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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케이 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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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란케이 도류는 중국 남송 시대의 선승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임제종을 널리 퍼뜨린 인물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선종 승려에게서 배우고, 1246년 일본 센류지 승려와의 인연으로 일본에 건너가 엔가쿠지, 센류지 등에서 머물며 송나라풍의 임제종을 전파했다. 호조 도키요리의 귀의를 받아 가마쿠라에 겐초지를 창건하고 개산조가 되었으며, 몽골의 침략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겐초지로 돌아와 입적했다. 그는 선종의 전파와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다도 발전에도 기여했다.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 조각, 묵적 등 다양한 미술 작품이 존재하며, 특히 겐초지 소장의 법어와 규칙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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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케이 도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란시 다오룽 초상화
이름란시 다오룽
일본어 이름란케이 도류 (蘭渓道隆)
출생1213년경
출생지쓰촨성
사망1278년경
국적중국
승려 정보
법명란케이 도류 (蘭渓道隆)
시호대각선사 (大覚禅師)
출생년도가정(嘉定) 6년 (1213년)
몰년고안(弘安) 원년 7월 24일 (양력 1278년 8월 13일)
입적지가마쿠라 겐초지 (鎌倉建長寺)
종파임제종(臨済宗) 대각파
스승무준사범
북간거간
무명혜성
제자남포소명
저작없음
사찰엔가쿠지
센뉴지 라이코인
주후쿠지
겐초지
슈젠지
젠코지
도코지

2. 생애

란케이 도류는 남송 배주(지금의 충칭 근교)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하여 무준사범과 북간거간에게서 선종을 배우고, 송원숭악의 법사가 되어 무명혜성의 법을 이었다.

1246년, 33세 때 센류지의 승려 게쓰오 지쿄와의 인연으로 제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쿠젠 엔가쿠지, 교토 센유지의 라이고인, 가마쿠라 주후쿠지 등에서 머물렀으며, 송나라풍의 본격적인 임제종을 널리 퍼뜨렸다. 또한 호조 도키요리의 귀의를 받아 가마쿠라에 초빙되었고, 다이코 교류가 연 조라쿠지의 주지가 되었다.[27]

1253년 호조 도키요리에 의해 가마쿠라에 겐초지가 창건되자 초빙되어 개산(開山)이 되었다. 겐초지는 순수한 선종 도량으로는 에이사이가 창건한 지쿠젠 국의 쇼후쿠지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창건 당시의 겐초지는 법회에서 중국어가 오가는 이국적인 공간이었다.[27] 당시 겐초지의 주지는 대부분 중국인이었으며, 무가쿠 소겐을 시작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온 선승들은 우선 겐초지에 들어가 주지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29]

란케이 도류가 주지를 맡았던 가마쿠라 겐초지.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란케이 도류는 훗날 교토 겐닌지, 주후쿠지, 가마쿠라의 젠코지 등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1274년 제1차 일본 원정(분에이의 역)을 전후해 원나라의 첩자로 의심받아 참언으로 고슈(甲州)나 오슈의 마쓰시마(松島), 이즈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때 자신이 몸을 피해 있던 슈젠지를 임제종 사찰로 개종시켰으며, 유배지에 있던 도코지 등을 재흥시키기도 하였다.

훗날 겐초지로 돌아온 란케이 도류는 그곳에서 1278년 입적하였다. 제1차 일본 원정이 있은 지 4년 만이었으며,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이 벌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란케이 도류의 후계로써 무가쿠 소겐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2. 1. 중국에서의 초기 생애

란케이 도류는 중국 남송 배주(涪州, 지금의 충칭 근교) 사람으로 13세에 출가하여 무준사범과 북간거간에게서 선종을 배우고, 송원숭악의 법사가 되어 무명혜성의 법을 이었다. 1226년 청두의 다츠사(大慈寺, :zh:大慈寺)로 가서 1227년에 삭발하고 다양한 형태의 선(禪) 수행에 참여했다. 이후 저장성으로 가서 만서우사(万寿寺)[4]에서 오준사범에게 선을 배우고, 지각 도충, 배견 쥐젠 등의 제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끈기 있게 좌선을 수행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후난, 후베이, 장시를 여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양산(장쑤성 우시)에 정착하여 취웨이사(翠微寺)에서 렌주에(과거 무명 훼이싱, 1160–1237)에게 선을 배웠다.

