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아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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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슈번 출신의 사무라이 아들로, 메이지 시대 일본 육군의 창설과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반막부 사상을 배우고, 보신 전쟁에서 조슈번 군대를 이끌었다. 메이지 유신 후 유럽에 파견되어 프로이센의 군사 제도를 연구, 육군경, 참모 총장 등을 역임하며 일본 제국 육군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군인칙유를 통해 군국주의적 가치를 강조하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내무대신과 총리를 역임하며 지방 행정 시스템을 정비하고, 교육칙어 제정에 관여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야마가타는 원로로서도 일본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한일 병합과 식민 통치에 대한 책임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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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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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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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출생일 | 1838년 6월 14일 (천보 9년 윤4월 22일) |
출생지 | 일본 나가토국 아부군 가와시마 마을 (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 가와시마) |
사망일 | 1922년 2월 1일 |
사망지 | 일본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오다와라정(현재의 오다와라시) |
소속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야마가타 도모코 |
파트너 | 요시다 사다코 |
자녀 | 후나코시 마쓰코 (딸) |
친척 | 야마가타 이사부로 (조카) |
출신 학교 | 쇼카손주쿠 |
직업 | 무사 ( 조슈번 번사), 육군 군인 |
봉사 기간 | 1868년–1905년 |
계급 | 원수 육군대장 |
서훈 | 종1위 [[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svg|38px]] 대훈위국화장경식 [[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svg|38px]] 대훈위국화대수장 [[파일:JPN Kinshi-kunsho 1Class BAR.svg|38px]] 공일급 금치훈장 [[파일:JPN Kinshi-kunsho 2Class BAR.svg|38px]] 공이급 금치훈장 [[파일:JPN Toka-sho BAR.svg|38px]]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38px]] 훈1등욱일대수장 [[파일:元帥徽章.svg|20px]] [[파일:帝國陸軍の階級―肩章―大将.svg|38px]] 원수육군대장 공작 |
친족 (정치가) | 후나코시 미쓰노조 (사위), 야마가타 이사부로 (양자, 조카), 야마가타 아리미치 (양손, 종손), 야마가타 아리미쓰 (양손, 외손), 야마가타 아리노부 (양증손, 증질손) |
종군 훈장 | [[파일:World War I Victory Medal ribbon.svg|x20px|link=일본의 기념장|전첩기장]] |
주요 전투 | |
전투 | 보신 전쟁 아이즈 전투 하치오키 전투 호쿠에쓰 전투 세이난 전쟁 구마모토 성 공방전 다바루자카 전투 시로야마 전투 청일 전쟁 주롄청 전투 평양 전투 러일 전쟁 |
수상 경력 |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889년 12월 24일 – 1891년 5월 6일 1898년 11월 8일 – 1900년 10월 19일 |
소속 내각 | 제1차 야마가타 내각 제2차 야마가타 내각 |
이전 수상 | 구로다 기요타카 오쿠마 시게노부 |
다음 수상 |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
천황 | 메이지 천황 |
주요 관직 | |
직책 | 추밀원 의장 |
재임 기간 | 1893년 3월 11일 – 1893년 12월 12일 1905년 12월 21일 – 1909년 6월 14일 1909년 11월 17일 – 1922년 2월 1일 |
이전 의장 | 오키 다카토 이토 히로부미 |
다음 의장 | 구로다 기요타카 이토 히로부미 기요우라 게이고 |
천황 |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
기타 관직 | |
직책 | 사법대신 |
재임 기간 | 1892년 8월 8일 - 1893년 3월 11일 |
소속 내각 | 제2차 이토 내각 |
직책 | 내무대신 |
재임 기간 | 1885년 12월 22일 - 1890년 5월 17일 |
소속 내각 | 제1차 이토 내각 구로다 내각 제1차 야마가타 내각 |
직책 | 내무경 |
재임 기간 | 1883년 12월 12일 - 1885년 12월 22일 |
직책 | 육군경 |
재임 기간 | 1873년 6월 8일 - 1873년 7월 2일 1874년 6월 30일 - 1878년 11월 8일 |
직책 | 귀족원 의원 |
재임 기간 | 1895년 8월 5일 - 1922년 2월 1일 |
칭호 및 훈장 | |
칭호 | 종1위, 원수, 공작 |
훈장 | 공1급 금치훈장 공2급 금치훈장 대훈위국화대수장 대훈위국화장경식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훈1등욱일대수장 메리트 훈장 회원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대십자 기사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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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이력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838년 6월 14일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하급 무사 야마가타 아리토시의 아들로 태어났다.[6] 어린 시절 이름은 다쓰노스케였으며, 이후 고스케, 쿄스케로 불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아리토모로 개명했다.[7]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인 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하며,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려는 지하 운동에 참여했다. 조슈번이 서구식으로 창설한 준군사 조직인 기헤이타이의 지휘관으로 활동했다.[6]
