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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르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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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게르만국은 나치 독일이 구상한 정치적 구상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게르만 민족을 통합하여 건설하려던 제국이다. 이 명칭은 중세 시대의 신성 로마 제국을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이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제1제국'으로 칭하며 프랑크 제국의 샤를마뉴를 존경했다. 나치 독일은 '제3제국'을 자처하며 신성 로마 제국을 선구자로 간주했다.

대게르만국은 인종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이들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영토 확장을 통해 동유럽을 식민지화하고 슬라브족을 제거하거나 게르만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37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공개적으로 목표가 선언되었으며, 점령지에서 극우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고, 게르만 친위대를 통해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대게르만국의 영역은 유동적이었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유럽의 여러 국가를 포함하는 것으로 구상되었다. 영국은 게르만 세계의 일부로 간주되었지만, 범게르만 통일의 목표에서는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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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르만국
개요
계획된 대게르만 제국의 지도
계획된 대게르만 제국의 지도
별칭대게르만국 (大-, 대한민국 정식 명칭)
대게르만 제국 (大-, 비공식 명칭)
게르만 민족의 대독일 제국 (독일어: Großgerman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독일 민족의 게르만 국가 (독일어: Germanischer Staat Deutscher Nation)
정치
정치 체제전체주의 나치 국가
지도자아돌프 히틀러 (예정)
역사
계획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에 의해 계획됨
목표게르만 민족의 지배하에 유럽 대륙을 통합하는 것
인구 및 영토
예상 인구3억 명 이상
예상 영토유럽 대부분
인종 정책
목표게르만족 우월주의 확립
비(非)게르만족 인구 감소 또는 제거
레벤스라움 확보
주요 대상유대인
슬라브족
롬족
기타 "인종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민족
언어
공용어독일어
기타
관련 개념범게르만주의
레벤스라움
나치즘

2. 역사적 배경

2. 1. 명칭

예정된 제국의 공식 명칭은 '독일 국민의 대게르만 제국'(Großgermanisches Reich Deutscher Nationde)이었다.[156] 이 명칭은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신성 로마 제국(독일 민족)을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나치 사관에서는 '제1제국'으로 알려져 있었다.[23] 나치 독일 정부는 독일 역사에서 이 중세 제국의 유산을 찬양하고 조롱했다. 히틀러는 "문화적 창의성", 조직력, 개인의 권리 포기를 이유로 프랑크 황제 샤를마뉴를 존경했다.[23] 그러나 그는 신성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것과 유사한 ''동방 정책''을 추구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오로지 이탈리아에만 집중한 것을 비판했다.[23]

안슐루스 이후, 히틀러는 제국 징표 (제국 왕관, 제국 검, 성창 및 기타 물품)가 비엔나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424년에서 1796년 사이에 보관되었던 뉘른베르크로 옮기라고 명령했다.[24] 뉘른베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전 비공식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했다. 징표 이전은 히틀러의 독일을 "구 제국"의 후계자로 정당화하는 동시에 옛 제국의 거주지였던 비엔나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루어졌다.[25]

1939년 보헤미아의 독일 점령 이후, 히틀러는 신성 로마 제국이 "부활"했다고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자신의 제국이 옛 "로마" 제국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26] "불편한 국제주의 바르바로사의 가톨릭 제국"과는 달리, 독일 민족의 게르만 제국은 인종 차별적이고 민족주의적일 것이다.[26] 중세 시대의 가치로의 회귀가 아니라, 그 설립은 "과거의 가장 좋은 측면이 현대적인 인종 차별적, 민족주의적 사고와 결합된 새로운 황금기로의 전진"이 될 것이었다.[26]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적 경계는 또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의해 영토 수정주의의 근거로 사용되어 한때 그 일부였던 현대 영토와 국가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다. 전쟁 전에도 히틀러는 제국의 영토에 거의 완전한 주권을 부여했던 베스트팔렌 조약을 뒤집는 것을 꿈꿨다.[37] 1939년 11월 17일, 제국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 역사적인 조약의 "완전한 청산"이 나치 정권의 "위대한 목표"라고 썼으며,[37] 그것이 뮌스터에서 서명되었기 때문에 같은 도시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썼다.[27]

히틀러는 '게르만 제국'이라는 용어를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단 두 번 사용했으며, 모두 '독일 국민'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156]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튜턴 제국'이라고도 칭했다.[157][158] 히틀러는 "게르만"이라는 단어를 반유대주의, 반기독교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했다고 지적받고 있다.[156] 1940년 4월 북유럽 침공 당시에는 "오늘부터 대게르만 제국이 성립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는 북유럽 국가 점령이라는 상황에서 연상된 것으로, 이념적인 색채는 옅다고 여겨진다.[156]

