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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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기이치는 1864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군인, 정치가이다. 육군 사관학교와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육군 대신과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며 중국에서의 일본 이익을 추구했으나, 장쭤린 폭살 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인해 쇼와 천황의 질책을 받고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1929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정책은 일본의 군국주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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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카 기이치 - 다나카 기이치 내각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다나카 기이치가 이끌었던 일본 내각으로, 입헌정우회 중심으로 쇼와 금융 공황 대처, 산업 입국, 반공 정책 강화, 대륙 정책 추진을 했으나, 장쭤린 폭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 다나카 기이치 - 3·15 사건
1928년 3월 15일 일본 제국에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일본공산당 등 공산주의 단체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탄압하여 1,600여 명을 체포한 사건으로, 노동 운동 탄압 및 치안유지법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 나가토국 사람 -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슈번 출신의 사무라이 아들로, 일본 육군의 창설과 근대화에 기여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지휘했으며, 군국주의적 가치 강조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 나가토국 사람 -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막말 시대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존왕양이 운동에 영향을 주고 서양 문물 도입을 주장했으며, 마쓰시타무라 숙을 통해 메이지 유신 주역들을 양성했으나, 정한론 등 일부 사상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 일본의 척무대신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일본의 척무대신 - 우가키 가즈시게
우가키 가즈시게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육군대신과 조선총독을 역임했으며,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수상 취임에 실패하고 외무대신으로서 중일 전쟁 종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다나카 기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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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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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나카 기이치 |
출생일 | 1864년 6월 22일 |
출생지 | 야마구치현 하기시 (구 조슈번) |
사망일 | 1929년 9월 29일 |
사망지 | 도쿄 |
묘지 | 도쿄도 후추시 다마 령원 |
경력 | |
소속 정당 | 입헌정우회 |
출신 학교 |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
배우자 | 다나카 스에 (1874–1937) |
서명 | TanakaG kao.png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74년–1924년 |
계급 | 대장 |
정치 경력 | |
작위 | 남작 |
수상 직함 | 정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공3급 금치훈장 |
총리 임기 시작 | 1927년 4월 20일 |
총리 임기 종료 | 1929년 7월 2일 |
이전 수상 | 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음 수상 | 하마구치 오사치 |
외무대신 임기 시작 | 1927년 4월 20일 |
외무대신 임기 종료 | 1929년 7월 2일 |
이전 외무대신 | 시데하라 기주로 |
다음 외무대신 | 시데하라 기주로 |
식민대신 임기 시작 | 1929년 6월 10일 |
식민대신 임기 종료 | 1929년 7월 2일 |
이전 식민대신 | 신설 |
다음 식민대신 | 마쓰다 겐지 |
내무대신 임기 시작 | 1928년 5월 4일 |
내무대신 임기 종료 | 1928년 5월 23일 |
이전 내무대신 | 스즈키 기사부로 |
다음 내무대신 | 모치즈키 게이스케 |
육군대신 임기 시작 (1) | 1918년 9월 20일 |
육군대신 임기 종료 (1) | 1921년 6월 9일 |
육군대신 임기 시작 (2) | 1923년 9월 2일 |
육군대신 임기 종료 (2) | 1924년 1월 7일 |
이전 육군대신 (1) | 오시마 겐이치 |
다음 육군대신 (1) | 야마나시 한조 |
이전 육군대신 (2) | 야마나시 한조 |
다음 육군대신 (2) | 우가키 가즈시게 |
기타 정보 | |
가족 | 사위: 오자와 타로 손자: 오자와 가쓰스케 |
자녀 | 다나카 다쓰오 (장남) |
2. 생애
1864년 나가토국(현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사족 반란인 하기의 난에 뛰어들었다가 반란 실패 후 너무 어린 나이라 훈방 조치되었으며,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8기), 일본 육군대학교(8기)를 졸업하고 청일전쟁에 참전했다. 종전 후엔 러시아에 유학했다가 1904년 러일 전쟁 때 만주군 참모로서 고다마 겐타로를 보필했다.