1867년과 1868년의 보신 전쟁에서 참모 장교로 활약한 후, 1869년 사이고 쓰구미치와 함께 유럽의 군사 제도를 시찰하러 파견되었다.[8] 그는 프로이센의 군사 제도에 큰 영향을 받아 귀국 후 일본 제국 육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873년에는 육군성 대신이 되어 징병 제도를 도입하고, 프로이센 군대를 모델로 한 근대적인 육군을 육성했다.[8]
2. 1. 출생과 성장
1838년 6월 14일,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 인근에서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6] 그의 아버지는 전시에는 무기를 운반하는 하급 사무라이였고, 평시에는 마을 관리 사무소의 하급 관리였다.[6] 그는 엄격한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6] 15세에 성인식(겐푸쿠)을 치르고 조슈번의 하급 관리로 일을 시작했다.[6]2. 2. 쇼카손주쿠 수학과 존왕양이 운동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사립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쇼카손주쿠일본어)에서 교육을 받으며 반막부(反幕部일본어) 의식을 길렀다.[15] 조슈번 군대인 기헤이타이( 奇兵隊|기헤이타이일본어)에 가담하여 막부 타도 운동을 펼쳤다. 보신 전쟁에는 조슈번 군대를 이끌고 막부 세력과 싸웠다.안정 5년(1858년) 7월, 야마가타를 포함한 6명의 젊은이가 시세를 배우기 위해 교토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 4명은 스기야마와 이토 슌스케(후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마츠시타무라 저택 제자들이었고, 야마가타가 선택된 것은 스기야마가 요시다 쇼인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교토에서 존왕양이파 거물이었던 쿠사카 겐즈이・료가와 세이간・우메다 운힌 등에게 감화되어 존황양이 사상을 품게 되었고, 10월 귀환 후 쿠사카의 소개로 요시다 쇼인의 마츠시타무라 저택에 입학했다. 그러나 다음 달 쇼인은 징계를 받게 되었고, 곧 감옥에 갇혀 사형당했다. 야마가타는 쇼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며, 생애에 걸쳐 "쇼인 선생 문하생"이라고 자칭했다. 입학 직후였던 야마가타는 죄를 묻지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을 투옥시키지 않도록 번의 중직자에게 직접 간청하기도 했다.
만엔 원년(1860년)에는 사쓰마 번 동향을 살피기 위해 서장 전달 역할로 사쓰마에 잠입했으나, 경계가 삼엄했고 사쓰마 사투리도 이해하지 못해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분큐 3년(1863년) 1월 3일, "존황양이"의 정의를 숙지하고 있다고 칭찬받아 종신 사분으로 승격되었다. 2월에 다시 교토로 향하여, 체류 중 다카스기 신사쿠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이후 류마티즘을 앓아 요양했으나, 9월경부터는 다카스기가 창설한 기병대에 관여하게 되었고, 12월 23일 3대 총관 아카네 무토 밑에서 부관에 해당하는 기병대 군감과 다다노우라 지영 사령에 취임하여, 병사 훈련과 다다노우라 경비에 전념했다.
2. 3. 보신 전쟁
조슈번 군대를 이끌고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막부 세력과 싸웠다. 북륙·월후 방면으로 출진하여 신정부군의 참모가 되었다. 에치고 방면에서 나가오카번 가로 가와이 쓰기노스케 등과 싸웠다.[1]3. 군 경력
일본제국 육군 창설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메이지 유신의 동지였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육군을 총지휘했다. 반란이 실패한 후 자결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목을 직접 들고 염불을 외웠다고 한다.
1877년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 반란에 맞서 근대화된 제국 육군을 이끌었다. 사이고의 참수된 머리가 야마가타에게 오자, 머리를 씻게 한 후 팔에 안고 전사한 영웅을 위한 명상을 읊었다.[8]
1882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황군' 복무 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했다. 이는 군국주의적이고 충성을 강조한 것으로, 1945년 해산될 때까지 일본 육군과 해군의 도덕적 핵심이었다.[8]
청일 전쟁 발발 당시 육군대신으로 전쟁을 지도했고, 러일 전쟁 때는 제1군 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맡아 도쿄에서 군을 지휘했다. 1898년 원수 계급으로 승진했다.[8]
육군대신으로서 야마가타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다른 군 장교들의 정치적 권력의 주요 원천이 된 일본제국 육군참모본부 설립을 추진했다. 1878년~1882년, 1884년~1885년, 1904년~1905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8]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예비적 국가 방위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일본 ''북진론'' 정책의 창시자였다.[8]
도바·후시미 전투 후, 기병대 본대에도 출진 명령이 내려져, 야마가타는 참모 후쿠다 교헤이와 함께 3월에 오사카를 거쳐 에도로 향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재회하여 의기투합한 후, 윤4월에 오사카로 돌아와 기도 다카요시와 이야기하여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호쿠리쿠 지방·에치고 방면 출진을 명령받아 무진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무진전쟁 (호쿠에쓰 전쟁·아이즈 전쟁)에서 구로다 기요타카와 함께 호쿠리쿠도 진무총독·아이즈 정토총독 다카쿠라 나가요시의 참모가 되어 기병대를 포함한 여러 번의 병사를 지휘했다. 윤4월 19일 다카다에서 군을 집결시켜 둘로 나누어 북상, 야마가타와 구로다는 해안을 따라 진행하는 군감 미요시 시게오미 지휘 본대와 동행, 군감 이와무라 다카토시가 이끄는 별동대는 내륙으로 진군했다. 본대는 4월 27일 구지라나미 전쟁에서 구와나번 병사에게 승리하고, 4월 28일 가시와자키를 점령했다. 별동대도 오지야를 점령했다.
