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구는 대만 타이중시 북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타이중시의 구(區) 중 하나이다. 아열대 기후에 속하며, 토란, 사탕수수, 쌀, 파, 고구마, 여주 등의 농산물 생산지로 유명하다. 자이언트 자전거 회사의 본사가 위치해 있으며, 타이완 철로 관리국 해안선과 다자역, 리난역이 지나간다. 주요 관광지로는 대갑 진란궁, 톄차오산 풍경 특정 구역 등이 있으며, 대갑 마조 순례 행사가 매년 열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타이중시의 행정 구역 - 스강구 스강구는 타이중시 동북부에 위치한 작은 구로, 다자 갑과 신서하 사이에 있으며, 과거 파제족 거주지였으나 현재는 스강댐, 토우 커자 문화관, 둥펑 자전거 녹도 등의 관광 명소를 가지고 있다.
타이중시의 행정 구역 - 룽징구 타이중시 서쪽에 위치한 룽징구는 원래 파포라족 원주민 거주지였으나 일본 통치 시대에 개칭되었고, 동쪽은 다두 고원에 위치하며, 타이중 화력 발전소와 둥하이 별장 야시장, 룽무징 등의 관광 명소가 있다.
다자 구는 대만 중부의 연안 지역, 타이중시의 북서부, 다자시(大甲渓) 하류의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와이푸구와, 서쪽은 대만 해협 및 다안구와, 남쪽은 다자시를 사이에 두고 칭수이구와, 북쪽은 먀오리현위안리진과 접하고 있다. 남북은 약 8.34km, 동서는 약 9.07km이다. 구내에는 다자시와 다안시(大安渓)가 남부 및 중부를 흐르고 있다.
기후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고, 연평균 기온은 24°C 전후이다. 지리 조건과 계절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봄은 한기와 난기가 충돌해 비가 많고, 여름은 남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산간부에서 대량의 비가 내리며, 태풍의 영향을 받아 매우 습도가 높고 강우량이 많다. 5월 ~ 8월까지의 강수량은 평균 200mm 이상이며, 연 강수량의 2/3를 차지한다. 가을이 되면 9월 하순부터 2월까지, 북동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건조하고, 또 강풍에 휩쓸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 때문에 연안에는 강풍을 피하기 위한 방풍림이 펼쳐져 있다.[4][5]
3. 역사
다자(타이코로 표기)와 주변 지역 지도 (1944)
다자구 지역은 본래 대만 원주민 중 하나인 평포족 타오카스족(Taokaseng)이 거주하며 사냥과 농경을 하던 곳이다. 1669년경 정성공 세력이 철참산 일대에 둔전을 설치하면서 한족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후 청나라 통치 시기인 1701년 해금 정책 완화 이후 푸젠성, 특히 취안저우 출신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되며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초기 정착민들은 수리 시설을 정비하고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진란궁을 비롯한 사찰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점차 마을을 발전시켰다.
1732년 진란궁 건립 이후 다자구는 점차 농촌 집락에서 벗어나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816년에는 순검사(巡檢司)가 이전해 왔고, 1827년에는 방어와 도시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석조 성벽(다자구 석보)이 축조되기도 했다. 이 시기 다자구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성하는 상업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1895년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다자구는 근대적인 도시 계획을 통해 큰 변화를 맞이했다. 1905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친 시구 개정을 통해 기존의 성벽이 철거되고, 해안선 철도 개통과 함께 역 주변이 개발되었으며, 바둑판 모양의 도로망이 정비되는 등 현대적인 도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화민국 시대에 들어서도 시가지는 꾸준히 확장되었다. 일본 통치 시대에 계획된 도시 구조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1974년과 1981년의 도시 계획을 통해 외곽 도로 건설, 주택지 및 공업지 조성 등이 이루어졌다. 과거 타이중현의 향이었으나, 2010년 12월 25일 타이중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2]
3. 1. 초기 역사
한족이 이주하기 전, 다자구 지역에는 원주민인 평포족 타오카스족( Taokas영어 )이 거주하며 사냥과 농업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당시 이 지역 평포족은 '붕산팔사(蓬山八社)'라 불리는 집락을 이루었으며, 다자구 내에는 동사(東社, 현재의 마밍푸), 서사(西社, 현재의 의화리·덕화리), 쌍료(雙寮, 건흥리), 린난(日南, 일남리)의 4개 분사가 있었다.
