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무네무라 (17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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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무네무라는 1718년 센다이 번의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로부터 이름을 받아 무네무라로 개명하고, 기슈 번 번주의 딸과 결혼했다. 1743년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으며, 문학, 검술, 군술 등 다방면에 능했다. 1747년 호소카와 무네타카 살해 사건 당시 재치를 발휘하여 호소카와 가문의 존속에 기여했다. 1752년 기근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세금 감면을 청원한 촌장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으며, 1756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가독은 아들 다테 시게무라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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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네무라 (171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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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다테 무네무라 |
본명 | 구네무라 |
로마자 표기 | Date Munemura |
출생 | 1718년 6월 25일 |
사망 | 1756년 6월 21일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신분 | 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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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
씨족 | 다테 씨 |
아버지 | 다테 요시무라 |
어머니 | 조마쓰인 |
배우자 | 운송인,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딸 |
자녀 | 레이쇼인, 다테 시게무라, 도이 도시노리, 다테 무라토모, 호리타 마사아쓰, 기타 |
관직 | |
번 | 무쓰국센다이 번 번주 |
주군 | 도쿠가와 요시무네 → 도쿠가와 이에시게 |
관위 | 종4위하, 종4위상・시종, 좌근위권중장, 에치젠노카미, 무쓰노카미 |
센다이 번주 | |
6대 번주 | 1743년 ~ 1756년 |
이전 번주 | 다테 요시무라 |
다음 번주 | 다테 시게무라 |
기타 | |
계명 | 정덕원전충산정신대거사 |
묘소 | 미야기현센다이시다이하쿠구의 다이넨지산 호카린 묘 |
2. 생애
센다이 번의 제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두 명이 요절하고 셋째 형 다테 무라카제가 분가하여 하타모토 가문을 세우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처음 이름은 히사무라(伊達久村jpn)였으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알현한 뒤 그의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무네무라'''(伊達宗村jpn)로 개명하였다.[1] 또한, 기슈 번 번주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딸 토네히메와 혼인하였다.
간포 3년(1743년), 아버지 요시무라가 은퇴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제6대 번주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으며, 마술, 검술, 창술, 군사 전략, 포술(호주쓰) 등 여러 방면에 능숙하여 지용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교호 3년(1718년) 5월 27일, 제5대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실 후유히메(조쇼인)이다.번유 다나베 키분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伊達久村|다테 히사무라jpn였다. 위로 형 두 명이 요절하고 셋째 형 다테 무라카제가 분가하여 별도의 하타모토 가문을 세웠기 때문에, 히사무라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후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공식적으로 알현을 받은 뒤, 쇼군의 이름에서 한 글자(편휘)를 받아 '''다테 무네무라'''[1]로 개명하였다. 또한, 요시무네의 뒤를 이어 기슈 번 번주가 된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딸 토네히메(운쇼인)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간포 3년(1743년), 아버지 요시무라가 은퇴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제6대 센다이 번주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으며, 마술, 검술, 창술, 군사 전략 및 포술과 호주쓰(사격술)에도 능숙하여 지용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2. 2. 호소카와 무네타카 사망 사건
엔교 4년(1747년) 8월 15일, 에도성 안에서 구마모토번주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하타모토 이타쿠라 가쓰요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타쿠라 가쓰요시는 다른 인물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호소카와 가문과 원한 대상 가문의 문장이 매우 비슷하여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오인하여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2]당시 호소카와 무네타카에게는 오메미에(쇼군 알현)를 마친 적자(嫡子, 정식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호소카와 가문은 후계자 부재로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1][2] 마침 사건 현장 근처에 있던 다테 무네무라는 이 상황을 목격하고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쓰러진 호소카와 무네타카의 시신 옆에서 "무네타카 님은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빨리 저택으로 옮겨 치료하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들에게 조언했다.[1][2]
무네무라의 조언에 따라 호소카와 가신들은 무네타카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 그의 유해를 서둘러 번의 저택으로 옮겼다.[1][2] 이를 통해 시간을 벌어 무네타카의 동생인 호소카와 시게카타를 말기 양자(末期養子, 사망 직전에 급히 정하는 양자)로 삼는다는 신고를 막부에 제출할 수 있었다. 그 후,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치료의 보람도 없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함으로써, 호소카와 가문은 개역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1][2]
2. 3. 기타하라 킨페이 직소 사건
다테 무네무라 치세 중에 영지 백성으로부터 연공(세금) 감면을 요구하는 직소를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미야기현 와타리정 오쿠마 나카이즈미의 하치만 신사에 세워진 "의민 기타하라 킨페이 현창비" 비문에는 호레키 2년(1752년), 센다이 번에 큰 흉작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받자 와타리군 나카이즈미 마을의 농민 기타하라 킨페이가 참근교대를 마치고 돌아오던 무네무라에게 직접 연공 감면을 호소했으나, 무네무라는 킨페이의 집과 땅을 몰수한 뒤 능지형에 처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제 역사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센다이 번의 공식 역사서인 『다테 치카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호레키 10년(1760년) 12월 23일: 농민 킨페이가 와타리군 나카이즈미 마을에서 무리를 모아 대관의 집에 쳐들어간 주모자로 지목되어 그 자리에서 능지형에 처해졌다.[2]
- 호레키 10년 10월 11일: 농민 겐노스케가 와타리군 코야마 마을에서 무리가 대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난입했을 때, 조부 명칠이 코야마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가담하지 않도록 한 공으로 상금을 받았다.[3]
이 기록에 따르면, 킨페이는 영주에게 직접 호소한 것이 아니라 대관 스즈키 유우키에몬의 집에 무리를 이끌고 습격했기 때문에 처형당했다. 또한 사건 발생 시점은 1760년으로, 이때 센다이 번의 영주는 1756년에 이미 사망한 다테 무네무라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다테 시게무라였다.