2. 2. 일본으로 건너오다

1246년 남송에 와 있던 일본 센류지의 승려 게쓰오 지쿄(月翁智鏡)와의 인연으로 제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에서 지쿠젠(筑前) 엔가쿠지(円覚寺) ・ 교토(京都) 센류지의 내영원(来迎院) ・ 가마쿠라(鎌倉) 슈후쿠지(寿福寺) 등에서 머물렀으며, 송나라풍의 본격적인 임제종(臨済宗)을 널리 퍼뜨렸다. 또한 싯켄(執権)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의 귀의를 받아 가마쿠라로 초빙되었고, 다이코 교류(退耕行勇)가 연 쇼라쿠지(常楽寺,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주지가 되었다.[27]

겐초(建長) 5년(1253년) 호조 도키요리에 의해 가마쿠라에 새로이 겐초지가 세워지고, 란케이 도류는 그곳으로 초빙되어 그 개산조가 되었다. 겐초지는 순수한 선종 도량(道場)으로써는 에이사이(栄西)가 연 지쿠젠 국의 세이후쿠지(聖福寺)[28] 다음으로 오래된 곳이다. 창건 당초의 겐초지는 법회에서 중국어가 오가는 이국적인 공간이었다.[27] 당시 겐초지의 주지는 거의가 중국인이었으며, 무가쿠 소겐(無学祖元)을 비롯해,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온 남송의 선승들은 우선 겐초지로 들어가 그 주지가 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29] 『사석집(沙石集)』을 저술한 일본의 승려 무슈(無住)는 『잡담집』(雑談集)에서 겐초지를 두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는 감상을 기록하였다.[29]

2. 3. 겐초지 창건과 활동

1246년 33세 때, 송나라에 와 있던 일본 센류지의 승려 게쓰오 지쿄(月翁智鏡)와의 인연으로 제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에서 지쿠젠(筑前) 엔가쿠지(円覚寺) ・ 교토(京都) 센류지의 내영원(来迎院) ・ 가마쿠라(鎌倉) 슈후쿠지(寿福寺) 등에서 머물렀으며, 송나라풍의 본격적인 임제종(臨済宗)을 널리 퍼뜨렸다. 또한 싯켄(執権)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의 귀의를 받아 가마쿠라로 초빙되었고, 다이코 교류(退耕行勇)가 연 쇼라쿠지(常楽寺)(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주지가 되었다.[27]

1253년 호조 도키요리에 의해 가마쿠라에 새로이 겐초지가 세워지고, 란케이 도류는 그곳으로 초빙되어 그 개산조가 되었다. 겐초지는 순수한 선종 도량(道場)으로써는 에이사이(栄西)가 연 지쿠젠 국의 세이후쿠지(聖福寺)[28] 다음으로 오래된 곳이다. 창건 당초의 겐초지는 법회에서 중국어가 오가는 이국적인 공간이었다.[27] 당시 겐초지의 주지는 거의가 중국인이었으며, 무가쿠 소겐(無学祖元)을 비롯해,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온 남송의 선승들은 우선 겐초지로 들어가 그 주지가 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29] 『사석집(沙石集)』을 저술한 일본의 승려 무슈(無住)는 『잡담집』(雑談集)에서 겐초지를 두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는 감상을 기록하였다.[29]

