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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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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마사무네는 1567년 데와 요네자와 성에서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어릴 적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어 "독안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584년 가문을 계승한 후 세력을 확장하며 도호쿠 지방의 패권을 다투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했으나 임진왜란 참전 등에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며 센다이 번을 개창,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외교에도 힘썼다. 그는 요리, 노, 갤리온 건조 등 다양한 취미를 즐겼으며, 그의 유훈과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다테 마사무네는 다양한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며, 그의 처세술과 야망은 여러 작품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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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테 마사무네 초상화 (도후쿠지 레이겐인 소장, 에도시대 중기)
이름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출생 이름본텐마루 (梵天丸)
출생일1567년 9월 5일
사망일1636년 6월 27일
출생지요네자와, 야마가타
사망지에도
별칭독안룡 (独眼竜)
신호부진히코노미코토 (武振彦命)
계명즈이간지덴 조잔젠리 다이코지 (瑞巌寺殿貞山禅利大居士)
묘소즈이호덴, 묘신지 탑두 반토인
159.4cm
가문 정보
가문다테 씨
아버지다테 데루무네
어머니요시히메 (모가미 요시모리의 딸)
배우자메고히메
자녀다테 히데무네
다테 다다무네
다테 무네키요
다테 무네야스
다테 무네쓰나
다테 무네노부
다테 무네타카
다테 다케마쓰마루
다테 무네자네
다테 무네카쓰
와타리 무네모토
이로하히메
무우히메
미네히메
센기쿠히메
쓰다
관직 및 직위
직책다테 씨 당주
센다이 번 초대 번주
관위종5위하 사쿄다이부, 지주, 에치젠노카미
종4위하 우고노에노곤쇼쇼, 무쓰노카미
정4위하, 산기
종3위 권중납언
추가 관위추증 종2위
정치 및 군사 활동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소속다테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참전 전투히토토리바시 전투
고리야마 전투
구로카와 공방전
스리아게하라 전투
스카가와 공방전
구노헤 반란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마쓰카와 전투
오사카 전투
지휘 부대센다이 번
기타
로마자 표기Date Masa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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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마사카게 (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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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67년 데와 요네자와 성에서 다테 데루무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본텐마루였다.[13] 1571년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을 잃었다.[2] 이 때문에, 후일 오슈의 "독안룡(片目の龍)"으로 불리게 되었다.[3]

1577년 성인식을 치르고 '마사무네(政宗)'라는 이름을 얻었다. 무로마치 막부 쇼군에게서 이름을 한 글자 받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선조의 이름에서 따왔다. 1579년에는 다무라 기요아키의 딸 메고히메와 혼인했다.

1581년, 14세의 나이에 소마 씨와의 전투에 처음 출전하여 승리했다.[13] 이후 아버지 테루무네를 대신하여 외교를 담당하기도 했다.[13]

다테 마사무네 갑옷


1584년(덴쇼 12년) 아버지 데루무네에게 가문을 물려받아 다테 집안의 17대 당주가 되었다. 데루무네는 41세로 아직 한창 때였으나 아들에게 가독을 넘겨줬다.[31] 센다이 번의 공식 기록인 『다테 지케 기록』에서는 가독 상속을 10월 6일부터 22일 사이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존 사료에서도 데루무네의 당주로서의 발급 문서의 마지막이 10월 5일자[32]이며, 마사무네의 당주로서의 발급 문서의 첫 번째가 10월 23일자라는 점, 그리고 데루무네의 은퇴 소식을 들은 이시카와 아키미츠(테루무네의 친동생)로부터의 문의에 대한 답변[33]이 전해지고 있다. 2023년에는 야마가타 대학 명예교수인 마츠오 고우지는 모가미 요시미쓰에게 보낸 덴쇼 12년 몇 월 12일자 서장의 내용을 재검토한 결과, 가독 상속은 10월 12일, 또는 적어도 10월 12일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34][35]

오데모리 성주 오우치 사다쓰나는 아시나 집안의 가신이던 니혼마쓰 성주 니혼마쓰 요시쓰구와 손잡고 다무라 씨의 지배에서 이탈, 마사무네에 맞서려 했다. 덴쇼 13년(1585년), 마사무네는 오데모리 성을 공격했다. 이때 그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성에 대한 철저한 학살과 파괴를 행하는 비정한 일면을 보였다.[4] 당시 호족의 대부분이 서로 친척 내지는 연척 관계였던 오슈에서 이러한 몰살 전술은 여지껏 전례가 없었던 대사건이었으며 인근 센고쿠 다이묘를 공포에 빠뜨렸다.

니혼마쓰 요시쓰구는 화해를 신청했고, 데루무네의 중재로 그의 소유 다섯 개 마을만을 하타케야마 씨 소유로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데루무네는 영지 안도건 등의 문제로 회견했던 니혼마쓰 요시쓰구에게 곧 납치된다. 당시 사냥 중이던 마사무네는 이 소식에 다급히 돌아와 니혼마쓰 일행을 뒤쫓았고, 사격을 명령하여 이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몰살시켜 버렸다고 한다. 아버지 데루무네도 이때 죽었다.[4]

그 뒤 아버지의 공양을 위한 7일간의 법요를 끝낸 마사무네는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한 전투라며 니혼마쓰 성을 포위했고, 니혼마쓰 집안을 돕기 위해 사타케 요시시게가 규합한 남부 오슈의 아시나 · 소마 · 이와키 · 유키 씨 · 니카이도 씨 등 3만의 반(反)다테 연합군과 아다치 군의 히토리 다리에서 사투를 벌였다.[5] 숫적으로는 1/5 이하의 전력이었던 다테 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고령의 중신 오니니와 요시나오의 최전선에서의 분전으로 마사무네는 간신히 모토미야 성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결국 사타케 가문이 자국내 사정으로 인해서 퇴각하자, 다른 가문들도 사타케를 따라서 퇴각하였다.

마사무네는 덴쇼 16년(1588년)에 고오리산 전투에서 상대국의 영토를 빼앗았고, 아내 메고히메의 친정인 다무라 씨의 협력을 얻어 지금의 후쿠시마현 중부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당시의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 ·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 특히 간토의 호조 씨와 도호쿠의 다테 집안에 대해 소부지령(사전 금지령)을 내렸지만, 마사무네히데요시의 명령도 무시한 채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고, 그 해 북방의 오자키 씨 집안의 내분에 개입해 1만의 군사로 침공을 감행하지만 오자키 집안의 완강한 저항과 아군인 구로카와 하루우지의 배반, 그리고 폭설에 의해 패배한다.(오자키 전투). 이 틈에 다테 집안 소유 영지 남쪽에 아시나·니카이도 씨 등이 침공해 왔으며, 백부 모가미 요시미쓰와도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갔지만 어머니 요시히메의 중재로 화해가 성립되어 간신히 궁지를 벗어났다.

덴쇼 17년(1589년)에는 도호쿠의 패권을 놓고 아이즈 번의 아시나 요시히로 · 사타케 요시노부의 연합군과 스리아게하라 전투(반다이산 기슭·이나와시로 정 부근)에서 싸운다. 그 무렵 아시나 집안은 이미 간파쿠 히데요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마사무네아시나 집안과 싸운다는 것은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아시나 요시히로는 1만 5천, 마사무네는 2만 1천을 이끌고 각자 반다이산 중턱에 진을 쳤다. 이 싸움에서 마사무네는 요시히로측 기마 무사 3백 기, 군사 2천 남짓을 죽였다고 하며, 마침내 구로카와 성을 함락시키고 아시나 집안을 멸망시킨 마사무네아이즈 지방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고, 거듭 군사를 스카 강으로 진군시켜 니카이도 씨마저 멸망시켰다. 이 싸움을 전후해 시라카와 요시지카·이시카와 아키미쓰·이와키 쓰네타카가 차례대로 마사무네에게 복속했다.

이 때 마사무네는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현아이즈야마가타현의 남부, 미야기현의 남부를 다스리며 전국적으로도 굴지의 영토 규모를 자랑했다. 여기에 시라카와 집안이라는 남부 무쓰의 여러 호족, 그리고 지금의 미야기현이나 이와테현 일부를 지배하던 오자키 씨·가사이 씨도 마사무네의 세력하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 사업을 이어받아 간토의 호조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다테 가문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교토로 올라와 공순의 뜻을 보이라고 재촉했다.[94] 마사무네는 이를 무시하고 아버지 데루무네 때부터 동맹 관계였던 호조 가문과의 관계 때문에 히데요시와 싸울 것인지, 아니면 오다와라 정벌에 가담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1590년 5월, 마사무네는 아사노 나가마사의 재촉을 받고 결국 오다와라 전투에 참여하기로 결정, 아이즈를 떠나 요네자와, 오구니를 거쳐 에치고, 시나노, 가이를 지나 오다와라에 도착했다.[94] 히데요시의 병력 규모를 본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게 복속했고,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본령을 안도했지만 아이즈는 몰수하여 72만 석으로 줄였다.[94] 오다와라 공격에 늦게 참여한 것에 대해 히데요시가 마사무네를 감금하고 위협했지만, 마사무네는 마에다 도시이에 등에게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히데요시를 감탄시켰다고 한다.[94]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면서 호조 우지마사호조 우지나오 부자는 항복했고, 히데요시는 오슈 징계를 실시하여 센고쿠 통일을 달성했다.[94] 마사무네는 아이즈 등을 잃고 72만 석으로 감봉되었고, 본거지를 구로카와 성에서 요네자와 성으로 옮겼다.[94]

1591년, 마사무네는 가모 우지사토와 함께 가사이·오자키 집안의 잇키를 평정했지만, 자신이 잇키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94] 마사무네는 교토로 올라와 변명하여 용서받았지만, 요네자와 성에서 이와테자와 성의 58만 석으로 감봉되고 성 이름을 이와데야마 성으로 바꾸었다.[94] 이 무렵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씨를 받아 '하시바오자키지주'라 칭하게 되었다.[44]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하고 도호쿠 지방의 다이묘들을 전투에 참여하도록 강요했다. 마사무네는 처음에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히데요시가 일본의 사실상 지배자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사무네는 여전히 지체하여 히데요시를 격분시켰습니다. 처형될 것을 예상한 마사무네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두려움 없이 분노한 그의 봉건 영주 앞에 섰습니다. 더 이상의 문제를 원하지 않았던 히데요시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며 "그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북부의 주요 세력이었던 마사무네는 잠재적인 경쟁자라면 누구든 그렇듯이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와의 오다와라 공성전에 늦게 참가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그의 영토 규모를 축소했습니다.

