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딩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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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우딩 체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본토 항공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국의 방공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 방공 구역을 기반으로 개발되었으며, 레이더(RDF) 기술을 핵심으로 하여 조기 경보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다우딩 체계는 필터실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그룹, 섹터 단위로 전달하여 전투기 요격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체계는 레이더, 관측소, 무선 방향 탐지, 피아식별장치 등의 정보원을 통합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의 공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우딩 체계는 전력 증강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지만, 정보 과부하, 무선 통신 문제, 그룹 간의 갈등 등의 문제점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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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본토 항공전 - 왕립공군 제303편대
왕립공군 제303편대는 1940년 영국에서 창설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하여 연합군 전투기 부대 중 가장 많은 격추 기록을 세우고, 이후 유럽 상공 작전에 참여하다 1946년 해산된 폴란드 공군 전투기 부대이다.
다우딩 체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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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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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방공 네트워크 |
국가 | 영국 |
사용 기간 | 1930년대 후반 – 제2차 세계 대전 |
목표 | 영국 본토 상공에서 적 항공기의 접근을 감지하고 식별 요격기 부대에 경고 적의 공습을 요격하기 위해 요격기를 배치 |
구성 요소 | 해안 방공 레이더 체인 홈 관측대 전화선 전투비행단 기상 관측 |
핵심 시설 | 필터 룸 |
설명 | |
설명 |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방공 네트워크 |
별칭 | 보고 시스템, C&R 시스템 |
관련 인물 | 휴 다우딩 |
2. 개발
2. 1. 이전 방공 체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 공습에 대응하기 위해 에드워드 애쉬모어는 런던 방공 구역(London Air Defence Area, LADA)을 구축했다. 애쉬모어는 도시 주변에 3개의 원형 방어망을 설치했는데, 외곽에는 탐조등과 대공포, 중간에는 전투기, 도시 가장 안쪽에는 더 많은 대공포를 배치하였다. 런던 호스 가드에 설치된 대형 도해반에는 정찰병들의 정보가 전달되었고, 나무 블록을 이용하여 항공기 위치와 정보를 표시했다. 지도 주변의 관찰자들은 이 정보를 25개의 지역 통제실 중 하나로 전달했고, 지역 통제실은 관련된 지도 부분을 다시 제작하여 역내 다양한 무기 시설에 정보를 전달하였다.전쟁 이후, LADA는 영국 전쟁부 산하 대영 방공 사령부(Air Defence of Great Britain, ADGB)에서 운영했다. ADGB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영국 전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LADA는 수도권 지역으로 바뀌었고, ADGB는 장거리 및 고속 항공기에 대응하기 위해 애쉬모어의 시스템을 확장했다. 색깔이 있는 마커는 5분 간격으로 표시된 섹터 시계의 색깔이 있는 영역과 일치했다. 정보가 들어오면, 플로터는 시계가 가리키는 색상의 마커를 사용하였고, 이는 테이블에 여러 색상의 마커 경로를 생성하여 쉽게 이어지는 "트랙"을 만들었다. 최신 마커의 색상으로 정보의 새로움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체계는 이후 미들랜즈에 구축되었다.[2]
이 체계는 조기 탐지가 결여되어 있었고, 항공기의 성능이 향상됨에 따라 조기 탐지는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음향 거울 및 유사한 장치에 대한 실험이 수행되었지만, 양호한 조건에서도 감지 범위가 8.0km까지 밖에 안 되어,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입증되었다. 대안이 없었기에 1934년 12월, 공군성(Air Ministry, AM)은 템스강 하구 계획의 일환으로 런던 주위에 음향 탐지 장치들을 배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2. 2. 레이더(RDF)의 등장

템스강 하구 계획이 승인된 지 한 달 후, 티자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전자"선"을 통해 비행기 엔진을 정지시키고 조종사를 장거리에서 죽일 수 있다는 신문 기사들과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설립되었다.[4] 위원회는 전파 전문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와트를 고문으로 초빙했다.[22] 와트는 그의 조수였던 아놀드 윌킨스에게 계산을 수행하도록 요청했고, 윌킨스는 곧바로 필요한 전파 에너지의 양이 현존하는 최첨단 전자 장치를 넘어선다는 결론을 내렸다. 와트가 대안을 묻자, 윌킨스는 라디오 수신에서 페이딩을 일으킨 항공기에 대한 중앙우체국 보고서를 떠올렸고, 이 효과가 비행기를 장거리에서 탐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1935년 1월 티자드 위원회에 이 개념에 대한 메모를 제출했다.
