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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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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4남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가조로 하여 성립된 가문이다. 도쿠가와 쇼군가의 후사가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고산쿄와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배출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도쿠가와 종가로부터 독립하여 백작 지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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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기본 정보
가몬[[파일:Japanese_crest_Tokugawa_Aoi.svg|20px|미쓰바아오이 문장]] 마루니미쓰아오이
이름도쿠가와씨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본성자칭 세이와 겐지
가조도쿠가와 무네타다
종별무가, 화족 (백작)
출신지무사시국 에도
근거지무사시국 에도, 도쿄부
주요 인물도쿠가와 하루사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무네요시
역대 당주
초대무네타다 (1735-1764)
2대하루사다 (1764-1799)
3대나리아쓰 (1799-1816)
4대나리유키 (1816-1830)
5대나리토모 (1830-1837)
6대요시마사 (1837-1838)
7대요시카쓰 (1838-1847)
8대마사마루 (1847)
9대요시노부 (1847-1859, 1862-1866)
10대모치나가 (1866-1884)
11대다쓰미치 (1884-1933)
12대무네야스 (1934-1989)
13대무네노부 (1989-1993)
14대무네치카 (1993-현재)
기타 정보
범례1735-1764: 재임 기간

2. 역사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고산쿄 중 유일하게 쇼군을 배출했는데, 11대 쇼군 이에나리와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이 가문 출신이다. 하루사다이에나리가 많은 자식을 얻었지만, 타야스 도쿠가와가 2대 하루사토는 요절했고, 시미즈 도쿠가와가 초대 시게요시는 친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 결과, 18세기 말 이후 쇼군가, 고산케 (오와리, 키이가), 고산쿄의 당주 대부분이 무네타다의 후손으로 채워졌고, 후쿠오카번 쿠로다가 등 도자마 대번에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혈통이 유입되었다.

하지만 히토쓰바시가 당주 중에는 단명하여 자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막부 말기에는 신판 대다수가 히토쓰바시가 혈통이었지만, 고산쿄무네타다의 후손은 타야스가뿐이었다. 8대 당주 마사마루는 오와리 도쿠가와가 출신 양자였지만, 아버지가 쇼군 이에나리의 아들이었고, 마사마루 사후에는 미토 도쿠가와가에서 요시노부가 양자로 들어왔다.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오와리번 번주였던 모치나가(미토가 혈통)가 당주가 되는 등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대정봉환 이후 무네타다의 남계 후손이자 타야스가 출신이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았고, 히토쓰바시가 당주는 다른 가문 혈통, 히토쓰바시가 혈통인 타야스가 당주가 도쿠가와 종가를 잇는 상황이 되었다.

1868년(메이지 원년), 도쿠가와 종가에서 독립하여 유신입번(히토츠바시번)했지만,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 때 지번사에 임명되지 못하고 폐번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윤 10월 가록 3805석을 받았고,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으로 화족에 편입되어 백작 작위를 받았다. 12대 당주 무네요시는 전후 마지막 귀족원 부의장을 지냈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본 측 전권위원 중 한 명이었다.

2. 1. 성립 배경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4남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가조로 하여,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를 대비해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며, 고쿠다카는 10만 석이다. 가명의 유래가 된 저택인 히토츠바시 저택은 에도성 히토츠바시문 안, 현재의 지요다구 오오테마치 1초메 4번지 부근에 있었다. 히토츠바시가는 독립된 별개의 "가문"이 아니라 "쇼군가(도쿠가와 종가)의 가족"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지는 막부령으로부터 명목적으로 분할되어 있을 뿐, 지배를 위한 번은 가지지 않았고, 가신단도 소수의 파견자(주로 하타모토, 그 밖에 당주 생가의 카츄 등)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다른 고산쿄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막부 말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당주 시대, 시부사와 에이이치시부사와 세이이치로 등 타가 지배지의 호농 출신을 가신으로 신규로 거둬들이거나, 이들을 이용해 영지에서 농병을 징모하고, 직속 병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무네타다겐분 2년(1737년)에 뇌료를 현미 2만 섬으로 고쳤으며, 겐분 5년(1740년)에 히토츠바시문 내에 택지 및 뇌료 1만 섬을 가증받아 히토츠바시가를 일으켰다. 엔쿄 3년(1746년), 신규로 뇌료 영지 10만 석을 무사시ㆍ시모츠케ㆍ시모우사ㆍ카이ㆍ이즈미하리마ㆍ빗츄 7개국 중에 주어져, 고쿠다카 10만 석이 된다. 다만, 영분은 시기에 따라 이동이 있었으며, 막부 말기에는 무사시ㆍ시모츠케ㆍ시모우사ㆍ에치고ㆍ셋츠ㆍ이즈미하리마ㆍ빗츄의 8개국 22군에 산재해 있었다.