2. 2.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나치 독일은 '제3제국'을 자칭하며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으로 여겨 선구자로 간주했다.[159]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프랑크 왕국 국왕이었던 카롤루스 대제의 권력 조직과 문화적 창조성은 높이 평가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 동방 정책을 추구하지 않은 점은 비판했다.[159]

안슐루스 이후, 히틀러는 신성 로마 제국의 레갈리아(Reichskleinodiende)인 제국 보관, 제국 검/Imperial Sword영어, 로타르의 십자가/Cross of Lothair영어, 성창 등을 에서 뉘른베르크로 옮기도록 했다.[160] 뉘른베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비공식 수도이자 나치당 전당대회 개최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전을 통해 히틀러는 독일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다.[161]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이후, 히틀러는 '신성 로마 제국 부활'을 선언했다.[162] 요제프 괴벨스 국민 계몽 선전 장관은 1939년 11월 17일 일기에 '역사의 청산이야말로 나치의 최종 목표'라고 기록했다.[163]

3. 이념적 배경

3. 1. 인종 이론

나치즘인종 이데올로기는 유럽의 게르만족을 더 큰 아리아인의 인종적으로 우월한 북유럽 하위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들은 문명 사회의 유일한 진정한 문화 담당자였다.[11] 이 사람들은 "진정한 게르만족"이 "인종적 자부심을 잃었다"거나 독일인의 가까운 인종적 친족으로 여겨졌다.[12]

독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독일인의 인종적 조상이며 "북유럽#R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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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게르만족" 개념은 단순히 민족, 문화, 또는 언어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아인의 적인 적으로부터 구출하고 싶어했던 우월한 "게르만 혈통"을 가진 뚜렷한

나치에 따르면 게르만족 외에도 프랑스인, 폴란드인, 왈로니아인, 체코인 등 비게르만족으로 보이는 개인도 귀족이나 농민 계통이라면 가치 있는 게르만 혈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18] 이러한 "잃어버린" 게르만적 요소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은 게르만화 과정을 통해 게르만 조상을 의식해야 했다(나치는 이 과정을 ''움폴쿵'', "인종으로의 복원"이라고 불렀다).[18]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아리아인이 그들의 우수한 혈통을 이용하여 적을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파괴해야 했다.[18] 이러한 유형의 나치 게르만화의 예는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동유럽 어린이의 유괴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의 첫 페이지에서 "공통 혈통은 공통 제국에 속한다"고 공공연히 선언하여, 나치 운동이 인식하는 인종의 본질적 특성이 "인공적" 개념(프로이센과 바이에른과 같은 지역 독일 정체성을 포함한 국가 정체성)보다 우선하여 어느 사람이 더 큰 독일 인종 국가("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퓌러")에 동화될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20]

3. 2. 범게르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차이

나치는 유럽의 다른 게르만족에게 독일인과 함께 인종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려 했지만, 이들 국가의 피지배 인구에게 어떤 국가적 권리도 부여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11] 다른 게르만 국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개별적인 단위가 아니라 단순히 독일의 확장으로 여겨졌으며,[11] 독일인들은 명백히 제국의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 이념적, 군사적 관점에서 모두"로 남을 의도였다.[28] 심지어 이 개념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던 하인리히 힘러조차 독일 ''민족(Volk)''과 게르만 ''민족(Völker)'' 사이의 계층적 구별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29] 친위대(SS)의 공식 신문인 ''다스 슈바르체 코르프스(Das Schwarze Korps)''는 게르만 '형제애'와 독일의 우월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29]

아돌프 히틀러와 힘러의 SS는 범게르만 제국을 옹호했지만, 그 목표는 나치 정권에서 보편적으로 지지되지는 않았다.[31]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 국민의 게르만 제국'''(독일어:'''Großgerman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고 언급했다.[156] 그러나 히틀러 자신이 "게르만 제국"에 대해 언급한 적은 적으며, 1920년부터 1924년까지는 2번뿐이었고, 모두 "독일 국민"을 덧붙인 형태였다.[156]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제3제국의 신전에서 나치 군수상의 증언』[157]에 따르면,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튜턴 제국'''"이라고도 칭했다.[158]

"대게르만 제국"의 개념을 자주 언급한 것은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인종 정책 책임자인 친위대 전국지도자하인리히 힘러이다. 힘러는 독일 민족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과 종이 유사한 여러 민족을 포섭하고, 독일 민족이 그 주도권을 잡는 "대게르만 제국"을 구상했다.