1591년, 마사무네는 다테 씨의 선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땅(오늘날의 다테시, 가와마타, 고오리, 쿠니미)을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하여 광범위한 폭동을 야기했습니다. 그는 결코 그 영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6]

쿠노헤의 난에서 싸운 후, 그는 이와테사와와 그 주변 땅을 그의 영지로 받았습니다. 마사무네는 그곳으로 이동하여 이와테사와 성을 재건축하고 이와데야마로 개명하고 성 아래에 도시 성장을 장려했습니다.[17] 마사무네는 13년 동안 이와데야마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주요 정치 및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마사무네와 그의 부하들은 히데요시의 임진왜란(1592-1598년)에서 훌륭하게 공을 세웠다.

분로쿠(文禄) 2년(1593년), 히데요시의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에 종군했다. 종군 당시 마사무네가 다테 가문 부대를 위해 마련한 전투 복장은 매우 화려하여 상락하는 도중에 세간의 소문이 되었다. 다른 군세가 통과할 때 조용히 지켜보던 교토 주민들도 다테세의 군복의 훌륭함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후로 화려한 차림을 좋아하고 착용하는 사람을 가리켜 "'''다테모노(伊達者)'''(다테모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는 명(明)과의 평화 협상 중 일본군의 조선 남부 연안의 축성에 있어서, 공사를 면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로부터의 병량의 지급을 거절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등 활약했다. 게이초의 역(慶長の役)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595년, 히데요시로부터 반역 혐의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했다. 히데쓰구와 친했던 마사무네는 위기에 처했고, 고마히메(駒姫)는 히데쓰구의 측실이 되기 위해 상경했을 뿐이었지만 처형되었다. 마사무네는 이요국(伊予国)으로 감봉될 뻔했지만, 유메 가게야스와 나카지마 무네모토의 직소 덕분에 사면되었다.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고 1599년 마사무네의 장녀 고로하치히메와 이에야스의 육남 마쓰다이라 타다테루를 약혼시켰다. 이 인연은 법도 위반의 사혼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벌칙 없는 화해로 마무리되었다.[45]

1592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하여 진주성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95] 조선으로 출병할 당시 다테가의 부대는 화려한 복장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다.[95] 마사무네는 조선에서 축성은 열심히 했지만, 침략 행위는 소극적이었고 정유재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다.[95]

1595년, 히데요시로부터 모반 혐의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히데쓰구와 친했던 마사무네도 혐의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이 일로 마사무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95]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는 1599년 맏딸 이로하히메와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약혼시키며 이에야스 지지로 돌아섰다.

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토벌에 나서자 마사무네도 종군하여 시라이시 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해 9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동군에 가담한 마사무네는 하세도 성 전투에서 모가미 가문을 지원했다. 그는 후쿠시마 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마사무네는 난부 가문에 대한 잇키를 선동한 사실이 발각되어, 당초 약속되었던 100만 석 영지 대신 센다이 번 60만 석(이후 62만 석)을 받게 되었다.[95]

1601년 마사무네는 센다이 성과 그 아래 도시 건설을 시작하여 센다이 번을 탄생시켰다. 센다이 번은 가가, 사쓰마에 이어 전국 3위의 규모였다. 마사무네는 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 등을 로마에 파견하여 에스파냐와 통상을 꾀하기도 했다.(게이초 겐오 시셋)

1604년, 마사무네는 5만 2천 명의 가신과 그들의 가족을 이끌고 당시 작은 어촌이었던 센다이로 이주했다. 그는 센다이를 크고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1614년1615년에는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도요토미 가문에 맞서 싸웠다. 1616년 후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종을 앞두자 마사무네는 그를 방문하여 선(禪)시 한 수를 낭독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겨울 전투)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야마토구 방면에서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화해가 성립된 후, 다테군은 오사카성 바깥쪽 해자 매립 공사 임무를 맡았고, 그해 12월 쇼군 히데타다로부터 이요 우와군(宇和郡)에 영지를 하사받았다.[50] 이듬해인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도묘지 전투에서는 고토 모토쓰구 등과 싸웠다. 모토쓰구는 다테 가문의 가신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자결했다고 한다.[50] 도묘지 어귀의 요충지인 고마쓰(小松) 산에 포진해 있던 고토 부대를 괴멸시킨 야마토구 방면군은 혼다(誉田) 마을로 진군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미즈노 가쓰나리는 마사무네에게 재공격을 요청했지만, 마사무네는 탄약 부족과 군사 부상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 때문에 노부시게는 오사카 성으로 돌아갔고, "간토의 무사가 100만이라고는 하나, 사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더이다"라며 비웃었다고 한다.[50]

혼다 마을 전투 중에 마사무네 측은 미즈노 가문의 가신 세 명을 습격해 말을 빼앗았지만, 가쓰나리는 매복했다가 마사무네 군세를 습격해 그들을 죽이고 말을 되찾아 돌려주었다. 마사무네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51]

사쓰마 번의 사료 『사쓰마 번 구기 잡록』에 따르면, 5월 7일 덴노지 전투에서 마사무네는 후네바구(船場口)에 진군해 아카시 다케노리 부대와 교전 중이던 미즈노 가쓰나리 측 신보 스케시게 부대 270명을 공격해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사무네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유신들은 항의했지만 마사무네는 "진보 부대는 아카시 부대에 완패했고 우리 군이 말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분이었다. 다테의 군법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52] 이 풍문은 여러 억측을 낳았지만, 마사무네가 처벌받은 기록은 없다.[53]

오사카 전투가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난카이도 이요 국 안의 10만 석을 마사무네에게 주었고, 마사무네는 이를 서장자인 다테 히데무네에게 주어 센다이 번에서 분가 독립시켜 우와지마 번의 초대 번주로 삼았다.

겐와 원년 9월(1615년)에는 사위 마쓰다이라 타다테루가 이에야스의 분노를 샀다.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전쟁 준비를 지시하고, 리처드 콕스는 전쟁 발발을 예측했다. 『키무라 우에몬 각서』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마사무네를 험담하며 히데타다에게 오슈 출진을 명령했고, 마사무네도 전쟁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면회를 요청했고, 마사무네는 2월 22일 슨푸성으로 향했다. 이에야스는 타다테루가 마사무네의 참언을 했다고 말하며 의심을 풀고 히데타다를 지키도록 유명했다.

같은 해 4월 이에야스가 죽자 마쓰다이라 타다테루는 개역되고, 고로하치히메는 이혼하여 친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8월경 다시 마사무네 토벌 소문이 퍼졌다.

세상이 안정된 후, 마사무네는 영토 개발에 힘썼다. 데이잔보리라 불리는 운하를 정비하고, 기타카미 강 수계 유역을 정리, 개척하여 곡창지대를 만들었다. 센다이 번은 표면상 62만 석이었지만, 실제로는 74만 5천 석(관에이 총검지)의 농업 생산량을 확보했다. 문화적으로는 상방(上方) 문화를 적극 도입, 국보인 오사키 하치만구, 즈이간지, 시오가마 신사, 무쓰 국분사 약사당 등을 남겼다. 가와무라 손베에를 초빙하여 이시마키 항을 설치, 기타카미 강 유역 수운을 통해 에도에 쌀을 수출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겐나 6년(1620년) 와령소동에서는 우와지마 번주가 된 히데무네와 대립, 한때 우와지마 번 반납을 막부에 청했으나 후에 화해했다. 마사무네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까지 섬겼다. 간에이 12년(1635년) 이에미쓰가 산킨코타이 제도를 발표하자, 마사무네는 "명령에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마사무네에게 토벌을 명령해 주십시오"라고 말했고, 이에미쓰는 마사무네에게 호신용 화승총 10정을 주었다.[54] 이에미쓰는 마사무네를 "다테의 아버지"라 부르며 귀히 여겼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와의 추억, 합전 등 전국 시대 이야기를 했다.

