"라고 말했다.

1943년 9월 1일, 253공으로 전속되었고, 같은 달, 항공 함대 사령 장관 구사카 지카시로부터 100기 격추 기념의 감사장과 "무공 발군"이라고 쓰인 노시 종이가 감긴 흰 칼집의 군도를 수여받는다. 10월, 내지 귀환했다.

1943년 11월 1일, 오이타 공에 배속되어 비행 학생 교관을 맡았다. 제자에게는 엄격했지만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

3. 1. 뉴기니 전역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쓰비시 A5M과 A6M 제로 전투기를 조종하며 뉴브리튼 섬의 바우나카나우 비행장, 뉴기니의 라에 등지에서 연합군 항공기와 교전했다.[1] 1942년 2월 3일, 니시자와는 PBY 카탈리나를 공격하여 첫 격추를 기록했으나, 실제로는 기지로 귀환했다.[1] 이후 P-39 에어라코브라와 F4F 와일드캣 등 다양한 기종을 격추하며 에이스 파일럿으로 성장했다.[1]

사카이 사부로, 오타 도시오와 함께 "청소 트리오"로 불린 니시자와는 1942년 5월 17일, 포트모르즈비 상공에서 동료들과 함께 곡예 비행을 선보여 적군을 도발하기도 했다.[5] 이들은 일본 편대가 귀환 비행을 위해 재편성되었을 때, 사카이는 나카지마에게 적기를 쫓아갈 것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이탈했고 몇 분 후, 사카이는 니시자와와 오타와 만나기 위해 다시 포트모르즈비 상공에 있었다. 세 사람은 이제 곡예 비행을 선보였고, 좁은 대형으로 세 번의 타이트 루프를 수행했다. 그 후, 환호하는 니시자와는 그 퍼포먼스를 반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로 다이빙하면서, 세 대의 제로기는 지상에서 어떤 대공 사격도 없이 세 번의 루프를 더 돌았다.[5] 이러한 행위는 적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상부로부터 "바보 같은 행동"이라며 비판받았다.[5]

1941년 10월 1일 지토세 해군 항공대에 배속된 이후, 1942년 2월 트럭 섬에서 라바울로 진출했다. 1942년 4월 1일, 타이난 해군 항공대(대남공)에 배속되었고,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섬 공격에 참가하여 6기를 격추 보고했다. 같은 전투에서 부상당한 사카이 사부로가 귀환하면서 니시자와가 선임 하사관이 되었다. 1942년 10월 21일, 니시자와는 격추 30기를 전군에 포고되었다.

1943년 5월 10일, 라바울에 재진출한 니시자와는 오시부치 타카시 중위의 전투 교육을 맡았다. 6월부터 러셀 섬 주변 작전에 종사했고, 8월 1일 렌도바 섬 상공에서 8기를 공동 격추를 보고했다. F4U 콜세어 4기와 교전, 니시자와 단독으로 3기 격추, 부하가 1기 격추를 보고하기도 했다.

니시자와 (서서, 왼쪽 첫 번째) 1942년 6월 라에에서 타이난 고쿠타이 소속 병사 조종사들의 단체 사진.


3. 2. 과달카날 전역

1942년 8월 초, 니시자와 히로요시가 소속된 항공대는 라바울로 이동하여 과달카날의 미군을 상대로 즉시 작전을 펼쳤다. 8월 7일의 첫 교전에서 니시자와는 6대의 F4F 와일드캣 격추를 주장했으나, 역사학자들은 2대 격추를 확인했다.

1942년 8월 8일, 니시자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사카이 사부로는 미 해군 항공모함 발진 폭격기와의 교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니시자와는 사카이가 보이지 않자 맹렬한 분노에 휩싸여 사카이의 흔적과 싸울 미국인을 찾아 그 지역을 수색했다. 결국 그는 진정하고 라쿠나이로 돌아왔고, 이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카이가 도착했다. 사카이는 머리에 총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한쪽 눈이 먼 상태로, 손상된 제로기를 타고 4시간 47분 동안 560해리(약 1,040km)를 비행하여 기지로 돌아왔다. 니시자와는 좌절된 걱정으로 대기 중인 운전자를 직접 끌어내고, 사카이를 가능한 한 빠르고 조심스럽게 외과 의사에게 직접 운전해 갔다. 사카이는 8월 12일에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과달카날에서의 장기간의 분쟁은 니시자와의 항공대(11월에 제251해군항공대로 개명)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미국의 항공기와 전술이 향상되었다. 사사이 준이치(27승)는 1942년 8월 26일 마리온 E. 칼 대위에게 격추되어 사망했고, 오타 토시오(34승)는 1942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1942년 10월 21일, 니시자와는 격추 30기를 전군에 포고되었다.

