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1946년 3월 우익 계열 노동조합으로 설립되었다. 공산주의 성향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대립하며, 1946년 9월 전평의 파업에 맞서 유혈 사태를 겪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어용 조직으로 변질되어 노동자들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다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소멸 위기에 처했다.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편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노총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해방 직후까지 존재한 좌익 계열 노동 단체로, 약칭은 전평이며 미군정 하에서 남한 노동 운동을 주도했으나 정치적 노선 차이와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 대한민국의 노총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결성되어 노동기본권 쟁취와 비민주 시대 청산을 과제로 활동하다가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결성 이후 발전적 해소를 선언했다.
  • 대한민국의 노총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1960년에 결성되어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정치 참여를 시작했으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비판도 받았고, 현재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와 교류하고 있다.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원내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이승만 계열과 김구 계열이 통합하여 결성된 우익 정당으로, 신탁통치 반대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제1당이 되었으나, 분열과 당세 약화로 1960년 소멸되었다.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원내정당 -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은 1948년 이승만 노선에 따라 5.10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9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단체이다.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기본 정보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
태극기
설립1946년 3월 10일
해산1960년 11월
후신한국노동조합총연맹
본부 위치서울특별시
명칭
한국어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한자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2. 역사

1945년 해방 이후 남로당 계열의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먼저 결성되었으나, 그 공산주의적 성향과 신탁통치 지지 등에 반발한 우파 민족주의 진영이 중심이 되어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창립하였다.

대한노총은 창립 직후부터 전평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특히 1946년 9월과 1947년 3월, 전평이 주도한 대규모 총파업 당시 대한노총은 파업 저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과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대한노총은 전평의 파업을 저지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전평이 비합법화되면서 대한민국 내 유일한 합법 노동조합 중앙 조직이 되었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반공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며 활동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체제가 강화되면서 점차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 조직으로 변질되었다.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비호 아래 노동자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에 반발한 민주화 세력은 1959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결성하며 대한노총과 다른 길을 모색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자 대한노총은 활동이 정지되는 등 위기를 맞았고, 이후 전국노협과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편되었다.

2. 1. 창립 배경 (1945~1946)

대한민국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0일, 허성택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로당 계열의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먼저 조직되었다. 그러나 전평은 공산주의 성향을 띠고 남북한을 아우르는 인민공화국 수립을 주장했으며, 신탁통치 지지 운동을 벌여 민족주의 진영의 반발을 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946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시천교회에서 우파 성향의 노동조합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창립되었다.

대한노총은 창립 이후 전평과의 대립 구도를 형성했으며, 같은 해 9월 전면적인 대결에 들어갔다. 전평은 1946년 9월, 제1차 제네스트(총파업)를 지시하여 9월 23일 철도 파업, 9월 24일 행정 파업을 감행했다. 당시 파업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 및 자금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에 파업 방침을 문의했고, 스티코프 사령관은 200만을 지원하며 요구 조건(임금 인상, 좌익 활동가 석방, 좌익 신문 속간, 공산당 지도부 체포령 철회 등) 관철 시까지 파업 투쟁을 지시했다.

대한노총은 파업 저지를 시도하며 전평 측과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은 좌익 선동가들이 파업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남로당 주도의 파업과 정치적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정과 우익 진영은 자율적인 방위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경찰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파업은 10월 1일을 기점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10월 7일 철도 운행이 재개되면서 전평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반면 대한노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주요 도시에서 조직 기반을 다지며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2. 2. 전평과의 대립 (1946~1948)

1945년 10월 10일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남로당 계열의 좌파 노동조합이었다. 전평은 공산주의 성향을 띠고 남북한을 아우르는 인민공화국 수립을 주장했으며, 신탁통치를 지지하여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시천교회에서는 우파 성향의 노동조합인 대한노총이 창립되었다.

대한노총은 창립 직후부터 전평과 본격적인 대립 관계에 들어섰다. 1946년 9월, 전평은 제1차 제네스트(총파업)를 지시하여 9월 23일 철도 파업과 9월 24일 행정 파업을 일으켰다. 대한노총은 파업 저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충돌로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은 이 파업의 배후에 좌익 선동 세력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이후 사실로 드러났다. 파업 주동자들과 공산당 지도부는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에 파업 방침을 문의했고, 스티코프 사령관은 200만을 지원하고 미군정의 좌익 탄압 중단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파업 투쟁을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남한 내 경찰력만으로는 남로당과 좌익 세력이 주도하는 파업과 무장 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 세력은 연합하여 자율적인 방위 조직을 결성했으며, 우익 청년단체 등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0월 1일을 기점으로 파업은 점차 진정되었고, 10월 7일에는 철도 운행이 재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평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대로 대한노총은 대한민국 주요 도시에서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이후에도 전평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47년 3월 22일, 전평은 제2차 제네스트를 지시하며 다시 한번 총파업을 시도했다. 이때 전평은 폭력 행위도 서슴지 않는 파괴적인 양상을 보였다. 대한노총은 이에 전면적으로 맞섰고, 또다시 유혈 충돌이 벌어졌으나 결국 전평의 파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패배로 인해 전평은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사실상 와해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식적으로 비합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전평이 소멸함에 따라 대한노총은 대한민국 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조합 중앙 조직(내셔널 센터)이 되었다.

2. 3. 어용 노조로의 전락 (1948~1960)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경쟁 조직이던 전평이 비합법화되자, 대한노총은 유일한 합법 노동조합 중앙 조직(내셔널 센터)으로 인정받으며 반공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체제가 강화되면서 대한노총은 점차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 조직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비호 아래, 노동자들의 민주화 요구를 조직폭력배와 경찰까지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대한노총의 비민주적 운영과 어용화에 반발한 노동운동 세력은 1959년 10월 전국노협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자, 대한노총 역시 다른 관변 조직들과 함께 활동이 정지되는 등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 비록 대한노총이 노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전국노협 역시 뚜렷한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 조직은 통합 논의를 거쳐 한국노총을 결성하게 된다.

2. 4. 한국노총으로의 재편 (1960~)

이승만 정권 하에서 대한노총은 제1공화국의 어용조직으로 변질되었다. 1959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대한노총은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비호 아래 조직폭력배와 경찰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10월, 대한노총의 비민주성에 반발한 민주화 세력들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결성하였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대한노총은 다른 정부 산하 조직과 함께 소멸 위기에 처하거나 활동 정지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대한노총이 이미 노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결성된 전국노협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결국 전국노협은 대한노총의 ‘대통합’ 요구에 따라 합류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결성하였다.

3. 역대 선거 결과

(내용 없음)

3. 1. 역대 총선 결과

(지역구 당선 / 후보)득표득표율1948년1대 총선2001 / 871,0621.04%1950년2대 총선2103117,9391.7%


3. 2. 역대 지방선거 결과

실시년도선거도의원 당선자시의원 당선자읍의원 당선자면의원 당선자
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당선비율
1952년1952년 지방선거2/3060.02%5/3780.01%6/11150.005%12/160510.0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