위원회는 이 개념을 폭격기 감지의 문제와 폭격기는 어디든 갈 수 있다라는 공포에 대한 잠재적인 해결책으로 보았다. 보급 및 연구를 위한 항공 위원 휴 다우딩은 이 개념에 감명받았지만, 실질적인 시범을 원했다. 1935년 2월 26일 데번트리 실험이 진행되었고, 기존 장비를 사용한 래시업(lash-up)은 인근 항공기의 존재를 명확하게 표시했다. 다우딩은 즉각 개발 자금을 방출했다. 1935년 여름, 암호명 "RDF"로 명명된 이 시스템은 97km의 범위에서 폭격기 크기의 목표물을 탐지할 수 있었다. 체인 홈(Chain Home)이라고 불리는 체계를 바탕으로, 영국 해안을 따라 약 40km 간격으로 RDF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들이 수립되었다.
1936년 여름, 비긴 힐에서 7개월 간의 전투기 요격 실험이 시작되었다. 헨리 티자드는 RDF가 제공할 약 50분의 경고 시간에 기초하여 실험을 제안했다. 항법 전문가 로버트 린튼 래그가 지원을 받은 대대 사령관 유스터스 그렌펠의 지휘 아래, 글로스터 건틀렛 전투기들은 가상의 전투기와 민간 항공기, 그리고 브리스톨 블레넘 경폭격기를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삼각법과 기계식 계산기를 통해 계산했지만, 그렌펠은 "빌어먹을 기계들"에 질색하여 눈으로 요격을 명령하게 되었다. 티자드는 이등변 삼각형에 기반하여 전투기와 폭격기가 정반대 지점에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요격지점을 빠르게 추산하는 "등각"법을 도입했다. 이 "Tizzy 각도" 덕분에, 요격률은 급속히 증가했고, 1936년 말에는 고도를 알고 있고 이것이 변화하지 않을시 요격률은 지속적으로 90% 이상을 유지했다. 폭격기가 고도를 바꾸거나 전투기가 폭격기 아래에 도착한다면, 공격을 위한 기동은 성공률을 약 60%로 줄였다.
2. 3. 초기 문제점

초기 체인 홈 기지는 보지 매너에 있는 레이더 연구원들의 새로운 실험실에 세워졌으나, 초창기 RDF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한번은 다우딩이 공격자들이 머리 위로 지나갈 때 공격 징후가 있는지 테스트 시스템을 지켜보았으나, 완전히 실패했다. 이러한 문제는 1937년 4월, 보지에서 CH 레이더의 프로토타입을 사용한 실험을 통해 해결되었으며, 관제사들이 610m 이내의 비행기 고도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체인 홈 체계는 경고 시간을 늘리기 위해 바다와 맞닿은 해안 가까이에 지어졌고, 가능한 한 적과 최대한 가까이 놓였다. 하지만, 이는 공격하러 가는 길에 있는 아군 전투기의 위치나 해안을 건너오는 적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지역에 대해 다우딩은 왕립 방공감시단(1941년에 "왕립" 칭호 획득) 체계에 의존하기로 계획했다.