1942년 11월 1일, 대남공은 제251해군항공대로 개칭. 부대 손실이 커서 재건을 위해 도요하시로 귀환했다. 생환한 탑승자는 니시자와를 포함해 십수 명이었다.

3. 3. 일본 귀환 및 교관 활동

1943년 11월 중순, 제251항공대는 손실 보충을 위해 일본 도요하시 비행장으로 소환되었고, 니시자와 히로요시를 포함한 생존 조종사 10명은 모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니시자와는 이때까지 40회 이상의 격추 전과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니시자와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요코스카 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사카이 사부로를 방문하여 교관 임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대부분의 동료 조종사들이 연합군의 우세한 전력과 개선된 항공기 및 전술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회고하며, 전투 복귀를 갈망했다.

니시자와는 1943년 5월 라바울로 복귀했고, 6월에는 구사카 진이치 해군 중장으로부터 "''무공 탁월''" ("현저한 군사적 용맹에 대한")이라고 새겨진 일본도를 받았다. 이후 9월에 뉴브리튼섬의 제253항공대로 전출되었으며, 11월에는 준위로 진급하여 오이타 항공대에서 훈련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 2월, 쿠릴 열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제203항공대에 합류했다.

3. 4. 필리핀 전역

10월에 203 비행대는 루손섬으로 이동했다. 니시자와와 다른 4명은 세부 섬의 더 작은 비행장으로 파견되었다.

1944년 10월 25일, 니시자와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상륙을 보호하던 클리프턴 스프라그 제독의 "태피 3" 기동 부대를 목표로 한 최초의 주요 ''가미카제'' 공격을 엄호하는 4대의 A6M5 전투기 편대를 이끌었다.[6] 이 호위 임무에서 니시자와는 그루먼 F6F 헬캣 전투기 2대를 격추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공중전 승리였다.[6]

일본 미쓰비시 A6M 가미카제 비행기가 1944년 10월 25일 USS ''수와니''를 공격했다.


250px USS ''화이트 플레인스''에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 이 비행기는 배를 빗나갔다.]]

thumb를 공격하여 1944년 10월 25일에 거대한 화구를 일으켰다.]]

USS ''수와니''가 1944년 10월 26일에 공격받았다.


thumb

니시자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환상을 보았다. 귀환 후, 나카지마 사령관에게 출격 성공을 보고하고 다음 날 ''특공대'' ''가미카제'' 임무 참가를 자원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니시자와의 A6M5 제로기는 250kg 폭탄으로 무장되었고 해군 항공 조종사 1등병 가쓰마타 도미사쿠가 조종했다.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였지만, 그는 수리가오 해협에서 호위항공모함 USS ''수와니''에 돌진했다. 가쓰마타는 ''수와니''의 비행 갑판에 추락하여 막 회수된 어뢰 폭격기와 충돌했다. 두 대의 비행기는 충돌과 동시에 폭발했고, 비행 갑판에 있던 다른 9대의 비행기도 폭발했다. 배가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몇 시간 동안 불탔고 승무원 85명이 사망하고 58명이 실종되었으며 102명이 부상당했다.

1944년 10월 26일, 니시자와는 자신의 제로기를 세부 기지의 특별 공격대에 넘겨주고, 새로운 비행기 수령을 위해 마바라카트 기지로 수송기에 편승하여 이동했다. 그 도중, 수송기가 민도로 섬 북단 상공에 도달했을 때, 해럴드 P. 뉴웰 중위의 그루먼F6F의 공격을 받고 격추되어 니시자와는 전사했다. 뉴웰 중위는 백식중폭격기 (육군기)였다고 하나, 제1021해군항공대의 고노 미쓰아게에 따르면 일식육공이 아니었을까 하며, 영식 수송기였다는 설도 있다.