2. 4. 유배와 복귀

1246년 33세 때, 센류지의 승려 게쓰오 지쿄와의 인연으로 제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지쿠젠 엔가쿠지 ・ 교토 센류지의 내영원(来迎院) ・ 가마쿠라 슈후쿠지 등에서 머물렀으며, 송나라풍의 본격적인 임제종을 널리 퍼뜨렸다. 또한 싯켄(執権) 호조 도키요리의 귀의를 받아 가마쿠라로 초빙되었고, 다이코 교류가 연 쇼라쿠지(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주지가 되었다.[27]

1253년 호조 도키요리에 의해 가마쿠라에 새로이 겐초지가 세워지고, 란케이 도류는 그곳으로 초빙되어 그 개산조가 되었다. 겐초지는 순수한 선종 도량(道場)으로써는 에이사이가 연 지쿠젠 국의 세이후쿠지[28] 다음으로 오래된 곳이다. 또한 창건 당초의 겐초지는 법회에서 중국어가 오가는 이국적인 공간이었다.[27] 당시 겐초지의 주지는 거의가 중국인이었으며, 무가쿠 소겐을 비롯해,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온 남송의 선승들은 우선 겐초지로 들어가 그 주지가 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29] 『사석집』을 저술한 일본의 승려 무주는 『잡담집』에서 겐초지를 두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는 감상을 기록하였다.[29]

란케이 도류는 훗날 교토 겐린지 ・ 슈후쿠지, 가마쿠라의 센코지 등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1274년 제1차 일본 원정(분에이의 역)이 벌어지고, 이를 전후해 원의 첩자로 의심받게 되어 참언으로 고슈(甲州)나 오슈(奥州)의 마쓰시마(松島), 이즈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때 자신이 몸을 피해 있던 슈젠지를 임제종 사찰로 개종시켰으며, 유배지에 있던 도코지 등을 재흥시키기도 하였다.

훗날 겐초지로 돌아온 란케이 도류는 그곳에서 1278년 입적하였다. 제1차 일본 원정이 있은지 4년 만이었으며,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이 벌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란케이 도류의 후계로써 무가쿠 소겐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3. 사상과 영향

란케이 도류는 일본에서 30년 이상 생활하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송나라의 순수 선불교를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하였고, 에도 시대 신유학과 철학, 문학, 예술, 건축 미학, 일상 풍습 등 송나라 특유의 문화를 일본에 들여와 일본 문화와 융합하여 일본 선불교 형성을 가속화했다.[1] 가마쿠라 막부를 비롯한 일본 통치자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선불교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고, 선불교가 여러 일본 불교 종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1] 선불교는 무사도 형성과 일본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

란케이 도류는 일본에서 시를 썼는데, 사천성에서 잡극을 보던 장면을 회상하며 선불교에 대한 통찰력을 표현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일본 드라마가 송나라 잡극의 영향을 받았다는 중요한 단서로 여기며, 그를 중일 드라마 문화 교류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한다.[11]

란케이 도류는 중국 문학과 일본 문학을 소통하기 위해 세 가지 방식을 사용했다.

첫째, 선(禪)을 설법할 때, 당시송시의 참고 문헌과 문학적 고사를 인용했다. 예를 들어 "흰 구름이 산봉우리 끝에 있지만, 행인은 산봉우리 밖에 있다"(白云尽处是青山, 行人更在青山外).[12], "배에 새겨 칼을 찾다"(刻舟求剑), "그림의 떡"(画饼充饥) 등이 있다.

둘째, 선에 관한 시와 자신의 감정을 썼다. 이 시들은 오산 문학(:ja:五山文学)에 큰 영향을 미쳤다.

셋째, 란케이 도류의 제자들이 편집한 《란케이 도류 어록》은 일본 선 어록의 문학 장르를 풍부하게 하고 개선했으며, 일본 선 어록 성숙의 징표 중 하나로 여겨졌다.

