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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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마도 정벌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마도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며,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고, 대마도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1389년 고려는 박위의 지휘 아래 제1차 정벌을 감행하여 왜구를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1396년에는 김사형이 이끄는 제2차 정벌이 있었으나, 일본 측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419년에는 이종무가 이끄는 제3차 정벌, 즉 기해동정이 있었지만, 명확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이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외교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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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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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마도 정벌 (第一次對馬島征伐) | |
분쟁 | 제1차 대마도 정벌 |
전체 | 전기 왜구 |
날짜 | 1389년(창왕 2년) 음력 2월 |
장소 | 나가사키현(長崎縣)의 부속도서 |
결과 | 고려의 승리 |
이유 | 우왕의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다. |
교전국 1 | [[파일:Royal flag of Goryeo (Bong-gi).svg|가운데|90px]] |
교전국 2 | [[파일:Ashikaga_mon.svg|가운데|65px]] 무로마치 막부 왜구 |
지휘관 1 | 박위(朴葳) |
지휘관 2 | 무로마치 왜구 |
병력 1 | 군함 100척 이상 병력: 10,000명 |
병력 2 | 불명 |
사상자 1 |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 |
사상자 2 |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 |
기타 |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
제2차 대마도 정벌 (第二次對馬島征伐) | |
분쟁 | 제2차 대마도 정벌 |
전체 | 전기 왜구 |
날짜 | 1396년(태조 5년) 음력 12월 |
장소 | 나가사키현(長崎縣)의 부속도서 |
결과 | 미상 |
이유 | 정벌의 발단은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는 120척으로 동래·기장·동평성을 함락,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만호를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
교전국 1 | [[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가운데|90px]] |
교전국 2 | [[파일:Ashikaga_mon.svg|가운데|65px]] 무로마치 막부 왜구 |
지휘관 1 | 5도병마도통처치사 김사형(金士衡) |
지휘관 2 | 무로마치 왜구 |
병력 1 | 불명 |
병력 2 | 불명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불명 |
기타 |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월 30일에 돌아올 때까지 약 2개월간의 사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제3차 대마도 정벌 (第三次對馬島征伐) | |
분쟁 | 제3차 대마도 정벌 |
전체 | 전기 왜구 |
날짜 | 1419년(세종 1년) 음력 6월 19일 |
장소 | 나가사키현(長崎縣)의 부속도서 |
결과 | 조선의 승리 |
교전국 1 | [[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가운데|90px]] |
교전국 2 | [[파일:Ashikaga_mon.svg|가운데|65px]] 무로마치 막부 왜구 |
지휘관 1 | 3군도통사 유정현(柳廷顯) |
지휘관 2 |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 |
병력 1 | 전함 227척, 군사 17,285명 |
병력 2 | 미상 |
사상자 1 | 정확히 알 수 없음 |
사상자 2 | 불명 |
기타 |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했으며,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
관련 전투 목록 | |
전기 왜구 | 오예포 전투 이작도 전투 진해 전투 삼일포 전투 합포 전투 홍산대첩 행안산 전투 해풍 전투 진포 해전 황산대첩 관음포대첩 대마도 정벌 |
2. 배경
쓰시마섬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어 중개 역할을 하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고, 원래 그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했다. 고려 말부터 조공과 함께 미곡(쌀)을 받아갔다. 또한 조선에서도 쓰시마섬을 우대하였으며, 쓰시마섬은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 때에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1]
1389년(창왕 2년) 음력 2월, 박위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구출하였다.[1]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389년(음력) 2월, 전함 100척으로 대마도 침공이 이루어졌으며, 박위를 사령관으로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이 따랐다.
1396년(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1]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같은 해 12월, 이성계가 이키 섬(壱岐)과 쓰시마 섬(対馬) 정벌을 명령했다.[1] 문하 우정승 김사형을 오도 병마 도통 처치사로 임명하고, 남재, 신극공, 이무를 부하로 두어 출정에 즈음하여 이성계가 남대문까지 전송했다.[1]
3. 제1차 정벌 (1389년)
「고려사」에서는 일본 배 300척과 연안의 건물을 불태우고, 붙잡혀 있던 자 100여 명을 구출했다고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창왕 명의로 칭찬받았다.[1]
일본 측 사료인 「종씨가보」(1719년 편찬)에는 같은 해 2월 18일에 고려군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강응 외구'''"라고 한다.[1] 다만, 이는 「고려사」 등을 참고하여 나중에 기술한 것이며, 이 사건 당시의 일본 측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록을 한국에서는 "제1차 대마도 정벌"이라고 칭하고 있다.