마사무네는 간에이 11년(1634년)경부터 건강 악화를 호소했다. 간에이 13년(1636년) 4월 18일, 어머니의 보답사인 호슌인에 참배한 후 성하를 둘러싼 산들을 순례했다. 경가봉에서는 곁에 있는 오쿠야마 조료에게 사후 매장지를 지시했다. 4월 20일 참근교대에 출발한 마사무네는 병세가 악화, 절식 상태가 계속되었고 배에 혹이 생겼다. 5월 21일 이에미쓰는 상야시키에 가서 마사무네를 문병했다. 마사무네는 행수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이에미쓰를 맞이했다.[54]

5월 24일 미시(오전 6시) 사망. 향년 70세(만 68세). 사인은 식도 분문암에 의한 암성 복막염으로 추정된다. "다테 오토코"라는 이름에 걸맞게 임종 시 처자에게도 죽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5월 26일 다테 다다무네에게 유령 상속이 허락되었다. 시신은 속대 차림으로 목관에 담아 방부 처리 후 가마에 실려 6월 3일 센다이로 돌아왔다. 순사자는 이시다 쇼칸 등 가신 15명, 배신 5명이었다. 에도에서는 7일간, 교토에서는 3일간 물고기와 새를 잡는 것과 음악 연주가 금지되었다.

사세의 구는,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속세의 어둠을 비추며 가는구나''".

즈이호덴 묘소에 있는 마사무네의 묘소

2. 1. 어린 시절

다테 마사무네는 1567년 데와 요네자와 성에서 다테 데루무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본텐마루였다.[13] 1571년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을 잃었다.[2] 이 때문에, 후일 오슈의 "독안룡(片目の龍)"으로 불리게 되었다.[3]

1577년 성인식을 치르고 '마사무네(政宗)'라는 이름을 얻었다. 무로마치 막부 쇼군에게서 이름을 한 글자 받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선조의 이름에서 따왔다. 1579년에는 다무라 기요아키의 딸 메고히메와 혼인했다.

1581년, 14세의 나이에 소마 씨와의 전투에 처음 출전하여 승리했다.[13] 이후 아버지 테루무네를 대신하여 외교를 담당하기도 했다.[13]

2. 2. 가독 상속과 세력 확장

1584년(덴쇼 12년) 아버지 데루무네에게 가문을 물려받아 다테 집안의 17대 당주가 되었다. 데루무네는 41세로 아직 한창 때였으나 아들에게 가독을 넘겨줬다.[31] 센다이 번의 공식 기록인 『다테 지케 기록』에서는 가독 상속을 10월 6일부터 22일 사이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존 사료에서도 데루무네의 당주로서의 발급 문서의 마지막이 10월 5일자[32]이며, 마사무네의 당주로서의 발급 문서의 첫 번째가 10월 23일자라는 점, 그리고 데루무네의 은퇴 소식을 들은 이시카와 아키미츠(테루무네의 친동생)로부터의 문의에 대한 답변[33]이 전해지고 있다. 2023년에는 야마가타 대학 명예교수인 마츠오 고우지는 모가미 요시미쓰에게 보낸 덴쇼 12년 몇 월 12일자 서장의 내용을 재검토한 결과, 가독 상속은 10월 12일, 또는 적어도 10월 12일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34][35]

오데모리 성주 오우치 사다쓰나는 아시나 집안의 가신이던 니혼마쓰 성주 니혼마쓰 요시쓰구와 손잡고 다무라 씨의 지배에서 이탈, 마사무네에 맞서려 했다. 덴쇼 13년(1585년), 마사무네는 오데모리 성을 공격했다. 이때 그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성에 대한 철저한 학살과 파괴를 행하는 비정한 일면을 보였다.[4] 당시 호족의 대부분이 서로 친척 내지는 연척 관계였던 오슈에서 이러한 몰살 전술은 여지껏 전례가 없었던 대사건이었으며 인근 센고쿠 다이묘를 공포에 빠뜨렸다.

니혼마쓰 요시쓰구는 화해를 신청했고, 데루무네의 중재로 그의 소유 다섯 개 마을만을 하타케야마 씨 소유로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데루무네는 영지 안도건 등의 문제로 회견했던 니혼마쓰 요시쓰구에게 곧 납치된다. 당시 사냥 중이던 마사무네는 이 소식에 다급히 돌아와 니혼마쓰 일행을 뒤쫓았고, 사격을 명령하여 이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몰살시켜 버렸다고 한다. 아버지 데루무네도 이때 죽었다.[4]

그 뒤 아버지의 공양을 위한 7일간의 법요를 끝낸 마사무네는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한 전투라며 니혼마쓰 성을 포위했고, 니혼마쓰 집안을 돕기 위해 사타케 요시시게가 규합한 남부 오슈의 아시나 · 소마 · 이와키 · 유키 씨 · 니카이도 씨 등 3만의 반(反)다테 연합군과 아다치 군의 히토리 다리에서 사투를 벌였다.[5] 숫적으로는 1/5 이하의 전력이었던 다테 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고령의 중신 오니니와 요시나오의 최전선에서의 분전으로 마사무네는 간신히 모토미야 성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결국 사타케 가문이 자국내 사정으로 인해서 퇴각하자, 다른 가문들도 사타케를 따라서 퇴각하였다.

마사무네는 덴쇼 16년(1588년)에 고오리산 전투에서 상대국의 영토를 빼앗았고, 아내 메고히메의 친정인 다무라 씨의 협력을 얻어 지금의 후쿠시마현 중부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당시의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 ·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 특히 간토의 호조 씨와 도호쿠의 다테 집안에 대해 소부지령(사전 금지령)을 내렸지만, 마사무네히데요시의 명령도 무시한 채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고, 그 해 북방의 오자키 씨 집안의 내분에 개입해 1만의 군사로 침공을 감행하지만 오자키 집안의 완강한 저항과 아군인 구로카와 하루우지의 배반, 그리고 폭설에 의해 패배한다.(오자키 전투). 이 틈에 다테 집안 소유 영지 남쪽에 아시나·니카이도 씨 등이 침공해 왔으며, 백부 모가미 요시미쓰와도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갔지만 어머니 요시히메의 중재로 화해가 성립되어 간신히 궁지를 벗어났다.

덴쇼 17년(1589년)에는 도호쿠의 패권을 놓고 아이즈 번의 아시나 요시히로 · 사타케 요시노부의 연합군과 스리아게하라 전투(반다이산 기슭·이나와시로 정 부근)에서 싸운다. 그 무렵 아시나 집안은 이미 간파쿠 히데요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마사무네아시나 집안과 싸운다는 것은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아시나 요시히로는 1만 5천, 마사무네는 2만 1천을 이끌고 각자 반다이산 중턱에 진을 쳤다. 이 싸움에서 마사무네는 요시히로측 기마 무사 3백 기, 군사 2천 남짓을 죽였다고 하며, 마침내 구로카와 성을 함락시키고 아시나 집안을 멸망시킨 마사무네아이즈 지방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고, 거듭 군사를 스카 강으로 진군시켜 니카이도 씨마저 멸망시켰다. 이 싸움을 전후해 시라카와 요시지카·이시카와 아키미쓰·이와키 쓰네타카가 차례대로 마사무네에게 복속했다.

이 때 마사무네는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현아이즈야마가타현의 남부, 미야기현의 남부를 다스리며 전국적으로도 굴지의 영토 규모를 자랑했다. 여기에 시라카와 집안이라는 남부 무쓰의 여러 호족, 그리고 지금의 미야기현이나 이와테현 일부를 지배하던 오자키 씨·가사이 씨도 마사무네의 세력하에 있었다.

2. 3. 도요토미 정권 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 사업을 이어받아 간토의 호조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다테 가문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교토로 올라와 공순의 뜻을 보이라고 재촉했다.[94] 마사무네는 이를 무시하고 아버지 데루무네 때부터 동맹 관계였던 호조 가문과의 관계 때문에 히데요시와 싸울 것인지, 아니면 오다와라 정벌에 가담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1590년 5월, 마사무네는 아사노 나가마사의 재촉을 받고 결국 오다와라 전투에 참여하기로 결정, 아이즈를 떠나 요네자와, 오구니를 거쳐 에치고, 시나노, 가이를 지나 오다와라에 도착했다.[94] 히데요시의 병력 규모를 본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게 복속했고,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본령을 안도했지만 아이즈는 몰수하여 72만 석으로 줄였다.[94] 오다와라 공격에 늦게 참여한 것에 대해 히데요시가 마사무네를 감금하고 위협했지만, 마사무네는 마에다 도시이에 등에게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히데요시를 감탄시켰다고 한다.[94]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면서 호조 우지마사호조 우지나오 부자는 항복했고, 히데요시는 오슈 징계를 실시하여 센고쿠 통일을 달성했다.[94] 마사무네는 아이즈 등을 잃고 72만 석으로 감봉되었고, 본거지를 구로카와 성에서 요네자와 성으로 옮겼다.[94]

1591년, 마사무네는 가모 우지사토와 함께 가사이·오자키 집안의 잇키를 평정했지만, 자신이 잇키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94] 마사무네는 교토로 올라와 변명하여 용서받았지만, 요네자와 성에서 이와테자와 성의 58만 석으로 감봉되고 성 이름을 이와데야마 성으로 바꾸었다.[94] 이 무렵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씨를 받아 '하시바오자키지주'라 칭하게 되었다.[44]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하고 도호쿠 지방의 다이묘들을 전투에 참여하도록 강요했다. 마사무네는 처음에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히데요시가 일본의 사실상 지배자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사무네는 여전히 지체하여 히데요시를 격분시켰습니다. 처형될 것을 예상한 마사무네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두려움 없이 분노한 그의 봉건 영주 앞에 섰습니다. 더 이상의 문제를 원하지 않았던 히데요시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며 "그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북부의 주요 세력이었던 마사무네는 잠재적인 경쟁자라면 누구든 그렇듯이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와의 오다와라 공성전에 늦게 참가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그의 영토 규모를 축소했습니다.