나치즘에 따르면, 비 게르만 계 민족인 프랑스인, 폴란드인, 왈론인, 체코인, 슬라브인 등에게도 게르만의 고귀한 피가 섞여 있으며, ""을 통해 게르만화를 통해 게르만족의 조상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178]

3. 3. 게르만 신비주의

NSDAP 지도부 내에서는 '게르만 역사' 육성의 정신적 함의에 대해 의견 불일치가 있었다.[32] 아돌프 히틀러하인리히 힘러의 비밀 민족주의 운동적 '게르만 임무' 해석을 비판했다.[32] 힘러가 샤를마뉴를 "작센의 도살자"라고 비난했을 때, 히틀러는 비두킨트의 굴복이 서구 문화를 독일 지역에 가져왔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32] 그는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 정책을 비판했고,[32] 아넨에르베를 통한 선사 시대 게르만 유적 발굴 고고학 프로젝트에 반대하며 "우리가 과거가 없다는 사실을 왜 온 세상의 주목을 받게 하는가?"라고 말했다.[32]

힘러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함께 기독교를 게르만 이교주의(게르만 민족의 토착 전통 종교)로 대체하려 했으며, 일본의 신토를 거의 완벽한 동아시아적 대응으로 간주했다.[33] 그들은 게르만 축성 의식을 위해 기독교 의식을 교환하기 위해 게르만 숭배 장소 건설을 명령했다.[33] 하인리히 하임스의 ''아돌프 히틀러, FHQ에서의 독백 1941–1944''에 따르면, 히틀러는 1941년 10월 14일에 "오딘/보탄 숭배를 부활시키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4. 영역

대게르만국의 영역은 1937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선언되었으며,[34] 당시 전황과 국제 관계에 따라 유동적이었다.[164] 초기에는 유럽의 게르만계 민족 전부를 병합하는 것으로 구상되었는데,[165]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게르만 민족이 포함"된 "거대한 제국" 건설을 언급했다.[34] 1940년 4월 9일,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을 때, 히틀러는 "1866년에 비스마르크 제국이 일어선 것처럼, 오늘날 대게르만 제국이 일어설 것이다."라며 게르만 제국의 수립을 발표했다.[37]

구체적으로 구 독일 제국(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바, 알자스-로렌, 오이펜-말메디, 클라이페다(메멜), 슬로베니아의 슈타예르스카 지방・고렌스카 지방・코로슈카 지방, 폴란드 포함), 네덜란드, 플랑드르,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스위스 독일어권, 리히텐슈타인을 포함했다.[165] 앵글로색슨 영국은 게르만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해상 동맹 국가로 여겨졌다.[166] 남티롤은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주권이 인정되어 제외되었다.



프랑스와의 국경은 신성 로마 제국 초기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왈롱, 스위스 로망드(프랑스어권), 프랑스 북부 및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도 영토로 구상되었다.[167] 나치즘의 동방 생존권 정책에서는 게르만계 민족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에 식민하여 우랄 산맥까지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구상되었다.[168][169] 원주민인 폴란드인과 러시아계 주민은 추방되어 우랄 산맥 동부로 이주될 예정이었다.[170]

이러한 범게르만주의적인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안슐루스'' 모델을 따르되, 더 큰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다.[39] 요제프 괴벨스는 1940년 4월, 합병된 게르만 국가들이 독일의 ''권력 장악(Machtergreifung)'' 이후와 유사한 "국가 혁명"을 겪고, 나치 원칙에 따라 강제적인 사회적, 정치적 "동조화"(''글라이히샬퉁'')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39] 궁극적인 목표는 개별 국가와 민족 개념을 파괴하고 "인종적으로 순수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37]

이를 위해 독일 점령자들은 점령 국가 내 극우 민족주의 운동(예: 나쇼날 삼링, NSB)에 실질적인 권력을 주지 않고, 범게르만주의 통일을 선호하는 협력자들을 지원했다.[41] 게르만 친위대는 이러한 정책 수행의 주요 도구였으며, 처음에는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의 ''알게마이네-SS'' 지역 지부로 구성되었다.[44] 1942년에는 히믈러가 덜 극단적인 협력 정당과 SA 스타일 조직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도구로 변모했다.[44][45] ''노르게스 SS''는 ''게르만스케 SS 노르게''로, ''네덜란드세 SS''는 ''게르만스 SS 인 네덜란드''로, ''알게메네-SS 플란데렌''은 ''게르만스 SS 인 플란데렌''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구성원들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게르만 퓌러"로서 충성을 맹세했다.[44][45]

히틀러는 베를린을 제국의 수도 게르마니아로 재건할 계획이었으며, 1942년에는 1950년 완공 예정에 맞춰 ''게르마니아''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53] 갈고리 십자는 나치당뿐만 아니라 북유럽-게르만 민족의 단일 국가로의 통합을 상징했다.[52]