나가오카번 가로 가와이 쓰기노스케와 아이즈 군의 저항에 부딪혀, 5월 13일 아사히야마 전투에서 친구 도키야마 나오하치가 전사했다. 5월 19일 미요시 시게오미의 나가오카성 함락으로 신정부 측이 유리해졌지만, 7월 25일 가와이가 나가오카성을 기습 탈환(핫초오키 전투), 야마가타는 사이온지 긴모치 총독과 함께 성 밖으로 도망쳤다.
7월 29일 나가오카성을 다시 함락시키고, 9월 18일부터 아이즈성 농성전에서 포위군에 가담, 9월 22일 아이즈번 항복에 입회한 후 에도로 가서 조슈번으로 돌아왔다. 에치고 평정이라는 전과는 올렸지만, 사쓰마, 조슈 병사 간 대립이 계속되어 조슈번 병사의 구로다 참모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야마가타는 한때 참모를 사직했지만, 다시 참모로 임명되었다. 이 문제는 사이고가 현지에 가서 위로받은 야마가타가 사쓰마와 조슈에 배려한 것으로 해결되었다.
메이지 2년(1869년), 유신의 공으로 상전록 600석을 받았다.[17]
3. 1. 유럽 시찰과 군제 개혁
1869년 사이고 주도와 함께 유럽에 파견되어 서구식 군제를 연구했다.[15] 야마가타는 당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 공업 발전에 감명을 받고 일본을 프로이센과 같은 공업 군사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15] 1870년 귀국 후, 일본의 국군 조직을 요청받고, 1873년 육군성 대신이 되었다. 1873년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군 근대화를 추진하였다.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사이고 주도와 함께 서구식 군대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에 파견되었다. 야마가타는 당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 공업 발전에 감명받고 농업국이었던 일본을 프로이센과 같은 공업 군사 국가로 탈바꿈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일본에 돌아와서 육군경에 임명되어 프로이센을 본뜬 군 근대화를 추진하여 1873년에 징병제가 도입되었다.
메이지 2년 3월, 기도 다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요청했던 해외 유학 허가가 나와, 6월 28일에 사이고 주도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를 순방하였다. 이듬해 메이지 3년 미국 경유로 8월 2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병부성의 직책에 취임하도록 권유받았으나, 처음에는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는 야마가타의 친구이자 병부대부였던 마에하라 카즈마사가 직전에 기도와 대립하여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으로, 그를 배려한 것이었다. 8월 28일 야마가타는 병부소부에 임명되었고, 마에하라가 곧 사직하면서 사실상 병부성 차관이 되었다.
야마가타는 각 번에 분산되어 있는 군사력을 중앙에 통합하기 위해, 사쓰마로 돌아가 있던 사이고를 정부로 불러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7월 14일, 폐번치현의 칙령이 반포된 날 병부대부로 승진하여, 경이 없는 병부성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메이지 5년 2월 27일, 병부성은 육군성·해군성으로 분리되었고, 야마가타는 육군대부가 되었다. 메이지 6년 1월 2진대 증설과 함께, 도쿄군관에서 전국 징병의 전 단계로서 신병 모집이 이루어졌다.
3. 2. 일본 제국 육군 창설
187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독일 제국을 본뜬 일본제국 육군참모본부를 창설하고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8] 그는 1878년~1882년, 1884년~1885년, 그리고 1904년~1905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며 일본 제국 육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육군대신으로서 야마가타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다른 군 장교들의 정치적 권력의 주요 원천이 된 일본제국 육군참모본부의 설립을 추진했다.
1882년에는 메이지 천황 이름으로 '황군'의 복무 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하였다. 이는 매우 군국주의적이고 충성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1945년 해산될 때까지 일본 육군과 해군의 도덕적 핵심으로 여겨졌다.[8]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사적 유산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지속되었다.
3. 3. 세이난 전쟁
메이지 유신 당시 동지였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육군경 겸 참군으로서 현장 총지휘를 맡았다. 해군 측 참군으로 가와무라 스미요시도 취임했지만, 육군 중심의 정부군 전략은 야마가타가 담당했다. 훈련도와 사기에서 우수한 사쓰마군에 맞서 장비, 물량, 병력으로 대항하여 진압했다. 또한 전신을 활용하여 분산된 군과 연락을 취하고, 정부는 해군을 사용하여 사쓰마군 후방의 가고시마를 습격하여 제해권을 장악했다.[18]1877년 2월 사쓰마군 거병 전, 야마가타는 가고시마 정세를 경계하여 오야마 이와오와 다니 다테키에게 엄계태세를 명령했다. 2월 5일 사쓰마군이 거병하자, 야마가타는 2월 10일 산조 사네토미의 허가를 얻어 오야마에게 근위보병 제1연대 등의 출동 준비를 시켰다. 구마모토성을 공격하지 못한 사쓰마군은 북상했고, 하카타에서 남하한 정부군과 다하라자카 등에서 격돌했다.[18]
3월 4일부터 정부군은 다하라자카를 공격했으나, 사쓰마군의 저항으로 3월 20일에야 돌파했다. 다카시마 도모노스케의 진언으로 별동대가 편성되어 구로다 기요타카 지휘 하에 야마다와 가와지가 이끄는 별동 제2여단이 야쓰시로에 상륙, 4월 14일 구마모토성 포위를 풀었다. 야마가타의 본대도 4월 16일 구마모토성에 입성했다. 이후 야마가타는 군 지휘를 맡아 사쓰마군을 추격, 9월 24일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결하며 전쟁이 끝났다. 사이고의 유체를 확인한 야마가타는 임무 완수를 기뻐하면서도 사이고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고 한다.