란케이 도류는 장쑤성, 저장성, 쓰촨성 등지의 불교 사찰에 거주했는데, 이 지역들은 차를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고 주요 차 생산지였다. 란케이 도류는 차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어록에는 "차를 마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단어와 구절이 등장한다. 란케이 도류는 제자들에게 남송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차를 마시는 규율을 엄격히 따르도록 요구했고, 일본 다도의 형성 및 확산에 기여했다.

3. 1. 선종의 전파와 발전

란케이 도류는 30년 이상 일본에서 생활하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송나라의 순수 선불교를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1] 란케이 도류는 에도 시대 신유학과 철학, 문학, 예술, 건축 미학, 일상 풍습 등 송나라 특유의 문화를 일본에 들여와 일본 문화와 융합하여 일본 선불교의 형성을 가속화했다.[1] 또한, 란케이 도류는 가마쿠라 막부를 비롯한 일본 통치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아 일본 선불교의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고, 다양한 일본 불교 종파에서 선불교가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1] 더 나아가 선불교는 무사도 형성과 일본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

3. 2. 문화 교류

란케이 도류는 30년 이상 일본에서 생활하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송나라의 순수 선불교를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또한 란케이 도류는 에도 시대 신유학과 철학, 문학, 예술, 건축 미학, 일상 풍습 등 송나라 특유의 문화를 일본에 들여왔다. 이를 일본 문화와 융합하여 일본 선불교의 형성을 가속화했다. 게다가 란케이 도류는 일본 통치자, 특히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아 일본 선불교의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고, 다양한 일본 불교 종파에서 선불교가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더 나아가 선불교는 무사도 형성 및 일본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1]

그가 일본 드라마에 미친 영향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하지만 란케이 도류는 일본에서 시를 썼다. 이 시에서 그는 사천성에서 잡극을 보던 장면을 회상하며 선불교에 대한 통찰력을 표현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통해 일본 드라마가 송나라의 잡극의 영향을 받았다는 중요한 단서로 여긴다. 따라서 그는 중일 드라마 문화 교류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1]

란케이 도류는 중국 문학과 일본 문학을 소통하기 위해 주로 세 가지 방식을 사용했다.

첫째, 란케이 도류는 선(禪)을 설법할 때, 당시송시의 많은 참고 문헌과 문학적 고사를 인용했다. 예를 들어 "흰 구름이 산봉우리 끝에 있지만, 행인은 산봉우리 밖에 있다"(白云尽处是青山, 行人更在青山外).[12], "배에 새겨 칼을 찾다"(刻舟求剑), "그림의 떡"(画饼充饥) 등이 있다.

둘째, 도류는 종종 선에 관한 시와 자신의 감정을 썼다. 이 시들은 우아함과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오산 문학(:ja:五山文学)에 큰 영향을 미쳤다.

셋째, 란케이 도류의 제자들이 편집한 《란케이 도류 어록》은 내용, 형식, 그리고 광범위한 전파력으로 일본 선 어록의 문학 장르를 풍부하게 하고 개선했다. 이는 일본 선 어록의 성숙을 보여주는 징표 중 하나로 여겨졌다.

3. 3. 다도(茶道) 발전

란케이 도류는 장쑤성, 저장성, 쓰촨성 등지의 불교 사찰에 거주하였는데, 이 지역들은 차를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고 주요 차 생산지였다. 따라서 란케이 도류는 차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록에는 "차를 마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단어와 구절이 등장한다. 란케이 도류는 제자들에게 남송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차를 마시는 규율을 엄격히 따르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란케이 도류는 일본 다도의 형성 및 확산에 기여했다.

4. 평가

(내용 없음)

5. 란케이 도류를 표현한 미술 작품

란케이 도류를 표현한 미술 작품으로는 초상화와 조각이 전해진다. 하위 섹션에서 '''정상(頂相)''', '''조각''', '''기타 작품'''에 대해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란케이 도류의 미술 작품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만 소개한다.

