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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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아는 차가타이 칸의 4대손으로, 1272년 차가타이 한국의 칸으로 추대되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그는 카이두와 대립하며 칸위 계승권을 두고 다투었고, 1282년 카이두에 의해 칸위에 올랐다. 이후 카이두와 협력하여 원나라에 대항했으며, 1301년 테케리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카이두가 사망하자 차파르를 옹립했다. 1306년 원나라와 함께 차파르를 항복시키고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분할했으며, 1307년 아프가니스탄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곧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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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 | |
---|---|
기본 정보 | |
이름 | 두와 |
로마자 표기 | Duwa |
한자 표기 | 都哇 |
출생 년도 | (정보 없음) |
사망 년도 | 1307년 |
사망 장소 | (정보 없음) |
정치 | |
작위 | 차카타이 칸국 칸 |
통치 기간 | 1282년 – 1307년 |
이전 통치자 | 부카 테무르 |
다음 통치자 | 쾨네체크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가족 | |
아버지 | 바라크 |
어머니 | (정보 없음) |
배우자 | 코초의 옐리이헤이미시 베키 |
자녀 | 쿠툴루그 크와자 에센 부카 1세 케베크 쾨네체크 야사우르 엘지기데이 두와 테무르 타르마시린 기타 |
2. 생애
두아는 차가타이 칸의 4대손으로, 아버지 바락이 1271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초기에는 실권이 없었으나, 카이두와의 협력과 원나라와의 대립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1301년 카이두와 함께 원나라를 공격했으나 테케리쿠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이두 사후 그의 아들 차파르를 옹립했다. 그러나 차파르와 갈등을 빚었고, 1306년 원나라와 협공하여 차파르를 굴복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307년 힌두쿠시 일대를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으나, 곧 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뇌 염증 또는 마비로 추정된다. 사후, 아들 콘첵이 칸위를 계승했으나 1308년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차가타이 칸의 4대손으로, 1221년 바미얀 공략 중 전사한 무투겐의 증손이자 에세나토의 손자였다. 1271년 아버지 바락이 우구데이 칸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아버지 바락이 죽을 당시 그는 세력도 없고, 나이가 어렸으므로 왕위는 그의 다른 친족 네구베이, 부카 테무르에게 넘어갔다. 1272년 그는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의 칸으로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실권이 없었다. 그는 카이두와 대립하는 한편 카이두의 측근이 된, 차가타이 칸국 5대 군주 알루구의 아들 츄베이 등 알루구의 자손들과도 칸위 계승권을 놓고 10년간 대립하였다.1282년, 카이두는 자신과 바락의 아들들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두와를 차가타이 칸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2]
1274년 카이두는 두아를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차가타이 칸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1287년 혹은 1291년이 되어서야 부카 테무르를 최종 격파하고 차가타이 울루스 전역을 손에 넣게 된다.
이후 카이두와 협력하여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도전했다. 고령의 쿠빌라이 칸은 이들을 진압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변방을 유린당했다.
1301년 카이두와 함께 카안 울루스에 쳐들어갔지만, 테케리쿠 전투에서 퀼리그 칸 카이산이 이끄는 원나라 군에 격퇴되고 카이두와 두아는 모두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 그러던 중 1301년, 카이두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그리고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즉위한 후에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는 원나라로 차바르를 추방시켰다. 두아는 그해 다시 군대를 보내 델리 술탄국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1307년 두아는 군사를 이끌고 힌두쿠시 일대를 공략하여 점령, 아프가니스탄까지 세력하에 두었으나, 곧 병을 얻어 사망했다. 두아의 사망 원인은 다소 불확실한데, 뇌 염증이라는 설과 마비에 의한 사망설이 있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드 알 딘에 의하면 두아는 1306년 뇌 염증으로 사망했다 한다. 다른 페르시아의 역사가 와사프는 그가 1307년 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2. 2. 카이두와의 협력과 원나라와의 대립
1271년 아버지 바락이 우구데이 칸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바락이 죽을 당시 그는 세력도 없고, 나이가 어렸으므로 왕위는 그의 다른 친족 네구베이, 부카 테무르에게 넘어갔다. 1272년 그는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의 칸으로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실권이 없었다. 그는 카이두와 대립하는 한편 카이두의 측근이 된, 차가타이 칸국 5대 군주 알루구의 아들 츄베이 등 알루구의 자손들과도 칸위 계승권을 놓고 10년간 대립하였다. 알루구는 차가타이 칸의 6남 바이다루의 아들이었다.[2]1274년 카이두는 두아를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차가타이 칸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1287년 혹은 1291년이 되어서야 부카 테무르를 최종 격파하고 차가타이 울루스 전역을 손에 넣게 된다.[2]
이후 카이두와 협력하여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도전했다. 고령의 쿠빌라이 칸은 이들을 진압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변방을 유린당했다.[2]
1301년 카이두와 함께 카안 울루스에 쳐들어갔지만, 테케리쿠 전투에서 퀼리그 칸 카이산이 이끄는 원나라 군에 격퇴되고 카이두와 두아는 모두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 그러던 중 1301년, 카이두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그리고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2]
즉위한 후에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는 원나라로 차바르를 추방시켰다. 두아는 그해 다시 군대를 보내 델리 술탄국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2]
2. 3. 차파르와의 갈등과 중앙아시아 지배
1271년 아버지 바락이 우구데이 칸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1282년 카이두는 자신과 바락의 아들들 사이의 평화를 위해 두아를 차가타이 칸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2]1301년 카이두와 함께 카안 울루스에 쳐들어갔지만, 테케리쿠 전투에서 퀼리그 칸 카이산이 이끄는 원나라 군에 격퇴되고 카이두와 두아는 모두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그리고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차파르는 즉위한 후에 두아와 대립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는 원나라로 차파르를 추방시켰다.
