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나리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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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나리쿠니는 센다이 번의 12대 번주로, 1817년에 태어나 1841년에 사망했다. 1827년 다테 나리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 나리요시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다테 요시쿠니를 대신하여 가문을 상속받았다. 그는 덴포 연간의 기근 속에서 저곡을 비축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1836년의 대기근으로 재정이 고갈되었다. 학문을 장려하고 행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지진, 수해, 기근 등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1841년 에도에서 사망했으며, 양자인 다테 요시쿠니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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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나리쿠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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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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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테 나리쿠니 (伊達斉邦) |
출생 | 1817년 11월 6일 |
출생지 | 미야기현 도메시 |
사망 | 1841년 9월 9일 |
사망지 | 에도 |
다른 이름 | 통칭: 소지로우 (総次郎) 후지사부로 (藤三郎) 코고로 (幸五郎) 무네노리 (宗礼) |
시호 | 류잔 공 (龍山公) |
계명 | 지운인덴 류잔신주 다이코지 (慈雲院殿竜山真珠大居士)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좌근위권소장 무쓰노카미 종4위상 좌근위중장 |
가문 | |
씨족 | 시라이시 씨 다테 씨 (도메 다테 가 → 다테 종가) |
아버지 | 다테 무네미쓰 (伊達宗充) |
어머니 | 가타쿠라 무라노리의 딸, 아츠네 |
양아버지 | 다테 나리요시 |
형제자매 | 다테 나리쿠니 구니요리 오타테메 미츠노부 |
의붓 동생 | 다테 요시쿠니 |
배우자 | 마사히메, 다테 나리요시의 딸 (게이쇼인) |
자녀 | 양자: 다테 요시쿠니 |
센다이 번 | |
번주 | 다테 가문 |
섬긴 쇼군 |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이에요시 |
12대 센다이 번주 | [[파일:Take ni Suzume.svg|20px]] |
임기 시작 | 1827년 |
임기 종료 | 1841년 |
이전 번주 | 다테 나리요시 |
다음 번주 | 다테 요시쿠니 |
2. 생애
다테 요시무라의 손자이자, 도메 다테 가문의 다테 무네미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고로, 토사부로, 소지로 등으로 불렸다.
1828년, 다테 나리요시가 사망하면서 센다이 번은 후계 문제로 위기를 맞았다. 나리요시의 아들 다테 요시쿠니는 당시 2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는 번을 적몰할 가능성을 시사하며 압박했다. 이에 로쥬 미즈노 타다아키라는 나리요시의 딸 마사히메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을 혼인시키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결국 다테 가문의 지류 출신인 나리쿠니가 마사히메와 결혼하고 요시쿠니를 양자로 삼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리쿠니는 1828년 궁중 계급 종사위하(従四位下)와 관위 무쓰노카미(Mutsu-no-kami)를 받았다. 그해 1월 28일에는 쇼군 이에나리에게 처음 어목견(御目見)을 얻고 종4위하(従四位下) 소장(少将)에 서임되었으며, 무쓰노카미(陸奥守)에 임관되었다. 또한, 나리요시에게서 받은 편휘(偏諱) '나리(斉)' 자를 받아 '''나리쿠니(斉邦)'''로 개명했다.[1] 1831년에는 종사위상(従四位上)과 사코노에추쇼(Sakonoe-chūshō)로 승진했다.[1]
나리쿠니는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지식을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덴메이 대기근 이후 지역 주도로 행해지던 '저곡(貯穀)' 정책을 뒷받침하였으며, 오쓰키 세이준에게 요쿄쿠의 신곡(新曲)을 만들게 하는 등 문화 예술 진흥에도 힘썼다. 유능한 관리를 등용하여 번정 개혁에 힘썼으나, 재임 기간 동안 지진, 수해, 기근 등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여 '천견론'(악정을 행하는 영주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다)의 관점에서 비판받기도 했다.[4] 그러나 산킨코타이 중 병에 걸려 1841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에도에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계
다테 나리쿠니일본어는 1817년 11월 6일, 도메 다테 가문(登米伊達家)의 당주 다테 무네미쓰일본어(伊達宗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센다이 번 제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伊達吉村)의 여덟 번째 아들 다테 무라요시|무라요시일본어였다. 어머니는 가타쿠라 무라노리일본어(片倉村矩)의 딸 쓰네코히메(恒子姫)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후지사부로(藤三郎), 고고로(幸五郎)였다.1819년, 남자아이가 없던 번주 다테 나리무네일본어가 병상에 눕자, 당시 2세였던 고고로(나리쿠니)는 와쿠야 다테 가문의 겐지로(후의 다테 요시모토일본어, 당시 12세), 이치노세키번 주 다무라 소우켄의 양제이자 사촌(아버지 소우미쓰의 친형인 다무라 무라스케일본어의 아들)인 다테 나리요시|다무라 아키요시일본어와 함께 번주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었다.