4. 제2차 정벌 (1396년)
일본 측 사료에는 이 시기에 조선군의 침공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1]
다만 조선왕조실록에는 1397년 1월 경상도 울주포에서 항복한 왜구 수령 나하온(羅可溫), 그의 아들 도시로(都時老), 부하 곤시라(昆時羅)가 관리를 인질로 삼아 도주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2월 10일에는 조선의 관직을 주고 귀순시켰다는 기록이 있다.[1] 또한 1398년 2월, 왜구 수령 육, 나하온, 망사문(望沙門) 등에게 관직을 부여함과 동시에 각각 등육, 임온, 지문으로 개명하게 했다고 한다.[1]
김사형은 이듬해 1월 30일에 귀환하여 영접을 받았고, 2월 8일에는 연회를 열었으므로, 어떤 공적이 인정된 듯하다.[1]
이를 한국에서는 "제2차 쓰시마 섬 정벌"이라고 칭하고 있다.[1] 조선에서는 이후에도 왜구의 귀순과 귀화 정책을 추진하지만, 쓰시마 섬에서는 소 정무의 사후 혼란으로 활동이 활발해진다.[1]
5. 제3차 정벌 (1419년, 기해동정)
이를 한국에서는 "제3차 대마도 정벌"이라고 칭하고 있다.
5. 1. 원인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하자, 대마도인들이 명나라 해안으로 약탈을 가던 도중에 조선의 서천군(구 비인 庇仁)과 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4]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조선은 새 도주인 소 사다모리가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논의하였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선포하였다.[5]
5. 2. 경과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7]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 정벌을 시작한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철수시킨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8]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9]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5. 3. 결과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1]
6. 평가 및 영향
대마도 정벌은 군사적 성과와 더불어 외교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1419년 기해동정은 180명의 조선군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 인명 피해가 컸고, 명확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가 항복하고 조공을 약속하면서 왜구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했다. 세종은 삼포를 개항하여 대마도주에게 통상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했다.[10]
2009년 한국역사연구회 학술 발표회에서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고,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 명의 병력을 준비한 점은 대마도 정벌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왜구는 주로 명나라 연안 지역에서 활동했다. 명나라는 일본 쇼군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려 했으나, 일본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일본 정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이 실행될 경우,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 온 태종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을 우려했다.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기 위해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는 것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즉, 조선은 정벌을 통해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고, 북방 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 했다.[10]
한편, 대마도 정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6. 1. 부정적 평가
1389년(음력) 2월, 박위를 사령관으로 한 고려군이 대마도를 침공했으나, 1719년 편찬된 「종씨가보」에는 고려군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이는 「고려사」 등을 참고하여 나중에 기술한 것이며, 당시의 일본 측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주편년략」(1723년 편찬)과 「쓰시마 기사」(1809년 편찬)에도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이들 역시 「고려사」 등을 참고한 뒤 후세의 전승을 채택한 것으로 사료로서 신빙성이 낮다.이기백은 「한국사신론」에서 이 공격 이후 왜구의 횟수가 격감했다고 주장했지만,[2] 1391년 8월 이마가와 료슌이 고려에 보낸 서신에는 왜구 단속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끊이지 않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이 사건 이후에도 왜구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396년 12월, 이성계가 이키 섬(壱岐)과 쓰시마 섬(対馬) 정벌을 명령했으나, 일본 측 사료에는 이 시기에 조선군의 침공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참조
[1]
문서
宗氏は日本の南北朝期における北朝方であり、「家譜」でも北朝の元号を使用している。
[2]
간행물
中・近世の韓日関係史に関する認識の共通点と相違点
http://www.jkcf.or.j[...]
日韓文化交流基金
[3]
지식백과
대마도정벌
두산백과
[4]
지식백과
대마도정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실록
세종실록
s:zh:朝鮮王朝實錄/世宗實錄#六月 [...]
1419-06-09
[6]
뉴스
"[만파식적]두모포"
https://www.sedaily.[...]
서울경제신문
2019-06-16
[7]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8]
실록
세종대왕실록
1419-07-17
[9]
실록
세종대왕실록
1419-10-18
[10]
뉴스
조선 세종1년 대마도 정벌 “왜구 소탕보다 明의 日정벌 차단 전략”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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