사카쓰다 마을의 『안에이 풍토기 어용서출』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스즈키 유우키에몬이 우다, 와타리 두 군의 대관으로 임명된 것은 호레키 8년(1758년) 3월 이후이므로, 킨페이가 주도한 봉기는 비문에 적힌 1752년이 아니라 호레키 9년(1759년) 또는 10년(1760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기타하라 킨페이 사건은 다테 무네무라가 아닌 다테 시게무라의 치세에 일어난 사건이며, 영주에게 직접 청원한 것이 아니라 대관의 처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봉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2. 4. 죽음
호레키 6년 5월 24일(1756년 6월 21일)에 39세로 사망했다. 가독은 아들 다테 시게무라가 이었다. 그의 묘는 센다이의 다이넨지야마에 있는 다테 가문 묘소에 있다.3. 인물과 일화
무네무라는 다테 요시무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명의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셋째 형 다테 무라카제는 별도의 하타모토 가문을 이루었기 때문에 무네무라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아명은 '''다테 히사무라'''|伊達久村일본어였으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공식적으로 알현한 뒤 쇼군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무네'(宗)를 받아 다테 무네무라(伊達宗村)가 되었다. 또한 당시 기이 번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딸과 약혼하였다. 1743년 아버지 다테 요시무라가 은퇴하자 그 뒤를 이어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승마, 검술, 창술, 군사 전략, 호주쓰(포술) 등 다방면에 능통하여 다재다능한 인물로 알려졌다.
1747년, 구마모토 번의 다이묘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에도 성에서 열리는 의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하타모토 이타쿠라 가쓰카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쓰카네는 본래 안나카 번의 이타쿠라 가쓰키요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호소카와 가문과 이타쿠라 가문의 가문(家紋)이 매우 비슷하여 무네타카를 오인하여 살해한 것이었다. 당시 호소카와 무네타카에게는 후계자가 없어, 이대로 사망 사실이 알려지면 호소카와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사건 현장 근처에 있던 다테 무네무라는 기지를 발휘하여 쓰러진 무네타카에게 다가가 "아직 살아있다!"고 외치고, 쇼군의 감찰관인 메쓰케가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가신들에게 명하여 시신을 서둘러 호소카와 가문의 저택으로 옮기도록 했다. 무네무라의 재빠른 대처 덕분에 호소카와 가문은 시간을 벌어 무네타카가 동생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는 공식 발표를 할 수 있었고, 무네타카의 사망 보고는 다음 날 이루어지게 되어 가문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752년, 센다이 번에는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무네무라는 에도에서의 산킨코타이를 마치고 영지로 돌아오던 중, 현재의 미야기현 와타리군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기근으로 고통받는 마을을 순찰하게 되었다. 이때 나카이즈미(中泉) 마을의 촌장 키타하라 카네히라(北原金平)가 무네무라에게 직접 다가와 마을의 세금 감면을 청원했다. 당시 다이묘에게 직접 청원하는 행위(직소)는 중죄로 여겨졌기에, 키타하라 카네히라는 처벌을 받아 집과 농지를 몰수당하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무네무라는 1756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다테 시게무라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의 묘소는 센다이의 다이넨지야마(大年寺山)에 있는 다테 가문 묘지에 마련되었다.
4. 가계
- '''아버지''': 다테 요시무라 (1680년 - 1752년)
- '''어머니''': 조쇼인 (1689년 - 1745년) - 이름 사다코(定子), 별칭 후유히메(冬姫). 공경 쿠가 미치노부의 양녀, 쿠가 미치나의 딸.
- '''정실''': 운쇼인 (1717년 - 1746년) - 이름 미네히메(峯姫), 토네히메(利根姫).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양녀, 기슈번주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차녀. 법명 온코(温恭).
- * 장녀: 레이쇼인 (1739년 - 1761년) - 이름 겐히메(源姫), 아츠코(敦子). 사가번주 나베시마 시게모리의 정실.
- * 삼녀: (1745년 - 1745년) - 요절.
- '''측실''': 세이젠인 (1719년 - 1763년) - 이름 노부코(信子), 통칭 오세이노 카타(おせいの方). 사카 노부유키의 딸.