5. 정책

1937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목표가 선언되었다.[34] 이 행사에서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은 "결국 독일 민족은 게르만 제국을 획득했다"라는 말로 끝맺었고, 이는 독일 외교 정책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정치권의 추측을 자아냈다.[34]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며칠 전, 히틀러는 측근과 함께 뮌헨 아파트로 향하던 중 알베르트 슈페어를 따로 불러 "우리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모든 게르만 민족이 그 안에 포함될 것이다. 그것은 노르웨이에서 시작하여 북부 이탈리아까지 뻗어나갈 것이다.[35][36] 내가 직접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내 건강만 유지할 수 있다면!"[34] 1940년 4월 9일, 독일이 베저 운동 작전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을 때, 히틀러는 게르만 제국의 수립을 발표했다. "1866년에 비스마르크 제국이 일어선 것처럼, 오늘날 대게르만 제국이 일어설 것이다."[37]

{{quote box

| title = |"독일은 [미래 목표]를 결정하여 명확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공간 정책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모든 국제 산업 및 국제 무역 정책 시도를 거부하고, 대신 다음 100년 동안 적절한 ''생존권(Lebensraum)''을 할당하여 우리 국민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 모든 힘을 집중한다. 이 공간은 동쪽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해군 강국의 의무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독일은 다시 육상에서 결정적인 힘을 형성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려고 한다. 이 목표는 최고 수준의 국가적, 민족적 요구에 똑같이 부합한다."

| author = —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팽창주의 의제를 설명함

| source = ''히틀러의 두 번째 책'' p.1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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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 = 25em

}}

제국의 수립은 1938년 오스트리아의 ''안슐루스'' 모델을 따르되, 더 큰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다.[39] 괴벨스는 1940년 4월, 합병된 게르만 국가들이 독일이 ''권력 장악(Machtergreifung)'' 이후 겪었던 것과 유사한 "국가 혁명"을 겪어야 하며, 나치 원칙과 이념에 따라 사회적, 정치적 "동조화"(''굘라이히샬퉁'')가 강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39]

이러한 점령 유럽 지역에서 추구된 ''굘라이히샬퉁''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별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마치 오스트리아인의 별도의 오스트리아 국가 및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안슐루스'' 이후 새로운 국가 및 당 지역의 수립을 통해 억압된 것과 같았다.[40] 새로운 제국은 19세기에 등장한 유형의 국가가 아니라 "인종적으로 순수한 공동체"가 될 예정이었다.[37] 이러한 이유로 독일 점령자들은 점령 국가에 존재하는 다양한 극우 민족주의 운동(예: 나쇼날 삼링, NSB 등)에 임시적인 ''현실 정치''적 이유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주는 데 관심이 없었고, 대신 범게르만주의 통일(즉, 독일과의 완전한 통합)을 지방주의적 민족주의(예: 데플라그)보다 선호하는 급진적인 협력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41]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와는 달리 이 과정은 상당히 오래 걸릴 예정이었다.[42] 결국 이러한 민족들은 독일인과 합쳐져 단일 지배 인종을 형성할 예정이었지만, 히틀러는 이러한 전망이 "약 100년" 후에나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과도기 동안 '신유럽'은 독일인들만으로 운영될 예정이었다.[29] 슈페어에 따르면, 히믈러가 결국 이 민족들을 게르만화하려 했던 반면, 히틀러는 그들의 "개성을 침해"하지 않으려 했다(즉, 그들의 모국어). 그리하여 미래에 그들이 그의 제국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43] 그러나 독일어영연방에서의 영어와 같은 지위를 갖는 공용어가 될 것이었다.[43]

지역 극단주의 민족주의 세력을 억압하는 데 사용된 주요 요원은 게르만 친위대였으며, 처음에는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의 ''알게마이네-SS''의 지역 지부로 구성되었다.[44] 이들은 처음에는 각 친나치 국가 사령관(드 클레르크, 무세르트, 크비슬링)의 지휘를 받았으며, 자체 국가 영토 내에서만 활동할 예정이었다.[44] 그러나 1942년 동안 게르만 친위대는 히믈러가 덜 극단적인 협력 정당과 SA 스타일의 조직(예: 노르웨이의 ''히르드'' 및 네덜란드의 ''Weerbaarheidsafdeling'')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도구로 더욱 변모했다.[44][45] 전후 게르만 제국에서 이들은 각 국가 영토의 새로운 지도부 간부를 형성할 예정이었다.[46] 범게르만주의 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노르게스 SS''는 이제 ''게르만스케 SS 노르게''로, ''네덜란드세 SS''는 ''게르만스 SS 인 네덜란드''로, ''알게메네-SS 플란데렌''은 ''게르만스 SS 인 플란데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 집단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각 국가 지도자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게르마니셔 퓌러''("게르만 퓌러")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44][45]

|thumb|나치 당국이 "''Das Grossdeutschland in der Zukunft''"(1943) 선전 지도에서 제안한 대게르만 제국의 삽화. 이 지도는 점령된 동유럽을 게르만-북유럽 정착민들의 식민지로 묘사하고 있다.[48]]]

