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테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테군은 10세기 전반에 시노부군에서 분할되어 탄생한 일본 후쿠시마현의 군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세력권에 속했으며, 이후 다테 씨가 지배했다. 에도 시대에는 양잠업이 장려되어 번성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이와시로국에 속했다. 2006년 다테정 등 5개 정이 합병하여 다테시가 되었고, 2008년 이노정이 후쿠시마시에 편입되면서 현재는 가와마타정, 고오리정, 구니미정 3개의 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와시로국의 군 - 아다치군
    후쿠시마현에 존재했던 아다치군은 906년 안적군에서 분리되어 설립, 메이지 시대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1879년 공식 발족했으나 2007년 모토미야정과 시라사와촌의 합병으로 소멸했으며, 소멸 당시 오타마촌을 포함하고 과거 니혼마쓰시, 혼미야시 등의 지역을 포함했다.
  • 이와시로국의 군 - 야마군
    야마 군은 후쿠시마현에 위치하며 반다이정, 이나와시로정, 니시아이즈정, 기타시오바라촌으로 이루어져 있고 반다이산과 이나와시로호를 포함한 자연환경과 기타카타 라멘, 사케, 아이즈칠기 등 문화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 후쿠시마현의 군 - 후타바군
    후타바군은 1896년 설치된 후쿠시마현의 군으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귀환 곤란 지역이 되었으며, 현재 부흥과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후쿠시마현의 군 - 아다치군
    후쿠시마현에 존재했던 아다치군은 906년 안적군에서 분리되어 설립, 메이지 시대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1879년 공식 발족했으나 2007년 모토미야정과 시라사와촌의 합병으로 소멸했으며, 소멸 당시 오타마촌을 포함하고 과거 니혼마쓰시, 혼미야시 등의 지역을 포함했다.
  • 다테씨 - 후쿠시마성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성은 1413년 다테 모치무네가 축성한 다이부쓰성을 기원으로, 스기노메성으로 불리다 후쿠시마성으로 개칭되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번주가 교체되고 메이지 유신 이후 폐성되어 현재는 현청사와 공원이 조성된 터에서 다테씨 관련 유물이 발굴된다.
  • 다테씨 - 다테 히데무네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다테 히데무네는 오사카 전투 공으로 이요 우와지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번정 개혁을 통해 우와지마 번의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안정에 기여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다테군
지도
기본 정보
국가일본
지방도호쿠 지방
후쿠시마현
다테군 (伊達郡)
로마자 표기Date-gun
면적221.67 km²
행정 구역
자치체가와마타정
구니미정
고오리정

2. 역사

율령제에서 도국군제가 정비되었을 때, 처음에는 현재의 후쿠시마시와 거의 같은 지역과 다테군·다테시 지역을 합쳐 시노부군(信夫郡, 신부군)이었다(고대에는 신부는 忍(닌)으로도 표기되었다). 10세기 전반에 시노부군에서 다테군을 분할했다. 당시 율령제의 조용조(租庸調) 과세를 정비할 필요성에서 각 군의 인구를 거의 균일하게 하기 위해 조정이 군의 분할 및 주민의 강제 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특히 조정에서 보면 개척지였던 무쓰국에서는 이러한 재편성이 활발했다. 이 분할에서 구 시노부군 중, 오구라 향(小倉郷), 아키(安岐, 안기) 향, 미네코시(岑越, 잠월) 향, 와타리(曰理, 왈리) 향은 신 시노부군이 되었고, 다테 향과 시즈리베(靜戸, 정호) 향과 구와야마 향의 3향이 새롭게 다테군이 되었다.