일본에서는 고승의 초상화를 정상(頂相)이라고 부르며, 란케이 도류의 정상은 여러 점이 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겐초지에 소장된 「란케이 도류 상」(1271년)은 호조 도키무네가 낭연거사라는 이름으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눈동자 주위에 금니를 사용한 독특한 기법이 특징이다.[30] 겐초지에는 이 외에도 「란케이 도류 경행도」[31]1329년에 제작된 「란케이 도류 상」[33] 등 다양한 란케이 도류 관련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조각 작품으로는 겐초지 서래암 개산당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하고 옥으로 눈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며, 란케이 도류 입적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34] 이 외에도 1676년에 제작된 겐린지 서래원의 「란케이 도류 좌상」[35], 가마쿠라 조라쿠지의 「란케이 도류 상」, 나가노현 사이안지의 「대각선사기상」 등이 있다.

초상화로는 서래원, 쇼후쿠지, 에이겐지, 즈이간지, 슈젠지 등 여러 사찰에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다.[36]

5. 1. 정상(頂相)

일본에서는 고승의 초상화를 가리켜 정상(頂相)이라고 부른다.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는 당시 사료를 통해 많은 수가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겐초지에 소장된 「란케이 도류 상」(蘭渓道隆像)에는 상단에 란케이 도류 자신의 찬(賛)이 적혀 있는데, 이 찬을 통해 분에이 8년(1271년) 낭연거사(朗然居士)라는 인물에 의해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30] 낭연거사는 란케이 도류에게 귀의한 호조 도키요리의 아들로, 훗날 가마쿠라 막부 8대 싯켄이 되는 호조 도키무네가 스스로 칭했던 거사명이다. 이 초상화에서는 눈동자 주위를 금니(金泥)로 테를 두르듯 그렸는데, 이는 다른 승려들의 정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법이다.

겐초지에는 일본 중요문화재인 「란케이 도류 경행도」(蘭渓道隆経行図)[31]와, 란케이 도류의 손제자인 다이코 겐쥬(太虚元寿)[32]1329년에 원나라 항저우의 선승 영석여지(霊石如芝)에게서 찬을 받은 동명의 「란케이 도류 상」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일본 중요문화재이자 견본채색이다.[33]

란케이 도류의 모습을 새긴 조각으로는 겐초지 서래암(西来庵) 개산당(開山堂)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이 대표작이다. 나무로 제작되어 옻칠을 하고 옥으로 눈을 표현한 이 작품은 13세기의 것으로 일본 중요문화재[34]로 지정되어 있으며, 란케이 도류의 입적 전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상의 옥으로 된 눈에서 눈동자는 수정을 박았으며, 눈동자를 중심으로 검은자위 주위에 방사선상으로 금니 선을 그었는데 이는 다른 작품에서는 사례가 없다. 겐초지에 소장된 란케이 도류 자신의 자찬을 첨부한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위엄 서린 란케이 도류의 눈빛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겐린지 서래원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은 에도 시대인 엔포(延宝) 4년(1676년) 불사(仏師) 고쇼(康乗)가 제작하였는데, 목상 가운데서는 오래된 두상에 속하며, 사실적인 얼굴 표현으로 란케이 도류 입적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35]

현존하는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로는 서래원(西来院) 소장 「대각선사상」(大覚禅師像), 후쿠오카현(福岡県) 쇼후쿠지(勝福寺) 소장 「대각선사상」(大覚禅師像, 일본 중요문화재), 사가현(滋賀県) 에이겐지(永源寺) 소장 「란케이 도류 상」이 있다. 이 가운데 에이겐지에 소장된 것은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란케이 도류와 야쿠오(約翁) ・ 쟈쿠시쓰(寂室) 두 선승까지 세 폭이 그려져 있다. 미야기현(宮城県) 사이안지(瑞巌寺)와 시즈오카현(静岡県)의 슈젠지 등에도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가 있다. 사이안지에 소장된 것도 에이겐지와 마찬가지로 란케이 도류, 性西法身, 明極聰愚 세 폭이 그려져 있으며, 미야기현 지정 문화재이다.[36] 조각으로는 가마쿠라 쇼라쿠지 소장 「란케이 도류 상」과 나가노현(長野県) 사이안지(西岸寺) 소장 「대각선사기상」(大覚禅師椅像, 가마쿠라 후기에서 난보쿠초 시대 사이) 등이 있다.

