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컨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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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컨 화이트는 19세기 프로 야구 선수로, 2013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1868년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에서 타율, 안타, 타점 등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화이트는 두 번의 타율 1위, 세 번의 타점 1위를 기록했으며, 당대 최고의 포수이자 3루수로 평가받았다. 선수 권익 보호에도 힘썼으며, 1939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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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컨 화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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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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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디컨 화이트 |
본명 | 제임스 로리 "디컨" 화이트 |
원어 이름 | James Laurie "Deacon" White |
출생일 | 1847년 12월 2일 |
출생지 | 미국 뉴욕주케톤 |
사망일 | 1939년 7월 7일(향년 91세) |
사망지 | 미국 일리노이주세인트 찰스 타운십 |
포지션 | 3루수/포수 |
타석 | 좌타 |
송구 | 우투 |
선수 경력 | |
프로 데뷔 (MLB) | 1871년 5월 4일,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 |
마지막 경기 (MLB) | 1890년 10월 4일, 버펄로 바이슨스 |
선수 경력 (팀) |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 (1868–1870)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 (1871–1872)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 (1873–1875)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 (1876)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 (1877) 신시내티 레즈 (1878–1879) 신시내티 스타스 (1880) 버펄로 바이슨스 (1881–1885) 디트로이트 울버린스 (1886–1888) 피츠버그 파이리츠 (1889) 버펄로 바이슨스 (1890) |
감독 경력 | |
감독 경력 (팀) | 포레스트 시티 오브 클리블랜드 (1872) 신시내티 레즈 (1879) |
기록 | |
타율 | .312 |
안타 | 2,067 |
타점 | 988 |
수상 | |
내셔널 리그 타격 챔피언 | 1877년 |
내셔널 리그 타점 리더 | 1876년, 1877년 |
명예의 전당 | |
헌액 | 2013년 |
헌액 방식 | 프리-인테그레이션 시대 위원회 |
득표율 | 87.5% |
참고 | 핸크 오데이, 제이콥 루퍼트, 디컨 화이트, 프리-인테그레이션 위원회에 의해 국가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출됨 |
2. 초기 생애
화이트는 뉴욕주 케톤에서 농부 레스터 S. 화이트(1820년경 출생)와 그의 아내 아델라인(1823년경 출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부는 최소 8명의 자녀를 두었다.[2][3]
이름 | 출생 연도 | 비고 |
---|---|---|
오스카 레로이[4] | 1844년경 | |
제임스 | ||
엘머 멜빌 | 1851년경 | |
윌리엄 | 1854년–1911년 | |
피비 데이비스[5] | 1856년경 | |
에스텔 | 1858년경 | |
조지 | 1862년경 – 1939년 이후[6] | |
해티 | 1867년경 |
그들은 또한 50대에 피비 메이너드(1876년경 출생)라는 소녀를 입양했다.[7] 화이트의 조상들은 아마도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8] 그의 사촌 엘머 화이트는 1871년 제임스의 팀 동료로 프로 야구를 했으며, 1872년 3월에는 사망한 최초의 프로 야구 선수로 기록되었다.[9]
3. 야구 경력
디컨 화이트는 미국 남북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북군 병사에게 야구를 배웠다.[10] 그의 프로 경력은 1868년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완전히 프로 선수로만 구성된 팀은 없었다. 그는 야구 역사상 최초의 프로 리그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이 출범한 1871년 리그 첫 경기에서 역사적인 첫 안타(2루타)와 첫 포구를 기록했다.
화이트는 20년에 걸친 선수 생활 동안 19세기 프로 야구의 여러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내셔널 어소시에이션 시절 강팀이었던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내셔널 리그에서는 캡 앤슨, 알 스폴딩과 함께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에서, 킹 켈리와 함께 신시내티 레즈에서, 댄 브라우더스와 함께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네드 핸런, 샘 톰슨과 함께 디트로이트 울버린스에서, 그리고 제이크 베클리, 퍼드 갈빈과 함께 피츠버그 앨러게니스 등 여러 팀을 거쳤다.