한족의 유입은 1669년경 정성공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성공은 무장 유국헌을 파견하여 다자구 철참산(鐵砧山)에서 군사적 목적의 둔전을 실시했는데, 이는 한족 정착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다자 국민중학교 부근의 '영반구(營盤口)'나 철참산의 '검정(劍井)'과 같은 지명은 당시의 흔적을 보여준다.
청나라 통치 초기에는 도항 제한으로 개발이 주춤했으나, 1701년 해금 정책 완화 이후 한족의 대규모 이주와 개발이 재개되었다. 다자구 이주민은 대부분 푸젠성, 특히 취안저우 출신이었다. 이들은 루강(鹿港)에서 북상하거나, 다안항(大安港) 또는 온항(溫港)으로 상륙하여 다자구로 들어왔다. 철참산 기슭 등에 집락이 형성되었으며, 초기에 북쪽 집락이 비교적 빨리 발전하여 현재 '구장(舊庄)'이라 불린다.
집락 발전은 수리 시설 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734년 린청주(林成祖)의 관개 정비 시작과 1780년 왕원칭(王元經)에 의한 관개 면적 확대로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주민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수리 시설을 따라 집락이 발전했으며, 사찰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국성묘(國姓廟)와 진란궁(鎮瀾宮)이 세워졌고, 중기 이후에는 정절사(貞節祠), 수신묘(水神廟), 진안궁(鎮安宮), 문창사묘(文昌祠廟) 등이 건립되어 지역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다자구 시가지(신장, 新庄)는 다자계(大甲溪)와 다안계(大安溪)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수해 피해가 적었고, 철참산과 수미산(水尾山) 기슭의 후리 대지에 자리 잡아 외부, 후리, 펑위안 등으로의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해 갔다. 1732년 진란궁 건립 이후 점차 도시로 성장했으며, 1787년 사찰 재건을 계기로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1816년에는 루강 순검사(巡檢司)가 이전해 오면서 행정 중심지의 기능도 갖추게 되었다.
1827년, 도시 방어와 위상을 높이기 위해 린총(林聰), 린자청(林甲成) 등의 제안으로 다자구 석보(石堡, 돌성)가 축조되었다. 불규칙한 타원형의 성벽은 길이 약 510장(丈), 높이 2장에 달했으며, 달걀 모양의 돌을 석회, 흑설탕, 쌀을 섞은 접착제로 쌓아 올렸다. 성벽 위에는 망루가 있었고 동(拱辰), 서(觀海), 남(薰風), 북(湛恩)의 4개 성문이 설치되었다. 1839년의 기록에는 "다자구 석보는...주민이 조밀하고 상인이 쇄도한다"고 적혀 있어, 당시 다자구가 행정 중심지이자 번성한 상업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성벽과 성문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다자구 시가지는 자연 발생적으로 불규칙하게 발전했다. 초기에는 대가(大街, 현재의 순천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확장되었고, 다안항의 물류 수송로가 정비되면서 서문가(西門街, 현재의 공작로)가 형성되었다. 1839년에는 교통 불편 해소를 위해 폭 5m의 벽돌 포장 도로인 동문의로(東門義路)가 건설되어 상업 중심지를 이루었다. 당시 주요 상업 도로였던 대가는 폭이 6척이었고 돌로 포장되었다. 북문가에는 미곡 시장이, 무영로구(武營路口, 현재 제1시장 부근)에는 어시장이 있었으며, 순검사, 수비서(守備署), 병영 등의 시설도 자리 잡았다.
1895년일본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다자구는 도시 계획을 통해 큰 변화를 겪었다. 1905년 제1차 시구 개정으로 석보 성벽이 철거되기 시작하여 1908년 동문, 1909년 남문과 북문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1922년해안선 철도가 개통되고 다자역이 설치되면서 역 주변과 역전로(현재의 장공로)가 개발되어 상업 활동 범위가 확장되었다. 기존의 대가(순천로)는 폭 18척으로 확장되고 하수 시설이 정비되었으며, 도로변 건물들은 일본식 신식 건축(다이쇼/쇼와 양식)으로 재건축되어 도시 경관이 변화했다.