체인 홈과 방공감시단은 서로 다른 장비를 사용했기 때문에 보고 내용이 때때로 대조적이었고, 국가망으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의 양은 과도하게 많았다. 또한, 체인 홈은 아군과 적군 항공기를, 방공감시단은 고고도에서 비행하는 피아 전투기를 구별할 수 없었다.
다우딩은 이러한 식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파 방향 탐지기와 핍-스퀵 시스템, 그리고 피아식별장치(IFF) 트랜스폰더의 도입을 추진했다. 이 장비들은 1940년 초와 1940년 10월에 각각 널리 활용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RDF, 방공감시단, 단파 방향 탐지기라는 세 가지 정보 원천이 생겼고, 이들 모두 영공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2. 4. 시스템 구축
패트릭 블래킷이 남긴 다우딩 체계 관련 업적은 운용과학이라는 수학 분야의 기초가 되었다.[23] 다우딩은 주요 문제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정보 중 어느 것도 완전한 범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느 것도 전투기들에게 직접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우딩, 헨리 티저드, 그리고 위원회의 또 다른 창립 멤버였던 수학자 패트릭 블래킷은 영국 방공부로부터 개념을 물려받은 새로운 체계를 발전시켰다.[23][5]다우딩은 레이더로부터 온 모든 위치 보고를 전투기 사령부의 새로운 전투기 방향 센터로 보내는 정책을 수립했다. 이것은 더 큰 지역을 포함하는 지도에 개개의 발견자들로부터 온 보고를 조합하기 위해 방공감시단이 이미 만들어놓은 체계를 따라 한 것이었다. 새로운 시스템은 영국 전역에서 훨씬 더 큰 규모로 같은 일을 했다. CH 및 OC 센터의 연락을 받은 전화 교환원은 지도 주변의 작업자들에게 보고를 전달했고, 직원들은 이 보고를 사용하여 작은 색상의 표시를 지도에 두었다. 이 표시들은 길어질수록 표적의 위치와 방향을 나타내는 선을 형성했다. 표적이 식별되면, 식별된 무리에는 번호, 즉 "트랙"이 할당되었다.[23]
시간이 흐르면서 목표물의 경로가 명확해지자 지도를 관찰하던 운영자들은 여러 전투기 집단을 향해 가는 선로를 골라 해당 정보를 집단 사령부로 전달했다. 집단 사령부들은 이러한 보고를 관련 트랙만 포함하는 마스터 맵의 일부를 재생성하는데 사용했다. 집단 사령부의 사령관들은 그들의 지역에서 벌어질 전투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목표물에 전투기를 쉽게 할당할 수 있었다. 한 구역 내의 비행대대에 할당된 목표물들은 같은 방식으로 비행대 본부로 전달되었고, 비행대 본부는 더 큰 규모로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들의 전투기를 안내하는데 사용되었다.[23]
1939년 초 기본적인 체계가 구축되었고, 1939년 8월 11일부터 폭격기 사령부는 프랑스 전역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항공기를 이용한 일련의 모의 공격을 개시했다. 왕립공군 제11비행단으로부터 온 보고서는 열광적이었는데, "훈련 내내 RDF의 정보와 발견은 일관되게 최고였으며, 해안에서 효과적으로 요격을 가능하게 했다"고 언급했다. 다우딩은 여기에 "주간 공습은 보통 쉽고 규칙적으로 추적되고 요격되었다."고 덧붙였다.[23]
3. 운용 방식
3. 1. 필터룸

다우딩이 제안한 첫 번째 개선 사항은 모든 CH 보고서가 전송되는 FCHQ에 '필터실'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CH 기지는 각도 및 거리 측정을 영국 국립 격자 좌표계의 위치로 변환했다. 필터실은 동일한 격자 지도가 있는 대형 지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레이더 기지에서 보낸 보고서는 필터실의 전화 교환원인 '텔러'에게 전달되었고, 텔러는 지도 주변에 서 있는 작업자인 '플로터'에게 연결하여 레이더 기지에서 플로터가 지도상 해당 위치에 가장 가깝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런 다음 플로터는 섹터 시계를 보고 색상 표시기를 해당 위치에 떨어뜨렸는데, 색상 시스템은 옵저버 군단에서 보고 시간을 표시하는 데 사용한 것과 동일했다. 보고 속도가 빨라 대규모 임무 중에 플롯 마커가 지도에 쌓여 매우 복잡해졌다.