다테 향은 아부쿠마강 서안 지역으로, 후세의 니시네 향(西根郷)으로 현재의 유노, 모니와, 코오리(桑折, 상절), 무쓰아이(睦合, 목합), 한다, 단자키(伊達崎, 이달기), 나가오카, 후지타, 코사카(小坂, 소판), 모리에노, 오키도, 오에다, 이사자와(五十沢, 오십택) 등이다. 시즈리베 향은 아부쿠마강 동안 지역으로, 후세의 히가시네 향(東根郷)으로 현재의 토미노, 야마후뉴, 시라네, 세키모토, 아와노, 야나가와, 오타, 가미호바라, 하시다자와, 토미나리, 호바라, 이시도, 료젠(霊山, 영산), 카케다, 오구니 등이다. 구와야마 향은 아부쿠마 고지 산간부로, 현재의 오아미기, 다이아미기, 토미타, 후쿠다, 코테, 오쿠보, 이이노, 타테기, 코테가와, 야마키야, 카와마타 등이다.

다테는 원래 인다쓰(因達)라고도 표기하며, '이다치' 또는 '이다테'라고 불렀다. 일설에 따르면 하리마국의 이타테 신사(이타테 병주 신사?)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다테시 서부 부근으로 이주하여 인다쓰 신사(다테 신사)를 받들면서 다테군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세력권이 되어, 후지와라 씨 일족인 사토 씨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토 씨는 시노부군과 다테군을 본거지로, 현재의 후쿠시마현 중부, 야마가타현 남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아이즈의 에니치지가 쇠퇴한 후에는 아이즈까지 세력권에 더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한 오슈 정벌 때, 다테군 쿠니미정의 아쓰카시야마 (당시에는 쿠니미산이라고도 함) 산록에 오슈 후지와라 씨의 방어선이 쳐져, 사실상의 결전장이 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킨 후, 사토 씨는 멸망을 면했지만 시노부 장원(시노부군의 마츠카와 이북)으로 밀려났고, 다테군은 사토 모토하루를 격파한 히타치 뉴도 넨사이에게 주어졌다. 넨사이는 히타치 국이사군을 본거지로 했던 간토 무사로, 다테군으로 옮겨 다테 씨를 칭하게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시대에 다테 마사무네가 현재의 미야기현・이와테현 남부로 전봉될 때까지 다테 씨의 지배가 이어진다. 또한, 메이지 유신까지 다테 씨의 공식적인 읽기는 '이다테'였다. 에도 시대에 '이다테' 또는 '이다치'에서 '다테'로 읽는 법이 변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토 씨는 그 후 이세 국으로 개역되거나, 일부는 다테 씨나 소마 씨 등에 섬기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 요네자와번 우에스기 씨의 영지였던 시기, 현재 후쿠시마시 북부의 스리카미강에서 다테군의 코오리정, 구니미정, 다테시 야나가와정에 이르는 거대한 용수로 "니시네 제방"이 건설되었다. 암반을 뚫어 여러 개의 터널을 만든 대공사였다. 이것으로 다테군 북부의 니시네 고(아부쿠마강 서안 지역: 반대로 동안 지역을 히가시네 고라고 부른다)의 경작지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제1기 공사로 니시네 제방 하제방이 만들어져, 코오리정 다테자키까지 13km의 수로가 아부쿠마강에 합류한다. 제2기 공사가 특히 난공사였던 우와제방으로, 다테시 야나가와정 이사자와까지 29km의 수로이다. 이 공사를 지휘한 요네자와번 봉행 후루카와 젠베이와 군역 사토 신에몬은 현재, 제방 관계자들이 메이지 시대 19년에 건립한 니시네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 후, 우에스기 쓰라노리(기라 요시히사의 아들) 가독상속 시 (1664년)에 시노부군과 다테군은 에도 막부에 징수되어 천령지가 된다.

도요토미 정권 시대를 거쳐 혼다 씨 후쿠시마번 시대까지, 다테군과 시노부군은 일괄 지배였지만, 홋타 씨 개역 후, 다테군 야나가와에는 마쓰다이라 씨 야나가와번이 설치되어, 다테군·시노부군의 일괄 지배는 종언을 맞이했다. 곧 시노부군에는 홋타 씨 후쿠시마번이 설치되었고, 홋타 씨 개역 후에는 이타쿠라 씨 후쿠시마번이 설치되었지만, 어느 쪽도 시노부군의 일부만을 영유하지 않아, 시노부군과 함께 다테군은 천령, 소번, 타번 비지가 마을 단위로 복잡하게 뒤섞이게 되었다. 다테군 내의 마을들은 후쿠시마번령, 야나가와번령, 시모테도 번령, 코오리번령, 코오리 진야 관할의 천령, 카와마타 진야 관할의 천령 등이 정신없이 변천하며 뒤섞였다.