화이트는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을 갖춘 선수로, 선수 생활 동안 두 차례 리그 타율 1위, 세 차례 리그 타점 1위를 차지했다. 특히 포수로서 타점왕에 오른 것은 오랫동안 희귀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당대 최고의 맨손 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선수 생활 후반에는 뛰어난 3루수로도 인정받았다. 거칠었던 19세기 야구 분위기와 달리, 화이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성경을 들고 다니는 독실한 신자이자 교회 집사였다.
선수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던 시절, 화이트는 1885년 오프 시즌 버펄로 바이슨스가 해체될 때 7000USD의 대가로 디트로이트 울버린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후 1888년 시즌 후 디트로이트 구단이 연봉 상승 등을 이유로 그의 소유권을 일방적으로 피츠버그 앨러게니스에 매각하자, 팀 동료 잭 로와 함께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구단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아무도 내 몸을 팔지 못할 것"이라며 선수 소유권 문제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는데, 이러한 선수들의 불만은 1890년 선수 연맹 결성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화이트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 리 앨런에 따르면, 그는 팀 동료들에게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려 했으나 대부분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화이트는 1890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년간의 프로 경력 동안 통산 .312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캡 앤슨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988타점을 올렸다. 또한 통산 경기 출장, 타수, 안타, 총 루타 등 여러 부문에서 상위권 기록을 남기며 은퇴했다.
은퇴 후 1891년에는 뉴욕-펜실베이니아 리그의 마이너 리그 팀 엘미라 글래디에이터스의 감독을 잠시 맡았다. 오랫동안 잊혔던 그의 업적은 200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 후보에 오르면서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2013년 베테랑 위원회의 선정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1. 내셔널 어소시에이션 시절 (1871-1875)
화이트는 1868년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 클럽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프로 선수로만 구성된 팀은 없었다. 1871년 야구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프로 리그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이 창설되자,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 소속으로 리그에 참가했다. 그는 1871년 5월 4일, 내셔널 어소시에이션 역사상 첫 경기 첫 이닝에서 보비 매튜스를 상대로 리그 첫 안타인 2루타를 기록했으며, 첫 포구 기록도 세웠다.[10] 화이트는 1871년과 1872년 클리블랜드 소속으로 각각 .322와 .339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지만, 팀은 하위권 성적을 면치 못했고 결국 2년 만에 리그를 탈퇴하며 해체되었다.
1873년에는 해리 라이트의 권유로 당시 강팀이었던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이적했다. 이적 첫 해인 1873년에 리그 최다인 77타점과 .392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1875년에는 리그 최고 타율인 .367을 기록하며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가 리그 4연패(1872-1875)를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3. 2. 내셔널 리그 시절 (1876-1890)
1876년 내셔널 리그가 창설되자, 화이트는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로 이적하여 앨버트 스폴딩, 캡 앤슨, 로스 번스 등과 함께 팀의 리그 초대 우승에 기여했다. 이 해 화이트는 리그 최다인 60타점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초대 "타점왕"이 되었다.[23]
1877년에는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로 복귀하여, 그해 타율(.387), 안타 수(103), 타점(49), 3루타 수(11) 등 4개 부문에서 리그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신시내티 레즈에서 3년(1878-1880),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5년(1881-1885)간 활동했다. 버펄로 소속이던 1884년 5월 16일 경기에서는 3루수로서 한 경기 1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9이닝 경기 메이저 리그 기록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이후 8명의 다른 선수가 이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1885년 오프 시즌에 버펄로 바이슨스가 해체되자, 7000USD의 대가로 댄 브라우더스 등 4명의 선수(당시 "빅 4"로 불림)와 함께 디트로이트 울버린스로 이적했다.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이룬 울버린스는 1887년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1888년 시즌 후, 구단은 연봉 상승 등을 이유로 화이트를 포함한 주축 선수들의 소유권을 일방적으로 피츠버그 앨러게니스에 매각했다.
화이트는 팀 동료 잭 로와 함께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했고, 피츠버그 합류를 거부하며 구단과 장기간 분쟁을 벌였다. 결국 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화이트는 기자에게 "우리는 돈에 감사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로의 팔은 망가졌어요. 저는 40세가 넘었고, 제 수비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아직 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 말은 하겠습니다. 아무도 제 몸을 팔지 못할 거예요. 내가 반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말하며 선수 권리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러한 선수들의 불만은 1890년 선수 연맹이 결성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1889년에는 피츠버그 앨러게니스에서 뛰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42세의 나이로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플레이어스 리그의 버펄로 바이슨스에 참가하여 122경기에 출전했다. 이 해를 마지막으로 화이트는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3. 선수 겸 감독 경력
디컨 화이트는 선수 생활 중 두 차례에 걸쳐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1872년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 소속으로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에서 2경기를, 1879년 신시내티 레즈 소속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18경기를 선수 겸 감독으로 치렀다.