3. 4. 군인칙유
1882년 메이지 천황 이름으로 '황군'의 복무 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하였다.[44] 이는 매우 군국주의적이고 충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군인칙유는 1878년 다케바시 사건의 배경에 자유 민권 운동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 야마가타가 10월 12일에 니시 아마네가 기초한 「군인훈계」를 육군에 배포하여 군기를 강화하려 한 것에서 기인한다.[44]3. 5.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청일 전쟁 발발 당시 육군대신으로 전쟁을 지도했고, 러일 전쟁 때는 제1군 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맡아 도쿄에서 군을 지휘했다. 1898년 원수 계급으로 승진했다.[8]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예비적인 국가 방위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일본 북진론 정책의 창시자였다.[8]4. 정치 경력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원로'라 불리는 일본 정부 지배 엘리트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8] 그는 군인 출신으로, 모든 민주적 제도를 불신하며 군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8]
그는 1882년 입법원(참사원) 의장을 거쳐,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내무대신(内務大臣)을 역임하며 정당,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을 탄압하고 현재까지 일본에서 사용되는 현-군-시 구조의 지방 행정 시스템을 조직했다.[14]
일본 내각(Cabinet of Japan)이 설립된 후, 야마가타는 제3대 일본 총리(Prime Minister of Japan)가 되었다. 1889년 12월 24일부터 1891년 5월 6일까지 첫 번째 임기 동안, 그는 메이지 헌법(Meiji Constitution)에 따라 부분적으로 선출된 제국 의회와 권력을 나눠야 했다. 1890년 10월 30일에는 교육칙어(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제정을 주재했다.
1898년 11월 8일부터 1900년 10월 19일까지 두 번째 총리로 재직하면서, 현역 군인만이 육군대신 또는 해군대신을 역임할 수 있다는 규칙을 제정하여 군이 향후 모든 내각 구성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정당원이 관료 조직의 주요 직책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총리 재임 외에도, 1894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 대관식에 참석하거나, 1896년 모스크바 외교 사절단을 이끄는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야마가타는 '원로'로서 일본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00년부터 1909년까지 민간 정당 지도자인 이토 히로부미에 반대했고, 가쓰라 다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10]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에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었고, 192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11]
1912년에는 군 예산 문제로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와 갈등을 빚어 다이쇼 정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히로히토와 고준 황후의 결혼에 반대하면서 그의 권력은 크게 손상되었다. 황실은 야마가타의 압력에 맞섰고, 결국 부부는 결혼에 성공했다.
야마가타는 1922년 2월 1일에 사망했고, 국장(state funeral)이 치러졌다.
4. 1. 내무대신과 지방자치제도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내무대신(内務大臣)을 역임하며 정당을 억압하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탄압했다.[14] 현-군-시 구조를 기반으로 한 지방 행정 시스템을 조직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다. 시제, 촌제, 부현제, 군제를 제정했다.4. 2. 총리 재임
1889년 12월 24일부터 1891년 5월 6일까지 제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직했다. 총리 재직 중 1890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군국주의적 교육관을 규정한 교육칙어를 반포하였다.[14] 총리 재임 기간은 1년 5개월로 짧았지만, 제1회 제국의회를 무사히 끝낸 공로로 정치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이토 히로부미에 필적하는 실력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19]1890년 6월 7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이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19] 7월 1일에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맞이하여, 11월 29일에 개회한 일본 최초의 제국의회에 임했다. 초연주의를 취하며 군비 확장을 추진하고, 제1회 제국의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주권선”(국경)뿐만 아니라 “이익선”(조선반도)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 예산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20]
이에 맞서 야당·민당의 입헌자유당, 입헌개진당은 격렬하게 반발하여, 예산안의 세입을 일부 삭감하는 수정안을 중의원에서 작성했고, 내각도 대응책으로 자유당 의원 매수 공작을 하거나, 민당과 관계가 깊은 무쓰 무네미쓰농상무대신을 통해 자유당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결과적으로 자유당 내부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추대하는 일파(토사파)가 정부의 타협을 선언했고, 첫 제국의회를 원만하게 폐회시키고 싶어하는 의원 전체의 의향도 있어, 예산안 삭감액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1891년 3월 2일에 중의원에서 예산이 성립되었다. 귀족원에서도 군에서 정계로 자리를 옮겨 야마가타와 대립을 계속한 다니 등 사장군파 등의 반발이 있었지만, 4일 후인 3월 6일에 예산안이 통과되었고, 3월 8일에 의회가 무사히 폐회식을 맞이한 후, 5월 6일에 야마가타는 수상을 사임했다.[19]
제1차 내각의 다른 공적은 부현군제 공포, 1890년 10월 30일에 부하인 요시카와 아키마사문부대신 및 이노우에 다케시법제국장관과 협력하여 교육칙어 발포가 있다.