다자는 한때 타이중현의 도시 향이었다. 2010년 12월 25일, 타이중의 새로운 직할시의 구로 승격되었다.[2]
3. 2. 청나라 통치 시대
청나라가 대만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초기에는 대만으로의 도항 제한 정책으로 인해 개발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701년 해금 정책이 완화되면서 한족에 의한 대규모 개발이 다시 시작되었고, 다자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다자구로 이주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푸젠성, 특히 취안저우 출신이었다. 이들은 루강에서 상륙하여 북쪽으로 개척하거나, 다자구 북서쪽 5km 지점의 다안항 또는 온항에서 상륙하여 다안정구, 하구구를 거쳐 다자구에 정착하는 경로를 따랐다. 점차 철참산 기슭의 정점대보(현재 제1공묘 부근) 및 사회미정점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특히 북쪽 끝 마을이 비교적 일찍 발전하여 현재 이 지역은 "구장"이라고 불린다.
이 시기 마을의 발전은 수리 시설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734년 린청주가 다자구 개발과 함께 관개 시설 정비를 시작했고, 1780년에는 왕원칭이 다자구 촌(현재 호안대촌)을 정비하여 관개 면적을 크게 늘렸다. 이러한 수리 시설 정비는 개인 농민이 아닌 집단의 자금과 노동력이 필요한 대규모 사업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주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마을이 발전할 수 있었다. 생활 수준 향상은 사회 분업과 거래의 발달로 이어져 거리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동시에 민간 신앙을 중심으로 사찰이 건립되어 지역 사회의 방위, 교육, 거래 등의 중심 역할을 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국성묘와 진란궁 등이 세워졌고, 중기 이후에는 주민들에 의해 정절사, 수신묘, 진안궁, 문창사묘 등이 잇달아 건립되었다.
다자구 시가지는 다자계와 다안계 두 하천 사이에 위치했지만,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어 수해 피해가 적었다. 또한 철참산과 수미산 기슭에 펼쳐진 후리 대지에 자리 잡아 외부, 후리, 펑위안 등지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1732년 진란궁이 건립된 후 다자구는 점차 농촌 마을에서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787년 진란궁이 재건되면서 인근 농촌 주민들이 모여들어 상업 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자구 보 내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1816년에는 루강의 순검서가 다자구로 이전하면서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더해졌다. 1827년, 도시의 방어 기능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린총, 린자청 등이 성벽 축조를 제안하여 다자구 석보가 건설되었다. 성벽은 시가지를 불규칙한 형태로 둘러쌌으며, 길이는 510장, 높이는 2장에 달했다. 달걀 모양의 돌을 쌓고 돌 사이는 석회, 흑당, 쌀을 섞은 것으로 메웠으며, 성벽 위에는 망루가 설치되었다. 동서남북 네 개의 문도 설치되었는데, 동문은 공신(拱辰), 서문은 관해(觀海), 남문은 훈풍(薰風), 북문은 담은(覃恩)이라 불렸다. (이 성벽과 문들은 일본 통치 시대에 철거되었다.) 1839년 동문 의로 비기에는 "다자구 석보는 담장의 경계, 남북의 요충지. 주민이 조밀하고 상인이 몰려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다자구가 행정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2]
다자구 시가지의 발전은 처음에는 대가(현재의 순천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외부, 후리, 다안 지역의 농촌 마을과 연결되고, 다안항에서 들어온 화물 수송로가 정비되면서 서문가(현재의 콩취로)가 형성되었다. 1839년에는 후리 지역과의 교통 편의를 위해 지역 유력자들이 폭 5m의 벽돌 포장 도로인 동문의로를 건설했다. 이 도로는 다자구 가, 서문 가, 삼각 가와 함께 당시 상업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주요 상업 도로였던 대가는 폭이 6척이었고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북문가(현재 문무로에서 복덕사 사이의 순천로)에는 쌀 시장이, 무영로구(현재 제1시장 일대)에는 어시장이 들어섰다. 행정 시설로는 순검서가 현재의 순천로 전신국 자리에, 수비서와 병영은 옛 순천국소교 터에 위치했다.