3. 유산
두아는 차가타이 칸의 4대손으로, 1271년 아버지 바락이 의문의 독살을 당한 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 1282년 카이두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의 칸으로 추대되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그는 카이두 및 알루구의 자손들과 칸위 계승권을 놓고 10년간 대립하였다. 1287년 혹은 1291년에 부카 테무르를 격파하고 차가타이 울루스 전역을 장악했다.
1301년 카이두와 함께 원나라를 공격했으나 테케리쿠 전투에서 패배하고 중상을 입었다. 카이두 사후, 1303년 그의 장남 차파르를 옹립하고 원나라 등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306년 차파르를 몰아내고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원나라와 분할했다.
1307년 두아는 힌두쿠시를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곧 병을 얻어 사망했다. 라시드 알 딘은 1306년 뇌 염증으로, 와사프는 1307년 마비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두아의 사후 차가타이 한국은 케벡 칸과 에센부카 칸 시기에 중앙아시아 분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1]
4. 가계
두아는 차가타이 칸의 4대손으로, 1221년 바미얀 공략 중 전사한 무투겐의 증손이자 에세나토의 손자였다. 할아버지 에세나토는 이름만 전하고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아버지 바락은 1266년 쿠빌라이 카안에 의해 5촌 당숙 무바라크 샤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다.[6]
1271년 아버지 바락은 우구데이 칸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아버지 바락이 죽을 당시 그는 세력도 없고, 나이가 어렸으므로 왕위는 그의 다른 친족 네구베이, 부카 테무르에게 넘어갔다. 1272년 그는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어려 실권이 없었다. 그는 카이두와 대립하는 한편 카이두의 측근이 된, 차가타이 칸국 5대 군주 알루구의 아들 츄베이 등 알루구의 자손들과도 칸위 계승권을 놓고 10년간 대립하였다. 알루구는 차가타이 칸의 6남 바이다루의 아들이었다.[6]
그의 뒤를 이어 장남 콘첵이 차가타이 한국의 칸위를 계승했으나, 1308년 사망하였다. 후일 모굴리스탄 칸국을 세운 투글루크 티무르는 그의 여섯째 아들 아미르 허자의 아들이었다.[6]
4. 1. 바부르나마에 기록된 가계
바부르가 저술한 《바부르나마》 1장 19페이지에는 그의 외조부 유누스 칸의 계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6]"유누스 칸은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 칸의 후손으로, 유누스 칸은 와이스 칸의 아들이며, 와이스 칸은 셰르알리 오글란의 아들, 셰르알리 오글란은 무함마드 칸의 아들, 무함마드 칸은 히즈르 호자 칸의 아들, 히즈르 호자 칸은 투글루크 티무르 칸의 아들, 투글루크 티무르 칸은 아이산 부가 칸의 아들, 아이산 부가 칸은 다와 칸의 아들, 다와 칸은 바락 칸의 아들, 바락 칸은 예순타와 칸의 아들, 예순타와 칸은 무투칸의 아들, 무투칸은 차가타이 칸의 아들, 차가타이 칸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다."
4. 2. 타리크히 라시디에 기록된 가계
미르자 무함마드 하이달 두글라트의 《타리크히 라시디》에 따르면 두아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6]순서 | 이름 | 순서 | 이름 | 순서 | 이름 |
---|---|---|---|---|---|
1 | 칭기즈 칸 | 8 | 투글루크 티무르 | 15 | 술탄 사이드 칸 |
2 | 차가타이 칸 | 9 | 히즈르 호자 | 16 | 압둘라시드 칸 |
3 | 무투칸 | 10 | 무함마드 칸 | 17 | 압둘 카림 칸 |
4 | 예순토아 | 11 | 시르 알리 오글란 | ||
5 | 기야스웃딘 바락 | 12 | 우와이스 칸 | ||
6 | 두와 | 13 | 유누스 칸 | ||
7 | 에센 부카 1세 | 14 | 아흐마드 알락 |
참조
[1]
서적
Marriage as Political Strategy and Cultural Expression: Mongolian Royal Marriages from World Empire to Yuan Dynasty
2001
[2]
서적
Tataro-Mongols in Asia and Europe
Printing House "Science" of Main Redaction of Eastern Literature
1977
[3]
간행물
Yuan Shi
[4]
서적
Tataro-Mongols in Asia and Europe
Printing House "Science" of Main Redaction of Eastern Literature
1977
[5]
간행물
Yuan Shi
[6]
서적
The Babur Nama in English
[7]
서적
The Tarikh-i-Rashidi: a history of the Moghuls of central Asia
S. Low, Marston and co.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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