아래는 선수 겸 감독 시절의 상세 기록이다.
※순위는 해당 연도의 최종 순위
연도 | 팀 | 리그 | 경기 | 승리 | 패배 | 승률 | 순위 | 비고 |
---|---|---|---|---|---|---|---|---|
1872년 | CFC | NA | 2 | 0 | 2 | .000 | 7위 | 8월 17일 ~, 선수 겸임 |
1879년 | CIN | NL | 18 | 9 | 9 | .500 | 5위 | 개막 ~ 6월 7일, 선수 겸임 |
통산 | 20 | 9 | 11 | .450 |
4. 선수로서의 특징
화이트는 당대 최고의 맨손 포수로 여겨졌으며, 선수 경력 후반에는 최고의 3루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10] 그는 1881년 팝 스나이더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전미 프로 야구 선수 협회(NA)와 내셔널 리그(NL)를 합쳐 포수로서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였다. 1884년 5월 16일에는 3루수로서 한 경기에서 1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9이닝 경기 메이저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이후 8명의 다른 선수들이 이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타격 능력 또한 뛰어나 두 번이나 리그 타율 1위(1875년 NA, 1877년 NL)를 차지했고, 세 번이나 리그 타점 1위(1873년 NA, 1876년 NL, 1877년 NL)에 올랐다.[23] 특히 포수가 타점 리그 1위를 차지한 것은 1953년 로이 캄파넬라가 내셔널 리그에서 1위를 하기 전까지 화이트가 유일한 사례였다. 통산 타율 .312를 기록했으며, 통산 988타점은 당시 캡 앤슨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19세기 야구의 거칠고 난폭했던 시대적 분위기와는 달리, 화이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항상 성경을 들고 다니며 교회에 출석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항상 절도 있는 태도를 유지했으며, 길쭉한 얼굴과 "바다코끼리 같은" 콧수염 때문에 프로 야구 선수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역사학자 리 앨런에 따르면 화이트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으며, 팀 동료들에게 이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화이트는 선수들의 권익에도 목소리를 냈다. 1889년, 자신과 팀 동료 잭 로의 계약이 피츠버그 앨러게니스에 팔리자 추가적인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며 장기간 분쟁을 벌였다. 그는 "우리는 돈에 감사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로의 팔은 망가졌어요. 저는 40세가 넘었고, 제 수비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아직 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 말은 하겠습니다. 아무도 제 몸을 팔지 못할 거예요. 내가 반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말하며 선수 계약의 부당함에 항의했다. 이러한 선수들의 불만은 1890년 선수 연맹 결성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화이트는 존 몽고메리 워드가 주도한 선수 조합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오랜 선수 생활 동안 많은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뛰었으며, 동료 선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2013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의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선수 권익 보호 활동
1888년, 디트로이트 울버린스 구단은 연봉 상승 등을 이유로 화이트를 포함한 선수들의 소유권을 일방적으로 피츠버그 앨러게니에 매각했다. 화이트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법정 다툼까지 벌였지만, 결국 1889년 피츠버그에서의 플레이를 강요받게 되었다.
1889년 시즌을 앞두고, 화이트와 팀 동료 잭 로는 구단이 자신들의 계약을 매각하면서 추가적인 보상을 지급하지 않자 복귀를 거부하며 장기간 분쟁을 벌였다. 결국 두 사람은 보상금을 받았지만, 화이트는 기자에게 "우리는 돈에 감사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로의 팔은 망가졌어요. 저는 40세가 넘었고, 제 수비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아직 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 말은 하겠습니다. 아무도 제 몸을 팔지 못할 거예요. 내가 반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말하며 구단의 일방적인 선수 거래를 비판했다.
이러한 선수들의 불만은 1890년 선수 연맹이 결성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화이트는 연봉과 이적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당시 야구 선수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며, 1880년대 존 몽고메리 워드가 주도한 야구 선수 조합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며 선수 권익 보호에 힘썼다.