이 칭호는 1941년 6월 23일 히믈러의 제안에 따라 히틀러가 사용했다.[47] 1941년 12월 12일, 네덜란드 우익 민족주의자 안톤 무세르트 또한 베를린의 총리관을 방문하여 히틀러에게 충성을 선언하면서 그를 이와 같이 불렀다.[49] 그는 히틀러를 ''퓌러 알러 게르마넨''("모든 게르만 민족의 퓌러")라고 부르고 싶어했지만,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전자의 방식을 명령했다.[47] 역사가 로 드 용은 이 둘의 차이점에 대해 추측한다. ''퓌러 알러 게르마넨''은 히틀러의 ''퓌러 운트 라이히스칸츨러 데스 그로스도이첸 라이히스''("대게르만 제국의 퓌러 및 국무총리")로서의 역할과 별개의 지위를 의미하는 반면, ''게르마니셔 퓌러''는 그 주요 기능의 속성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49] 1944년에도 간혹 선전 출판물에서 그를 이 비공식적인 칭호로 언급하기도 했다.[50] 무세르트는 히틀러가 그의 일치하는 개인적 배경으로 인해 게르만 민족의 퓌러가 되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원래 바이에른군에 입대하여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잃은 오스트리아 국민이었다. 따라서 그는 7년 동안 무국적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무세르트에 따르면 그는 "게르만 지도자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51]

갈고리 십자 깃발은 나치당뿐만 아니라 북유럽-게르만 민족의 단일 국가로의 통합을 상징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52] 갈고리 십자는 전 세계 많은 문화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치들에게 근본적으로 게르만적이고 유럽적인 상징으로 여겨졌다.

히틀러는 오랫동안 독일 수도 베를린을 새로운 제국 도시로 건축적으로 재건할 의도가 있었으며, 1942년에는 1950년 완공 예정에 맞춰 ''게르마니아''로 이름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이름은 특히 구상된 게르만 제국의 명확한 중심점으로 만들고, 유럽의 게르만 민족에 대한 통일된 게르만-북유럽 국가의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되었다.[53]

5. 1. 저지대 국가

1940년 5월 10일부터 1945년 5월 5일까지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은 네덜란드는 처음에는 군정이 들어섰으나, 이후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통치하는 민정으로 바뀌었다. 히틀러는 저지대 국가 전체를 제국에 포함시키고, 대독일 제국을 게르만 제국으로 개혁할 의사를 밝혔다.[28] 룩셈부르크벨기에제2차 세계 대전 중 각각 1942년1944년에 공식적으로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28] 벨기에는 플란데른, 왈로니엔, 브뤼셀 구의 새로운 ''Reichsgaue''로 합병되었다.[28]

1940년 네덜란드 전투에서 로테르담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라인강 하구에 위치해 있어 "게르만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로 재건될 예정이었다.[58] 네덜란드는 5개의 새로운 ''Gaue'' 또는 ''gewesten''(하위 국가의 일종인 네덜란드 역사적 용어)으로 분리될 ''Gau Westland''로의 변환이 제안되었다.[57] 프리츠 슈미트는 Wilhelmus(네덜란드 국가)와 유사한 애국적 상징이 금지되는 한, 이를 ''Gau Holland''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57]

하인리히 힘러는 800만 명에 달하는 전체 네덜란드 인구를 비슬라강과 부크강 계곡의 독일 점령 폴란드의 농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까지 고려했다.[59] 이러한 경우 그는 비어 있는 네덜란드 영토에 ''SS 홀란트 주''를 설립하고 압수된 모든 네덜란드 재산과 부동산을 신뢰할 수 있는 SS-인들에게 분배하기를 바랐다고 한다.[60]

히틀러는 왈로니아를 프랑스의 로마화가 왈론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분리된 "실제로 독일 영토"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독일은 이를 되찾을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7] 왈로니아 전체를 포함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서유럽의 전통적인 게르만어-로망스어 언어 경계에 걸쳐 있는 몇 개의 더 작은 지역을 이미 포함하는 것을 고려했다. 여기에는 Arlon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룩셈부르크어 사용 지역이 포함되었으며,[63] Eupen 서쪽의 저지 다이어트어 사용 지역(소위 ''Platdietse Streek'')인 림부르크 공국의 역사적 수도인 Limbourg 주변 지역이 포함되었다.[64]

5. 2. 북유럽 국가

히틀러는 베저 운동 작전 침공 이후, 다시는 노르웨이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58] 규모가 작고 독일과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덴마크를 독일의 주로 병합하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65] 하인리히 힘러아이슬란드도 게르만 국가 그룹에 포함시키기를 희망했다.[65] 군사적 관점에서, 해군 지휘부는 스피츠베르겐,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셰틀랜드 제도가 독일의 지배 하에 놓이기를 희망했다.[68]