1591년, 마사무네는 다테 씨의 선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땅(오늘날의 다테시, 가와마타, 고오리, 쿠니미)을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하여 광범위한 폭동을 야기했습니다. 그는 결코 그 영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6]

쿠노헤의 난에서 싸운 후, 그는 이와테사와와 그 주변 땅을 그의 영지로 받았습니다. 마사무네는 그곳으로 이동하여 이와테사와 성을 재건축하고 이와데야마로 개명하고 성 아래에 도시 성장을 장려했습니다.[17] 마사무네는 13년 동안 이와데야마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주요 정치 및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마사무네와 그의 부하들은 히데요시의 임진왜란(1592-1598년)에서 훌륭하게 공을 세웠다.

분로쿠(文禄) 2년(1593년), 히데요시의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에 종군했다. 종군 당시 마사무네가 다테 가문 부대를 위해 마련한 전투 복장은 매우 화려하여 상락하는 도중에 세간의 소문이 되었다. 다른 군세가 통과할 때 조용히 지켜보던 교토 주민들도 다테세의 군복의 훌륭함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후로 화려한 차림을 좋아하고 착용하는 사람을 가리켜 "'''다테모노(伊達者)'''(다테모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는 명(明)과의 평화 협상 중 일본군의 조선 남부 연안의 축성에 있어서, 공사를 면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로부터의 병량의 지급을 거절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등 활약했다. 게이초의 역(慶長の役)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595년, 히데요시로부터 반역 혐의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했다. 히데쓰구와 친했던 마사무네는 위기에 처했고, 고마히메(駒姫)는 히데쓰구의 측실이 되기 위해 상경했을 뿐이었지만 처형되었다. 마사무네는 이요국(伊予国)으로 감봉될 뻔했지만, 유메 가게야스와 나카지마 무네모토의 직소 덕분에 사면되었다.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고 1599년 마사무네의 장녀 고로하치히메와 이에야스의 육남 마쓰다이라 타다테루를 약혼시켰다. 이 인연은 법도 위반의 사혼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벌칙 없는 화해로 마무리되었다.[45]

2. 4. 세키가하라 전투와 센다이 번

1592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하여 진주성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95] 조선으로 출병할 당시 다테가의 부대는 화려한 복장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다.[95] 마사무네는 조선에서 축성은 열심히 했지만, 침략 행위는 소극적이었고 정유재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다.[95]

1595년, 히데요시로부터 모반 혐의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히데쓰구와 친했던 마사무네도 혐의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이 일로 마사무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95]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는 1599년 맏딸 이로하히메와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약혼시키며 이에야스 지지로 돌아섰다.

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토벌에 나서자 마사무네도 종군하여 시라이시 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해 9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동군에 가담한 마사무네는 하세도 성 전투에서 모가미 가문을 지원했다. 그는 후쿠시마 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마사무네는 난부 가문에 대한 잇키를 선동한 사실이 발각되어, 당초 약속되었던 100만 석 영지 대신 센다이 번 60만 석(이후 62만 석)을 받게 되었다.[95]

1601년 마사무네는 센다이 성과 그 아래 도시 건설을 시작하여 센다이 번을 탄생시켰다. 센다이 번은 가가, 사쓰마에 이어 전국 3위의 규모였다. 마사무네는 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 등을 로마에 파견하여 에스파냐와 통상을 꾀하기도 했다.(게이초 겐오 시셋)

1604년, 마사무네는 5만 2천 명의 가신과 그들의 가족을 이끌고 당시 작은 어촌이었던 센다이로 이주했다. 그는 센다이를 크고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1614년1615년에는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도요토미 가문에 맞서 싸웠다. 1616년 후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종을 앞두자 마사무네는 그를 방문하여 선(禪)시 한 수를 낭독했다.

2. 5. 오사카 전투와 말년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겨울 전투)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야마토구 방면에서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화해가 성립된 후, 다테군은 오사카성 바깥쪽 해자 매립 공사 임무를 맡았고, 그해 12월 쇼군 히데타다로부터 이요 우와군(宇和郡)에 영지를 하사받았다.[50] 이듬해인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도묘지 전투에서는 고토 모토쓰구 등과 싸웠다. 모토쓰구는 다테 가문의 가신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자결했다고 한다.[50] 도묘지 어귀의 요충지인 고마쓰(小松) 산에 포진해 있던 고토 부대를 괴멸시킨 야마토구 방면군은 혼다(誉田) 마을로 진군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미즈노 가쓰나리는 마사무네에게 재공격을 요청했지만, 마사무네는 탄약 부족과 군사 부상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 때문에 노부시게는 오사카 성으로 돌아갔고, "간토의 무사가 100만이라고는 하나, 사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더이다"라며 비웃었다고 한다.[50]

혼다 마을 전투 중에 마사무네 측은 미즈노 가문의 가신 세 명을 습격해 말을 빼앗았지만, 가쓰나리는 매복했다가 마사무네 군세를 습격해 그들을 죽이고 말을 되찾아 돌려주었다. 마사무네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51]

사쓰마 번의 사료 『사쓰마 번 구기 잡록』에 따르면, 5월 7일 덴노지 전투에서 마사무네는 후네바구(船場口)에 진군해 아카시 다케노리 부대와 교전 중이던 미즈노 가쓰나리 측 신보 스케시게 부대 270명을 공격해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사무네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유신들은 항의했지만 마사무네는 "진보 부대는 아카시 부대에 완패했고 우리 군이 말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분이었다. 다테의 군법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52] 이 풍문은 여러 억측을 낳았지만, 마사무네가 처벌받은 기록은 없다.[53]

오사카 전투가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난카이도 이요 국 안의 10만 석을 마사무네에게 주었고, 마사무네는 이를 서장자인 다테 히데무네에게 주어 센다이 번에서 분가 독립시켜 우와지마 번의 초대 번주로 삼았다.

겐와 원년 9월(1615년)에는 사위 마쓰다이라 타다테루가 이에야스의 분노를 샀다.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전쟁 준비를 지시하고, 리처드 콕스는 전쟁 발발을 예측했다. 『키무라 우에몬 각서』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마사무네를 험담하며 히데타다에게 오슈 출진을 명령했고, 마사무네도 전쟁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면회를 요청했고, 마사무네는 2월 22일 슨푸성으로 향했다. 이에야스는 타다테루가 마사무네의 참언을 했다고 말하며 의심을 풀고 히데타다를 지키도록 유명했다.

같은 해 4월 이에야스가 죽자 마쓰다이라 타다테루는 개역되고, 고로하치히메는 이혼하여 친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8월경 다시 마사무네 토벌 소문이 퍼졌다.

세상이 안정된 후, 마사무네는 영토 개발에 힘썼다. 데이잔보리라 불리는 운하를 정비하고, 기타카미 강 수계 유역을 정리, 개척하여 곡창지대를 만들었다. 센다이 번은 표면상 62만 석이었지만, 실제로는 74만 5천 석(관에이 총검지)의 농업 생산량을 확보했다. 문화적으로는 상방(上方) 문화를 적극 도입, 국보인 오사키 하치만구, 즈이간지, 시오가마 신사, 무쓰 국분사 약사당 등을 남겼다. 가와무라 손베에를 초빙하여 이시마키 항을 설치, 기타카미 강 유역 수운을 통해 에도에 쌀을 수출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겐나 6년(1620년) 와령소동에서는 우와지마 번주가 된 히데무네와 대립, 한때 우와지마 번 반납을 막부에 청했으나 후에 화해했다. 마사무네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까지 섬겼다. 간에이 12년(1635년) 이에미쓰가 산킨코타이 제도를 발표하자, 마사무네는 "명령에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마사무네에게 토벌을 명령해 주십시오"라고 말했고, 이에미쓰는 마사무네에게 호신용 화승총 10정을 주었다.[54] 이에미쓰는 마사무네를 "다테의 아버지"라 부르며 귀히 여겼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와의 추억, 합전 등 전국 시대 이야기를 했다.

마사무네는 간에이 11년(1634년)경부터 건강 악화를 호소했다. 간에이 13년(1636년) 4월 18일, 어머니의 보답사인 호슌인에 참배한 후 성하를 둘러싼 산들을 순례했다. 경가봉에서는 곁에 있는 오쿠야마 조료에게 사후 매장지를 지시했다. 4월 20일 참근교대에 출발한 마사무네는 병세가 악화, 절식 상태가 계속되었고 배에 혹이 생겼다. 5월 21일 이에미쓰는 상야시키에 가서 마사무네를 문병했다. 마사무네는 행수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이에미쓰를 맞이했다.[54]

5월 24일 미시(오전 6시) 사망. 향년 70세(만 68세). 사인은 식도 분문암에 의한 암성 복막염으로 추정된다. "다테 오토코"라는 이름에 걸맞게 임종 시 처자에게도 죽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5월 26일 다테 다다무네에게 유령 상속이 허락되었다. 시신은 속대 차림으로 목관에 담아 방부 처리 후 가마에 실려 6월 3일 센다이로 돌아왔다. 순사자는 이시다 쇼칸 등 가신 15명, 배신 5명이었다. 에도에서는 7일간, 교토에서는 3일간 물고기와 새를 잡는 것과 음악 연주가 금지되었다.

사세의 구는,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속세의 어둠을 비추며 가는구나''".

