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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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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라국은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국가이다. 다라리는 반달 모양의 땅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옥전 고분군과 성산토성 등의 유적을 통해 정치, 경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다라국의 위치는 합천 쌍책면 일대, 일본 규슈 아리아케해 연안 설이 존재하며, 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대야주가 설치되었다가 백제에 점령, 삼한통일 후 강양군이 되어 현재의 합천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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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국
다라국
가야 연맹
위치
정보
존속 기간42년 ~ 562년
위치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지역
수도미상
정치 체제군장국가
주요 인물이질금 (夷叱今)
아시혜 (阿時兮)
멸망 원인신라에 병합됨
역사
건국42년
멸망562년, 신라에 병합됨
기타
관련 국가가야 연맹

2. 위치 비정

오늘날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多羅里)는 반달 모양 땅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달내'로 읽을 수 있다. 다라리와 성산리 일대에는 합천 옥전 고분군이 있어 다라국 중심은 쌍책면 일대로 추정된다. 신라 시대 합천읍에는 대야성이 있어 중심지가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재석(전 고려대 교수)은 규슈 아리아케해 연안의 타라무라(多良村), 타라산(多良山) 일대를 다라국 위치로 비정하여 김연학 교수와 논쟁을 벌였으나,[1][2] 이는 임나가야 소국 위치를 일본 규슈로 보는 주장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삼국사기에는 다벌국(多伐國)이 나오는데, 다라국과 동일하게 보기도 하지만, 대구의 '달구벌(達句火)'에 있던 진한 소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2. 1. 합천 쌍책면 일대 설

오늘날 합천군 쌍책면에 다라리(多羅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반달 모양 땅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라는 대량(大良), 대야(大耶) 등으로도 전해지고 현대어로 모두 "달내"로 읽을 수 있다. 다라리와 함께 성산리 일대에 합천 옥전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 다라국 중심은 쌍책면 일대로 여긴다. 한편 신라 시대에 합천읍에는 대야성이 있어서 신라 시대에 합천의 중심이 쌍책면에서 오늘날 합천읍으로 옮긴 듯하다.

한편 최재석(전 고려대) 교수는 다라국의 위치를 규슈아리아케해 연안에 있는 타라무라(多良村), 타라산(多良山)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 논쟁을 벌여,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했었다.[1][2] 이는 임나가야의 소국 위치를 일본 규슈 일대로 비정하는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조에 등장한 다벌국(多伐國)이 다라국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벌국은 오늘날 대구광역시인 '달구벌(達句火)'에 있던 진한 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

2. 2. 규슈 아리아케해 연안 설 (소수설)

최재석(전 고려대 교수)은 다라국의 위치를 규슈아리아케해 연안에 있는 타라무라(多良村), 타라산(多良山)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 논쟁을 벌였고,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했다.[1][2] 이는 임나가야의 소국 위치를 일본 규슈 일대로 비정하는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2. 3. 다벌국과의 관계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조에 등장한 다벌국(多伐國)을 다라국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벌국은 오늘날 대구광역시인 '달구벌(達句火)'에 있던 진한 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오늘날 합천군 쌍책면에 다라리(多羅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반달모양 땅이름에서 유래했다 한다. 다라는 대량(大良), 대야(大耶) 등으로도 전해지고 현대어로 모두 "달내"로 읽을 수 있다. 다라리와 함께 성산리 일대에 옥전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 다라국 중심은 쌍책면 일대로 여긴다. 한편 신라시대에 합천읍에는 대야성이 있어서 신라시대에 합천의 중심이 쌍책면에서 오늘날 합천읍으로 옮긴 듯하다.

한편 최재석(전 고려대) 교수는 다라국의 위치를 규슈아리아케해 연안에 있는 타라무라(多良村), 타라산(多良山)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 논쟁을 벌여,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했었다.[1][2] 이는 임나가야의 소국 위치를 일본 규슈일대로 비정하는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3. 주요 유적

합천 옥전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과 합천 성산토성은 다라국의 주요 유적이다. 옥전 고분군은 다라국 지배층의 무덤이고, 성산토성은 다라국의 방어 및 행정 중심지로 추정된다.[3]

3. 1. 옥전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고대 묘역으로, 다라국의 지배층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 황강낙동강과 합류하기 직전 황강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고분의 크기와 구조,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다라국의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 특유의 토기와 함께 5세기부터 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대가야, 신라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거대한 고총을 중심으로 대형 고분과 중소형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데, 23호분과 35호분은 다라국의 성립과 전성기를 대표하는 고분이다.[3]

3. 2. 성산토성

합천 성산토성은 옥전 고분군과 밀접하게 연관된 성곽으로, 다라국의 방어 및 행정 중심지로 추정된다. 자연 절벽을 활용한 천연 방어선과 토성,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둘레는 약 1.1km이다. 가야의 다른 성곽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3]