노르웨이 도시 트론헤임 근처에 30만 명의 주민을 수용하는 새로운 독일 대도시 ''노르트슈테른'' ("북극성") 건설이 준비되었다.[58][69] 이 도시는 리틀 벨트와 그레이트 벨트를 가로지르는 아우토반으로 본토 독일과 연결될 예정이었다.[70]

스웨덴의 미래 종속은 '신질서'로의 편입을 정권이 고려했다.[71] 힘러는 스웨덴인들을 "북유럽 정신과 북유럽인의 전형"이라고 언급하며, 중앙 및 남부 스웨덴을 게르만 제국에 편입하기를 기대했다.[71] 1942년 4월,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이 북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스웨덴을 점령했어야 했다고 언급했다.[75]

대다수의 국민이 발트-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나치 인종적 관점에서, 북유럽 국가가 아닌, 명예 북유럽 국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77] 핀란드는 1941년에 카렐리야 영토를 장악하여 점령함으로써 정복된 소련의 적대적인 잔재에 대한 독일의 북부 측면의 수호자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77] 1944년 9월 핀란드가 소련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자, 힘러는 핀란드를 "게르만적 시각을 가진 국가 사회주의 핀란드"로 변혁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느꼈다.[80]

5. 3. 스위스

나치 이데올로기자들은 스위스인을 독일 민족의 분파로 간주했지만, 퇴폐적인 서구 문화의 사상에 의해 잘못 인도되었다고 생각했다.[82] 히틀러는 스위스를 "우리 ''민족''의 잘못된 분파"라고 비난했고, 스위스 국가를 "유럽의 얼굴에 난 종기"라고 폄하하며, 나치가 동유럽에서 식민지화할 영토에 정착시키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다.[83]

하인리히 힘러는 부하들과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독일과 완전히 통합하는 계획을 논의했으며, 스위스를 독일 제국과 '재결합'하기 위한 국가판무관 직책에 여러 사람을 염두에 두었다.[5][84] 1940년 8월, 베스트팔렌 남부의 가울라이터 요제프 바그너와 바덴 공화국의 총리 발터 쾰러는 스위스를 ''라인란트팔츠''에 합병하는 것을 지지하며 제네바의 국제 연맹을 새로운 행정 구역의 정부 소재지로 제안했다.[85]

이탈리아 왕국과 협력하여 스위스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군사 작전인 탄넨바움 작전이 1940-1941년 동안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와의 휴전 협정 이후 독일군에 의해 진지하게 고려되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보류되었다.[86] 스웨덴과 같은 중립국에 대한 암묵적인 적대감은 스위스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괴벨스는 1941년 12월 18일 일기에 "만약 그들[중립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참전국들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르는 동안 무사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이익까지 얻는다면 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81]

5. 4. 프랑스 동부

뮌헨 협정 이후, 1938년 12월 히틀러와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독일이 알자스-로렌에 대한 영토 주장을 포기하고 양국 공동의 이익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상호 협의할 것을 선언하는 협정을 체결했다.[87] 그러나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 사령부에 프랑스를 상대로 한 독일-이탈리아 합동 전쟁 작전 계획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87]

내무부는 1940년 6월 솜 강 하구에서 제네바 호수까지 이어지는 동부 프랑스 지역의 합병을 계획하기 위한 초기 메모를 작성했고,[88] 1940년 7월 10일, 힘러는 이 지역을 방문하여 독일화 가능성을 조사했다.[37] 합병될 영토는 9개의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구성될 것이며, 백만 명의 독일인 "농민" 가족의 정착이 필요할 것이었다.[37]

히틀러는 독일이 대륙에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 프랑스 대서양 연안에 군사적 요새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91] 해안을 따라 르아브르, 브레스트, 생나제르 등 여러 주요 프랑스 도시는 히틀러에 의해 ''페스퉁''("요새")으로 지정되었다.[92]

1942년 4월 26일, 요제프 괴벨스는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프랑스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프랑스는 이제 서기 1500년의 국경으로 되돌려질 것이다. 이는 부르고뉴가 다시 제국에 속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라고 언급했다.[93]

5. 5. 대서양 섬

1940년 여름,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이 나치 점령 유럽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거점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 카보베르데, 마데이라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를 점령하는 방안을 고려했다.[21][94] 1940년 9월, 히틀러는 스페인 외무 장관 세라노 수녜르와의 회담에서 프랑스령 모로코를 대가로 카나리아 제도 중 하나를 독일이 사용할 수 있도록 스페인에 제안했다.[94] 히틀러의 대서양 섬에 대한 관심은 1940년의 군사적 상황에 의해 부과된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중요한 해군 기지를 독일의 통제에서 해제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94]