야나가와는 번이 되거나, 타번의 비지(맡은 땅)가 되거나, 천령이 되거나 하는 등 변천이 격심하다.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부터 번성한 센다이번 다테 씨의 출신지로서의 지명도(브랜드)로부터, 종종 다이묘의 영지 교체의 대체지, 임시 맡은 땅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마쓰다이라 씨 야나가와번의 마지막 번주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대립한 것으로 유명한 오와리번의 도쿠가와 무네하루이다. 야나가와 번주 시대는 마쓰다이라 미치하루. 야나가와 번주가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했기 때문에, 한 번 야나가와번은 폐번되었다.

한편, 막부는 국내에서의 생사의 자급과 질의 향상을 진행하여 막부에 의한 생사 생산의 독점을 도모하려고 계획하고, 누에의 육성에 적합한 다테군 일대에 양잠업을 장려했다. 이 때문에, 동군은 전국 굴지의 양잠 지대가 되었다. 안에이 2년 (1773년), 다테군·시노부군의 17개 마을은 영업세를 막부에 납부하여 '''오슈 잠종 본장'''의 명칭(등록 상표)을 얻었다.


  • 겐나 4년(1618년) - 니시네 시모세키 착공.
  • 간에이 2년(1625년) - 니시네 카미세키 완성. 비용은 5만 7천 료.
  • 만지 3년(1659년) - 우에스기 가문에 의한 신다쓰 검지.
  • 간분 4년(1664년) - 우에스기 가문의 후계자 소동으로 우에스기 번은 30만 석에서 15만 석으로 감봉. 다테 군과 시노부 군은 천령이 됨.
  • 간분 11년(1671년) - 신다쓰 검지.
  • 엔포 7년(1679년) - 시노부 군과 함께 후쿠시마 번(혼다 씨 1대)이 됨.
  • 덴와 2년(1682년) - 혼다 씨가 하리마히메지 번으로 전봉되면서 다테 군은 천령이 됨. 이후 다테 군의 대부분은 메이지 유신까지 천령이 되었다.
  • 칸엔 2년(1749년) - 대흉작으로 신다쓰 양군 막령 소백성 일규·소원. 이른바 텐구 소동.
  • 호레키 5년(1755년) - 대흉작, 수해.
  • 메이와 연간(1764년 - 1769년경) - 후쿠시마의 해운업자인 와타나베 주로에몬이 아부쿠마 강의 개수. 뱃길이 열림.
  • 안에이 1년(1772년) - 대흉작.
  • 텐메이 3년(1783년) - 봄의 장마, 여름에 아사마 산 분화로 대흉작. 텐메이 대기근이 시작됨.
  • 텐메이 4년(1784년) - 기근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잇따름.
  • 간세이 8년(1796년) - 흉작. 쌀이 수확되지 않아 쌀값 폭등.
  • 간세이 10년(1798년) - 쌀값 폭등으로 백성 소동.
  • 분세이 8년(1825년) - 대흉작.
  • 덴포 4년(1833년) - 대흉작. 덴포 대기근 시작.
  • 덴포 6년(1835년) - 흉작.
  • 덴포 7년(1836년) - 대흉작. 굶어 죽는 사람이 잇따름.
  • 가에이 4년(1851년) - 시노부 군·다테 군에서 신다쓰 2군 백성 일규.
  • 가에이 5년(1853년) - 카케다에 구소 렌(소작인의 상호부조 조직)이 생김.
  • 게이오 2년(1866년) - 시노부 군 다테 군 180개 촌에서 5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요나오시 일규(신다쓰 소동 타도)가 일어남.