2. 2. 초기 역사 (무네타다 ~ 요시노부 이전)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4남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가조로 하여,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를 대비해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었고, 고쿠다카는 10만 석이었다. 가명의 유래가 된 저택인 히토츠바시 저택은 에도성 히토츠바시문 안, 현재의 지요다구 오테마치 1초메 4번지 부근에 있었다. 히토츠바시가는 독립된 별개의 "가문"이 아니라 "쇼군가 (도쿠가와 종가)의 가족"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지는 막부령으로부터 명목적으로 분할되어 있을 뿐, 지배를 위한 번은 가지지 않았고, 가신단도 소수의 파견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다른 고산쿄도 마찬가지였다.

무네타다겐분 2년 (1737년)에 뇌료를 현미 2만 섬으로 고쳤으며, 겐분 5년 (1740년)에 히토츠바시문 내에 택지 및 뇌료 1만 섬을 가증받아 히토츠바시가를 일으켰다. 엔쿄 3년 (1746년)에는 신규 뇌료 영지 10만 석을 무사시, 시모츠케, 시모우사, 카이, 이즈미, 하리마, 빗츄 7개국에 주어져 고쿠다카 10만 석이 되었다. 다만, 영분은 시기에 따라 이동이 있었으며, 막부 말기에는 무사시, 시모츠케, 시모우사, 에치고, 셋츠, 이즈미, 하리마, 빗츄의 8개국 22군에 산재해 있었다.

히토츠바시가는 고산쿄 중 유일하게 쇼군을 배출했는데, 11대 쇼군 이에나리와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히토츠바시가 출신이다. 더욱이, 하루사다이에나리가 많은 자식을 얻은 한편, 타야스 도쿠가와가 2대 하루사토가 요절하고, 시미즈 도쿠가와가 초대 시게요시가 친자를 남기지 않은 결과, 18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쇼군가와 고산케오와리와 키이가 당주, 고산쿄의 모든 당주가 무네타다의 후손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토자마의 대번, 후쿠오카번 쿠로다가 등에도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의 피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히토츠바시가 당주 자신은 단명하여 자식을 남기지 못한 자가 많았다. 막부 말기에는 수많은 신판이 히토츠바시가의 혈통으로 채워지는 한편, 고산쿄이자 무네타다의 후손은 타야스가가 유일하였다. 8대 당주인 마사마루는 오와리 도쿠가와가에서 온 양자였지만, 아버지는 쇼군 이에나리의 아들이었고, 마사마루가 요절한 후에는 히토츠바시가의 핏줄이 아닌 미토 도쿠가와가로부터 요시노부가 양자로 들어왔다.

2. 3. 막부 말기 (요시노부 ~ 메이지 유신)

도쿠가와 요시노부 당주 시대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시부사와 세이이치로 등 다른 번의 지배를 받던 지역의 부유한 농민 출신을 가신으로 새로 받아들였다. 이들을 이용하여 영지에서 농병을 징집하고, 직속 병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히토쓰바시 가문은 고산쿄 중에서 유일하게 쇼군을 배출했는데,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히토쓰바시 가문 출신이다.