5. 2. 조각

일본에서는 고승의 초상화를 정상(頂相)이라고 부른다.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는 당시 사료를 통해 많은 수가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겐초지에 소장된 「란케이 도류 상」(1271년)에는 란케이 도류 자신의 찬(賛)이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낭연거사(朗然居士)라는 인물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30] 낭연거사는 란케이 도류에게 귀의한 호조 도키무네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이 초상화는 눈동자 주위를 금니(金泥)로 테를 두르듯 그렸는데, 이는 다른 승려들의 초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법이다.

겐초지에는 일본의 중요문화재인 「란케이 도류 경행도」[31]와 란케이 도류의 손제자인 다이코 겐쥬(太虚元寿)[32]1329년에 영석여지(霊石如芝)로부터 찬을 받은 「란케이 도류 상」이 있는데, 이 역시 일본의 중요문화재이자 견본채색이다.[33]

란케이 도류의 모습을 새긴 조각으로는 겐초지 서래암(西来庵) 개산당(開山堂)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이 대표작이다. 나무로 제작되어 옻칠을 하고 옥으로 눈을 표현한 이 작품은 13세기의 것으로, 일본의 중요문화재[34]로 지정되어 있으며, 란케이 도류의 입적 전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상의 옥으로 된 눈에서 눈동자는 수정을 박았으며, 눈동자를 중심으로 검은자위 주위에 방사선상으로 금니 선을 그었는데 이는 다른 작품에서는 사례가 없다. 겐초지에 소장된 란케이 도류 자신의 자찬을 첨부한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위엄 서린 란케이 도류의 눈빛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겐린지 서래원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은 1676년 불사(仏師) 고쇼(康乗)가 제작하였는데, 목상 가운데서는 오래된 두상에 들며, 이들은 사실적인 얼굴 표현으로 란케이 도류 입적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35]

현존하는 란케이 도류의 조각으로는 가마쿠라 쇼라쿠지 소장 「란케이 도류 상」과 나가노현 사이안지(西岸寺) 소장 「대각선사기상」(가마쿠라 후기에서 난보쿠초 시대 사이) 등이 있다.

5. 3. 기타 작품

일본에서 고승의 초상화를 정상(頂相)이라고 부른다.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는 많은 수가 제작되었음을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겐초사에 소장된 「란케이 도류 상」(蘭渓道隆像)은 1271년 낭연거사(朗然居士)라는 인물에 의해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30] 낭연거사는 란케이 도류에 귀의한 호조 도키요리의 아들로 훗날 가마쿠라 막부 8대 싯켄이 되는 호조 도키무네가 스스로 칭했던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초상화는 눈동자 주위를 금니(金泥)로 테를 두르듯 그려넣었는데, 이는 다른 승려들의 초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법이다.

겐초지에는 일본의 중요문화재인 「란케이 도류 경행도」(蘭渓道隆経行図)[31]와 란케이 도류의 손제자인 다이코 겐쥬(太虚元寿)[32]1329년에 원나라 항저우의 선승 영석여지(霊石如芝)로부터 찬을 받은 동명의 「란케이 도류 상」이 있다.[33]

란케이 도류의 모습을 새긴 조각으로는 겐초지 서래암(西来庵) 개산당(開山堂)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이 대표작으로, 나무로 제작되어 옻칠을 하고 옥으로 눈을 표현하였다. 이 좌상은 13세기의 것으로 일본의 중요문화재[34]로 지정되어 있으며, 란케이 도류의 입적 전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상의 옥으로 된 눈에서 눈동자는 수정을 박았으며 눈동자를 중심으로 검은자위 주위에 방사선상으로 금니 선을 그었는데 이는 다른 작품에서는 사례가 없다. 겐린지 서래원에 있는 「란케이 도류 좌상」은 1676년 불사(仏師) 고쇼(康乗)가 제작하였다.[35]