3. 3. 일본 통치 시대
1895년일본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면서, 다자구 시가지는 두 차례의 도시 계획을 통해 큰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 시구 개정은 1905년에 이루어졌으며,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성벽 철거였다. 1827년 방어와 위엄을 위해 축조되었던 석조 성벽은 이 시기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여, 1908년에는 동문이, 이듬해인 1909년에는 남문과 북문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도시 구조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해안선 철도가 개통되고 다자구에 역이 설치되면서 도시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역 주변과 짠첸로(현재의 장공로)가 새롭게 개발되었고,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기존 시가지에서 역 주변까지 확장되었다. 또한, 기존의 주요 도로였던 대가(大街, 현재의 순천로)는 폭이 16.2m로 넓혀지고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지는 등 현대적인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도로 양쪽의 건물들도 '다이쇼식', '쇼와식'으로 불리는 새로운 일본식 건축 양식으로 재건축되면서, 점차 일본 문화의 색채가 짙어진 도시 경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4년에 실시된 제2차 시구 개정은 도시 구조를 더욱 크게 바꾸었다. 기존의 중심가였던 대가(현재의 순천로)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새로운 도로들이 건설되면서, 오늘날 볼 수 있는 바둑판 모양의 도시 골격이 형성되었다. 도로 폭도 대로 16.2m, 중로 12.7m, 소로 7.25m로 규격화되었으며, 종관 공로(현재의 중산로), 다안가(大安街, 현재의 문무로), 서문가(西門街, 현재의 콩취로) 등 주요 도로들이 이때 정비되었다.
이러한 일본 통치 시대의 도시 계획과 개발은 다자구를 근대적인 도시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식민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변화였으며 전통적인 도시 경관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3. 4. 중화민국 시대
대만 광복 후, 다자구의 시가지는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그러나 중심지는 여전히 진란궁을 중심으로 한 순천로 주변에 머물렀는데, 이는 동쪽의 산과 철도로 인한 지리적 제약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초기 발전은 옛 성곽 안의 조양, 다자구, 순천, 공문 4개 리를 기반으로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남쪽의 남양, 훈풍 2개 리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1960년대에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평안, 장미리가 새로 생겨났다. 이후 동쪽의 중산리와 북쪽의 문무리가 발전했으며, 1969년에는 장공로 서쪽 끝에 신미리가 설치되었다.
다자구 시가지는 남북 축인 순천로와 중산로, 동서 축인 문무로와 광명로를 중심으로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갔다. 전후에는 일본 통치 시대에 계획된 바둑판 모양의 도로를 기반으로 발전했지만, 1974년 다자구진 도시 계획과 1981년 일남 지역 도시 계획이 발표되면서 새로운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 계획들은 기존 도로망 외에 대만당업철도 부지를 활용한 외곽 순환 도로(현재의 경국로) 건설과 함께, 동서남북 각지에 주택지와 공업지를 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다자구는 일본 통치 시대에 형성된 바둑판 모양의 구 시가지와 새로 개발된 신시가지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도시로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다자구는 다양한 특산물과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토란과 사탕수수가 유명하며, 이 외에도 쌀, 파, 고구마, 여주 등이 생산된다. 특산품으로는 버터 향이 나는 얇고 바삭한 페이스트리인 나이요우 수빙 (奶油酥餅|나이유수빙중국어)과 토란으로 만든 디저트인 자색 옥 수 등이 있다. 또한 다자 동부 도기, 위터우 등과 같은 공예품과 짚모자 및 관련 제품도 생산된다.
자전거 산업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세계적인 자전거 제조 기업인 자이언트가 1972년 다자구에서 설립되었으며, 한때 본사가 이곳에 있었다.
6. 교통
다자역
타이완 철로관리국 해안선이 지나며 다자역과 난르역이 위치한다. 타이완 고속철도가 구 동부를 통과하지만, 현재 계획된 역은 없다.
매년 봄 타이완에서는 대갑 진란궁의 마조를 모시고 진행하는 '대갑 마조 순례'(大甲媽祖遶境進香)가 열린다. 이는 타이완의 중요한 종교 문화 행사 중 하나로, '대갑 마조 관광 문화 축제'의 핵심 행사이다.
이 순례는 타이중시(옛 타이중 현 포함), 창화현, 윈린현, 자이현 등 여러 지역을 통과하며 진행된다. 전체 순례 거리는 330km에 달하고, 7박 8일 이상 소요되며 80개가 넘는 사원을 경유한다. 순례 기간에는 타이완 전통 민속 예술 공연과 현대적인 예술 공연이 함께 펼쳐져 축제의 흥을 돋우고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신자들은 마조 신앙을 공유하며 여러 현과 시를 함께 걷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우정을 나눈다. 7박 8일간의 여정은 종교적 경건함과 활기찬 축제 분위기가 공존하며, 고대와 현대, 지역과 외국의 다양한 문화 공연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는 타이완 사람들의 깊은 종교적 신념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중국 본토의 마조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 순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는 중국 본토 약 40개 사원에서 2,000명 이상의 신자가 순례에 참여했으며, 당시 마잉주 전 총통도 참석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