1869년 이후 이와시로국에 소속되었다. 후쿠시마 분지는 막말 이후의 양잠 호황으로 인해 메이지 시대에는 100개 이상의 은행이 난립했다.(야나카와마치, 다테시 참조)

메이지 12년(1879년)에 이다테군청은 현재의 다테시 호바라마치에 설치되었지만, 코오리에서 유치 운동이 벌어져 메이지 16년(1883년)에 현재의 이다테군 코오리마치로 이전되었다. 현재 코오리마치에서는 당시의 화양 절충 건축의 군청 건물이 구 이다테군청으로 유지, 공개되고 있으며,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 이다테군청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정촌 합병 흐름으로, 시노부군의 전역과 이다테군과 아다치군의 일부는 현재 후쿠시마시가 되었다. 현재 시노부군은 없다. 남은 이다테군 9개 정 중 5개 정은 2006년 1월 1일에 합병하여 다테시가 되었다. 또한, 후쿠시마시(구 시노부군) 동부와 이다테군 서부의 평야부를 후쿠시마 분지 또는 신다쓰 평야라고 부른다. 이다테군·다테시와 후쿠시마시(시노부군)는 예로부터 같은 문화권, 경제권, 생활권으로서 불가분한 상태에 있으며, 현재도 그 상황은 변함없다. 이다테군 내 많은 정민들이 후쿠시마시나 다테시로 통근 또는 통학하고 있다.

2. 1. 고대 - 헤이안 시대

율령제에서 도국군제가 정비되었을 때, 처음에는 현재의 후쿠시마시와 거의 같은 지역과 다테군·다테시 지역을 합쳐 시노부군(信夫郡, 신부군)이었다(고대에는 신부는 忍(닌)으로도 표기되었다). 10세기 전반에 시노부군에서 다테군을 분할했다. 당시 율령제의 조용조(租庸調) 과세를 정비할 필요성에서 각 군의 인구를 거의 균일하게 하기 위해 조정이 군의 분할 및 주민의 강제 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특히 조정에서 보면 개척지였던 무쓰국에서는 이러한 재편성이 활발했다. 이 분할에서 구 시노부군 중, 오구라 향(小倉郷), 아키(安岐, 안기) 향, 미네코시(岑越, 잠월) 향, 와타리(曰理, 왈리) 향은 신 시노부군이 되었고, 다테 향과 시즈리베(靜戸, 정호) 향과 구와야마 향의 3향이 새롭게 다테군이 되었다.

다테 향은 아부쿠마강 서안 지역으로, 후세의 니시네 향(西根郷)으로 현재의 유노, 모니와, 코오리(桑折, 상절), 무쓰아이(睦合, 목합), 한다, 단자키(伊達崎, 이달기), 나가오카, 후지타, 코사카(小坂, 소판), 모리에노, 오키도, 오에다, 이사자와(五十沢, 오십택) 등이다. 시즈리베 향은 아부쿠마강 동안 지역으로, 후세의 히가시네 향(東根郷)으로 현재의 토미노, 야마후뉴, 시라네, 세키모토, 아와노, 야나가와, 오타, 가미호바라, 하시다자와, 토미나리, 호바라, 이시도, 료젠(霊山, 영산), 카케다, 오구니 등이다. 구와야마 향은 아부쿠마 고지 산간부로, 현재의 오아미기, 다이아미기, 토미타, 후쿠다, 코테, 오쿠보, 이이노, 타테기, 코테가와, 야마키야, 카와마타 등이다.

