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 야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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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다 야스미쓰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미카와 지방의 다하라 성을 근거지로 삼은 도다 씨의 종주였다. 그는 마쓰다이라 씨와 이마가와 씨의 세력 다툼 속에서 딸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시집보내는 등 생존을 위한 노력을 했으나, 1547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명을 어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오다 노부히데에게 넘긴 배신 행위로 인해 아들 다카미쓰와 함께 사망하고 다하라 도다 씨는 멸망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야스미쓰의 배신이 아닌 이마가와 씨와 오다 씨의 연합 공격으로 인해 이에야스가 인질로 보내졌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의 자손들은 여러 다이묘 가문에서 번주가 되거나 가신으로 활약하며 가문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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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야스미쓰 | |
---|---|
기본 정보 | |
이름 | 도다 야스미쓰 |
다른 이름 | 도다 우지카네 (戸田氏栄) |
생몰년도 | 1576년 ~ 1655년 1월 26일 (80세) |
출생지 | 미카와국 |
사망지 | 오가키 번 |
가문 | |
가문 | 도다 씨 |
관위 | |
관위 | 종5위하, 다이젠노다이스케 (大膳大輔) |
주요 경력 | |
주요 경력 | 고모로 번 번주 미노 다카토미 번 번주 미노 오가키 번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도다 가즈시게 |
어머니 | 마쓰다이라 이에타다의 딸 |
정실 | 마쓰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
측실 | 고데 가쓰타카의 딸 가와무라 씨 |
자녀 | 도다 우지마사 (長男) 도다 우지요시 (次男) 도다 우지사다 (三男) 도다 우지노리 (四男) 딸 (도다 다다요시의 양녀) 딸 (이나가키 시게토모의 정실) 딸 (마쓰다이라 다다치의 정실) |
인물 정보 (일본어 위키) | |
이름 (일본어) | 戸田 康光 (とだ やすみつ) |
다른 이름 (일본어) | 戸田 氏栄 (とだ うじひで) |
생몰년도 (일본어) | 天正4年 - 明暦元年12月9日 |
관위 (일본어) | 従五位下 大膳大輔 |
번 | 小諸藩→高富藩→大垣藩 |
가독 상속 | 戸田氏栄 |
2. 가계
도다 이즈노카미 종5위하 좌위문위 십랑 노부요시 (도다 씨의 조상) ― 도다 히코타로 요시나리=도다 마고지로 요리시게 (동생)=도다 주로 요시후사 (동생) ― 도다 주로 요리카타 ― 도다 주로 요리후사 ― 도다 단조추 무네타다 ― 도다 사부로 쓰나미쓰 ― 도다 단조자에몬 무네미쓰 ― 도다 단조추 노리미쓰 ― 도다 사콘노조 마사미쓰 ― '''도다 단조쇼히쓰 야스미쓰'''
도다 야스미쓰는 미카와 국 무장인 도다 마사미쓰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아쓰미 반도를 통일한 증조부 무네미쓰의 이름을 따서 '''무네미쓰'''라고 지었다.
3. 생애
도다 씨의 종주로서 미카와 다하라 성을 근거지로 삼고, 후타츠기 성(도요하시시) 등에 일족을 배치하여 미카와 만 일대를 지배하려 했으나, 북쪽의 마쓰다이라 씨와 동쪽의 이마가와 씨 등 더 큰 센고쿠 다이묘가 히가시미카와로 진출해 왔기 때문에 이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마쓰다이라 씨를 따랐지만,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사후 마쓰다이라 씨가 쇠퇴하여 이마가와 씨에게 복속되자 도다 씨도 마찬가지로 종속되었다. 덴분 6년(1537년)경 이마하시 성의 마키노 나리토시를 쳐서 도다 노리시게를 입성시키고, 마키노 씨를 우시쿠보 성으로 몰아냈다.[1]
(하위 섹션 "세력 확장과 갈등"과 "이마가와 가문 배신과 최후"에서 도다 야스미쓰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해당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야스미쓰는 딸 마키히메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시집보내는 등 마쓰다이라 가문과 관계를 맺었지만,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명을 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오다 노부히데에게 넘기고 이마가와 가문을 배신했다. 이로 인해 이마가와 가문의 공격을 받아 아들 도다 다카미쓰와 함께 전사했다.[2]
3. 1. 세력 확장과 갈등
도다 야스미쓰는 도다 씨의 종주로서 다하라 성을 근거지로 삼고 미카와 만 일대를 지배하려 했지만, 북쪽의 마쓰다이라 씨와 동쪽의 이마가와 씨와 같은 더 큰 센고쿠 다이묘들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마쓰다이라 씨를 따랐으나,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사후 마쓰다이라 씨가 쇠퇴하여 이마가와 씨에 복속되자 도다 씨도 이마가와 씨에 종속되었다.[1]