하루사다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많은 자식을 얻은 반면, 다야스 도쿠가와가 2대 하루사토가 요절하고, 시미즈 도쿠가와가 초대 시게요시가 친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 결과, 18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쇼군가와 고산케오와리와 키이 가문 당주, 고산쿄의 모든 당주가 히토쓰바시 가문의 무네타다의 후손이 차지하게 되었다. 후쿠오카번 구로다가 등 도자마의 대번에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혈통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 자신은 단명하여 자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막부 말기에는 수많은 신판이 히토쓰바시 가문의 혈통으로 채워졌지만, 고산쿄이자 무네타다의 후손은 다야스가만이 유일했다. 8대 당주인 마사마루는 오와리 도쿠가와가에서 온 양자였지만, 아버지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이었다. 마사마루가 요절한 후에는 히토쓰바시 가문의 혈통이 아닌 미토 도쿠가와가로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양자로 들어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오와리번의 전 번주인 모치나가(혈통으로는 미토가와 연결됨)가 대신 당주에 오르는 등 변칙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편, 대정봉환 후에는 무네타다의 남계 후손이면서 다야스가 출신이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았다. 정작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는 다른 집안의 혈통으로, 히토쓰바시 가문의 혈통인 다야스가 당주가 도쿠가와 종가를 잇게 되었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68년 (메이지 원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도쿠가와 종가로부터 독립하여 유신입번했다 (히토츠바시번). 그러나 1869년(메이지 2년)에 판적봉환을 했지만, 지번사에 임명되지 못하고 폐번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윤 10월에 가록 3805석을 지급받았고, 1884년(메이지 17년) 7월에는 화족령에 의해 화족에 올랐고, 백작 지위를 받았다. 12대 당주 무네요시는 전후 마지막 귀족원 부의장을 맡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일본 측 전권위원 중 한 명이었다.

3. 역대 당주

대수이름출생사망재임 기간비고
1무네타다1721년1765년1735년 ~ 1764년
2하루사다1751년1827년1764년 ~ 1799년11대 쇼군 이에나리의 아버지
3나리아쓰1780년1816년1799년 ~ 1816년
4나리노리1803년1830년1816년 ~ 1830년
5나리쿠라1818년1837년1830년 ~ 1837년나리마사 (타야스가)의 아들, 하루사다의 손자
6요시마사1825년1838년1837년 ~ 1838년12대 쇼군 이에요시의 아들, 하루사다의 증손자
7요시히사1823년1847년1838년 ~ 1847년나리마사 (타야스가)의 아들, 하루사다의 손자
8마사마루1846년1847년1847년오와리 도쿠가와가에서 양자로 옴, 하루사다의 증손자
9요시노부1837년1913년1847년 ~ 1866년15대 쇼군으로 취임
10모치하루1831년1884년1866년 ~ 1884년전 오와리번 15대 번주 모치나가, 요시노부의 육촌
11사토미치백작
12무네요시미토 도쿠가와가에서 양자로 옴, 요시노부 형의 손자, 백작
13무네노부
14무네치카현 당주


4. 가문의 특징 및 의의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으며,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고, 고쿠다카는 10만 석이었다. 가문의 명칭은 에도성 히토쓰바시문 안, 현재의 지요다구 오테마치 부근에 있던 히토쓰바시 저택에서 유래했다.

히토쓰바시가는 "쇼군가(도쿠가와 종가)의 가족"으로 인식되어, 영지는 막부령에서 명목상 분할되었을 뿐 번을 가지지 않았고, 가신단도 소수였다. 겐분 2년(1737년)에는 현미 2만 섬으로 뇌료를 고쳤고, 겐분 5년(1740년)에는 히토쓰바시문 내 택지와 뇌료 1만 섬을 추가로 받아 히토쓰바시가를 일으켰다. 엔쿄 3년(1746년)에는 10만 석의 뇌료 영지를 무사시, 시모쓰케 등 7개 국에 걸쳐 받아 고쿠다카 10만 석이 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8개 국 22군에 영지가 산재해 있었다.

고산쿄 중 유일하게 쇼군(11대 도쿠가와 이에나리,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을 배출했다. 18세기 말 이후 쇼군가, 고산케, 고산쿄 당주 대부분과 도자마 대번 후쿠오카번 구로다가 등에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히토쓰바시가 당주는 단명한 경우가 많아, 막부 말기에는 신판은 히토쓰바시가 혈통으로 채워졌지만, 고산쿄이자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후손은 다야스가뿐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오와리번 전 번주 도쿠가와 모치나가가 당주가 되는 등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했고,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남계 후손인 다야스가 출신이 도쿠가와 종가를 이었다.

메이지 원년(1868년) 도쿠가와 종가에서 독립해 유신입번했지만,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 후 지번사에 임명되지 못하고 폐번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에 의해 백작 작위를 받았다. 12대 당주 무네요시는 귀족원 부의장,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본 측 전권위원이었다.

