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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사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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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사다모리는 1385년경 출생한 인물로, 1418년 아버지의 사망 후 쓰시마 소 씨의 당주가 되었다. 초기에는 왜구의 수령 하야타 사에몬타로가 실권을 쥐었으나, 1419년 응영의 외구에서 조선군에 맞서 싸우며, 이후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1441년에는 일본인의 조선 근해 어업 권리를 획득하고, 가길 조약을 통해 교역 이익을 독점했다. 오우치 씨와의 갈등으로 영토를 빼앗기기도 했으며, 1452년 사망 후 아들과 조카가 당주직을 이었다. 드라마 용의 눈물과 대왕 세종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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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사다모리
인물 정보
이름소 사다모리
일본어 표기宗 貞盛 (そう さだもり)
로마자 표기Sō Sadamori
출생1407년
사망1451년
아버지소 사다시게
어머니대마 종가
배우자도노모 도요모토의 딸
오다치 씨
자녀소 시게모치
소 모리쿠니
소 사다카즈
소 요시시게
겐준
딸 (이치기 나가모치 부인)
딸 (사다치 요시나가 부인)
가문 정보
씨족소 씨
신분슈고 다이묘
관위종5위
직책대마 수호
거성부산성

2. 생애

소 사다모리는 1385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릴 적 이름은 도도구마마루였고, 통칭은 히코로쿠 또는 우마였다. 141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당주가 되었으나, 당시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왜구의 수령이었던 하야타 사에몬타로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1419년 응영의 외구 이후,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데 힘썼다. 1441년 고혁도 조어 금지약을 통해 일본인이 조선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고, 가길 조약을 맺어 조선과의 교역 이익을 독점했다. 또한 문인 제도를 확립하여 소 씨의 쓰시마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교역에 눈독을 들이던 오우치 씨와 대립하게 되었고, 소니 씨와 함께 오우치 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많은 영토를 잃었다. 한편, 오우치 씨에게 영지를 빼앗긴 소니 요리를 비호하기도 했다.

1452년 6월 22일 사망하였고, 당주는 아들 소 시게모토와 조카 소 사다쿠니가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쓰시마 경영

소 사다모리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유력한 설은 1385년이다. 어릴 적 이름은 도도구마마루였고, 통칭은 히코로쿠 또는 우마였다. 141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뒤를 이어 당주가 되었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도도구마마루였으며 원복하지 않았다. 또한 이 무렵은 당주로서 젊었기 때문에 실권은 왜구의 수령이었던 하야타 사에몬타로가 쥐고 있었다.

1419년 응영의 외구에서는 분전하여 양군이 교착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군의 요구를 거절한 뒤 조선의 사자에게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정전 수호를 요청했다. 전후 사다모리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 및 강화에 힘썼다. 1441년에는 일본인이 조선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고혁도 조어 금지약)를 획득했다. 그 후에도 조선과 가길 조약을 맺어, 조선과의 교역에 의한 이익을 독점했다. 또한, 문인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소 씨에 의한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2. 2. 응영의 외구 (조선의 쓰시마 정벌)

141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쓰시마의 당주가 되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실권은 왜구의 수령이었던 하야타 사에몬타로가 쥐고 있었다.

1419년 응영의 외구에서는 분전하여 양군이 교착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군의 요구를 거절한 뒤 조선의 사자에게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정전 수호를 요청했다.

2. 3. 조선과의 관계 회복 및 강화

응영의 외구(1419년)에서 소 사다모리는 분전하여 양군이 교착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군의 요구를 거절한 뒤 조선의 사자에게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정전 수호를 요청했다.. 전후 사다모리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 및 강화에 힘썼다. 1441년에는 일본인이 조선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고혁도 조어 금지약)를 획득했다. 그 후에도 조선과 가길 조약을 맺어, 조선과의 교역에 의한 이익을 독점했다. 또한, 문인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소 씨에 의한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2. 4. 오우치 씨와의 갈등과 죽음

1419년 응영의 외구에서 소 사다모리는 분전하여 양군이 교착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군의 요구를 거절한 뒤 조선의 사자에게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정전 수호를 요청했다. 전후 사다모리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 및 강화에 힘썼다. 1441년에는 일본인이 조선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고혁도 조어 금지약)를 획득했다. 이후 가길 조약을 맺어 조선과의 교역에 의한 이익을 독점했고, 문인 제도를 확립하여 소 씨의 쓰시마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교역에 관심을 가진 오우치 씨와 대립, 소 씨의 주군인 소니 씨와 함께 오우치 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많은 영토를 잃었다. 한편, 오우치 씨에 의해 영지를 잃은 소니 요리를 보호했다.

1452년 6월 22일 사망. 당주 자리는 아들 소 시게모토와 조카 소 사다쿠니가 이었다.

3. 소 사다모리가 등장한 작품

소 사다모리는 다음 작품들에 등장했다.

3. 1.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対馬歴史人物伝 宗貞盛 https://www.city.tsu[...] 対馬市 2023-10-13
[2] 간행물 老松堂のみた日本 http://www.isc.sensh[...] 専修大学
[3] 서적 단종실록 권2, 단종 즉위년(1452년) 7월 15일(병오) 4번째 기사
[4] 서적 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1418년) 8월 25일(임인)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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