1940년 11월과 1941년 5월,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계획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던 시기를 전후하여, 히틀러가 아조레스 제도에서 미국 도시에 장거리 폭격기를 배치하고 싶다고 말했다.[95] 히틀러는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에 위치한 루프트바페 비행장이 독일이 "미국을 상대로 육상 기지에서 공습을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42년 5월 아메리카봄버 초장거리 전략 폭격기 설계 경쟁이 시작되기 약 1년 전이었다.[96]

5. 6. 영국

범게르만 통일의 목표에서 제외된 유일한 국가는 영국이었다.[97] 그러나 나치 정부는 영국을 게르만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였다.[98] 한스 F. K. 귄터는 앵글로색슨족이 인종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독일인보다 더 성공적이었으며,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콘월, 웨일스의 해안 및 섬 지역은 노르드족의 습격과 식민지화로 인해 추가적인 북유럽 혈통을 받았다고 이론화했다. 바이킹 시대, 그리고 동앵글리아와 북부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은 9세기와 10세기에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99] 귄터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아우프노르둥"(Aufnordung, "추가 북유럽화")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결국 1066년의 노르만 정복으로 정점에 달했다.[99]

히틀러는 제2의 서적에서 대영 제국의 제국적 위대함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하며,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의 증거로 삼았다.[101] 그는 독일이 동유럽에 자체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 영국의 "무자비함"과 "도덕적 가책 부재"를 모방하기를 희망했다.[102] 그는 영국이 시간이 지나면 신뢰할 수 있는 독일의 동맹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104]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소련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영국인들이 다른 게르만 민족과 함께 정복된 동부 영토를 식민지화하는 데 독일인에 합류하기를 희망했다.[18]

5. 7. 채널 제도

영국의 채널 제도는 영구적으로 게르만 제국에 통합될 예정이었으며, 군사 점령은 1940년 6월 30일부터 1945년 5월 9일 해방까지 지속되었다.[115] 1940년 7월 22일, 히틀러는 전쟁 후 이 섬들을 로베르트 레이의 독일 노동 전선의 통제 하에 두고 ''기쁨을 통한 힘'' 휴양지로 이전할 것이라고 밝혔다.[116] 독일 학자 카를 하인츠 페퍼는 1941년 이 섬들을 방문하여 독일 점령자들이 섬 주민들의 노르만 유산을 활용하고 섬들을 "게르만 미국가"로 취급해야 한다고 권고했는데, 이는 영국과의 통합이 역사적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117] 그는 이 섬들에 대한 선호하는 정책을 몰타에서 영국이 추구했던 정책과 유사하다고 비유했는데, 여기서 몰타어이탈리아어에 맞서 "인위적으로" 지원받았다.[117]

5. 8. 아일랜드

독일군은 1940년 8월, 바다사자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아일랜드 침공을 위한 군사 작전 계획을 세웠다.[118] 점령된 아일랜드는 영국과 함께 임시 행정 시스템으로 통치될 예정이었으며, 이는 6개의 군사-경제 사령부로 나뉘었고, 그 중 하나의 본부는 더블린에 위치할 예정이었다.[118] 새로운 질서에서 아일랜드의 미래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히틀러가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 국가와 통일시키려 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119]

5. 9. 이탈리아 북부

히틀러는 북부 이탈리아인들을 강력한 아리아인으로 여겼지만,[120]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121] 아넨에르베는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신석기 시대 남티롤 지역에 북유럽-게르만족이 존재했음을 주장하며, 이를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고대 북유럽-게르만족의 영향력으로 연결했다.[122] 나치 정권은 고대 로마 지배 계급이 북유럽인이었다고 주장하며, 로마 제국의 몰락을 지중해 인종과의 혼혈로 인한 북유럽 아리아 지배 계급의 순수성 저하 결과로 보았다.[123] 히틀러는 지중해 인종의 어두운 피부색이 흑인 혈통의 흔적이라고 여겨, 북유럽 유산을 가진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124]

히틀러는 로마 제국과 그 유산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125]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단테 알리기에리,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은 로마 이후 시대 북부 이탈리아인들의 업적을 칭찬했다.[126] 나치는 이들의 업적을 북유럽적 유산, 즉 게르만 조상 덕분으로 돌렸고,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범적인 북유럽인으로 인정했다.[127] 독일 관리 헤르만 하르트만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게르만 뿌리를 가진 북유럽인이라고 썼다.[127] 히틀러는 북부 이탈리아 예술이 "순수한 독일적"이라고 언급하며,[129] 라딘어프리울리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이 인종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게르만 세계의 일부라고 보았다.[130] 히틀러는 현대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인종 정책을 모방하여 롬바르디아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1] 그는 독일인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이탈리아인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했다.{{인용문|문화적 관점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 이탈리아인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의 예술은 우리가 그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독일인입니다.