- * 장남: 다테 쿠메노조 (1738년 - 1745년) - 요절.
- * 차남: 다테 시게무라 (1742년 - 1796년) - 처음 이름 쿠니무라(国村). 적자가 되어 센다이 7대 번주가 됨.
- * 차녀: 하이히메 (1745년 - 1757년) - 마츠다이라 요시노부의 약혼자였으나 요절.
- * 사녀: 카이히메 (馨子, 케이코) (1747년 - 1771년) - 오바마번주 사카이 타다츠라의 정실.
- * 오녀: 닌히메 (1749년 - 1775년) - 이름 사이코(綵子). 나카무라 카게사다 (요시카게)의 부인.
- * 육녀: 나오히메 (1750년 - 1755년) - 요절.
- * 칠녀: 종히메 (1751년 - 1753년) - 요절.
- * 칠남: 다테 토시치로 (1753년 - 1753년) - 요절.
- * 팔남: 호리타 마사아츠 (1755년 - 1832년) - 처음 이름 나카무라 무라요시(中村村儀). 카타타번주 호리타 마사토미의 양자가 됨.
- '''측실''': 쇼시(照子) - 통칭 오리쿠노카타(お陸の方), 법명 렌다이인(蓮台院). 사노 무네토모의 딸.
- * 삼남: 도이 토시노리 (1748년 - 1813년) - 카리야번주 도이 토시노부의 양자가 됨.
- '''측실''': 토요(豊) - 법명 요치인(陽智院). 하시모토 아키나가의 딸.
- * 사남: 다테 무라토모 (1749년 - 1776년) - 와쿠야 다테 가문의 다테 무라타네의 양자가 되어 8대 당주가 됨.
- '''측실''': 세이코(清子) - 통칭 오루다이노카타(おる代の方), 법명 쇼켄인(正献院). 야스다 요시타카의 딸.
- * 오남: (1750년 - 1750년) - 요절.
- '''측실''': 엔치인 (1732년 - 1761년) - 이름 시즈카(静), 통칭 오키요노카타(お清の方). 하야시 가문의 하야시 미치아키의 딸, 하야시 시헤이의 누나.
- * 육남: 도이 토시치 (1750년 - 1766년) - 카리야번주 도이 토시노부의 양자가 됨.
- * 구녀: 세이히메 (せい姫, 晴姫) (1752년 - 1829년) - 이름 호코(峯子). 마츠에번주 마츠다이라 하루사토 (후마이)의 정실.
- '''측실''': 오토에노카타(お登恵の方) - 법명 이젠인(以然院). 탄노 타카유키의 딸.
- * 팔녀: 에이히메 (1751년 - 1757년) - 이나바 마사히로의 약혼자였으나 요절.
- * 십일녀: 후사히메 (1753년 - 1759년) - 요절.
- * 십이녀: 료히메 (1755년 - 1762년) - 요절.
- '''측실''': 칸테이인(観庭院) - 이시카와 사다미치의 딸.
- * 십녀: 사이히메 (1752년 - 1753년) - 요절.
5. 편휘를 받은 인물
- 다테 시게'''무라''' (차남, 적자) ※ 그 외 무네무라의 아들들은 형인 시게무라로부터 편휘를 받아 이름에 '무라' 자를 사용하였다.
- 다무라 '''무라'''타카 (친동생. 처음에는 토메 다테 가문을 계승하여 다테 '''무라'''카츠(伊達村勝일본어)라 칭했으나, 후에 이치노세키 번의 다무라 가문을 이어받아 개명하였다.)
- 다테 '''무라'''요시 (친동생. 형 무라카츠(무라타카)가 다무라 가문으로 옮겨가자 토메 다테 가문을 계승하였다.)
- 다테 '''무라'''히로 (가와사키 다테 가문)
- 다테 '''무라'''토시 (미즈사와 다테 가문)
- 다테 '''무라'''카 (이와야도 다테 가문 5대 당주 다테 무라모치의 장남. 요절하였다.)
- 다테 '''무라'''토미 (무라카의 친동생. 이와야도 다테 가문 6대 당주.)
- 다테 '''무라'''요시 (미야토코 다테 가문)
- 다테 '''무라'''요리 (무라요시의 친동생. 자식이 없던 무라요시의 양자가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 카타쿠라 '''무라'''카도 (의제. 정실 부인이 무네무라의 여동생 고우히메( 郷姫일본어, 마사코雅子일본어)이다.)
- 시라카와 '''무라'''미츠 (마사카 시라카와 가문 6대 당주. 시라카와 무라히로(白河村広일본어)의 아들이다.)
- 시라카와 '''무라'''유 (마사카 시라카와 가문 7대 당주. 미야토코 다테 가문의 다테 무라오키의 넷째 아들이다.)
- 미사와 '''무라'''야스 (다테 무라카, 무라토미의 친동생. 미사와 무라키요의 양자가 되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六代伊達治家記録 巻之五 徹山公 五
1760-12-23
[3]
서적
六代伊達治家記録 巻之五 徹山公 五
176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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