6. 은퇴 이후
선수 생활 대부분 동안 코닝에 있는 농장에서 살았던 화이트는 1881년 바이슨스에 입단하면서 버팔로로 이주했다.[12] 은퇴 후에는 버팔로에서 성공적인 마차 회사를 운영했다.[13]
1900년 이후, 외동딸 그레이스를 멘도타에 있는 멘도타 칼리지에 보내면서[14] 재림 기독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아내 메리엄과 함께 멘도타로 이주하여 대학 기숙사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다.[14] 아내 메리엄이 1914년 사망한 후[11] 재혼했으며, 말년에는 딸 부부가 있는 오로라로 이주하여 대학 공동체와 가까이 지냈다.[16]
화이트는 1939년 7월 7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그는 그해 여름 야구 명예의 전당 개막식에 초대받지 못하고 헌액자 투표에서도 외면당한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0]
6. 1. 가족 관계
화이트는 뉴욕주 케톤에서 농부 레스터 S. 화이트(1820년경 출생)와 그의 아내 아델라인(1823년경 출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적어도 8명의 자녀를 두었다.[2][3] 화이트의 조상들은 미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것이다.[8] 그의 사촌 엘머 화이트도 1871년 제임스의 팀 동료로 프로 야구를 했으며, 1872년 3월 엘머는 사망한 최초의 프로 야구 선수로 기록되었다.[9]이름 | 출생 연도 | 비고 |
---|---|---|
오스카 레로이 | 1844년경 | [4] |
제임스 | ||
엘머 멜빌 | 1851년경 | |
윌리엄 | 1854–1911 | 프로 야구 선수 |
피비 데이비스 | 1856년경 | [5] |
에스텔 | 1858년경 | |
조지 | 1862년경 – 1939년 이후 | [6] |
해티 | 1867년경 | |
피비 메이너드 | 1876년경 | 입양[7] |
화이트는 1871년 4월 24일 뉴욕주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메리엄 반 아스데일(1851년생)과 결혼했다.[11] 그는 선수 생활 대부분을 코닝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살았고, 1881년 바이슨스에 입단한 후 뉴욕주 버팔로로 이사했다. 그들의 외동딸 그레이스 휴슨 화이트는 1882년 9월 8일 버팔로에서 태어났다.[12] 화이트가 울버린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족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이사했지만 곧 버팔로로 돌아왔다. 1900년까지 그는 그곳에서 성공적인 마차 회사를 운영했다.[13]
1900년 이후, 화이트 부부는 딸 그레이스를 멘도타 칼리지 (일리노이주 멘도타)에 보냈고, 이로써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재림 기독교 학교와의 가족 관계가 시작되었다. 1909년까지 제임스와 메리엄은 멘도타로 이사했고, 1912년까지 여학생 기숙사인 메이플 홀의 관리인이 되었다. 1912년 8월 15일, 그레이스는 같은 멘도타 졸업생 로저 A. 왓킨스와 기숙사에서 결혼했다.[14] 그해, 대학은 동쪽으로 약 80.47km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오로라 칼리지가 되었다. 메리엄은 1914년 4월 30일 멘도타에서 사망했다.[11] 로저와 그레이스 왓킨스는 계속해서 대학과 관계를 맺었고 1920년 오로라로 이사했다. 1927년 로저는 대학 이사회에 합류하여 1971년까지 봉사했으며, 처음 2년을 제외하고는 이사회의 서기를 맡았다.[15] 1930년까지 디컨 화이트는 재혼하여 아내 앨리스와 함께 대학 총장 옆집인 221 칼루멧 애비뉴에 있는 왓킨스 자택으로 이사했다.[16]
화이트는 1939년 7월 7일 사망했으며, 그의 두 번째 아내 앨리스(사망 당시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에 머물고 있었음), 그의 남동생 조지, 그리고 그의 딸 그레이스(1882–1956[12])와 그녀의 남편 로저(1888–1977[18])가 유족으로 남았다.[10]
6. 2. 재림 기독교회와의 관계
1900년 이후, 화이트 부부는 외동딸 그레이스 휴슨 화이트(1882년생[12])를 일리노이주 멘도타에 있는 멘도타 칼리지에 보냈다. 이를 계기로 화이트 가족과 재림 기독교 학교 간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14] 1909년 무렵, 디컨 화이트와 아내 메리엄은 멘도타로 이사했으며, 1912년까지 대학의 여학생 기숙사인 메이플 홀의 관리인으로 일했다.[14]1912년 8월 15일, 딸 그레이스는 같은 대학 졸업생인 로저 A. 왓킨스와 메이플 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4] 같은 해 대학은 동쪽으로 약 약 80.47km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오로라 칼리지가 되었다.[14] 아내 메리엄은 1914년 4월 30일 멘도타에서 세상을 떠났다.[11] 당시 오로라 칼리지의 한 학생은 메리엄을 "엄마 화이트"라고 부르며, 그녀가 "쾌활한 성격으로 모든 이에게 다정했으며, 학생들을 자신의 딸처럼 여기며 친절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11]
