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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모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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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모치하루는 다카스 번의 다이묘이자 오와리 번의 다이묘, 그리고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다카스 사형제' 중 한 명으로, 1831년에 태어나 1884년에 사망했다. 막부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조슈 정벌에 참여하고 히토쓰바시 가문을 상속받았다. 보신 전쟁 당시에는 도쿠가와 가문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판적봉환을 신청하고 히토쓰바시 번을 해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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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모치하루
기본 정보
도쿠가와 모치나가
이름도쿠가와 모치나가 (徳川 茂徳) / 도쿠가와 시게나가 (徳川 茂栄)
출생1831년 6월 11일
사망1884년 3월 6일
출생지에도, 일본
국적일본
관직
직위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 당주
재임 시작1866년
재임 종료1884년
이전도쿠가와 요시노부
다음도쿠가와 사토미치
가계
아버지마쓰다이라 요시타쓰
양아버지도쿠가와 요시카쓰
배우자니와 나가토미 딸 마사히메
자녀마쓰다이라 요시타네 (다카스 가문), 도쿠가와 다쓰미치 (히토쓰바시 가문) 등
양자도쿠가와 요시노리 (오와리 가문)
형제미나모토노스케, 요시카쓰, 다케나리, 세이자부로, 모치나가, 가타모리, 사다아키, 데쓰마루, 요시타케, 유키
기타 정보
시대에도 시대 후기 - 메이지 시대
개명친자부로
마쓰다이라 다네시게 (초명)
마쓰다이라 요시히로
도쿠가와 모치나가
도쿠가와 시게나가
아호호: 고토쿠, 아호: 보쿠도, 은거호: 겐도
시호겐주인덴
묘소간에이지야나카 묘지
관위종3위
참의
좌근위권중장
종2위
권대납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사다
이에모치
요시노부
미노다카스 번 번주 → 오와리 번 번주
씨족다카스 마쓰다이라 가문 →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

2. 생애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있다. 이들은 '''다카스 사형제'''(高須四兄弟)로 알려져 있다.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 당주를 계승하기 전 다카스 번과 오와리 번의 다이묘를 역임했으며, 바쿠마츠 시대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후 아들 사토미치에게 히토쓰바시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2. 1. 초기 생애 (다카스 번, 오와리 번 시대)

덴포 2년(1831년), 다카스 번 10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친사부로'''였으며, 후에 아버지 요시타쓰로부터 편휘를 받아 '''다쓰시게'''(建重, 초명)라고 이름을 지었다. 장형과 넷째 형은 요절했고, 둘째 형 요시카쓰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을, 셋째 형 다케시게는 하마다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이 4명의 형을 대신하여 가에이 2년(1849년) 8월 16일 다카스 번 세자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1일,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오메미에했다. 가에이 3년(1850년) 10월 16일, 아버지의 은거로 다카스 번 제11대 번주로 취임하여 '''요시치카'''를 칭했다.

안세이 5년(1858년) 7월 5일, 안세이 대옥으로 형 요시카쓰(후의 요시카쓰)의 은거근신에 따라 오와리 번주로 취임,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로부터 편휘를 받아 '''모치나가'''라고 칭했다. 취임 당시의 경위로 인해, 번내의 지지는 쓰케가로 다케코시 마사토미 등 사쿠하파가 중심이 되었다. 다카스 번주는 대신 장남 요시즈미가 계승했다.

만엔 원년(1860년), 헵번식 로마자로 유명한 제임스 커티스 헵번과 프란시스 홀, 듀안 시몬스 박사 부부는 가나가와주쿠 근처의 도카이도에서 다이묘 행렬을 구경했다.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행렬 선봉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헵번과 홀은 따르지 않고, 서서 행렬을 응시했기 때문에, 오와리 번주도 헵번들 앞에서 가마를 멈추고 오페라글라스로 헵번 등을 관찰하는 등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지만, 수 분 후에 오와리 공의 행렬은 아무 일 없이 출발하여, 사건·분쟁으로 번지는 일 없이 무사히 끝났다. 이 때의 오와리 번주는 연대로 보아 도쿠가와 모치나가로 여겨진다.[2]

2. 2. 막부 정치 참여와 히토쓰바시 가문 상속

1865년 4월, 조슈 재정벌막부로부터 정벌 총독으로 내정되었으나, 측근들의 반발로 기슈번주 도쿠가와 시게노부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시게노부와 함께 오사카성에서 이에모치를 보좌하며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1] 같은 해 윤5월, 이름을 '''모치하루'''(茂徳)로 고쳤다.[1] 같은 해 6월, 막부로부터 하타모토 오토비(旗本御後備)를 명받았다.[1] 효고 개항 요구 사건 당시, 히토쓰바시가 당주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과 함께 대응에 분주히 움직여 이에모치의 신임을 얻었다.[1] 같은 해 10월, 장군이 없는 에도에서 에도 르스이를 명받아 에도로 갔다.[1]

1866년 12월 27일, 친형 게이쇼나 친동생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아이즈번주/교토 수호직)의 주선으로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15대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를 계승했다.[2]

2. 3.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 보신 전쟁 발발 후, 형 도쿠가와 요시카쓰의 뜻에 따라 도쿠가와 가문 구제를 위한 탄원 활동을 전개했다. 에지리 숙에서 동정대총독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869년 3월 판적봉환을 신청했고, 같은 해 12월 폐번이 되어 지번사에는 임명되지 못했다. 1870년 6월 가신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히토쓰바시 번을 해체했다. 1884년 3월 54세로 사망했으며, 법호는 겐주인덴(顕樹院殿)이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마쓰다이라 요시타쓰 (1800-1862)
어머니노리히메도쿠가와 하루토시의 딸
정실마사히메니와 나가토미의 딸
측실고스게 씨
장남마쓰다이라 요시미 (1858년 - 1860년)마사히메 소생, 고스 마쓰다이라 가의 후계자.
4남도쿠가와 릿도 (1872년 - 1944년)코스게 씨 소생,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의 후계자.
양자도쿠가와 요시노리도쿠가와 요시카츠의 셋째 아들,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후계자.


4. 다카스 4형제



다카스 번의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의 아들로, 그의 형제로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있으며, 이들은 '''다카스 4형제'''(高須四兄弟)로 알려져 있다.[3]

5. 평가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게이오 원년(1865년) 9월의 효고 개항 요구 사건에 대한 모치하루의 대응을 높이 평가하여 "앞으로 친밀하게 생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1]

참조

[1] 간행물 幕末の徳川将軍家と尾張家十五代徳川茂徳 徳川林政史研究所 2013-03
[2] 서적 日本人と参勤交代 柏書房 2010-06
[3] 문서 尾張藩主時代の養父で茂徳の実兄
[4] 문서 一橋徳川家当主時代の養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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