4. 1. 쇼군 배출 가문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시조로 하며,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를 대비해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며, 고쿠다카는 10만 석이다. 히토쓰바시가는 독립된 별개의 "가문"이 아니라 "쇼군가(도쿠가와 종가)의 가족"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영지는 막부령으로부터 명목적으로 분할되었을 뿐, 지배를 위한 번은 가지지 않았고, 가신단도 소수의 파견자로 구성되었다. 이는 다른 고산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막부 말기 도쿠가와 요시노부 당주 시대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을 가신으로 거두어들이거나, 이들을 이용해 영지에서 농병을 징모하고 직속 병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히토쓰바시가는 고산쿄 중 유일하게 쇼군을 배출했는데,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히토쓰바시가 출신이다. 18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쇼군가와 고산케오와리와 키이가 당주, 고산쿄의 모든 당주가 히토쓰바시 가문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후손이었고, 도자마 대번 후쿠오카번 구로다가 등에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그러나 히토쓰바시가 당주 자신은 단명하여 자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막부 말기에는 수많은 신판이 히토쓰바시가 혈통으로 채워지는 한편, 고산쿄이자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후손은 타야스가뿐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오와리번의 전번주 도쿠가와 모치나가가 대신 당주에 오르는 등 변칙적인 일이 벌어졌다. 대정봉환 이후에는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남계 후손이면서 타야스가 출신이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았다.

4. 2. 혈통의 번성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시조로 하는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며, 고쿠다카는 10만 석이었다. 히토쓰바시가는 고산쿄 중 유일하게 쇼군을 배출했는데,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히토쓰바시가 출신이다.

도쿠가와 하루사다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많은 자식을 얻은 한편, 다야스 도쿠가와가 2대 하루사토가 요절하고, 시미즈 도쿠가와가 초대 시게요시가 친자를 남기지 못하면서, 18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쇼군가와 고산케오와리, 키이가 당주, 고산쿄의 모든 당주가 히토쓰바시 가문의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후손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도자마의 대번, 후쿠오카번 구로다가 등에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피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히토쓰바시가 당주 자신은 단명하여 자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막부 말기에는 수많은 신판이 히토쓰바시가의 혈통으로 채워졌지만, 고산쿄이자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후손은 다야스가만이 유일했다. 8대 당주 마사마루는 오와리 도쿠가와가에서 온 양자였지만, 아버지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이었고, 마사마루 사후에는 히토쓰바시가의 혈통이 아닌 미토 도쿠가와가로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양자로 들어왔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오와리번의 전 번주 모치나가 (미토가와 혈연관계)가 당주가 되는 등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은 집안은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남계 후손이면서 다야스가 출신이었고, 히토쓰바시가의 당주는 다른 집안 혈통으로, 히토쓰바시가의 혈통인 다야스가 당주가 도쿠가와 종가를 잇게 되었다.

4. 3. 막부 말기의 특이성

도쿠가와 요시노부 당주 시대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세이이치로 등 다른 번의 지배를 받던 지역의 부유한 농민 출신을 가신으로 새로 받아들였다. 이들을 이용하여 영지에서 농병을 징집하고, 직속 병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이에나리요시노부가 히토쓰바시가 출신이다. 하루사다이에나리가 수많은 자식을 얻은 한편, 타야스 도쿠가와가 2대 하루사토가 요절하고, 시미즈 도쿠가와가 초대 시게요시가 친자를 남기지 않은 결과, 18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쇼군가와 고산케오와리와 키이가 당주, 고산쿄의 모든 당주가 히토쓰바시 가문의 무네타다의 후손이 되었다. 도자마의 대번, 후쿠오카번 구로다가 등에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피가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히토쓰바시가 당주 자신은 단명으로 자식을 남기지 못한 자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막부 말기에는 수많은 신판이 히토쓰바시가의 혈통으로 채워지는 한편, 고산쿄이자 무네타다의 후손은 타야스가가 유일하였다. 8대 당주인 마사마루는 오와리 도쿠가와가에서 온 양자이지만, 아버지는 쇼군 이에나리의 아들이었다. 마사마루의 요절 후에는 히토쓰바시가의 핏줄이 아닌 미토 도쿠가와가로부터 요시노부가 양자로 들어왔다.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오와리번의 전 번주인 모치나가 (핏줄로는 미토가와 연결됨)가 대신 당주에 오르는 등 변칙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편, 대정봉환 후에는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은 집안은 무네타다의 남계 후손이면서 타야스가 출신이며, 정작 히토쓰바시가의 당주는 타 집안의 핏줄로, 히토쓰바시가의 핏줄인 타야스가 당주가 도쿠가와 종가를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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