사위 로저 왓킨스와 딸 그레이스는 오로라 칼리지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갔고, 1920년 오로라로 이사했다. 로저 왓킨스는 1927년부터 1971년까지 대학 이사회에서 활동했으며, 초기 2년을 제외하고는 이사회 서기를 맡았다.[15] 1930년 무렵, 디컨 화이트는 재혼한 아내 앨리스와 함께 오로라에 있는 딸 부부의 집(221 칼루멧 애비뉴)으로 이사하여 대학 총장 옆집에 살게 되었다.[16] 그는 말년까지 재림 기독교 공동체 및 오로라 칼리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6. 3. 사망
화이트는 1939년 7월 7일 이른 아침, 91세의 나이로 세인트찰스 타운십에 있는 폭스강의 대학 휴양지인 루드 캠프에 있는 왓킨스의 별장에서 사망했다.[10] 건강 상태는 양호했으나, 당시의 재앙적인 폭염이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었다.[10]그는 사망 다음 날 오로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야구 100주년 기념식의 주요 손님이었으나, 이 축제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행사로 변경되었다.[17] 화이트는 그해 여름 야구 명예의 전당 개막식에 초대받지 못하고 헌액자 투표에서도 완전히 무시당한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10] 그의 장례식은 오로라의 힐리 채플에서 열렸으며, 멘도타의 레스트랜드 묘지에 안장되었다.[10]
그의 사망 당시 유족으로는 두 번째 아내 앨리스(당시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에 머물고 있었음), 남동생 조지, 그리고 딸 그레이스(1882–1956[12])와 그녀의 남편 로저(1888–1977[18])가 있었다.
7. 명예의 전당 헌액
화이트의 활약은 오랫동안 야구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2008년 8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원로 위원회는 그를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그는 1943년 이전에 선수 경력을 시작한 10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을 위한 투표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선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만, 1940년 이전에 선수 생활을 마친 후보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2010년에는 미국 야구 연구 협회의 19세기 위원회가 화이트를 그 해의 '간과된 19세기 야구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는 아직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19세기 선수, 감독, 임원 등 야구계 인물을 재조명하는 의미를 가졌다.
이후 2012년 12월 3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새로운 프리 통합 시대 위원회(1947년 이전 시대 담당)가 화이트를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는 위원회 투표에서 총 16표 중 14표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마침내 화이트는 위원회에서 함께 선출된 다른 두 명과 함께 2013년 7월 28일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공식적으로 헌액되었다. 헌액식에서는 그의 증손자인 제리 왓킨스가 고인을 대신하여 수락 연설을 진행했다. 화이트는 출생(1847년)부터 헌액(2013년)까지 16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사망한 지 거의 75년 만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이 지나 헌액된 인물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8. 특기 사항
화이트는 독실한 신자로 알려져 있으며, 항상 성경을 가지고 다니고 교회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베이스볼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그는 길쭉한 얼굴에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바다코끼리 같은" 콧수염을 길러 프로 야구 선수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항상 절도 있는 태도를 유지했고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당시 선수들에게는 연봉 협상이나 이적의 자유가 거의 없었는데, 화이트는 이러한 선수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1880년대에는 존 몽고메리 워드가 주도한 야구 선수 조합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당대의 유명 선수들과 함께 뛰었으며, 오랜 현역 생활 덕분에 많은 동료 선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한편, 작가 리 앨런의 저서 ''The National League Story''(1961)에 따르면, 화이트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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