다테는 원래 인다쓰(因達)라고도 표기하며, '이다치' 또는 '이다테'라고 불렀다. 일설에 따르면 하리마국의 이타테 신사(이타테 병주 신사?)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다테시 서부 부근으로 이주하여 인다쓰 신사(다테 신사)를 받들면서 다테군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2. 2. 헤이안 시대 말기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세력권이 되어, 후지와라 씨 일족인 사토 씨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토 씨는 시노부군과 다테군을 본거지로, 현재의 후쿠시마현 중부, 야마가타현 남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아이즈의 에니치지가 쇠퇴한 후에는 아이즈까지 세력권에 더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한 오슈 정벌 때, 다테군 쿠니미정의 아쓰카시야마 (당시에는 쿠니미산이라고도 함) 산록에 오슈 후지와라 씨의 방어선이 쳐져, 사실상의 결전장이 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킨 후, 사토 씨는 멸망을 면했지만 시노부 장원(시노부군의 마츠카와 이북)으로 밀려났고, 다테군은 사토 모토하루를 격파한 히타치 뉴도 넨사이에게 주어졌다. 넨사이는 히타치 국이사군을 본거지로 했던 간토 무사로, 다테군으로 옮겨 다테 씨를 칭하게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시대에 다테 마사무네가 현재의 미야기현・이와테현 남부로 전봉될 때까지 다테 씨의 지배가 이어진다. 또한, 메이지 유신까지 다테 씨의 공식적인 읽기는 '이다테'였다. 에도 시대에 '이다테' 또는 '이다치'에서 '다테'로 읽는 법이 변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토 씨는 그 후 이세 국으로 개역되거나, 일부는 다테 씨나 소마 씨 등에 섬기게 되었다.

2. 3. 에도 시대

에도 시대 초, 요네자와번 우에스기 씨의 영지였던 시기, 현재 후쿠시마시 북부의 스리카미강에서 다테군의 코오리정, 구니미정, 다테시 야나가와정에 이르는 거대한 용수로 "니시네 제방"이 건설되었다. 암반을 뚫어 여러 개의 터널을 만든 대공사였다. 이것으로 다테군 북부의 니시네 고(아부쿠마강 서안 지역: 반대로 동안 지역을 히가시네 고라고 부른다)의 경작지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제1기 공사로 니시네 제방 하제방이 만들어져, 코오리정 다테자키까지 13km의 수로가 아부쿠마강에 합류한다. 제2기 공사가 특히 난공사였던 우와제방으로, 다테시 야나가와정 이사자와까지 29km의 수로이다. 이 공사를 지휘한 요네자와번 봉행 후루카와 젠베이와 군역 사토 신에몬은 현재, 제방 관계자들이 메이지 시대 19년에 건립한 니시네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 후, 우에스기 쓰라노리(기라 요시히사의 아들) 가독상속 시 (1664년)에 시노부군과 다테군은 에도 막부에 징수되어 천령지가 된다.

도요토미 정권 시대를 거쳐 혼다 씨 후쿠시마번 시대까지, 다테군과 시노부군은 일괄 지배였지만, 홋타 씨 개역 후, 다테군 야나가와에는 마쓰다이라 씨 야나가와번이 설치되어, 다테군·시노부군의 일괄 지배는 종언을 맞이했다. 곧 시노부군에는 홋타 씨 후쿠시마번이 설치되었고, 홋타 씨 개역 후에는 이타쿠라 씨 후쿠시마번이 설치되었지만, 어느 쪽도 시노부군의 일부만을 영유하지 않아, 시노부군과 함께 다테군은 천령, 소번, 타번 비지가 마을 단위로 복잡하게 뒤섞이게 되었다. 다테군 내의 마을들은 후쿠시마번령, 야나가와번령, 시모테도 번령, 코오리번령, 코오리 진야 관할의 천령, 카와마타 진야 관할의 천령 등이 정신없이 변천하며 뒤섞였다.

야나가와는 번이 되거나, 타번의 비지(맡은 땅)가 되거나, 천령이 되거나 하는 등 변천이 격심하다.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부터 번성한 센다이번 다테 씨의 출신지로서의 지명도(브랜드)로부터, 종종 다이묘의 영지 교체의 대체지, 임시 맡은 땅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마쓰다이라 씨 야나가와번의 마지막 번주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대립한 것으로 유명한 오와리번의 도쿠가와 무네하루이다. 야나가와 번주 시대는 마쓰다이라 미치하루. 야나가와 번주가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했기 때문에, 한 번 야나가와번은 폐번되었다.