1898년 제1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붕괴 후 제2차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을 조각했다. 헌정당과 제휴하여 지조증징(地租増徴)을 실시하고, 정당 세력의 관료 기구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문관 임용령 개정, 추밀원 권한 확대, 군부 대신 현역 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 제정 등으로 관료제를 강화했다. 또한 치안경찰법 제정으로 부상하는 노동 운동에 대비했다. 외교 면에서는 1900년 의화단 운동에서 열강 여러 나라와 함께 청에 파병하여 열강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가 입헌정우회를 조직함으로써 내각 총사퇴했다.[14]
4. 3. 원로로서의 활동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총리 퇴임 후에도 원로로서 일본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4년 11월 1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스페인에 필리핀을 40억파운드에 매입하겠다는 잠정적인 제안을 했다.[9] 1896년에는 모스크바에 외교 사절단을 이끌고 가, 한국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권리를 확인하는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했다.
1900년부터 1909년까지 야마가타는 민간 정당의 지도자인 이토 히로부미에 반대했고, 그의 후견인인 가쓰라 다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10]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야마가타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었고 192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11] 비록 러일 전쟁 후에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1909년부터 1922년까지 추밀원 의장으로서 정부 배후의 실세로 남아 사망할 때까지 차기 총리의 선출을 결정했다.[11]
1912년, 야마가타는 군 예산을 둘러싼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와의 분쟁으로 다이쇼 정변으로 알려진 헌법 위기를 초래했다.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 장군이 내각이 원하는 예산을 지급하지 않자 사임했고, 사이온지 긴모치는 그를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법에 따르면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고위 장성과 제독이어야 했고, 야마가타의 사주를 받은 모든 자격 있는 장군들이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에서 복무하기를 거부하여 내각은 사임해야 했다.
4. 4. 다이쇼 시대의 활동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야마가타는 이를 경계하여 러시아와 협의하여 만주에 1~2개 사단을 파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대해서는 원로와 상의하기 전에 각의를 결정한 가토 고메이 외무대신을 격노하게 했다.[14] 1919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회복했다.[14]4. 5. 궁중의 어떤 중대사건
1920년 여름,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던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의 고준 황후)에게 색각 이상 유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야마가타에게 전해졌다.[29] 당시 군인은 색각 이상이 있으면 부적격으로 간주되었고, 군무 수행을 전제로 하는 황족에게 색각 이상이 유전될 가능성을 야마가타는 우려했다.[29]야마가타는 궁내대신을 자신의 계열인 나카무라 유지로로 교체하고, 의사단의 보고를 받은 후 후시미노미야 사다히토 친왕을 통해 나가코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에게 혼약 사퇴를 "고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30] 그러나 구니노미야는 이미 결정된 혼약을 가볍게 변경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스기우라 주고 등을 동원해 혼약 변경 반대 운동을 벌였다.[31]
문제가 커지자 야마가타는 오다와라에서 나와 도쿄에 머무르며 추밀원 의장 사표를 제출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구니노미야 측의 반대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31] 결국 야마가타는 혼약 조사가 불충분했다는 사죄서를 제출하고 오다와라로 돌아가 징계를 받았다.[31]
1921년, 일부 의원들이 이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야마가타는 여전히 혼약 사퇴를 추진했다. 그러나 야마가타 파벌의 유력자마저 구니노미야 측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였고, 하라 다카시 총리와 다른 원로들은 이 문제에서 거리를 두었다.[32] 게다가 야마가타가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유럽 방문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국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사 폭동 우려까지 제기되었다.[32]
결국 궁내대신은 혼약 사퇴가 불가능하다고 진언했고, 야마가타도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32] 야마가타는 모든 관직에서 사퇴하고 훈장 반납까지 청하는 서면을 제출했지만, 다이쇼 천황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섭정 설치 문제가 시급해져 그의 사표는 각하되었다.[33] 이 사건으로 야마가타는 급격히 늙었고, 그의 권력은 크게 손상되었다.[33]
5. 사망
1922년 2월 1일,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폐렴과 기관지확장증으로 오다와라의 별장 고키안에서 85세로 사망했다.[29][30] 그의 국장(国葬)은 히비야 공원에서 거행되었으나, 한 달 전 사망한 오쿠마 시게노부의 '국민장'에 비해 한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27][31]
당시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국장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는데, 군중이 몰려들었지만 실제 참례자는 적어 "비에 젖은 깨끗한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고 전했다. 귀빈석에는 도고 헤이하치로를 비롯한 장관들이 예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일반인 참배도 허용되었지만 야마가타 가에서 입장권을 받은 사람들로 제한되었다.[32]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야마가타의 국장을 "국장다운 분위기는 전혀 없고, 완전히 관장이나 군장의 느낌"이라고 평가하며, 오쿠마 시게노부의 국민장과 비교해 "쓸쓸한 '민중 없는' 국장"이라고 보도했다.[27][31]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망 후 종일위를 추서받았으며,[30] 그의 유해는 고쿠코쿠지에 매장되었다. 묘비에는 "추밀원의장 원수 육군대장 종일위 대훈위 공일급 공작"이라고 새겨져 있다.[27][30]
야마가타의 사망으로 사쓰마-조슈 연합에 의한 과두적 번벌 지배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원로는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사이온지 긴모치만 남게 되었고, 정부와 군을 조정하는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6. 비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4] 특히, 그의 정책은 한국 역사와 민족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는 의회와 정당에 불신감을 가졌고, 민주주의 사상과 보통선거 확대에도 경계심을 드러냈다.