각 CH 기지가 고유한 부정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표적의 위치를 보고하는 두 기지는 서로 다른 두 위치에 표적을 배치했다. 이러한 보고가 들어오면 필터실의 플롯이 지도에 흩어졌다. 플롯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던 관찰자들은 이들 중 어떤 것이 한 그룹의 항공기를 나타내는지 파악하려고 했다. 한 그룹의 마커가 단일 편대라고 확신하면 플롯의 중앙에 나무 블록을 놓고 블록에 숫자와 문자를 배치하여 항공기 유형, 수 및 고도를 표시했다. 블록은 더 많은 플롯 마커가 보드에 배치됨에 따라 주기적으로 이동하거나 수정되었다. 블록이 이동하면서 플로터는 작은 화살표 모양의 포인터를 남겨 블록이 있었던 위치를 표시했다. 트랙 블록은 멀리서 읽을 수 있도록 큰 글씨를 사용했지만, 때로는 오페라 글라스가 필요했다.
이러한 다수의 레이더 플롯을 단일 블록으로 줄이는 것이 필터실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한 그룹이 식별되면 일반적으로 두 자리의 "트랙 번호"가 부여된다. 이 시점부터 필터실은 해당 트랙 번호와 국립 격자 좌표계의 업데이트된 위치를 전달하여 주어진 표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네트워크에 공급해야 하는 정보의 양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일단 생성되면 전체 네트워크는 동일한 트랙 번호를 사용하므로 예를 들어 텔러는 트랙을 전달하여 CH 기지에서 특정 표적에 대한 업데이트를 요청할 수 있었다.
때로는 보고 체인의 일부가 아닌 외부 소스에서 제공된 정보를 플로팅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SOS를 호출하는 전투기는 비상 주파수를 통해 라디오로 이 정보를 보고했으며, 이는 가장 가까운 청취소에서 수신되었다. 이 정보도 필터실로 흘러 들어갔지만, 그들은 지상의 플로터와 연결되지 않았다. 지도 위의 작업자는 극장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하여 관심 위치를 표시할 수 있었으며 필터를 사용하여 투사되는 메시지를 변경할 수 있었다.
3. 2. 단계적 보고
다우딩이 도입한 두 번째 개선 사항은 조종사에게 전달되는 정보량을 줄이고 전달 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통제 및 정보 흐름을 계층화하여 조종사에게 필요한 정보만 전달되도록 했다.[6] 최상위 수준은 벤틀리 프라이어리에 위치한 FCHQ 필터 룸으로, CH에서 들어오는 개별 정보를 필터링하여 전투 공간 전체를 파악했다. 이후 정보는 그룹으로 전달되었다.[6]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 방어 전투기는 4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11 그룹은 영국 공군 억스브리지 기지(RAF Uxbridge)에, 12 그룹은 영국 공군 헉널 기지(RAF Hucknall)에, 13 그룹은 블레이클로(Blakelaw)에, 10 그룹은 영국 공군 러들로 매너 기지(RAF Rudloe Manor)에 플로팅 룸을 두었다.[6]
그룹 본부에서는 FCHQ의 플롯을 재현한 플로팅 보드를 통해 해당 그룹에 관심 있는 지역만 다루었다. 정보는 미리 필터링되어 지도를 자주 변경할 필요가 없었고, 나무 블록을 사용하여 편대 위치를 나타냈다. 태그는 트랙 번호, 적/아군 상태, 항공기 수, 고도를 나타냈고, 색상은 보고서 업데이트 시점을 나타냈다.[6]
각 그룹은 여러 섹터로 나뉘었고, 섹터 통제소는 계층 구조의 최하위 수준이었다. 섹터 통제소는 조종사, 바라지 풍선(barrage balloon), 대공포 부대와의 통신을 담당했다. 섹터 사령관은 은퇴하거나 의학적 휴가를 받은 전직 조종사였다.[6]
정보 흐름은 주로 한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분할되었다. 필터 룸은 여러 보고서를 수신했지만, 그룹과 섹터는 관심 있는 정보만 전달받았다. 섹터 운영자는 비행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만 조종사에게 전달하여 무선 시간을 절약했다.