한편, 막부는 국내에서의 생사의 자급과 질의 향상을 진행하여 막부에 의한 생사 생산의 독점을 도모하려고 계획하고, 누에의 육성에 적합한 다테군 일대에 양잠업을 장려했다. 이 때문에, 동군은 전국 굴지의 양잠 지대가 되었다. 안에이 2년 (1773년), 다테군·시노부군의 17개 마을은 영업세를 막부에 납부하여 '''오슈 잠종 본장'''의 명칭(등록 상표)을 얻었다.

  • 겐나 4년(1618년) - 니시네 시모세키 착공.
  • 간에이 2년(1625년) - 니시네 카미세키 완성. 비용은 5만 7천 료.
  • 만지 3년(1659년) - 우에스기 가문에 의한 신다쓰 검지.
  • 간분 4년(1664년) - 우에스기 가문의 후계자 소동으로 우에스기 번은 30만 석에서 15만 석으로 감봉. 다테 군과 시노부 군은 천령이 됨.
  • 간분 11년(1671년) - 신다쓰 검지.
  • 엔포 7년(1679년) - 시노부 군과 함께 후쿠시마 번(혼다 씨 1대)이 됨.
  • 덴와 2년(1682년) - 혼다 씨가 하리마히메지 번으로 전봉되면서 다테 군은 천령이 됨. 이후 다테 군의 대부분은 메이지 유신까지 천령이 되었다.
  • 칸엔 2년(1749년) - 대흉작으로 신다쓰 양군 막령 소백성 일규·소원. 이른바 텐구 소동.
  • 호레키 5년(1755년) - 대흉작, 수해.
  • 메이와 연간(1764년 - 1769년경) - 후쿠시마의 해운업자인 와타나베 주로에몬이 아부쿠마 강의 개수. 뱃길이 열림.
  • 안에이 1년(1772년) - 대흉작.
  • 텐메이 3년(1783년) - 봄의 장마, 여름에 아사마 산 분화로 대흉작. 텐메이 대기근이 시작됨.
  • 텐메이 4년(1784년) - 기근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잇따름.
  • 간세이 8년(1796년) - 흉작. 쌀이 수확되지 않아 쌀값 폭등.
  • 간세이 10년(1798년) - 쌀값 폭등으로 백성 소동.
  • 분세이 8년(1825년) - 대흉작.
  • 덴포 4년(1833년) - 대흉작. 덴포 대기근 시작.
  • 덴포 6년(1835년) - 흉작.
  • 덴포 7년(1836년) - 대흉작. 굶어 죽는 사람이 잇따름.
  • 가에이 4년(1851년) - 시노부 군·다테 군에서 신다쓰 2군 백성 일규.
  • 가에이 5년(1853년) - 카케다에 구소 렌(소작인의 상호부조 조직)이 생김.
  • 게이오 2년(1866년) - 시노부 군 다테 군 180개 촌에서 5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요나오시 일규(신다쓰 소동 타도)가 일어남.

2. 4. 메이지 시대 - 헤이세이 시대

1869년 이후 이와시로국에 소속되었다. 후쿠시마 분지는 막말 이후의 양잠 호황으로 인해 메이지 시대에는 100개 이상의 은행이 난립했다.(야나카와마치, 다테시 참조)

메이지 12년(1879년)에 이다테군청은 현재의 다테시 호바라마치에 설치되었지만, 코오리에서 유치 운동이 벌어져 메이지 16년(1883년)에 현재의 이다테군 코오리마치로 이전되었다. 현재 코오리마치에서는 당시의 화양 절충 건축의 군청 건물이 구 이다테군청으로 유지, 공개되고 있으며,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정촌 합병 흐름으로, 시노부군의 전역과 이다테군과 아다치군의 일부는 현재 후쿠시마시가 되었다. 현재 시노부군은 없다. 남은 이다테군 9개 정 중 5개 정은 2006년 1월 1일에 합병하여 다테시가 되었다. 또한, 후쿠시마시(구 시노부군) 동부와 이다테군 서부의 평야부를 후쿠시마 분지 또는 신다쓰 평야라고 부른다. 이다테군·다테시와 후쿠시마시(시노부군)는 예로부터 같은 문화권, 경제권, 생활권으로서 불가분한 상태에 있으며, 현재도 그 상황은 변함없다. 이다테군 내 많은 정민들이 후쿠시마시나 다테시로 통근 또는 통학하고 있다.