7. 사생활과 취미
야마가타는 뛰어난 정원 디자이너로, 그가 디자인한 정원은 오늘날 일본식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으로 교토에 있는 그의 별장 무린안의 정원이 있다.[12]
와카 짓기가 취미였으며, 평생 수만 수의 와카를 지었다고 한다.[22] 또한 한시, 춤, 서예도 즐겼다. 이시카미 신궁의 누문에 걸린 "만고유신(萬古猶新)"이라는 현판은 야마가타의 글씨다. 차를 즐기는 사람이자 건축과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쿄의 츠바키야마소, 교토의 무린안, 오다와라의 고키안 정원은 야마가타가 직접 구상하고 이와모토 카츠고로와 근대 정원의 선구자로 알려진 7대 오가와 지헤이에게 맡겨 조성한 것이다.[34] 이 정원들은 야마가타의 취향에 따라 자연을 살린 구성이며, 전통적인 일본 정원과는 다른 근대적·자연주의적 일본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34] "메이지 시대의 새로운 정원이 제시한 특징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정원 감각 그 자체이다"라고까지 평가되며, 참여한 오가와 지헤이 자신의 정원 기법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34] 야마가타는 고쿄(御所)의 정원을 제외하면 무린안이 교토에서 가장 훌륭한 정원이라고 생각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말했고, 소나무 묘목을 하사받았다. 야마가타는 이를 기념하여 "어사치송내기(御賜稚松乃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01년에 자란 소나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천황에게 바치자 "보낸 어린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늙어서도 천년의 친구가 되겠구나"라는 노래를 받았고, "하사받은 소나무여, 어린 소나무여, 윗분의 은혜로운 이슬이 내리는 정원에", "은혜 깊은 푸른 소나무 그늘 아래 늙음도 잊고 천대까지 살겠네"라는 답가를 지었다.[35]
마쓰이 히로키치는 "와카와 한시 모두 뛰어나며, 와카는 통태 박사를 스승으로 삼아 명작도 많다고 한다. 서예 또한 뼈대가 있으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무골한 사람 같지만, 노래와 춤 외에도, 세이겐의 염(咽)은 물론, 그 분야의 식견도 높다고 한다. 공을 단순한 무관의 성실한 사람으로만 여기는 것은, 그 운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담장 너머의 구경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36]
야마가타의 3대 정원은 다음과 같다.[37]
젊은 시절 류머티즘을 앓았고, 30대부터 치통에 시달렸으며,[22] 청일전쟁에서도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여러 질병을 겪은 야마가타는 건강에 신경을 썼다.[22] 생활은 규칙적이고 검소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수건으로 몸을 닦고, 식후에는 창을 휘둘렀다.[45] 젊었을 때는 일본주를 좋아해 술을 많이 마셨지만,[22] 60세 이후에는 음주를 저녁 식사에 포도주 3잔 정도로 줄였다. 마쓰모토 준이 제창한 ‘해수욕 건강법’을 받아들여, 고타오안에서는 대야에 소금물을 받아 허리까지 담그고 머리에는 담요를 덮어 땀을 흘리는 방식으로 실천했다.[27][39]
오랫동안 중의원 의원을 지낸 세키 나오히코는 야마가타의 식생활에 대해 "야마가타 공은 평소 식사에는 반드시 자소의 졸임이 있었고, 따뜻한 밥에 뿌려 먹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말했다.[40]
1868년 4월, 29세의 야마가타는 교토로 떠나기 전 조슈번의 딸인 16세의 토모코와 결혼했다. 야마가타는 7월에 번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둘째 딸인 마쓰코(1878년 8월 출생)를 제외하고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1893년 아내 토모코가 사망한 후, 야마가타는 요시다 사다코라는 기생을 사실상의 아내로 맞이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야마가타 가족 등록부에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권력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처럼 첩을 두었다. 요시다 사다코 외에, 야마가타의 지원으로 교토에서 다방을 경영하던 호리 사다코가 있다. 호리 사다코에 따르면, 야마가타는 “색기 없는 분”으로 화려한 놀이는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어도 “저분은 미인이군” 하고 입으로만 말할 뿐이었다고 한다.[22]
8. 평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의 기초를 다지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군사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두 차례나 총리를 역임하며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정당 정치를 억압하고 군부의 힘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14]
요시다 쇼인은 야마가타가 송하촌숙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입숙 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15]
그는 마른 장신에 덧니가 있는 외모를 가졌으며,[33] 군인 출신답게 "일개 무변(一介の武弁)"을 자처하며 군인의 면모를 강조했다.
야마가타는 가쓰라 다로에게 불신을 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중용했지만, 관보령 개정 등 육군 권한 축소에는 강하게 반발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 당시에는 고종에게 양위를 요구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응을 맡겼다.
제2차 가쓰라 내각 성립 과정에서 야마가타는 데라우치 육군대신의 유임을 요구하며 내각을 감시하려 했고, 군비 축소 가능성을 경계했다. 그러나 2개 사단 증설 문제 연기 결정에 실망하고, 한일 병합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자 애도했다.
신해혁명 이후 만주 파병을 제안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고, 메이지 천황 붕어 후 가쓰라 다로를 견제했다.
그는 초연주의(超然主義) 지도자로서 자유민권운동을 탄압하고 대역사건을 주도했으며, 궁중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생전부터 인기가 낮았다.