[[File:Zuiho-den06s3200.jpg|thumb|즈이호덴 묘소에 있는 마사무네의 묘소

3. 인물 및 일화

다테 마사무네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전형적인 정서불안형, 우왕좌왕형 인물이었다. 24살때 이런 기질 덕분에 오슈의 패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하면서도 이에야스가 의도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스스로 봉지(封地)를 획득하려고 무리하게 군대를 일으켜 결국 이에야스가 약속했던 100만 석은 이런 다테 마사무네의 행동과 상쇄되어 없어져 버렸다. 심지어는 자신이 대다이묘의 신분으로서 마에다 도시이에의 조카 마에다 도시마스에게 그런 점으로 훈계를 듣고도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횡행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간양록》에서는 친동생을 죽인 점 등을 거론하면서 왜장 중 가장 음흉하고 사악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테 마사무네 동상

  • * '독안룡'의 유래


휘 '마사무네'는 아버지 데루무네가 다테 집안의 중흥조로 모셔지던 무로마치 시대의 제9대 당주 대선대부 마사무네의 이름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96] 마사무네 본인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선조(대선대부 마사무네)와 관련된 곳에 묻히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그곳에 묻혔다.[96]

마사무네의 별칭인 '독안룡'은 원래 당나라 무장이자 후당의 태조가 된 이극용의 별명이다. 《자치통감》권제255에 "여러 장군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극용은 외눈이었고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독안룡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사무네를 처음으로 '독안룡'이라고 부른 것은 1901년(메이지 34년)에 발행된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가 최초이다.

마사무네가 원래는 '외눈의 행자'라 불린 만해(滿海) 스님의 환생이라는 일화는 마사무네 생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도호쿠 지방의 석화(昔話) 중에는 '센다이님(마사무네)의 신비스러운 힘으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농민의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오른쪽 눈을 잃은 원인은 천연두였지만, 마사무네는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나뭇가지에 오른쪽 눈이 박혀 눈알을 뽑아 삼켰다고 주장했다.

에도 시대 후기 유학자 라이산요(頼山陽)는 한시에서 마사무네를 '독안룡'이라 칭했다. 1841년 간행된 『산요유고(山陽遺稿)』에 실린 「영사절구(詠史絶句)」 15수 중 하나가 마사무네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183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다음과 같다.

"

횡삭영풍독차공(横槊英風独此公)

육생비리렴군봉(肉生髀裏斂軍鋒)

중원약미수운우(中原若未収雲雨)

하북혼귀독안룡(河北渾帰独眼龍)

"

:창을 옆에 끼고 시를 짓는 기개는 오직 이 공(公)뿐이다.

:허벅지 살이 붙고 군대의 칼날을 거두었다.

:만약 중원이 아직도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하북은 모두 독안룡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출전)

::이토 아이고(伊藤靄谿) 주석 『산요유고시주석(山陽遺稿詩注釈)』서예계, 1985년

::라이세이이치(頼成一)·이토 키치조(伊藤吉三) 역주 『라이산요시초(頼山陽詩抄)』이와나미 쇼텐〈이와나미 문고〉, 1944년

"독안룡(独眼竜)"은 원래 중국 당(唐) 왕조 말기 군벌 수령 중 군사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리커용(李克用)의 칭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제255권에 "장수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크용은 한쪽 눈이 약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독안룡이라고 불렀다"라고 적혀 있다. "眇"에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와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작다"라는 뜻이 있어 리커용의 정확한 상태는 불분명하다. 산요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던 마사무네를 리커용에 비유한 것은 그의 시적 독창성이다.

첫 구절의 "槊(삭)"은 "창(矛)"을 의미하며, 조조(曹操)가 적벽의 전투(赤壁の戦い)를 앞두고 진중에서 무기를 옆에 끼고 시를 지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소식(蘇軾)이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술을 따르고 강가에 서서, 창을 옆에 끼고 시를 짓는 것은 진정으로 일세의 영웅이다"라고 읊으며 조조를 칭송한 것을 바탕으로, 조조에 필적할 만큼 문무 양도에 뛰어난 영웅은 일본에서는 마사무네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구절은 유비(劉備)의 "비육의탄(髀肉の嘆)" 고사를 바탕으로, 평화의 도래와 함께 군대를 거두고 몸이 나른해진 마사무네의 한탄을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의 "중원(中原)"은 황하(黄河) 중류 지역을 가리키며, 장안(長安)·낙양(洛陽)을 포함한 지역으로, 고대 은(殷) 왕조·주(周) 왕조 이래 중국 문명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리커용의 숙적이었던 군벌 주전충(朱全忠)의 지배하에 있었고, 주전충은 후에 후량(後梁)을 세운다. 여기서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일본의 킨키 지방의 비유가 된다. "운우(雲雨)"는 전란을 비유한다.

마지막 구절의 "하북(河北)"은 현재의 하북성(河北省)이 아니라 황하 북쪽 지역을 가리키며, 리커용의 본거지 진양(晋陽, 현재 산시성(山西省)태원시(太原市))이 중원에 대해 황하 북쪽에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일본의 도호쿠 지방의 비유이다. 산요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나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한 천하 통일이 급속도로 진전되지 않았다면, 도호쿠 지방 전역이 마사무네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이라며 마사무네가 "늦게 태어났다"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 * 외모와 콤플렉스


다테 마사무네는 애꾸눈인 것에 대해 엄청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화공에게 두 눈이 멀쩡한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마사무네의 유언에 따라 양쪽 눈을 뜬 상태로 그려진 초상화도 있으며,가노 야스노부가 그린 센다이 시 박물관 소장의 초상화가 그 예시이다. 사후에 제작된 목상이나 그림에는 오른쪽 눈을 약간 작게 하여 양쪽 눈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비록 병으로 잃었다고 해도, 부모에게서 받은 눈 하나를 잃은 것은 불효이다"라는 마사무네의 생각 때문이었다.[55]

마사무네가 등장하는 여러 픽션 작품에서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기록에는 눈을 가린 모습은 없다.[56] 칼의 칼등 모양의 눈가리개 등으로 오른쪽 눈을 가리는 관습은 1942년 영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영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암살단의 화살에 오른쪽 눈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설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오른쪽 눈을 가리지 않는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창작물에서 칼등 모양의 눈가리개는 마사무네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2016년 텔레비전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시대 고증을 중시하면서도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흰 붕대라는 절충안을 채택하기도 했다.[57]

스타 워즈의 다스 베이더가 쓴 가면은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된 다테 마사무네의 투구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이다.

  • * 처세술과 야망


다테 마사무네는 অসাধারণ한 처세술과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오자키 잇키를 선동했다는 의혹을 받았을 때, 흰 수의에 금박을 입힌 책주(磔柱, 십자가)를 짊어진 모습으로 출두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증거로 제시된 문서에 자신의 서명(할미새를 도안화한)에 바늘 구멍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혐의를 벗었다. 실제로는 두 개의 서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히데요시도 확증을 얻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마사무네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했다. 그의 은거소였던 와카바야시(若林)성(지금의 일본 미야기 형무소 자리)이나 마사무네가 재건한 즈이간사, 마사무네의 사당인 즈이호덴(瑞鳳殿)이 있는 센다이 시 쓰네가호(經ヶ峰) 역사 공원에는 마사무네가 조선에서 가져온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남아있다.

모가미씨 집안이 우에스기 집안의 공격을 받았을 때, 가타쿠라 가게쓰나의 '어부지리' 계책을 진언했지만, 마사무네는 어머니의 안전을 이유로 원군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에스기군이 야마가타 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움직일 음모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사무네는 닌자 집단인 구로하바키구미(黑脛巾組)를 통해 이간 및 선동 공작을 벌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도요토미 정권 시대부터 천하를 찬탈하고자 책략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참전을 미룬 것은 오슈 지역 내부 단속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고호조씨와 연합하여 히데요시를 쓰러뜨리려 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가사이·오자키 잇키를 선동하여 영지 확대를 노렸다는 설도 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 원제: Historia de Iapam)》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에게 배반을 의심하며 봉록 몰수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와가 다다지카(和賀忠親)를 선동하여 난베 도시나오(南部利直)의 영토를 침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갓타군만 더해 주었고, 이는 동군 참가 무장 중 가장 적은 논공행상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사무네는 센다이 평야의 신전(新田) 개발을 추진하여 센다이 번의 고쿠타카를 크게 늘렸다.[98] 센다이 번은 에도 시대 중기에 고쿠타카 200만 석을 넘는 일본 최대 수준의 번으로 성장했다.[98]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로마에 파견한 '게이쵸 견구사절'은 막부 타도를 꾀한 마사무네의 계획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쓰네나가는 로마와의 군사동맹 교섭 중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마사무네가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고 발언했다.[99]

마사무네는 막부군과의 결전에 대비한 작전 기획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 집안과의 관계 악화로 막부 타도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막부는 마사무네가 살아있는 동안 모반 가능성을 경계했다.