3. 지세

1878년(메이지 12년)에 행정 구역으로 발족한 당시의 군역은 가와마타정 일부(야마키야)를 제외하고, 다테시의 전역, 후쿠시마시의 일부 (이이노정 각 정 및 다테코야마·오나미·이이자카정 히가시유노·이이자카정 유노·이이자카정 모니와·그리고 이이자카정 나카노 자 항갑악·토자와·가미오가와·요헤이지)를 포함한다.

후쿠시마 분지라는 비교적 비옥한 토지가 많은 이다테군과 다테시는, 특히 북부 평야부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경제 활동이 활발했다. 중세에는 다테 씨의 본거지였으며, 에도 시대에는 아부쿠마강의 뱃길로 번성했다.

북부의 한다산에는 일본 3대 은산으로 꼽히는 한다 은산이 있었다. 엣추의 마츠쿠라 금산 개발(1595년까지 운상)로 실적이 있는 요네자와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 시대부터 본격적인 채광이 시작되었고[1], 호바라성주인 오오이시 씨가 은산도 통괄했다. 간분 반지령으로 우에스기 씨가 이다테군에서 떠난 후, 막부 직할령으로서 대관소가 설치되었으나, 산출량 불안정으로 막부는 경영을 중지했다. 1873년(메이지 6년), 광산 불하가 시작되어, 한다 은산은 고다이 토모아츠가 취득, 연간 약 20톤을 산출했다[2]

오슈 가이도에서 우슈 가이도가 분기하는 추와케의 숙장 마을도 번성했다. 현재 오슈 가이도에 해당하는 국도 제4호선과 우슈 가이도에 해당하는 국도 제13호선후쿠시마시에서 분기하며, 도호쿠 본선오우 본선, 도호쿠 신칸센야마가타 신칸센도 같은 경로를 지난다. 그러나 당시에는 코오리가 추와케가 되어, 현재의 쿠니미정을 지나 미야기현시로이시시, 시치카슈쿠마치를 거쳐 데와국(야마가타현아키타현)으로 이어졌다.

4. 행정

성명취임일퇴임일비고
11879년 1월 27일
1926년 6월 30일군청 폐지로 인해 폐지


5. 자치체의 변천

1889년 4월 1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다테군에는 고오리정, 야나가와정, 호바라정, 가케다촌, 가와마타정, 나가오카촌, 유노촌, 모니와촌, 무쓰아이촌, 한다촌, 고사카촌, 후지타촌, 다테자키촌, 모리에노촌, 오키도촌, 오에촌, 이고사와촌, 도미노촌, 야마후네오이촌, 시라네촌, 세키모토촌, 아와노촌, 오타촌, 후시구로촌, 가미호바라촌, 하타자와촌, 도미나리촌, 오쿠니촌, 료젠촌, 이시도촌, 고테가와촌, 고테촌, 도미타촌, 후쿠다촌, 오쿠보촌, 이이노촌, 다테키촌, 고아미기촌, 오아미기촌, 이이자카촌이 발족했다. 모니와촌의 일부는 시노부군 이이자카정 나카노촌에 편입되었다.

1893년 2월 3일, 다테키촌의 일부(다테코야마)에 다테코야마촌, 잔부(아오키)에 아오키촌이 발족했고, 고테촌의 일부(고지마)가 분립하여 고지마촌이 발족했다. 1898년 1월 21일 가케다촌이 정제 시행으로 가케다정이 되었다. 1901년 10월 1일 유노촌의 일부(히가시유노)가 분립하여 히가시유노촌이 발족했다. 1911년 11월 10일 후지타촌이 정제 시행으로 후지타정이 되었다.