그 후 참모 차장, 하라 다카시 내각과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을 맡았다. 하라 다카시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오른 뒤, 남작 작위를 받고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22년 중국 상하이 방문 중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에 의해 암살당할 뻔했다.[62] 이후 정계에 뛰어들어 1925년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뒤를 이어 정우회 총재가 되었다.
1927년 3월,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하에 쇼와 금융 공황이 터지면서 와카쓰키 내각은 같은 해 4월에 총사직하였다. 이에 입헌정우회 총재 다나카 기이치가 내각을 조성하였다. 그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재정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다카하시는 일본 전국에 지급 유예령을 실시해 금융 공황을 진정시켰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시데하라 기주로 등에 의한 협조 외교 방침을 전환해 적극 외교로 노선을 변경하였고, 중국에서의 이익과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적인 정책을 폈다.
1928년 중국에서 장쭤린 폭살 사건[63]이 일어나자 국제적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용의자를 군법 회의를 통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육군의 강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1929년에 총사직하였다. 다나카는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1929년 9월 29일 오전, 급성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그가 남긴 중국에서의 팽창 정책을 실시할 것을 천황에게 권고했다는 다나카 상주문은 현재까지 진위 문제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1864년 나가토국(현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사족 반란인 하기의 난에 가담했다가 나이가 어려 훈방 조치되었다.[62] 어릴 적부터 정치에 뜻을 두어 촌사무소 직원과 초등학교 교원으로 일하다가 20세에 육군 교도단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8기)와 일본 육군대학교(8기)를 졸업하고 청일 전쟁에 참전했다.종전 후에는 러시아에 무관으로 파견되어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근무했다. 이때 일본 제국 해군의 히로세 다케오와 친분을 쌓았으며, 러시아 정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러시아를 연구했다.[62] 러일 전쟁 발발 당시에는 육군 내에서 손꼽히는 러시아 전문가로서 만주에서 고다마 겐타로 장군의 보좌관으로 복무했다.

1906년에는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장군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국방 계획 초안을 작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 기본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금계훈장(3등)을 받았다.[14] 1910년에는 재향군인회를 설립했고, 1911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성 군사국장이 되어 상비군 병력을 2개 보병 사단으로 증강할 것을 권고했다. 1918년 9월 보물훈장(1등)을 받았다.
1918년 9월부터 1921년 6월까지 하라 다카시 내각총리대신의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했다. 1920년 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욱일대수장(1등)을 받고, 화족 귀족 제도의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협심증 발작으로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별장에서 요양 생활을 하였다.
1922년 중국 상하이 방문 중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에 의해 암살당할 뻔했다.[62]
2. 2. 정계 입문과 총리 취임