만년의 마사무네는 '취여구호(醉余口號)'라는 한시를 남겼는데, 이 시는 천하를 얻지 못한 회한과 여생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센다이 성을 산성으로 유지한 것은 죽는 순간까지 천하를 차지할 야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마사무네는 틈만 나면 "내가 2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전국의 패자(覇者)가 되었을 텐데..."라고 한탄하며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는 '과거에는 천하를 노렸지만, 지금은 이에미쓰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 *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면서도 유사시 천하의 패권을 잡을 기회를 노렸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서 실패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이에야스에게 감복하고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사위로 삼는 등, 천하를 얻으려는 야망을 단념하고 영지 경영에 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사무네가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사위 다다테루를 쇼군으로 앉히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598년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는 가타쿠라 고쥬로의 조언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다. 1600년, 도쿠가와 군의 지휘하에 시로이시 전투와 하세도 전투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센다이 번을 하사하여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1604년, 마사무네는 5만 2천 명의 가신과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센다이로 이주하여 크고 번영하는 도시로 발전시켰다. 1614년과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맞서 싸웠다. 1616년 이에야스가 임종을 앞두자, 마사무네는 그를 방문하여 선시를 낭독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마사무네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했다. 이에미쓰는 마사무네에게 쇼군 앞에서도 칼을 차는 것을 허락하고, 니조성 참내 때 고산케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자주색 말총을 하사했다. 마사무네가 병상에 눕자 에도성 안의 절과 신사에 쾌유 기도를 올리게 하고, 사망 3일 전에는 직접 문병을 왔다. 마사무네 사후에는 히데타다 사망 때보다 더 비통해하며 에도와 교토에서 살생과 유흥을 금지했다. 이에미쓰는 실전 경험이 없어 마사무네 등에게 전투에 대해 자주 물었는데, 스이아게하라 전투에 대해 질문했을 때 승자인 마사무네는 상세히 설명했지만, 패자인 사타케 요시노부는 침묵했다고 한다.

만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저택에 초청했을 때, 히데타다가 히데요시에게 받은 칼을 갖고 싶다고 하자 마사무네는 막부의 품위를 해치는 일이라며 반박했다. 1628년 히데타다를 센다이 번 에도 저택에 초대했을 때, 마사무네가 직접 음식을 올리자 측근인 나이토 마사시게가 시식을 요청했다. 마사무네는 10년 전이라면 반란을 일으킬 생각도 있었겠지만, 독살 같은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격분하여 응답했다.

  • * 취미와 문화


다테 마사무네는 다양한 취미를 가진 인물로, 특히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당시 다이묘들 사이에서 요리가 취미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마사무네는 자금 조달을 위한 목적 외에도 미식가로서 요리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대접이란 제철 음식이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고 주인이 직접 요리하여 그것을 대접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명기집》에 남겼다. 이 말은 오늘날 일본뿐 아니라 서양의 요리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핫토리 영양전문학교와 다테 집안의 요리사가 세운 미야기 조리제과전문학교 등에서 교훈으로 삼고 있다.

센다이 지역에서 시작된 많은 일본 요리는 마사무네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데야마 명물인 냉동두부(凍り豆腐)와 낫토는 마사무네의 요리 연구 결과물이며, 센다이 명물 떡 준다모치(ずんだ餅)도 그가 고안했다는 설이 있다. 센다이 성벽 아래에는 미소 창고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대규모 된장 생산 체제를 구축한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어묵 또한 마사무네가 고안했다는 설이 있지만, 미야기 현 수산시험장의 자료에는 에도 시대 중기에 생겨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리 외에도 마사무네는 (能), 와카, 갤리온 건조 등 다양한 취미를 즐겼다. 특히 에 심취하여 자신의 시동을 태고(太鼓)의 명인에게 입문시키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서 태고를 연주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노에 연간 3만여 석을 투자할 정도였다. 히데요시가 주최한 노래 모임에서는 마사무네가 읊은 와카가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던 마사무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하고, 스페인 탐험가 세바스티아노 비스카이노와 친분을 쌓았다. 그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스페인식 갤리온을 건조하기도 했다.

이시노마키(미야기현, 일본)에 있는 갤리온선 '''다테 마루''' 또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복제품


마사무네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 건조를 명령하고, 자신의 가신인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포함한 180명의 사절단을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여 관계를 맺기도 했다.[8]

술에는 약한 편이라 취해서 실수한 일화가 여럿 남아 있다. 쇼군 히데타다와의 약속을 숙취로 지키지 못하고 병을 핑계로 둘러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골초였던 마사무네는 매일 기상 뒤, 낮, 잠들기 전 규칙적으로 세 번 담배를 피웠으며, 그의 유품 중에는 애용하던 담뱃대가 남아있다. 유품 중에는 로사리오도 발견되어 그가 몰래 기독교에 귀의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천주교 신자를 학살한 점을 볼 때 정치적 이용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 1. '독안룡'의 유래

휘 '마사무네'는 아버지 데루무네가 다테 집안의 중흥조로 모셔지던 무로마치 시대의 제9대 당주 대선대부 마사무네의 이름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96] 마사무네 본인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선조(대선대부 마사무네)와 관련된 곳에 묻히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그곳에 묻혔다.[96]

마사무네의 별칭인 '독안룡'은 원래 당나라 무장이자 후당의 태조가 된 이극용의 별명이다. 《자치통감》권제255에 "여러 장군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극용은 외눈이었고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독안룡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사무네를 처음으로 '독안룡'이라고 부른 것은 1901년(메이지 34년)에 발행된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가 최초이다.

마사무네가 원래는 '외눈의 행자'라 불린 만해(滿海) 스님의 환생이라는 일화는 마사무네 생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도호쿠 지방의 석화(昔話) 중에는 '센다이님(마사무네)의 신비스러운 힘으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농민의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오른쪽 눈을 잃은 원인은 천연두였지만, 마사무네는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나뭇가지에 오른쪽 눈이 박혀 눈알을 뽑아 삼켰다고 주장했다.

에도 시대 후기 유학자 라이산요(頼山陽)는 한시에서 마사무네를 '독안룡'이라 칭했다. 1841년 간행된 『산요유고(山陽遺稿)』에 실린 「영사절구(詠史絶句)」 15수 중 하나가 마사무네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183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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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삭영풍독차공(横槊英風独此公)

육생비리렴군봉(肉生髀裏斂軍鋒)

중원약미수운우(中原若未収雲雨)

하북혼귀독안룡(河北渾帰独眼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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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옆에 끼고 시를 짓는 기개는 오직 이 공(公)뿐이다.

:허벅지 살이 붙고 군대의 칼날을 거두었다.

:만약 중원이 아직도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하북은 모두 독안룡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출전)

::이토 아이고(伊藤靄谿) 주석 『산요유고시주석(山陽遺稿詩注釈)』서예계, 1985년

::라이세이이치(頼成一)·이토 키치조(伊藤吉三) 역주 『라이산요시초(頼山陽詩抄)』이와나미 쇼텐〈이와나미 문고〉, 1944년

"독안룡(独眼竜)"은 원래 중국 당(唐) 왕조 말기 군벌 수령 중 군사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리커용(李克用)의 칭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제255권에 "장수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크용은 한쪽 눈이 약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독안룡이라고 불렀다"라고 적혀 있다. "眇"에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와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작다"라는 뜻이 있어 리커용의 정확한 상태는 불분명하다. 산요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던 마사무네를 리커용에 비유한 것은 그의 시적 독창성이다.

첫 구절의 "槊(삭)"은 "창(矛)"을 의미하며, 조조(曹操)가 적벽의 전투(赤壁の戦い)를 앞두고 진중에서 무기를 옆에 끼고 시를 지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소식(蘇軾)이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술을 따르고 강가에 서서, 창을 옆에 끼고 시를 짓는 것은 진정으로 일세의 영웅이다"라고 읊으며 조조를 칭송한 것을 바탕으로, 조조에 필적할 만큼 문무 양도에 뛰어난 영웅은 일본에서는 마사무네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구절은 유비(劉備)의 "비육의탄(髀肉の嘆)" 고사를 바탕으로, 평화의 도래와 함께 군대를 거두고 몸이 나른해진 마사무네의 한탄을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의 "중원(中原)"은 황하(黄河) 중류 지역을 가리키며, 장안(長安)·낙양(洛陽)을 포함한 지역으로, 고대 은(殷) 왕조·주(周) 왕조 이래 중국 문명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리커용의 숙적이었던 군벌 주전충(朱全忠)의 지배하에 있었고, 주전충은 후에 후량(後梁)을 세운다. 여기서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일본의 킨키 지방의 비유가 된다. "운우(雲雨)"는 전란을 비유한다.

마지막 구절의 "하북(河北)"은 현재의 하북성(河北省)이 아니라 황하 북쪽 지역을 가리키며, 리커용의 본거지 진양(晋陽, 현재 산시성(山西省)태원시(太原市))이 중원에 대해 황하 북쪽에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일본의 도호쿠 지방의 비유이다. 산요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나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한 천하 통일이 급속도로 진전되지 않았다면, 도호쿠 지방 전역이 마사무네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이라며 마사무네가 "늦게 태어났다"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3. 2. 외모와 콤플렉스

다테 마사무네는 애꾸눈인 것에 대해 엄청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화공에게 두 눈이 멀쩡한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마사무네의 유언에 따라 양쪽 눈을 뜬 상태로 그려진 초상화도 있으며,가노 야스노부가 그린 센다이 시 박물관 소장의 초상화가 그 예시이다. 사후에 제작된 목상이나 그림에는 오른쪽 눈을 약간 작게 하여 양쪽 눈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비록 병으로 잃었다고 해도, 부모에게서 받은 눈 하나를 잃은 것은 불효이다"라는 마사무네의 생각 때문이었다.[55]

마사무네가 등장하는 여러 픽션 작품에서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기록에는 눈을 가린 모습은 없다.[56] 칼의 칼등 모양의 눈가리개 등으로 오른쪽 눈을 가리는 관습은 1942년 영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영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암살단의 화살에 오른쪽 눈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설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오른쪽 눈을 가리지 않는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창작물에서 칼등 모양의 눈가리개는 마사무네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2016년 텔레비전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시대 고증을 중시하면서도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흰 붕대라는 절충안을 채택하기도 했다.[57]

스타 워즈의 다스 베이더가 쓴 가면은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된 다테 마사무네의 투구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이다.