1927년 5월 1일 이이노촌이 정제 시행으로 이이노정이 되었고, 1928년 1월 1일 고테가와촌이 정제 시행 및 개칭하여 쓰키다테정이 되었다. 1930년 11월 3일 이이노촌의 일부(니시이이노·이이노의 각 일부)가 분립하여 메이지촌이 발족했다. 1940년 4월 1일 나가오카촌이 정제 시행 및 개칭하여 다테정(제1차)이 되었다.

1954년 3월 31일 후지타정, 고사카촌, 오키도촌, 모리에노촌, 오에촌이 합병하여 고쿠미정이 발족했다. 1955년 1월 1일 고오리정, 무쓰아이촌, 다테자키촌, 한다촌이 합병하여 다시 고오리정이 발족했다. 같은 해 1월 2일 이이노정, 오쿠보촌, 메이지촌, 아오키촌이 합병하여 다시 이이노정이 발족했고, 1월 31일 가케다정, 료젠촌, 이시도촌, 오쿠니촌이 합병하여 료젠정이 발족했다.

1955년 3월 1일, 야나가와정, 이고사와촌, 도미노촌, 야마후네오이촌, 시라네촌, 세키모토촌, 아와노촌이 합병하여 다시 야나가와정이 발족했고, 호바라정, 오타촌, 하타자와촌, 도미나리촌, 가미호바라촌이 합병하여 다시 호바라정이 발족했으며, 츠키다테정, 고테촌이 합병하여 다시 츠키다테정이 발족했다. 같은 날 가와마타정, 이이자카촌, 고아미기촌, 오아미기촌, 도미타촌, 후쿠다촌, 고지마촌 및 아다치군 야마키야촌이 합병하여 다시 가와마타정이 발족했다.

1957년 1월 1일 후시구로촌이 정제 시행, 즉시 개칭하여 다테정(제2차)이 발족했다.

2006년 1월 1일 다테정, 야나가와정, 호바라정, 료젠정, 쓰키다테정이 합병하여 다테시가 발족하여, 군에서 이탈했다. 2008년 7월 1일 이이노정이 후쿠시마시에 편입되었다.

6. 시정촌 합병

2006년 1월 1일, 다테 정, 야나가와 정, 호바라 정, 료젠 정, 쓰키다테 정이 합병해 다테시가 되었다. 이 합병은 다테 5정 합병 협의회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시청사는 구 호바라 정사무소가 본청사, 구 야나가와 정사무소가 분청사로 사용되었다.

당초 고오리 정을 포함한 다테 6정 합병 협의회가 구성되었으나, 고오리 정에서 합병에 대한 정장과 정 의회의 대립으로 2005년 1월 28일 협의가 중단되었고, 같은 해 9월 30일에 해산되었다.

2008년 7월 1일, 이노 정이 후쿠시마시에 편입되었다. 이는 후쿠시마시와 이이노 정의 합병 협의회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당초에는 가와마타 정도 포함된 법정 합병 협의회가 설치되었으나 가와마타 정은 탈퇴하였다.

7. 현재의 구성 정

가와마타정, 고오리정, 구니미정다테군에 속해있다.

7. 1. 고리정 (桑折町)

다테 군에는 가와마타정, 고오리정, 구니미정이 있다.

7. 2. 구니미정 (国見町)

가와마타정고오리정다테군에 속한 지역이다.

7. 3. 가와마타정 (川俣町)

가와마타정후쿠시마현 다테군의 정이다.

참조

[1] 웹사이트 半田銀山 2023-02-21
[2] 웹사이트 半田銀山の繁栄から閉鎖まで~上杉景勝が開発しやがて五代友厚の経営に 2022-05-27
[3] 문서 記載は飯坂村1村
[4] 문서 泉沢村西郷、泉沢村東郷に分かれて記載
[5] 문서 三池藩
[6] 문서 「旧高旧領取調帳」では三池藩→黒石県となっているが、他の資料では1698年に黒石藩領になっているため、誤りと思われる
[7] 법령 諸藩取締奥羽各県当分御規則 太政官布告 1869-02-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