3. 3. 정보 출처
Chain Home은 이전의 시각적 또는 음향 위치 확인 시스템에 비해 조기 탐지 시간을 크게 개선했다. 켄트 해안 동남부의 CH 기지에서 프랑스 공군 기지에서 적의 공습이 형성되는 것을 탐지하는 경우가 흔했다. 또한, 이 정보는 주야간, 어떤 날씨에서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대 경고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CH 기지는 가능한 해안에 가깝게 배치되어야 했다. 정면에 있는 물체만 찾을 수 있었으므로 CH는 육지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두 개의 추가적인 위치 확인 서비스가 필요했다.
육상에서 적 항공기를 추적하는 임무는 왕립 감시단(Royal Observer Corps)에 주어졌다. ROC 기지가 많고 담당 구역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에 정보 중복 및 과부하가 우려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ROC의 정보는 필터이자 통신 기지 역할을 하는 Observer Centre (관측 센터)의 병렬 시스템으로 전송되었다. 이 사전 필터링된 정보는 다우딩 보고 체인으로 전송되었다.

마찬가지로, 별도의 보고 체인은 Huff-Duff (수신기) 및 pip-squeak (송신기)로 알려진 시스템을 사용하여 무선 방향 탐지 (RDF)를 통해 아군 항공기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RDF를 사용하여 위치를 파악하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진 두 개 이상의 관측 위치가 필요하며, 보고서를 삼각 측량해야 한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약 48 킬로미터 떨어진 세 개의 기지가 사용되었다. 이 정보는 선택된 Sector Control에 보고되었으며, Sector Control은 이를 사용하여 위치를 파악하고 주요 작전 플롯에 해당 정보를 전달했다. 그런 다음 관제사는 비행대에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전투기의 위치는 필요한 경우에만 체인 위로 전송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투 비행대의 상태에 대한 정보는 섹터에 알려졌지만, 어떤 비행대를 투입할지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룹에 필요했다. 이 작업을 위해 작전실에는 비행대의 병력 강도와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일련의 칠판과 전기 램프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었다. "토트 보드"라고 알려진 이 시스템을 통해 사령관은 어떤 부대가 명령을 받을 수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태는 ''해제됨'' (사용 불가); ''사용 가능'' (20분 내에 이륙 가능); ''준비'' (5분 내 이륙); ''대기'' (조종사가 조종석에 탑승, 2분 내 이륙); ''이륙 및 위치 이동 중''; ''적 발견''; ''착륙 명령''; ''착륙 및 연료 보급/재무장''이었다. 토트 보드 옆에는 날씨판이 있었다. 여성 지원 공군 (WAAF) 플로터의 책임이었다. 토트 및 날씨판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해당 정보를 체인 위로 중계하는 것.
3. 4. 지휘 계통


다우딩 체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작전실"이었다. FCHQ와 그룹 본부에 주로 위치한 이 방들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낮은 층에는 대형 플로팅 테이블이 있었고, 플롯 주변과 위에 책상에 통신병이 배치되었다. 때로는 유리 뒤에 지휘관이 관찰하고 소통할 수 있는 플롯 위에 2층이 있었다.