2. 2. 번주 계승
1819년 센다이 번 번주 다테 나리무네가 후사 없이 병에 걸리자, 2세였던 나리쿠니는 다테 요시모토, 다무라 아키요시와 함께 번주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었다.[1] 나이와 혈연을 고려하여 다무라 아키요시가 다테 나리요시로서 11대 번주가 되었다.1827년 나리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다음날 이름을 '''소우지로'''로 개명했다.[1] 1828년 양아버지 나리요시가 사망하자, 나리요시의 친아들 조주사부로(후의 다테 요시쿠니)가 어렸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받아 12대 번주가 되었다.[1]
막부의 로쥬는 나리요시의 정실에게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을 혼인시켜 가독 상속을 시키는 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센다이 번 중신들의 노력으로 무마되었다.[1]
1828년 휘를 '''소우레이'''라 칭하고, 장군 이에나리에게 어목견을 얻고 종사위·소장에 서임되어 무쓰노카미에 임관했으며, 나리요시처럼 "나리"자를 받아 '''나리쿠니'''로 개명했다.[1] 1831년 종사위상·중장으로 승진했다.[1]
2. 3. 번주 시절
다테 나리요시(Date Nariyoshi)의 죽음으로 센다이 번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의 아들인 훗날의 다테 요시쿠니(Date Yoshikuni)는 당시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Tokugawa shogunate)는 적몰(attainder) 가능성을 언급하며 번을 압박했다.로쥬(rōjū) 미즈노 타다아키라(Mizuno Tadaakira)는 나리요시의 네 살배기 딸 마사히메(Masahime)를 쇼군(Shōgun) 도쿠가와 이에나리(Tokugawa Ienari)의 아들과 결혼시키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대신 다테 가문의 지류 출신인 다테 나리쿠니가 마사히메와 결혼하고, 유아였던 다테 요시쿠니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삼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28년, 나리쿠니는 궁중 계급 종사위하(従四位下)와 관위(courtesy title) 무쓰노카미(Mutsu-no-kami)를 받았다.[1] 그해 1월 28일에는 쇼군 이에나리에게 처음 어목견(御目見)을 얻고 종4위하(従四位下) 소장(少将)에 서임되었으며, 무쓰노카미(陸奥守)에 임관되었다. 또한, 나리요시에게서 받은 편휘(偏諱) '나리(斉)' 자를 받아 '''나리쿠니(斉邦)'''로 개명했다.[1] 1831년에는 종사위상(従四位上)과 사코노에추쇼(Sakonoe-chūshō)로 승진했다.[1]
나리쿠니는 덴메이 대기근 이후 지역 주도로 행해지던 '저곡(貯穀)' 정책을 뒷받침했다.[2] 이는 1833년 흉작 때 효과를 발휘했지만,[2] 1836년 대기근 때는 고갈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다.
1837년, 나리쿠니는 나리요시의 딸 사이히메(綵姫)와 혼인하고, 동시에 나리요시의 유자(遺子)이자 사이히메의 친동생인 조주사부로(후의 다테 요시쿠니)를 양자로 삼았다.[3]
학문을 좋아했던 나리쿠니는 오쓰키 세이준(大槻清準)에게 요쿄쿠(謡曲)의 신곡(新曲)을 만들게 하는 등 문화, 예술 진흥에 힘썼다. 유능한 관리를 등용하여 번정 개혁에 힘썼으나, 재임 기간 동안 지진, 수해, 기근 등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여 '천견론(天譴論)'(악정을 행하는 영주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다)의 관점에서 비판받기도 했다.[4]
2. 4. 사망
다테 나리쿠니는 참근교대 중에 병에 걸려, 덴포 12년 7월 24일 (1841년 9월 9일)에 25세의 나이로 에도에서 사망했다.[4] 양자인 다테 요시쿠니가 뒤를 이었다. 계명은 자운원전룡산진주대거사(慈雲院殿龍山眞珠大居士)이다.3.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다테 무네미쓰 (1787~1843) |
어머니 | 쓰네코히메(恒子姫) - 가타쿠라 무라노리의 딸 |
양부 | 다테 나리요시 (1798~1828) |
정실 | 교쇼인 (慶松院, 1824~1861) - 마사히메(正姫), 다테 나리요시의 장녀 |
양자 | 다테 요시쿠니 (1825~1874) - 다테 나리요시의 차남 |
4. 편휘를 받은 인물
이름 | 비고 |
---|---|
다테 요시쿠니(伊達慶邦) | 양자, 의제(전대 척의의 아들), 차대 번주[1] |
다테 구니야스(伊達邦寧) | 실제 동생, 등미 이다테 가문[2] |
다테 구니타카(伊達邦隆) | 와쿠야 이다테 가문[3] |
다테 구니타카(伊達邦孚) | 미야토코 이다테 가문[4] |
다테 구니노리(伊達邦命) | 미즈사와 이다테 가문 |
다테 구니카즈(伊達邦和) | 가와사키 이다케 가문 |
가타쿠라 구니노리(片倉邦憲) | |
다무라 구니아키(田村邦顕) | 무쓰 이치노세키번 7대 번주, 전대 척의의 양제·다무라 소켄의 아들 |
다무라 구니유키(田村邦行) | 무쓰 이치노세키번 8대 번주, 구니아키(邦顕)의 동생 |
미사와 구니아키(三沢邦明) | 미사와씨, 미사와 무라노부의 손자 |
참조
[1]
문서
(제목 없음)
2016-06-00
[2]
서적
제6장 仙台藩における天保の基金への社会的対応
臨川書店
2020-11-30
[3]
서적
仙台叢書
[4]
서적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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