3. 3. 처세술과 야망

다테 마사무네는 অসাধারণ한 처세술과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오자키 잇키를 선동했다는 의혹을 받았을 때, 흰 수의에 금박을 입힌 책주(磔柱, 십자가)를 짊어진 모습으로 출두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증거로 제시된 문서에 자신의 서명(할미새를 도안화한)에 바늘 구멍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혐의를 벗었다. 실제로는 두 개의 서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히데요시도 확증을 얻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마사무네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했다. 그의 은거소였던 와카바야시(若林)성(지금의 일본 미야기 형무소 자리)이나 마사무네가 재건한 즈이간사, 마사무네의 사당인 즈이호덴(瑞鳳殿)이 있는 센다이 시 쓰네가호(經ヶ峰) 역사 공원에는 마사무네가 조선에서 가져온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남아있다.

모가미씨 집안이 우에스기 집안의 공격을 받았을 때, 가타쿠라 가게쓰나의 '어부지리' 계책을 진언했지만, 마사무네는 어머니의 안전을 이유로 원군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에스기군이 야마가타 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움직일 음모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사무네는 닌자 집단인 구로하바키구미(黑脛巾組)를 통해 이간 및 선동 공작을 벌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도요토미 정권 시대부터 천하를 찬탈하고자 책략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참전을 미룬 것은 오슈 지역 내부 단속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고호조씨와 연합하여 히데요시를 쓰러뜨리려 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가사이·오자키 잇키를 선동하여 영지 확대를 노렸다는 설도 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 원제: Historia de Iapam)》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에게 배반을 의심하며 봉록 몰수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와가 다다지카(和賀忠親)를 선동하여 난베 도시나오(南部利直)의 영토를 침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갓타군만 더해 주었고, 이는 동군 참가 무장 중 가장 적은 논공행상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사무네는 센다이 평야의 신전(新田) 개발을 추진하여 센다이 번의 고쿠타카를 크게 늘렸다.[98] 센다이 번은 에도 시대 중기에 고쿠타카 200만 석을 넘는 일본 최대 수준의 번으로 성장했다.[98]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로마에 파견한 '게이쵸 견구사절'은 막부 타도를 꾀한 마사무네의 계획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쓰네나가는 로마와의 군사동맹 교섭 중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마사무네가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고 발언했다.[99]

마사무네는 막부군과의 결전에 대비한 작전 기획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 집안과의 관계 악화로 막부 타도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막부는 마사무네가 살아있는 동안 모반 가능성을 경계했다.

만년의 마사무네는 '취여구호(醉余口號)'라는 한시를 남겼는데, 이 시는 천하를 얻지 못한 회한과 여생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센다이 성을 산성으로 유지한 것은 죽는 순간까지 천하를 차지할 야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마사무네는 틈만 나면 "내가 2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전국의 패자(覇者)가 되었을 텐데..."라고 한탄하며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는 '과거에는 천하를 노렸지만, 지금은 이에미쓰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3. 4.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면서도 유사시 천하의 패권을 잡을 기회를 노렸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서 실패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이에야스에게 감복하고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사위로 삼는 등, 천하를 얻으려는 야망을 단념하고 영지 경영에 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사무네가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사위 다다테루를 쇼군으로 앉히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598년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는 가타쿠라 고쥬로의 조언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다. 1600년, 도쿠가와 군의 지휘하에 시로이시 전투와 하세도 전투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센다이 번을 하사하여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1604년, 마사무네는 5만 2천 명의 가신과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센다이로 이주하여 크고 번영하는 도시로 발전시켰다. 1614년과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맞서 싸웠다. 1616년 이에야스가 임종을 앞두자, 마사무네는 그를 방문하여 선시를 낭독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마사무네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했다. 이에미쓰는 마사무네에게 쇼군 앞에서도 칼을 차는 것을 허락하고, 니조성 참내 때 고산케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자주색 말총을 하사했다. 마사무네가 병상에 눕자 에도성 안의 절과 신사에 쾌유 기도를 올리게 하고, 사망 3일 전에는 직접 문병을 왔다. 마사무네 사후에는 히데타다 사망 때보다 더 비통해하며 에도와 교토에서 살생과 유흥을 금지했다. 이에미쓰는 실전 경험이 없어 마사무네 등에게 전투에 대해 자주 물었는데, 스이아게하라 전투에 대해 질문했을 때 승자인 마사무네는 상세히 설명했지만, 패자인 사타케 요시노부는 침묵했다고 한다.

만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저택에 초청했을 때, 히데타다가 히데요시에게 받은 칼을 갖고 싶다고 하자 마사무네는 막부의 품위를 해치는 일이라며 반박했다. 1628년 히데타다를 센다이 번 에도 저택에 초대했을 때, 마사무네가 직접 음식을 올리자 측근인 나이토 마사시게가 시식을 요청했다. 마사무네는 10년 전이라면 반란을 일으킬 생각도 있었겠지만, 독살 같은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격분하여 응답했다.

3. 5. 취미와 문화

다테 마사무네는 다양한 취미를 가진 인물로, 특히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당시 다이묘들 사이에서 요리가 취미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마사무네는 자금 조달을 위한 목적 외에도 미식가로서 요리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대접이란 제철 음식이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고 주인이 직접 요리하여 그것을 대접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명기집》에 남겼다. 이 말은 오늘날 일본뿐 아니라 서양의 요리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핫토리 영양전문학교와 다테 집안의 요리사가 세운 미야기 조리제과전문학교 등에서 교훈으로 삼고 있다.

센다이 지역에서 시작된 많은 일본 요리는 마사무네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데야마 명물인 냉동두부(凍り豆腐)와 낫토는 마사무네의 요리 연구 결과물이며, 센다이 명물 떡 준다모치(ずんだ餅)도 그가 고안했다는 설이 있다. 센다이 성벽 아래에는 미소 창고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대규모 된장 생산 체제를 구축한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어묵 또한 마사무네가 고안했다는 설이 있지만, 미야기 현 수산시험장의 자료에는 에도 시대 중기에 생겨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리 외에도 마사무네는 (能), 와카, 갤리온 건조 등 다양한 취미를 즐겼다. 특히 에 심취하여 자신의 시동을 태고(太鼓)의 명인에게 입문시키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서 태고를 연주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노에 연간 3만여 석을 투자할 정도였다. 히데요시가 주최한 노래 모임에서는 마사무네가 읊은 와카가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던 마사무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하고, 스페인 탐험가 세바스티아노 비스카이노와 친분을 쌓았다. 그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스페인식 갤리온을 건조하기도 했다.

마사무네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 건조를 명령하고, 자신의 가신인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포함한 180명의 사절단을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여 관계를 맺기도 했다.[8]

술에는 약한 편이라 취해서 실수한 일화가 여럿 남아 있다. 쇼군 히데타다와의 약속을 숙취로 지키지 못하고 병을 핑계로 둘러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골초였던 마사무네는 매일 기상 뒤, 낮, 잠들기 전 규칙적으로 세 번 담배를 피웠으며, 그의 유품 중에는 애용하던 담뱃대가 남아있다. 유품 중에는 로사리오도 발견되어 그가 몰래 기독교에 귀의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천주교 신자를 학살한 점을 볼 때 정치적 이용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4. 유훈

메이지 시대 이후,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으로 여겨지는 것이 속설로 유포되고 있다.[76]


  • 인(仁)이 지나치면 나약해질 것이요, 의(義)가 지나치면 고지식해질 것이요, 예(禮)가 지나치면 아첨하게 될 것이요, 지(智)가 지나치면 거짓을 일삼게 될 것이요, 신(信)이 지나치면 손해를 볼 것이다.
  • 느긋한 마음으로 온화하게 살 것이며, 일체에 검약하여 금은을 두지 마라. 검약하는 방법은 부자유스러움을 참는 데에 있으니, 이 세상에 손님으로 왔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괴로울 것이 없다.
  • 아침 저녁의 식사는 맛있지 않더라도 맛있다고 칭찬해야 한다. 원래 손님의 몸으로 온 사람은 좋고 싫은 것을 (주인에게) 내색하면 안 되는 법이다.
  • 오늘 하루의 일상 동안 자손과 형제에게 친애하여 사바세계의 휴식을 삼아라.