1925년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뒤를 이어 정우회 총재가 되었다.1927년 3월,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하에서 쇼와 금융 공황이 터지면서 와카쓰키 내각은 같은 해 4월에 총사직하였다. 이에 입헌 정우회 총재 다나카 기이치가 내각을 조성하였다. 그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재정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다카하시는 일본 전국에 지급 유예령을 실시해 금융 공황을 진정시켰다.[62]
2. 3.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정책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1927년 4월에 성립되어, 쇼와 금융 공황 속에서 적극적인 내정 및 외교 정책을 펼쳤다.다나카 기이치는 내무대신, 외무대신, 식민 대신을 겸임하며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1] 국내적으로는 좌익 및 공산주의자 탄압에 힘썼는데, 1928년 3·15 사건과 1929년 4·19 사건에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1]
대외적으로는 시데하라 기주로의 협조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중국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강경 외교를 추진했다. 1927년과 1928년, 세 차례에 걸쳐 장제스의 북벌을 저지하기 위해 산둥 성에 군대를 파견, 제남 사건을 일으켰다.[1] 또한, 만주와 내몽골 분리 정책(満蒙分離政策|만몽 분리 정책일본어)을 추진하여 이 지역을 중국 본토와 분리하려 시도했다.[1]
1928년 2월에는 제1회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다나카 기이치는 자신의 주장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총리 겸 정우회 총재로서의 포부를 레코드에 녹음하여 전국 관계자에게 배포했다.[21]
2. 4. 장쭤린 폭살 사건과 몰락
1928년 중국에서 장쭤린 폭살 사건[63]이 발생하자, 다나카 기이치는 국제적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용의자를 군법 회의를 통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육군의 강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63]사건 발생 1년 후인 1929년 6월 27일, 다나카는 최종 보고에서 "관동군은 장쭤린 폭살 사건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쇼와 천황에게 보고했다. 이는 진상 규명과 엄정한 처벌에 대한 육군의 반발과 일본의 불명예를 우려한 각료들의 반대 때문이었다.[25][26]
이 보고에 천황은 "네가 처음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27]라며 다나카를 추궁했다. 다나카는 자신의 행위를 천황에게 경위를 보고하는 "상문(上聞)"으로 생각했지만, 천황은 천황에게 처리를 진언하여 재가를 구하는 "상주(上奏)"로 받아들였다.[26]
이후 천황은 스즈키 간타로 시종 장관에게 "다나카 총리의 말은 전혀 알 수 없다. 다시 듣는 것은 내가 싫다"는 뜻을 전했다.[27] 이를 전해 들은 다나카는 1929년 7월 2일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다나카 기이치는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1929년 9월 29일 오전에 급성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3. 사망
1929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9월 29일 오전, 급성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30]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천황의 불쾌감을 산 것이 협심증 병력이 있던 다나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퇴임 후 다나카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우울해했으며, 귀족원 의원 당선 축하회에 주빈으로 참석했지만 보기에도 기운이 없었다고 한다.
다나카 기이치일본어가 사망한 곳이 별채였기 때문에, 첩의 집에서 복상사한 것이 아니냐는 억측이 있었다. 『다나카 기이치 전기』에 따르면 이 여성은 입적은 하지 않았지만 다나카를 오랫동안 지지해 온 여성이라고 한다. 이와는 별개로 자살설도 있다.[30] 마쓰모토 세이초는 『쇼와사 발굴』에서 나카지마 카메지로의 "다나카 기이치 대장의 할복" (『문예춘추 임시 증간 쇼와의 35대 사건』, 1955년 수록)을 인용하여, 다나카의 죽음에 대해 일부에서 복상사설, 나아가 자살설이 유포되고 있음을 소개하며, "다나카의 죽음이 발표대로 협심증 발작이었는지, 또는 자살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30]
다나카의 죽음으로 막말 시기부터 세력을 유지해 온 조슈벌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졌다. 묘소는 다마 영원이다.