성산토성의 북쪽과 동쪽은 토성, 남쪽과 서쪽은 석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은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활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토성은 나무 기둥과 돌로 보강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성곽 축조 방식은 가야의 독특한 성곽 건축 기술을 반영한다. 성산토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6세기 초반 다라국의 전성기에 축조되었음을 시사한다.[3]

4. 정치, 경제, 문화

일본서기에 하한기(下旱岐)와 이수위(二首位)라는 관직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옥전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통해 (玉) 생산과 더불어 신라가야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합천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

4. 1. 경제

다라국은 전반적으로 위 두 사서의 기록과 옥전 고분군 발굴 성과를 통해 알려져 있으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일본서기에는 하한기(下旱岐)와 이수위(二首位)라는 관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는 고분군이 확인된 마을 이름인 옥전(玉田)에서 알 수 있듯이 (玉)이 많이 생산되었다. 옥전 고분군에서는 신라식과 김해식의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다수의 옥제품 및 보석제 유물과 함께 토기와 금동제 관모, 환두대도, 고구려풍 투구 등이 출토되었다. 고구려풍 투구는 신라 문화권의 영향 아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등자와 말투구 등 많은 양의 마구류가 발굴되었다.

토기는 이후의 도굴 피해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발굴되었는데, 굽높이 술잔(高盃)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대개 김해, 함안 등지의 것과 유사하지만, 옥전 2기 4호분에서는 신라식의 것이 나오기도 했다.

4. 2. 문화



다라국에 대한 기록은 위 두 사서의 기록과 옥전 고분군 발굴 성과가 현재까지 밝혀진 전부이므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서기》에는 하한기(下旱岐)와 이수위(二首位)라는 관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는 고분군이 확인된 마을 이름인 옥전(玉田)에서 알 수 있듯이 (玉)이 많이 생산되었다. 옥전 고분군에서는 신라식과 김해식의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다수의 옥제품 및 보석으로 만든 유물과 함께 토기와 금동제 관모, 환두대도, 고구려풍 투구 등이 출토되었다. 고구려풍 투구는 신라 문화권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등자와 말투구 등 많은 양의 마구류가 발굴되었다. 토기는 이후의 도굴 피해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발굴되었는데, 굽높이 술잔(高盃)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대개 김해, 함안 등지의 것과 유사하지만, 옥전 2기 4호분에서는 신라식의 것이 나오기도 했다.

5. 역사

다라국은 다른 소국에 비해 역사가 짧은 것으로 보인다. 변한 지역은 400년에 구야국 중심의 가야 연맹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쇠락한 이후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국이 들어서기까지 극심한 혼란기에 들어섰고, 이 시기에 일련의 집단들의 이동이 이루어져 기존 소국들의 사회 체제가 변화하기도 하고 몇몇 소국들이 무주지에 더 성립되기도 했다. 다라국도 이 시기를 전후해 성립된 듯하다.

5. 1. 건국과 멸망

변한 지역은 400년에 구야국 중심의 가야 연맹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쇠락한 이후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국이 들어서기까지 극심한 혼란기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일련의 집단들의 이동이 이루어져 기존 소국들의 사회 체제가 변화하기도 하고 몇몇 소국들이 무주지에 더 성립되기도 했다. 다라국도 이 시기를 전후해 성립된 듯하다. 그 이전에도 청동기 시대 전후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유물이 출토되기는 했다. 562년 신라대가야를 비롯한 여러 가야들을 정복할 때 신라에 편입되어 대야주가 설치되어 옛 가야 땅을 관할하였다가 642년 대야성 전투로 백제에 점령된 후 삼한통일 후 강주의 강양군(江陽郡)이 되어 지금의 합천군이 되었다.

5. 2. 멸망 이후

400년, 구야국 중심의 가야 연맹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쇠락한 이후 변한 지역은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가 들어서기까지 극심한 혼란기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일련의 집단들의 이동이 이루어져 기존 소국들의 사회 체제가 변화하기도 하고, 몇몇 소국들이 무주지에 새로 성립되기도 했다. 다라국도 이 시기를 전후해 성립된 듯하다. 그 이전에도 청동기 시대 전후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유물이 출토되기는 했다.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비롯한 여러 가야들을 정복할 때 신라에 편입되어 대야주(大耶州)가 설치되어 옛 가야 땅을 관할하였다. 642년 대야성 전투로 백제에 점령된 후 삼한통일 후 강주의 강양군(江陽郡)이 되어 지금의 합천군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한국고대사회사방법론 1990-03-31
[2] 서적 한국고대사회사연구 2001-08-25
[3] 웹인용 "[가야사 시민강좌] 제4부 합천의 고대사 이야기"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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