야스미쓰는 자신의 딸 마키히메(다하라 고젠)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시집보냈다. 히로타다는 미즈노 노부모토의 여동생 오다이노 가타와 이혼한 상태였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히로타다와 도다 야스미쓰 모두 미즈노 씨 및 마키노 씨와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혼인을 맺은 것이라고 한다.[1] 족보에는 마키히메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 형제인 마쓰다이라 타다마사, 마쓰다이라 이에모토, 에사이, 나이토 노부나리 등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의 생모는 각각 다르며, 야스미쓰는 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양육했거나 후견인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47년(덴분 16년), 야스미쓰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명으로 슨푸에 인질로 보내지는 히로타다의 아들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오카자키 성에서 슨푸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야스미쓰는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고 다케치요를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히데에게 넘겼다. 『미카와 이야기』에는 야스미쓰가 다케치요를 영락전 1천 관문에 팔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 이에 분노한 요시모토는 군사를 보내 야스미쓰를 공격했고, 야스미쓰는 아들 도다 다카미쓰와 함께 전사하여 다하라 도다 씨는 멸망했다.[2]
최근 연구에서는 1547년 당시 이마가와 씨와 오다 씨가 연합하여 도다 씨와 마쓰다이라 씨를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오카자키 성이 함락되어 히로타다가 항복의 증거로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낸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3]
3. 2. 이마가와 가문 배신과 최후
도다 야스미쓰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딸 다하라고젠(田原御前) 마키히메를 시집보냈지만,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사후 마쓰다이라 씨가 쇠약해져 이마가와 씨에게 복속되자 도다 씨도 이마가와 씨에 종속되었다.[1]
1547년(덴분 16년), 야스미쓰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명을 받아 슨푸에 인질로 보내지는 히로타다의 적남 다케치요(竹千代,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오카자키에서 슨푸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야스미쓰는 다케치요를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히데에게 넘겨 이마가와 씨를 배신했다.[2] 이는 오다 씨와의 내통에 의한 이반이었으며, 『미카와 이야기』에 따르면 영락전으로 천 관문, 마쓰다이라 기에는 백 관문에 팔아 넘겼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다하라에 군사를 보냈고, 야스미쓰는 다하라 성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병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들 다카미쓰와 함께 전사하여 다하라 도다 씨는 멸망했다.[2]
4. 자손 및 일문
- 니렌기 도다가 (도다 종가): 야스미쓰의 차남 노부미쓰가 시조이다. 이마가와 가문에 충성하여 가문을 보전했고, 후손들은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며 번성했다.
- 다하라 도다가: 야스미쓰의 동생 다다마사가 시조이다. 마쓰다이라 가문을 섬기며 다하라성을 탈환했고, 후손들은 에도 시대에 다이묘 가문으로 성장했다.
- 오가키 도다가: 야스미쓰의 사촌 우지테루의 후손으로, 가즈아키와 우지카네 부자가 오가키 번을 다스렸다.
4. 1. 니렌기 도다가 (도다 종가)
도다 야스미쓰의 차남 노부미쓰(宜光)는 아버지 야스미쓰의 명으로 니렌기 성주에 봉해져, 니렌기 도다가라고 칭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이 이마가와에 반역한 것과는 다르게 노부미쓰는 이마가와 측에 붙었기 때문에, 도다 가문의 혈통을 유지하여 살아남아 성장한 그의 자손이 도쿠가와 씨에게 임관하게 된다. 따라서 노부미쓰로부터 시작된 적통으로서 니렌기 도다가를 들어 도다 종가로 한다.노부미쓰의 직계 자손으로는 적류로 마쓰모토 번의 번주가 된 야스나가(康長)로서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생이자 양녀 마쓰히메와의 혼인으로 마쓰다이라 성씨를 하사받아 도다 마쓰다이라가의 시조가 되어 도다 종가로도 명맥을 잇게 된다. 노부미쓰의 삼남 시게마사(重政)의 후손들은 미토 번사가 되어 막말 미토 번 가로 주다유(忠太夫), 아지마 다테와키(安島帯刀) 등도 배출했다.[1]
4. 2. 다하라 도다가
도다 쇼에몬 다다마사(또는 미쓰타다)는 야스미쓰의 동생으로, 오카자키로 탈출하여 후에 마쓰다이라 가문에 들어갔다. 그는 도다 종가의 거성인 다하라성을 탈환하여 도다 씨의 분파이면서도 다하라 성주가 되었다. 이후 다다마사의 자손은 다하라 도다가로 불리게 되었다.[1]다다마사의 손자인 다카쓰구는 이에야스 밑에서 공을 세워 이즈 시모다에 5000석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다하라 1만 석으로 복귀했다. 그의 자손은 에도 시대에 후다이 다이묘가 되어, 우쓰노미야 번과 아시카가 번을 거쳐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1]
4. 3. 오가키 도다가
야스미쓰의 사촌 우지테루(氏輝)의 손자 가즈아키(一西)와 그의 아들 우지카네(氏鉄)가 오가키번(大垣藩) 도다가를 시작했다.[1]5.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今川氏の三河・尾張経略と水野一族
岩田書院
2020
[2]
서적
高野山平等院供養帳と三河国衆
岩田書院
2020
[3]
서적
徳川家康 境界の領主から天下人へ
平凡社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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