1944년 3월 1일, 203공(203空)에 배속되었다. 7월 10일, 전투 제303비행대에 소속되어 북 지시마 방면의 방어를 맡았다. 베테랑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경험이 부족한 자들의 지휘를 걱정하여 군기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1944년 (쇼와 19년) 9월 하순, 지바현 모바라 기지의 스미다 가즈오 비행 조장의 방에 동남 방면의 격전을 경험한 에이스 파일럿인 니시자와, 이와모토 테쓰조, 오다 노부요시, 오제키 고지, 사이토 사부로 등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이때 니시자와는 격추수를 120기 이상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와모토 테쓰조가 "적이 올 때는 물러났다가 적이 물러갈 때 격추하는 거야. 즉, 상공에서 대기하다가 이탈하여 돌아가려는 녀석을 일격필살하는 거지. 이미 고향 생각에 젖은 적은 반격할 의지가 없으니 쉽게 격추할 수 있어. 한 번의 공중전에서 다섯 대까지 격추한 적이 있지",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승산이 없을 때는 눈을 감고 정면에서 기총을 난사하며 조종간을 마구 돌리면서 돌입하다가 이탈하는 경우도 있어"라고 말하자, 니시자와는 "중간에 돌아가는 녀석은 피탄했거나 겁에 질린 녀석이겠지. 그러면 (다른 기체와의) 협동 격추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했다.

1944년 (쇼와 19년) 10월, 첩호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진출했다.

3. 4. 1. 가미카제 특공대 호위

1944년 10월 25일, 니시자와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클리프턴 스프라그 제독의 "태피 3" 기동 부대를 목표로 한 최초의 주요 ''가미카제'' 공격을 엄호하는 4대의 A6M5 전투기 편대를 이끌었다.[6] 이 호위 임무에서 니시자와는 그루먼 F6F 헬캣 전투기 2대를 격추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공중전 승리였다.[6]

250px USS ''화이트 플레인스''에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 이 비행기는 배를 빗나갔다.]]

thumb를 공격하여 1944년 10월 25일에 거대한 화구를 일으켰다.]]

thumb

니시자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환상을 보았다. 귀환 후, 나카지마 사령관에게 출격 성공을 보고하고 다음 날 ''특공대'' ''가미카제'' 임무 참가를 자원했으나 거절당했다.

3. 4. 2. 죽음

1944년 10월 26일,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필리핀 민도로 섬 상공에서 미 해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나카지마 Ki-49 '돈류'("헬렌") 수송기에 탑승하여 필리핀 마발라캇의 클라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 와스프(CV-18) 소속 VF-14 비행대의 F6F 헬캣 2대의 공격을 받고 격추된 것이다. 이 공격은 소위 해럴드 P. 뉴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7]

니시자와의 죽음은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에 의해 공식 발표되었고, 그는 사후 소위로 추서되었다. 그의 사후 법명은 '부카이인 고한 기코 교시'로, '군대의 바다에서 모든 뛰어난 조종사를 반영하는 존경받는 불교도'를 의미한다. 그의 장례식은 1947년 12월 2일에 거행되었으나, 유해는 수습되지 못했다.

4. 사후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전사 후, 일본군에서 그의 공적을 기려 전군에 포고되었다. 종전 시 연합 함대 고시 172호에서 "전투기대의 중견 간부로서 시종 용전 감투하여 적기에 대한 협동 전과 429기 격추 49기 격파 내 단독 36기 격추 2기 격파의 희유한 혁혁한 무훈을 받들었다"라고 발표되었다.

전후, 태평양 전쟁에서 미일 양국을 통틀어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 중 한 명으로 알려졌으며, 미국국방부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스기타 쇼이치와 함께 그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7] 그는 180cm 이상의 큰 키에[7] 마른 체형이었고, 항상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어 예과 연습생 시절에는 "푸른 호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전후에 쓰인 전기에서는 "라바울의 마왕"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관점에서는 니시자와 히로요시를 침략 전쟁과 전쟁범죄에 가담한 인물로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특히,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 호위 임무는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를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여겨진다.

5.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A6M Zero-sen Aces 1940-42 Osprey Publishing
[2] 서적 Aces Book Sales, Incorporated
[3]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Aces 1937–45 Osprey Publishing
[4] 서적 A6M Zero-sen Aces 1940-42 Osprey Publishing
[5] 웹사이트 Hiroyoshi Nishizawa: Japan's World War II Ace of Aces. http://www.historyne[...] 2006-06-12
[6] 웹사이트 Hiroyoshi Nishizawa http://acesofww2.com[...]
[7] 문서 同期生の伊沢泰助によれば5尺9寸ほど(178.8cm)だったという。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