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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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자는 삼국 시대 오나라와 위나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225년 산동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위나라에 의해 진압당하고 오나라로 도망쳐 장군이 되었다. 오나라에서 요식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흥 전투에 참전했으며, 문흠의 북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제갈탄의 난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위나라에 항복, 안원장군에 임명되었다. 촉한 멸망 이후 종회가 항복한 강유 등에게 당자의 사례를 언급하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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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당자 |
원어 이름 | 唐咨 |
출생지 | 린수 현, 산둥 성 롄윈강 시, 장쑤 성 (추정) |
직업 | 장군 |
관직 | |
임기 시작 | 258년 |
임기 종료 | 불명 |
군주 | 조모 / 조환 |
임기 시작 | 252년 |
임기 종료 | 258년 |
군주 | 손량 |
2. 생애
당자(唐咨)는 현재의 산둥성 린수 현 남동쪽과 장쑤성 롄윈강 시 간위 구 북서쪽에 위치한 리청군(利城郡) 출신으로, 오나라와 위나라에서 장군을 지냈다. 위나라 장군 제갈탄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위나라에 투항했다.
252년 11월, 위나라의 왕창, 관구검, 제갈탄, 호준 등이 오나라 동흥을 공격했을 때 제갈각의 선봉장으로 참전했다.[1]
262년, 종회와 사마소의 명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으로 여겼다.[7]
263년, 촉한의 유선이 항복한 후, 종회에게 항복한 강유 등 촉나라 관리들 앞에서 종회가 "당자는 포위당해 포로로 잡혔지만 항복 후에도 정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1]
이후 당자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1. 초기 생애와 위나라에서의 반란
225년, 산동 지역 이성군(利成郡)의 병사 채방(蔡方) 등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서기(徐箕)를 죽이고 당자를 우두머리로 추대했다.[8] 위나라 조정에서는 둔기교위(屯騎校尉) 임복(任福)을 보내 당자를 공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어 당자는 배를 타고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에서는 당자를 장군으로 임명했다.[1]234년 노릉군, 회계군, 남해군에서 도적이 봉기하자,[3] 235년 당자는 손권의 명령으로 유찬과 함께 여대의 지휘 아래 반란 진압에 나섰다. 236년에는 노릉의 도적 나려(羅厲)를 사로잡았다.[4]
예장・임천의 도적 동사(董嗣)의 약탈을 막기 위해 오찬과 함께 병사 3000명을 이끌고 방어전을 펼쳤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물리치지 못했다.[5]
239년, 오나라 장수 요식(廖植)이 임하(臨賀)태수 엄강(嚴綱)을 죽이고 평남장군(平南將軍)을 자칭하며 형주 남부와 교주 일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오나라에서는 여대를 보내 진압하게 했다. 당자는 손권의 명령을 받아 여대를 도와 반란을 진압했다.[4]
2. 2. 오나라에서의 활약
225년, 산동 지역 이성군(利成郡)의 병사 채방(蔡方) 등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서기(徐箕)를 죽이고 당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받들었다.[8] 위나라 조정에서 둔기교위(屯騎校尉) 임복(任福)을 보내 당자의 무리를 공격하게 하니 얼마 가지 않아 진압당하여 배를 타고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 조정에서는 당자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오나라의 장수가 되었다.239년, 오나라 장수 요식(廖植)이 임하(臨賀)태수 엄강(嚴綱)을 죽이고 스스로 평남장군(平南將軍)이라 칭하며 형주 남부와 교주 일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오나라에서는 여대(呂岱)가 진압에 나섰다. 당자는 손권(孫權)의 명령을 받아 여대를 도와 반란 진압에 이바지했다.[4] 252년 11월, 위나라의 왕창(王昶), 관구검(毌丘倹), 제갈탄(諸葛誕), 호준 등이 오나라 동흥(東興)을 공격해 왔을 때 제갈각(諸葛恪)에 의해 선봉장으로 참전했다.
256년, 관구검의 반란을 돕다가 오나라로 망명해 온 문흠(文欽)이 위나라 공격을 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오나라의 실권자 손준(孫峻)이 편성한 정벌군에 전장군(前將軍)으로 참전하여 서주와 청주 공략 임무를 받았으나, 손준이 갑작스런 병으로 죽는 바람에 원정이 중단되었다.[6]
257년, 제갈탄이 사마소(司馬昭)의 야심에 반발하여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인질로 보내 구원을 청하자 오나라에서는 3만 명의 원군을 보냈다. 당자는 문흠, 전역(全懌) 등과 함께 수춘으로 가서 사마소의 진압군에 맞섰으나 전역, 전단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258년, 남아있는 무기를 총동원하여 5, 6일간 밤낮으로 남쪽 포위망을 공격했지만, 위나라의 투석기와 불화살에 공격 무기들마저 다 파괴되면서 탈주병이 속출했으며, 제갈탄이 문흠과의 의견 차이로 문흠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져 문앙과 문호가 위나라로 투항하고 제갈탄과 당자의 계책도 다하여 결국 위나라의 총공격에 제갈탄은 죽고 성은 함락되어 당자는 적에게 사로잡혔다.