불쾌한 이탈리아 유형은 남부에서만 발견되며, 그곳에서도 모든 곳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유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빈-오타크링, 뮌헨-기징, 베를린-판코! 두 유형, 즉 이 타락한 이탈리아인과 우리 유형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혐오스러운지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129]}}

나치 정권의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입장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았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존경하고 모방했으며,[132] 그가 알프스 인종 유산을 가진 독일인과 인종적으로 가깝다고 강조했다.[132] 그러나 일부 나치들은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안톤 드렉슬러는 무솔리니가 유대인이고 파시즘이 유대인 운동이라고 주장했다.[133]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이 인종적으로 약하고, 무책임하며, 부패한 사람들로 인식되기도 했다.[133]

남티롤 지역은 독일 민족주의와 이탈리아 민족주의 주장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이탈리아 민족주의 창시자 주세페 마치니는 남티롤 인구가 게르만화된 로마 기원 인구이며, "해방되어 정당한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13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남티롤은 이탈리아에 할당되었고,[134]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화를 추구했다.[135]

무솔리니는 1922년 남티롤 지역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히틀러는 이 입장을 채택했다.[136]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탈리아와의 동맹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고려할 때 남티롤 독일인의 권리에 대한 우려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137] 1938년 5월 7일, 히틀러는 브레너 고개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기존 국경에 대한 헌신을 선언했다.[138] 1939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남티롤 독일인들에게 이탈리아 문화에 동화되거나 독일로 떠나는 선택을 제공하는 협정을 맺었다.[138]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을 포기한 후, 독일은 이탈리아 영토를 압수하여 ''사실상'' 직접 통제에 통합했다.[140] 히틀러는 북부 이탈리아에 "롬바르드 국가"를 창설하여 대게르만 제국에 통합하는 것을 고려하고, 남티롤과 베네치아는 독일에 직접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139] 1943년 9월 29일 괴벨스는 히틀러가 이탈리아-독일 국경이 베네토 지역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했다고 밝혔다.[141] 힘러는 펠릭스 케르스텐에게 북부 이탈리아가 결국 대독일에 포함될 운명이라고 선언했다.[142]

무솔리니 구출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RSI) 수립 이후, 히틀러는 남티롤을 공식적으로 합병하는 것을 거부하고 RSI가 이 영토에 대한 공식 주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144] 그러나 실제로 남티롤 영토는 ''알펜포어란트 작전 구역''으로 ''사실상'' 독일의 ''Reichsgau Tirol-Vorarlberg''에 통합되었다.[140][145] 우디네,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폴라, 피우메, 류블랴나는 ''아드리아티셰스 퀴스텐란트 작전 구역''으로 ''사실상'' ''Reichsgau Kärnten''에 통합되었다.[146]

1943년 9월 10일자 추가 OKW 명령에서 히틀러는 프랑스 국경까지 뻗어 있는 북부 이탈리아에 추가 작전 구역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147] ''노르트베스트-알펜'' 또는 ''슈바이처 그렌체'' 작전 구역은 손드리오 및 코모 현 전체와 브레시아, 바레세, 노바라, 베르첼리의 일부를 포함할 예정이었다.[148] ''프란초지셰 그렌체'' 구역은 아오스타 현과 토리노의 일부, 쿠네오 및 임페리아 현도 포함할 예정이었다.[148]

1943년 가을부터 아넨에르베는 남티롤 지역에 북유럽-게르만족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를 추가로 주장했다.[122]

6. 동유럽 식민지화 참여

독일 제국의 영토 팽창주의의 주요 목표는 게르만족 ''레벤스라움(생존권)'' 확보를 위해 동유럽에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50] 이는 독일 국가의 영토 기반 확대와 독일 인구 확장을 통해 달성될 예정이었으며, 토착 슬라브족 주민의 대량학살과 게르만화를 통해 발트족 주민을 제거할 계획이었다.[150]

1942년 대게르만국, 중앙 상단에는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우측 하단에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그리고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가 위치해 있다.


NSDAP 지도부는 인종적 가치에 대한 인식 때문에 슬라브족 주민이 쫓겨난 후 게르만 국가에서 사람들을 "모집"하여 이러한 영토에 정착시킬 전망에 열광했다.[152] 아돌프 히틀러는 20년 안에 우크라이나는 원주민 외에도 2천만 명의 거주자를 위한 고향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151]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정착민들이 새롭게 식민지화된 지역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힘러의 헤게발트 정착촌에 대한 원래 계획은 독일인 외에도 네덜란드인과 스칸디나비아인을 정착시키는 것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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