4. 평가와 유산
다나카 기이치의 적극 외교는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 군국주의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3] 그의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일본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듯 보였으나, 장기적으로는 동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국제적인 고립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
한편, 그가 천황에게 제출했다는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은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다.[3] 1929년 중화민국은 다나카 기이치가 만주, 몽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것을 옹호하는 "다나카 메모리얼 제국주의 정복 계획"을 작성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1927년에 이 계획을 천황에게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계획은 전쟁 당시 선전 영화 시리즈인 ''우리가 싸우는 이유''에서 사실로 제시되었으며, 이 계획은 동아시아 정복 이후 미국 정복을 구상했다고 주장했다.[3] 1950년대 중반에 출판된 회고록에서 일본계 대만 사업가인 차이즈칸은 1928년 6월 20일 밤, 다나카에 반대하는 일본의 여러 주요 전전(戰前) 정치인 및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은밀한 작전을 통해 황실 도서관에서 "계획서"를 직접 복사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문서를 위조된 것으로 간주한다.[4]
5. 가족 및 친족
구 분 | 내용 |
---|---|
부친 | 하기번 무사 다나카 신스케[33] |
모친 | (혼족) 미요[33] |
부인 | 오오츠키 스텐 - 육군 군인 오오츠키 나오시의 여섯째 딸 (1874년 ~ 1937년). 1893년에 결혼.[33] |
장남 | 다나카 다쓰오 - 귀족원 의원, 야마구치현 지사, 중의원 의원, 제1차 기시 내각의 관방 부장관, 제2차 사토 내각의 총리부 총무장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통산상, 스즈키 젠코 내각의 문상 등을 역임.[33] |
장녀 | 다나카 마사코 - 육군 중장 하시모토 가쓰타로의 양녀[33] |
혼외자 | 데구치 후미 - 군마현 후지오카정의 민물고기 가게 "후지카와"의 딸 (1898년 ~ ?). 고반초의 별저택에 살면서 1남 4녀를 낳음.[33] |
3녀 | 다나카 도메코[33] |
3녀 사위 | 오자와 타로 - 타이완 총독부 관료, 전 야마구치현 지사, 중의원 의원, 참의원 의원[33] |
외손 장남 | 오자와 도시로[33] |
외손 차남 | 오자와 가쓰스케 - 중의원 의원, 변호사. 야마구치현 변호사 회장, 재판관 소추 위원회 위원, 재판관 탄핵 재판소 재판원[33] |
외손 장녀 | 오자와 준코 - 나고야 고등재판소 판사・우노 에이이치로의 아내[33] |
외손 차녀 | 오자와 나츠코 - 와이·데이·케이 회장・사카모토 노리유키의 아내[33] |
외손 3녀 | 오자와 아키코 - 센켄 신문사・이데 시게유키의 아내[33] |
외손 4녀 | 오자와 유키코 - 쇼치쿠・야마가타 히로시의 아내[33] |
6. 서훈
다나카 기이치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주요 훈장으로는 금계훈장, 보관훈장, 욱일대수장 등이 있다.
훈장 | 등급 | 수여일 |
---|---|---|
금계훈장 | 3등급 | 1906년[5] |
보관훈장 | 대수 | 1918년[6] |
욱일대수장 | 1920년[7] | |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 1929년[8] |
외국 훈장으로는 불가리아의 성 알렉산더 훈장, 중국의 호랑이 줄무늬 훈장, 폴란드의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등이 있다.
국가 | 훈장 | 등급 | 수여일 |
---|---|---|---|
불가리아 | 성 알렉산더 훈장 | 2등급 | 1914년[9] |
중국 | 호랑이 줄무늬 훈장 | 2등급 | 1918년[10] |
폴란드 |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 대십자 | 1927년[11] |
덴마크 | 다네브로그 훈장 | 1등급 | 1929년[12] |
영국 | 성 미카엘 · 성 조지 훈장 | 기사단장 (KCMG) | 1929년[13] |
영국 | 대영 제국 훈장 | 기사단 십자 대십자장 (GBE)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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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828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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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644号「叙任及辞令」
19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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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1695号「叙任及辞令」
1918-03-3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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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828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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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2467号「叙任及辞令」
19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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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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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2431号「叙任及辞令」
1920-09-08
[55]
간행물
官報 第2903号「叙任及辞令」
1922-04-10
[56]
간행물
官報 第2858号・付録「辞令」
1922-02-14
[57]
간행물
官報 第1499号・付録「辞令二」
1931-12-28
[58]
간행물
官報 第644号「叙任及辞令」
1914-09-22
[59]
간행물
官報 第1695号「叙任及辞令」
1918-03-30
[60]
간행물
官報 第235号「叙任及辞令」
1927-10-08
[61]
간행물
官報 第777号「叙任及辞令」
1929-08-01
[62]
뉴스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29>김익상 의거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11-14
[63]
문서
1928년, 친일적 성향을 띠었던 만주 지역의 군벌이자 정치인 [[장쭤린]]을 폭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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