8. 1. 당대와 후대의 평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대에 정당 정치와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인물로 여겨져 비판받았다.[14] 다이쇼 시대 언론인 우사키 사기조(鵜崎鷺城)는 야마가타를 "교활하고 자신의 세력을 위해 세력을 확장하며 음험하고 집요하다"고 비판했다.[28] 하라 다카시(原敬) 또한 『하라 다카시 일기(原敬日記)』에서 같은 평가를 내렸다. 반면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는 야마가타를 "온건한 제국주의자"라고 평가했다.[28]메이지 시대 원훈으로 육군 기반을 세워 군부에 큰 영향력을 가졌다. 원리원칙을 유지하면서도 타협을 허용하는 현실주의적 측면과 인재 발굴 및 육성에 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4]
- 勝海舟 "저 사람은 정직한 한쪽 편만 아는 사람이야."[45]
- 尾崎行雄
- * "야마가타는 꼼꼼하게 챙겨주는 성격이어서, 한번 챙겨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챙겨주었다. 그 결과 야마가타에게는 사당(私黨)이 생겼다. 반면 이토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신봉자가 늘어나기만 할 뿐, 기필코 이토를 위해 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토는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겼다."[46]
- * "현재 일류 정치가 중 으뜸가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국(器局)이 넓지 못하고, 지혜가 깊지 못하며, 용맹이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베푼 친절도 제대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악과를 낳는 경우가 있다. 이것 참으로 통탄할 만하고 아까운 일이다."[47]
- *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야마가타 세 사람을 평하여) 그 인물을 벌거벗겨 놓고 평가하자면 야마가타 공이 가장 뛰어났다고 나는 느꼈다."[42]
- * "무섭도록 주의 깊은 사람이어서 항상 일을 두 번 세 번 생각했기 때문에 야마가타 공은 평생에 걸쳐 큰 실책이 별로 없었고, 공 자신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 같다."[42]
- * "전형적인 군인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으로 '군인의 체면'을 중시했다."[42]
- 三浦梧楼
- * "야마가타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우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은 책략가로서 성의가 부족한 면이 있다. 이것이 그의 결점이다."[48]
- * "신중하고 굳건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신중함 속에 굳건한 기반이 쌓여 있다. 이토나 이노우에가 미치지 못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49]
- 伊藤痴遊 "실천적인 면에서 후세에 전해질 만한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원수가 되어 육군의 수뇌였던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고 과묵하며, 매우 중후한 인품으로, 어딘가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많은 부하를 길러 육군 쪽에도, 정치 쪽에도 매우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 세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지성(至誠)이라는 면에서 다른 정치가나 군장과 달리, 매우 진지하게 국가를 생각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 임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절대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어떤 일에도 열심이었던 것은 감탄할 만하다."[50]
- 石橋湛山은 야마가타 사망을 맞이한 다이쇼 11년(1922년) 2월 11일 『東洋經濟新報』 칼럼 「소평론」에서 야마가타의 정치 권력을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의 결과"라 평가하고, 궁중의 어떤 중대한 사건에서의 행동도 지성에서 나온 행위라고 평가했다. "세상은 정체되지 않는 신진대사가 있어야 비로소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한다"며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물러가는 것이며, 죽음 또한 하나의 의미 있는 사회 봉사가 되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쇼와 20년(1945년) 4월 14일 「주간 단신」에서 중앙 지도부에 정전 양략(政戰兩略) 요령을 요구하며 "바라건대 야마가타 원수여 나오소서, 이토 후작이여 나오소서"라고 적었다.[51]
- 昭和天皇은 종전 직후 쇼와 20년(1945년) 9월, 明仁親王(상황 아키히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이지 천황 시대에는 야마가타, 오야마, 야마모토와 같은 육해군 명장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마치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과 같이 군인이 횡행하여 대국을 생각하지 않고, 진격하는 것을 알면서도 후퇴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라며 大山巖, 山本権兵衛와 함께 야마가타를 육해군 명장으로 언급했다.[52]
현대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되며,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은 비판받는다.[14] 1961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를 저술한 藤村道生는 야마가타가 청일 전쟁을 "침략의 절호의 기회"로 보았고, "일본에 비할 데 없는 군국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야마가타에 의한 관료·군벌이) 일본을 지배해 결국 암흑의 태평양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야마가타와 태평양 전쟁을 직접 연결했다. 有馬学은 메이지 시대부터 헤이세이 중기까지 야마가타 논의를 분석, 야마가타가 개인적 성격이나 정치적 태도, 실제 모습과 별개로 "근대 일본의 어두운 면", "부정되어야 할 존재"로 "상징화", "기호화"되어 이야기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야마가타 파벌(山縣閥) 유지를 "야마가타 자신의 권력욕"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우자키 로조 주장 이후 藤村道生, 岡義武 등 연구자들에게 계승된다. 伊藤之雄는 야마가타가 주관적 견해로 신념에 따라 권력을 유지했고, 주위 칭찬과 비난을 듣지 않는 "우직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최근 ジョージ・アキタ, 伊藤隆 등은 다른 시각에서 야마가타 실체에 접근한다. 이토 다카시는 야마가타가 시모노세키 전쟁, 삼국간섭의 경험을 거쳐 열강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서구인 대 아시아인의 "인종 전쟁"을 우려하는 "일중 제휴론자"이며, 미국과 대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외교적으로 매우 신중한 태도"[7]를 유지한 정치가였으며, 기존 군국주의적 이미지와 다른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1][2][3][4][5][6][8][9][10][11][12][13][16] 이토 유키오는 러일 전쟁, 시베리아 출병, 청일 전쟁에서 야마가타가 열강 의향을 확인하는 신중한 움직임을 보였고, 육군 전체 통제를 중시했으며, 태평양 전쟁으로 가는 길은 야마가타 이상과 정신을 잊은 후계 군인들에 의해 열렸다고 주장한다.