이것들은 막말에서 메이지 시대에 걸쳐 미토 광공하야시 시헤이 등의 유훈으로 여겨졌으며,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으로서는 메이지 27년의 『고고총지(好古叢誌)』제3편 8권 만록(漫録) 「센다이 황문(黄門) 마사무네 경 유훈(政宗卿遺訓)」이 초출이지만, 다테 씨(伊達氏)에 관련된 사료 속에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76]

5. 평가

다테 마사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시대부터 천하를 찬탈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여러 책략을 꾸몄다고 한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천하를 장악하여 전쟁을 종결시켰다면 동아시아의 백성들에게 칭송받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참전을 미룬 것은 아시나 집안 영토에 대한 내부 단속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사타케 집안에 맞서 고호조씨 집안과 손잡고 히데요시를 쓰러뜨리려 했다는 설도 있다. 가사이·오자키 잇키를 선동하여 영지 확대를 노렸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에게 "네가 날 배반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며 오슈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곁에 두려 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와가 다다치카를 선동해 난부 도시나오의 영토를 침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갓타군만 더해 주었는데, 이는 동군에 참가한 무장들 중 가장 적은 논공행상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사무네는 센다이 평야의 개간을 장려하여 센다이 번의 석고를 크게 늘렸다.[98] 에도 시대 중기에는 고쿠다카가 200만 석을 웃도는 일본 최대 수준의 번으로 성장했다.[98] 센다이 번의 풍요로움은 널리 알려져 야스이 소켄은 《독서여적》에서 "2백여만 석", 호아시 반리는 《동잠부론》에서 "250만 석"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98]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사절로 로마에 파견된 게이초 견구사절은 막부 타도를 꾀한 마사무네의 계획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99] 쓰네나가는 로마와의 군사동맹 교섭 중 펠리페 3세에게 "마사무네는 세력이 있고 용맹하여, 뭇 사람들 모두가 황제가 되리라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발언했다.[99]

마사무네는 막부군과의 결전에 대비한 작전 입안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개역, 스페인과의 동맹 실패 등으로 인해 막부 타도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마사무네가 살아있는 동안 막부는 그가 언제 모반을 일으킬지 몰라 항상 경계했다. 리처드 콕스의 일기에는 "마사무네 공은 카르사 님(마쓰다이라 가즈사노스케 다다테루)을 후원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1628년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센다이 번 저택에 초대하여 대접했는데, 이때 독살 의혹이 일자 "10년 전이라면 모반할 생각도 있었지만, 독살 같은 옹졸한 짓이 아니라 한 판의 싸움으로 결판을 내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타다는 마사무네에게 이에야스가 슨푸성에서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 마사무네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오슈를 치려고 했었다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만년의 마사무네는 '취여구호'라는 한시를 남겼는데, 마지막 구절은 "이제는 여생이나마 편안히 보내고 싶다"와 "천하를 얻지 못하고 여생도 분하게 보낸다"라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여, 그의 진의에 대한 논란이 있다. 센다이 성이 산성이라 평화로운 세상을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사후에는 평성으로 옮길 것을 추천한 것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천하를 차지할 야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마사무네는 틈만 나면 천하를 노리는 모습으로 중앙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는 "내가 2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전국의 패자가 되었을 텐데..."라고 한탄하며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는 "이 마사무네는 물론이요, 이론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신종의 예를 표했고, 이에미쓰의 외박을 경계하며 "저도 이에야스 공의 목을 몇 번이나 노렸던 적이 있습니다"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6. 한국과의 관계

다테 마사무네는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참전했다.[95]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하여 진주성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95] 출병 당시 다테가의 부대는 황금으로 된 긴 진사가를 씌우는 등 화려한 복장으로 유명했으며, 교토 주민들의 환호성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고쿠다카가 매우 많았던[95]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은 조선 남부 연안에 '왜성'을 쌓았는데, 마사무네는 공사 면제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에게 아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축성에 참여했다.[95] 그러나 정작 전투에는 소극적이어서, 제2차 진주성 전투 외에는 다른 다이묘들이 전투를 벌일 때 팔씨름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침략 행위에 태만했다.[95] 결국 정유재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다.[95]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할복 사건 당시, 히데쓰구와 친분이 있던 마사무네는 모반 혐의를 받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마사무네는 이에야스와 딸 이로하히메와 이에야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약혼시키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 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에 종군하여 시라이시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100만 석의 영지를 약속했으나, 마사무네가 독단적으로 잇키를 선동한 사실이 발각되어 약속은 백지화되고 센다이 개부 허가와 무쓰 국 갓타 군 2만 석 추가에 그쳤다.

마사무네는 루이스 소텔로를 비롯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도호쿠에서 포교 활동을 하도록 허락했다. 또한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여 필리핀, 멕시코, 스페인을 거쳐 로마를 방문하는 등 외교에도 힘썼다.[8] 이 원정대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라는 갤리온선을 건조하여 사용했다. 원정대원 중 일부는 스페인 코리아 델 리오(세비야)에 남아 정착했으며, 그 후손들은 하폰(Japan)이라는 성을 가지고 현재 스페인에 살고 있다.

7. 관련 작품

다테 마사무네는 센고쿠 시대의 인물로, 문학,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다루어졌다.[25]


  • 장편소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다테 마사무네》가 대표적이며, 이를 원작으로 한 1987년 NHK 대하드라마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와타나베 켄이 마사무네 역을 맡았다. 야마오카 소하치 외에도, 카이온지 시오고로, 이구치 아사오등의 작가들이 쓴 소설들이 있다.
  • 영화: 1942년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 카타오카 치에조 주연의 《독안룡 마사무네》와 1959년 코노 스즈이치 감독, 나카무라 킨노스케 주연의 《독안룡 마사무네》 등이 제작되었다. 그 이전 1912년,1915년,1919년에 제작된 영화도 있다.
  • 텔레비전 드라마: 1987년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 외에도 1993년 타카하시 에이키 주연의 《독안룡의 야망 다테 마사무네》, 1995년 시바타 쿄헤이 주연의 《사랑과 야망의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 2013년 시이나 킷페이 주연의 《와룡의 천〜다테 마사무네·독안룡이라 불린 남자〜》 등이 있다.
  • 애니메이션: 후쿠시마현다테시와 가이나가 공동 제작한 《마사무네다테니쿠루》가 있으며, 무라세 아유무가 마사무네의 성우를 맡았다.[25]
  • 만화: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다테 마사무네》, 나가이 고&다이내믹 프로의 《전국무장열전 다테 마사무네》 등이 있다.
  • 게임: 캡콤의 《전국 BASARA》 시리즈에서 나카이 카즈야가 마사무네의 성우를 맡았으며, 코에이의 《전국무쌍》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남코에서 제작한 패미컴 게임 《독안룡 마사무네》도 있다.
  • 기타: 오사카 프로레슬링에는 마사무네라는 링 네임을 가진 레슬러가 활동하고 있다.[26][27] ''1632'' 시리즈의 책 1636: 운명의 바다에서 단편 ''떠오르는 태양''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오다 시나몬 노부나가에서는 마사무네가 부(Boo)라는 프렌치 불독으로 환생한다. 은하전설 위드: 오리온에서는 마사무네의 개 버전이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사무라이 시대: 일본을 위한 전투에서 배우 이토 히데아키가 다테 마사무네를 연기했다. 비디오 게임 페르소나 5 스트라이커즈에서 마사무네는 여러 번 언급된다. 비디오 게임 AI: 섬니엄 파일즈에서 주인공 카나메 다테는 왼쪽 눈을 제거했는데, 이는 마사무네 자신을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케멘 센고쿠 오토메 게임의 루트 캐릭터이기도 하다. 1935년 나카야마 신페이 작곡, 사이죠 야소 작사의 『고반조 오도리』는 「마사무네 공 삼백년제」를 기념하여 만들어졌으나, 가사에 있는 「옥좌」라는 단어가 불경하다 하여 금지곡이 되었다가 2017년에 복원되었다.[91][92] 사쿠라유키의 『비상』은 스리카미하라 전투를 그린 곡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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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뉴스 【独自】伊達政宗作「達磨図」90年ぶり発見 展覧会出品後、行方不明に https://kahoku.news/[...] 河北新報 2022-05-17
[73] 웹사이트 涌谷伊達家の至宝紹介 甲冑、刀など武具20点 https://www.kahoku.c[...] 河北新報社 2019-09-06
[74] 웹사이트 子孫が語る刀剣と秘話 伊達政宗にとって刀とは家を存続させる象徴 (1/2) https://dot.asahi.co[...]
[75] 서적 伊達政宗―奥州より天下を睨む独眼龍
[76] 웹사이트 76 五常訓は政宗の作かどうか http://lib-www.smt.c[...] 仙台市 2014-06-25
[77] 서적 天下人の一級史料 柏書房 2009
[78] 뉴스 「ミス・ワールド2018」日本代表決定 伊達政宗の末裔・慶応大学の伊達佳内子さん https://mdpr.jp/news[...] モデルプレス 2018-08-28
[79] 서적 骨は語る_徳川将軍・大名家の人びと 2021-06
[80] 웹사이트 「独眼竜」が猫にデレデレ? 書状が伝える意外すぎる武将の一面 https://www.sanin-ch[...] 山陰中央新報デジタル 2022-02-06
[81] 웹사이트 伊達政宗の書状を初公開 猫テーマのミニ企画展 https://www.sanin-ch[...] 山陰中央新報デジタル 2022-01-14
[82] 서적 常山紀談 博文館
[83] 웹사이트 常山紀談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22-11-02
[84] 서적 常山紀談 博文館
[85] 논문 松川だるまの民族誌 東北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2005-03-31
[8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11-09
[87] 서적 豊臣秀吉研究 角川書店 1975
[88] 서적 骨が語る日本史 学生社 1998
[89] 웹사이트 三藩主の墓とその遺品 https://www.zuihoden[...] 2021-04-23
[90] 웹사이트 ザ・AZABU 第44号 https://www.city.min[...] 港区麻布地区総合支所 2020-11-07
[91] 뉴스 <御藩祖をどり>幻のご当地ソング82年ぶり復活 伊達政宗三百回忌に制作も…特高警察の圧力で「発禁」 http://www.kahoku.co[...] 河北新報 2017-12-04
[92] 뉴스 佐々木伸:幻の歌 82年ぶり復元◇発禁処分の政宗「御藩祖をどり」たどり、今春にも演奏会◇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9-09
[93] 일반
[94]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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