2. 3. 제갈탄의 난과 위나라 투항
257년, 제갈탄이 사마소의 야심에 반발하여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아들 제갈경을 인질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1] 오나라에서는 3만 명의 원군을 보냈는데, 당자는 문흠, 전역 등과 함께 수춘으로 가서 사마소의 진압군에 맞섰다.[1] 그러나 전역, 전단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1]258년, 남아있는 무기를 총동원하여 5, 6일간 밤낮으로 남쪽 포위망을 공격했지만, 위나라의 투석기와 불화살에 공격 무기들마저 다 파괴되면서 탈주병이 속출했다.[1] 제갈탄이 문흠과의 의견 차이로 문흠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져 문앙과 문호가 위나라로 투항했고, 제갈탄과 당자의 계책도 다했다.[1] 결국 위나라의 총공격에 제갈탄은 죽고 성은 함락되어 당자는 적에게 사로잡혔다.[1] 항복한 당자는 위나라에 투항하였고, 사마소는 그를 안원장군(安遠將軍)으로 임명했다.[1]
2. 4. 위나라에서의 말년
225년, 산둥 지역 이성군(利成郡)의 병사 채방(蔡方) 등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서기(徐箕)를 죽이고 당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받들었다.[8] 위나라 조정에서는 둔기교위(屯騎校尉) 임복(任福)을 보내 당자의 무리를 공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어 당자는 배를 타고 오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오나라 조정에서는 당자를 장군으로 임명했다.239년, 오나라 장수 요식(廖植)이 임하(臨賀)태수 엄강(嚴綱)을 죽이고 스스로 평남장군(平南將軍)이라 칭하며 형주 남부와 교주 일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오나라에서는 여대(呂岱)를 보내 진압하게 했다. 당자는 손권(孫權)의 명령을 받아 여대를 도와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252년 11월, 위나라의 왕창(王昶), 관구검(毌丘倹), 제갈탄(諸葛誕), 호준 등이 오나라의 동흥(東興)을 공격해 왔을 때 제갈각(諸葛恪)에 의해 선봉장으로 참전했다.
256년, 관구검의 반란을 돕다가 오나라로 망명해온 문흠(文欽)이 위나라 공격을 제안했다. 오나라의 실권자 손준(孫峻)은 이를 받아들여 정벌군을 편성했고, 당자는 전장군(前將軍)으로서 서주와 청주 공략 임무를 받았으나, 손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원정은 중단되었다.
257년, 제갈탄이 사마소(司馬昭)의 야심에 반발하여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인질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오나라에서는 3만 명의 원군을 보냈다. 당자는 문흠, 전역(全懌) 등과 함께 수춘으로 가서 사마소의 진압군에 맞섰으나, 전역, 전단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등 궁지에 몰렸다.
258년, 남은 무기를 모두 동원하여 5, 6일간 밤낮으로 남쪽 포위망을 공격했지만, 위나라의 투석기와 불화살에 공격 무기들마저 모두 파괴되면서 탈주병이 속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제갈탄이 문흠과의 의견 차이로 문흠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져 문앙과 문호가 위나라로 투항하고, 제갈탄과 당자의 계책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위나라의 총공격에 제갈탄은 죽고 성은 함락되었으며, 당자는 포로로 잡혔다.
262년, 종회와 사마소의 명에 따라 바다도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만들게 하니, 외부에서는 오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배를 만든다고 여겼다.
263년, 촉한의 유선이 항복한 후, 종회에게 항복한 강유 및 촉의 관리들을 포로들 앞에서 종회가 말하기를 '''"당자는 포위당해 포로로 붙잡힌 후에 항복하고도 지금 정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당자는 제갈탄의 반란에 대한 원군 장수로 등장하여 위군에게 패배하여 오나라로 돌아가려 하지만, 손침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마소에게 투항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오나라에 남겨둔 가족들은 손침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후 촉 정벌에도 참여한다.[4]
참조
[1]
서적
三国志 魏志「文帝紀」
"225"
[2]
서적
三国志 魏志「文帝紀」
[3]
서적
三国志 呉志「呂岱伝」
[4]
서적
三国志 呉志「呉主伝」
[5]
서적
三国志 呉志「周魴伝」
[6]
서적
三国志 呉志「三嗣主伝」
[7]
서적
三国志 魏志「鍾会伝」
[8]
서적
정사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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