전투 지휘는 그룹에게 위임되었다. 그룹 지휘관은 위에서 지도를 보면서 자신의 구역을 통해 적 항공기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토트 보드를 검토하고, 비행대를 선택하여 자신의 섹터에 스크램블하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명령은 "제92비행대, 적 21기를 요격하라"와 같이 간단할 수 있었다.
섹터는 해당 비행대의 사무실(종종 작은 초가집)에 전화하여 비행기에 스크램블하라고 명령했다. 편대를 구성한 후 섹터 통제관은 비행대에 핍스퀴크 시스템을 설정하여 추적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위치가 측정되어 섹터 플로팅 테이블로 전송되면 통제관은 편대 지휘관에게 지침을 전달했다. 벡터링은 1935년 빅긴 힐 훈련에서 개발된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되었으며, 섹터 지휘관은 아군 항공기의 위치를 그룹에서 전송된 적의 플롯과 비교하여 요격을 준비했다.
비행대, 기지 및 적 편대에는 통신 속도와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암호가 할당되었다. 예를 들어, 빅긴 힐의 섹터 통제소는 "새퍼(Sapper)"라는 이름이 지정되었고,[7] 빅긴 힐에 주둔한 제72비행대는 "테니스(Tennis)"로 알려졌다.[8] 따라서 적의 위치에 대한 업데이트는 "테니스 리더, 여기는 새퍼 통제소, 고객이 현재 메이드스톤 상공에 있으며, 벡터 0-9-0, 엔젤 2-0"과 같은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 이 예에서 빅긴 힐 통제관(새퍼)은 제72비행대(테니스)에게 메이드스톤 상공을 비행 중인 표적을 요격하기 위해 동쪽으로(벡터 0-9-0) 6,096m (엔젤 2-0)에서 비행하도록 요청하고 있었다.[9] 섹터는 또한 지역 대공포 및 풍선 방어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출격 후 전투기를 비행장으로 안전하게 복귀시키는 역할도 했다.
3. 5. 물리적 구조
FCHQ와 집단 통제 센터는 비행장과 떨어진 폭탄 방어 벙커에 위치해 있었으며, 대부분 전쟁 직전에 건설되었다. 통신은 GPO가 설치하고 폭탄으로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하 깊숙이 묻어 놓은 수백 마일에 달하는 전용 전화선을 통해 보장되었다.
구역 통제 센터는 비교적 작았고, 대부분 지상에 있는 벽돌로 된 단층 기와 지붕 구조물에 위치하여 공격에 취약했다. 1940년까지 대부분은 처마 높이까지 도달하는 주변의 흙 언덕 또는 "폭발 벽"으로 반쯤 보호되었다. 다행히도 루프트바페 정보는 이 방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대부분 그냥 두었다.
31일 급습으로 비긴 힐의 통제실이 파괴되었지만, 이는 우연한 폭탄 공격 때문이었다. 추가 예방 조치로 비행장과 떨어진 다른 장소에 긴급 통제실이 설치되어 효율성이 약간 떨어졌다. 예를 들어 켄리는 인근 케이터햄의 정육점 안에 있는 대체 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초기 방의 취약성이 인식되었고, 1930년대 확장 프로그램 동안 건설된 새로운 비행장에서는 폭탄 방지 Mk. II, L자형 구조물을 사용했다.
4. 한국 방공 시스템에 주는 시사점
4. 1. 한국 방공 시스템의 발전 방향
5. 문제점
다우딩 체계는 실전에서 효능을 입증했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FCHQ 필터실은 엄청난 양의 정보 유입으로 과부하가 발생했다. 1940년 1월의 작전 연구 보고서는 필터실이 레이더 보고를 상호 연관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나치게 복잡한 형태로 발전하여 통제 수준이 "끔찍할 정도로 낮다"고 결론지었다. 필터실은 단일 실패 지점이 될 수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었고, 트래퍼드 리 말로리를 비롯한 비평가들은 필터실을 그룹 사령부로 옮겨 중복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휴 다우딩은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여 갈등을 심화시켰다.