8. 2. 한국에서의 평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정책이 한국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점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1912년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일 병합과 식민 통치에 대한 책임이 크다고 비판받는다.[53]역사가들은 야마가타를 정당 정치 부정, 번벌(藩閥) 정치 추진, 사회 운동 탄압의 대표 인물로 지목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53] 특히,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는 1961년 저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에서 야마가타가 청일 전쟁을 "침략의 절호의 기회"로 보았고, "일본에 비할 데 없는 군국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야마가타에 의한 관료·군벌이) 일본을 지배해 결국 암흑의 태평양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평가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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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清戦争-{{small|東アジア近代史の転換点}}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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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清戦争の軍事戦略
芙蓉書房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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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清戦争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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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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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の近現代史をどう見るか
岩波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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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戦史研究年報 第6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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防衛省防衛研究所
20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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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歴代総理の胆力「山県有朋」(4)「元祖・健康オタク」の塩風呂
https://www.asagei.c[...]
2019-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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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歴代内閣・首相事典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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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神戸大学経済経営研究所 新聞記事文庫 人物伝記
{{新聞記事文庫|url|0100297[...]
神戸大学
201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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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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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真面目で几帳面、だから嫌われた〜『山県有朋──愚直な権力者の生涯』 伊藤 之雄著(評者:尹 雄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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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経BP
201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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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柩車は粛々と行く
{{新聞記事文庫|url|0100297[...]
19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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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老記者の思ひ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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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公論社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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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山県有朋の庭園観と椿山荘
https://doi.org/10.5[...]
日本造園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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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即位礼にともなう記念解説シートの配布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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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鄰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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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四十五年記者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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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県有朋(やまがたありと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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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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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治の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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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かの偉人たちに学ぶ「歴史的健康術」(5)<幕末~明治の英傑>山県有朋「海水風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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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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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七十七年の回顧
三省堂
193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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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学究生活の思い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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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咢堂放談
今日の問題社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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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国葬での菅氏の弔辞、山県有朋に込めた思い…安倍氏にあこがれた菅氏・菅氏をうらやんだ安倍氏
https://www.yomiuri.[...]
読売新聞オンライン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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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歴代総理の胆力「山県有朋」(2)絶対権力者は「元祖・闇将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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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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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海舟全集 第十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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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近代快傑録
千倉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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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内治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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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観樹将軍縦横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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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観樹将軍豪快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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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維新回顧巨人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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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十五年戦争下の石橋湛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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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政治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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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象徴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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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역사자료센터
山県有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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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886-10-20
[55]
간행물
官報
1895-12-21
[56]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枢密院議長元師陸軍大将公爵山県有朋特旨叙位ノ件
[57]
간행물
官報
1922-02-03
[58]
간행물
官報
188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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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89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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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89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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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89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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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898-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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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02-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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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03-10-12
[65]
간행물
官報
1907-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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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07-09-23
[67]
간행물
官報
19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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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1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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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20-09-08
[70]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御署名原本・大正十一年・勅令第十八号・故議定官枢密院議長元帥陸軍大将従一位大勲位功一級公爵山県有朋国葬ノ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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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号外「勅令」
官報
1922-02-03
[72]
간행물
官報 第2853号「故山県枢密院議長葬儀」
官報
1922-02-07
[73]
간행물
官報 第1047号「叙任及辞令」
官報
1886-12-24
[74]
간행물
官報 第1250号「叙任及辞令」
官報
1887-08-27
[75]
간행물
官報 敍任及辭令
官報
1889-11-01
[76]
간행물
官報 第2222号「叙任及辞令」
官報
1890-11-24
[77]
간행물
官報 第4005号「叙任及辞令」
官報
1896-11-02
[78]
간행물
官報 第4157号「叙任及辞令」
官報
1897-05-14
[79]
간행물
官報 第4785号「叙任及辞令」
官報
1899-06-15
[80]
간행물
官報 第6828号「叙任及辞令」
官報
1906-04-07
[81]
간행물
官報 第7415号「叙任及辞令」
官報
190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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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1035号「叙任及辞令」
官報
1916-01-17
[83]
간행물
官報 第1777号「叙任及辞令」
官報
191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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椿山荘の女王・吉田貞子
二松堂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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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美人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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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人物ファイル 山県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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えんじゅ2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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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山県有朋とその館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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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観光 知られざる 6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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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観光株式会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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湘南新聞
200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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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名勝 無鄰菴とは│京都市が所有する明治・大正の元老 山県有朋の別荘 名勝 無鄰菴
https://www2.city.ky[...]
京都市
201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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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古稀庵
http://www.city.odaw[...]
小田原市
201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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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有朋と庭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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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縣有朋記念館
201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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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県有朋記念館(旧・山県有朋別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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栃木県総合教育センター
201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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