무선 통신 또한 문제였다. 전투기에 장착된 TR.9D 고주파 HF 무선 전화 세트는 두 개의 채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륙 전에만 주파수를 선택할 수 있어 다른 비행대와의 협력을 제한했다. TR.9는 저전력으로 인해 지상 대 공중에서는 약 40km, 공중 대 공중에서는 5km의 범위를 가져 수신 품질에 문제가 있었다.
체인 홈은 해안 "앞"의 항공기에 대한 정보만 생성할 수 있었고, 내륙에서는 관측 책임자(OC)에 의존해야 했다. OC는 시각에 의존했기 때문에 야간이나 악천후에는 정보 제공이 어려웠다. 1940년 여름은 이례적으로 날씨가 좋아 "전투기의 여름"이라고 불렸으며, OC는 독일 공습이 폭격기가 목표물을 볼 수 있는 날씨에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도움을 받았다.
11 그룹과 12 그룹 간의 갈등도 문제였다. 12 그룹 지휘관 트래퍼드 리 말로리는 11 그룹을 지원하는 대신 빅 윙 편성을 선호하여 루프트바페(독일 공군)를 공격하려 했지만, 빅 윙은 조립에 시간이 걸려 전투 초반에는 효과가 미미했다. 키스 파크가 11그룹 지휘를 맡게 되면서, 리 말로리는 다우딩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다우딩은 지휘 구조를 중앙 집중화하지 않아 그룹 지휘관들이 자체 전투를 통제하고 다른 그룹의 지원을 요청할 수만 있었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6. 결과 및 영향
이 시스템의 효과는 매우 컸으며, 전력 증강 개념의 널리 사용되는 예시로 남아있다.
레이더가 도입되기 전에는 요격 임무가 점점 더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 보였다. 폭격기의 속도와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요격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전투기의 성능 또한 향상되었지만, 조종사를 항공기에 탑승시키고 이륙하는 것과 같은 특정 측면에서 개선되지 않는 고정된 지연이 발생했다. 관측병과 음향 탐지라는 유일한 탐지 수단은 최상의 조건에서 약 20km 정도의 거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찰병이 공습을 알리고 전투기가 고도까지 상승하기 전에 폭격기는 목표물 위에 도달하곤 했다.
이러한 불균형한 힘의 균형 때문에, 레이더 도입 전 전투기 작전은 일반적으로 정찰 비행 또는 "제공 작전"의 형태를 취했으며, 적을 만날 희망으로 미리 정해진 경로 또는 지역을 따라 비행하도록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요격 임무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정찰대는 적을 전혀 보지 못한 채 귀환했다. 프랑스 공방전 당시 모든 부대에도 마찬가지였으며, 30%의 요격률이 일반적이고 50%는 우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속 부대의 공격의 경우, 공격자는 공격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해당 경로를 따라 이미 공중에 떠 있는 항공기만 마주하게 되므로 특정 지역에서 방어군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임의의 접근 경로를 따라 합리적인 수의 전투기가 있도록 하려면 모든 경로를 커버하기 위해 항상 엄청난 수의 항공기가 공중에 떠 있어야 했다. 전투기는 유지 보수 및 연료 보급에 대부분의 시간을 지상에서 보내기 때문에, 공중에 있는 전투기 수의 배수가 필요하며, 각 조종사가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만 비행할 수 있으므로 비슷한 규모의 조종사 수도 필요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했으며, "폭격기는 항상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널리 믿어진 이유 중 하나였다.
1934년 여름, 영국 공군(RAF)은 최대 35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 그 중 절반 정도는 런던에 접근을 시도하는 폭격기였고, 나머지 절반은 그들을 저지하려는 전투기였다. 초기 결과가 너무 처참하여 지휘관들은 결과를 개선하려 노력했으며, 결국 임무 전에 폭격기의 위치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전투기 관제사에게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격기의 70%는 전투기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런던에 도달했다. 그 결과는, 한 RAF 지휘관이 말했듯이, "무방비 상태와 절망감, 또는 적어도 불안감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다우딩 시스템이 제공하는 전장의 통일된 시야는 방어에 유리하게 판도를 바꾸었다.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정보를 전투기에게 신속하게 전송함으로써 적을 찾아 공격하는 능력이 극적으로 향상되었고,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전투기는 이륙하여 목표물로 직접 비행하여 교전한 후 기지로 직접 돌아왔다. 초기 작전에서 75%의 요격률은 일상적인 수준이었으며, 운영자들이 작업에 익숙해짐에 따라 이 숫자는 계속 개선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날 무렵에는 90% 이상의 요격률이 흔해졌고, 여러 차례의 공습은 100%의 요격률을 기록했다. 수치상으로 볼 때, 전투 사령부는 "루프트바페"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전투기를 두 배 이상 보유한 것과 같았다.
영국에서 CH가 설치되는 동안 독일은 자체 레이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으며, 프레야 레이더로 알려진 훌륭한 조기 경보 시스템을 배치했다. 하지만 레이더에서 전투기로 정보를 전달하는 복잡성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심각하게 고려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9년 헬리고란트 만 해전에서 100대 이상의 독일 항공기가 소규모 RAF 폭격 부대를 맞이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그들 중 절반도 찾지 못했다. 이는 "루프트바페" 프레야가 공습을 목표물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지점에서 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다. 레이더 운영자가 전투기와 통신할 방법이 없었다. 전투기에 도달한 유일한 레이더 보고는 목표물 근처의 해군 프레야에서 온 것이었고, 상황을 개선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진주만 공격 당시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오파나 레이더 기지는 일본 항공기를 섬에 도달하기 약 한 시간 전에 탐지했다. 그들은 그러한 정보를 배포하는 통신 사무실에 전화하여 보고했다. 사무실은 그날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편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그 당시 동쪽에 위치한 이들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통신 장교 커밋 타일러 중위는 레이더 기지가 폭격기를 발견했지만 경고를 전달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일본의 공격은 저항 없이 진행되었다.
다우딩 시스템의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야만 효과적인 방어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피터 타운젠드(RAF 장교)는 독일군은 영국의 레이더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레이더가 '본' 내용이 그렇게 정교한 통신 시스템을 통해 공중의 전투기 조종사에게 전달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언급했다.
초기 전쟁 기간 동안 "루프트바페"는 이 시스템의 가치를 일관되게 과소평가했다. 1940년 7월 16일 "루프트바페" 정보 보고서는 통신 감청을 통해 알고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선례에 대한 세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8월 7일의 후속 보고서에서는 이 시스템에 대해 언급했지만, 전투기를 해당 구역에 묶어 대규모 공습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과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제안했을 뿐이었다.
전후 즉시 영국 역사학자들과 이 사건을 논의하는 동안 에르하르트 밀히와 아돌프 갈란트는 초기 공습 동안 하나 또는 두 개의 CH 기지가 파괴되었을 수 있지만, 어려운 목표임이 입증되었다고 믿음을 표명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여러 기지가 한동안 운영을 중단했고, 다른 기지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을 인터뷰한 역사학자들은 "그들은 요격 기술에 대한 전투 사령부의 RDF 기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는 그 기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이 얼마나 당혹스러울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라고 언급했다.
갈란트는 전쟁 후 처음부터 영국은 전쟁 기간 내내 결코 균형을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레이더와 전투 통제 네트워크 및 조직이었다고 언급하며,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씁쓸한 놀라움이었고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으며, 우리는 탁월하게 잘 조직되고 단호한 영국 본토 방어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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