현존하는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로는 서래원(西来院) 소장 「대각선사상」(大覚禅師像), 후쿠오카현(福岡県) 쇼후쿠지(勝福寺) 소장 「대각선사상」(일본의 중요문화재), 사가현(滋賀県) 에이겐지(永源寺) 소장 「란케이 도류 상」이 있다. 미야기현(宮城県) 즈이간지(瑞巌寺)와 시즈오카현(静岡県)의 슈젠지 등에도 란케이 도류의 초상화가 있다.[36] 조각으로는 가마쿠라 조라쿠지(常楽寺) 소장 「란케이 도류 상」과 나가노현(長野県) 사이안지(西岸寺) 소장 「대각선사기상」(大覚禅師椅像) 등이 있다.

6. 묵적(墨蹟)

란케이 도류는 일본 서예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묵적 서법의 기초를 놓은 장즉지의 서체를 익히고 그 서풍을 일본에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서체는 늘 장즉지의 서체와 비교된다.

란케이 도류의 묵적으로 법어(法語) ・ 규칙(規則)을 쓴 것이 겐초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의 국보로써 지정 명칭은 '''대각선사묵적(법어규칙)'''(大覚禅師墨蹟(法語規則))이다.

란케이 도류 필 "법어" (겐초지 소장, 국보)


『법어 ・ 규칙』은 「견편영이후행」(見鞭影而後行)이라는 글로 시작하는 『법어』와 「장로수좌」(長老首座)로 시작하는 『규칙』으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37][39]

『법어』는 승려의 태만함을 경계하고 참선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며, 『규칙』은 행동 규칙의 엄격함을 요구하며 위반자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내용은 모두 『대각습유록』(大覚拾遺録)에 실려 있다.

서식이나 문장이 모두 근엄하고 확고한 자형(字形)에 가늘고 자재한 변화, 세세한 곳까지 널리 미치는 필세가 주목된다.[37][39] 그 서풍은 장즉지의 서체의 영향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구애됨이 없는 선승으로써의 질박하면서도 솔직한 태도가 느껴진다.[37][39][40]

촌법(寸法)은 다음과 같다.

종류크기
『법어』85.1cm×41.5cm
『규칙』84.8cm×40.9cm



일본 불교 사찰의 서예계에서 란케이 도류는 융희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8] 그러나 오늘날 그의 서예 작품은 몇 점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작품 중 『법어규칙』(法语规则) 두 점과 『중문풍송문』(重文讽诵文) 세 점은 현재 겐초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교토의 대덕사에 보존된 『금강경』(金刚经) 작품 또한 그의 중요한 서예 작품이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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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高僧传 中华书局 1992-10
[4] 간행물 中华文化画报 http://mall.cnki.net[...] 2008
[5] 웹사이트 http://www.jssdfz.co[...]
[6] 웹사이트 Buddhist Communication History Between China and Japan http://dongchu.ddbc.[...]
[7] 웹사이트 书法报|书法艺术网 http://www.sfrx.cn/o[...] Sfrx.cn null
[8] 웹사이트 荣西- 佛教百科-佛教知识堂 佛教百科_佛经_法师 - Powered by HDWiki! https://archive.toda[...] Wiki.fjdh.com 2008-01-21
[9] 웹사이트 欢迎光临宁波文化网!-兰溪道隆 https://archive.toda[...] 202.107.212.146 null
[10] 웹사이트 禅僧兰溪道隆与日本文化-《中华文化画报》2008年07期 http://www.cnki.com.[...] Cnki.com.cn null
[11] 웹사이트 南宋禅僧兰溪道隆对日本文化的影响-《学习月刊》2008年22期-中国知网 http://mall.cnki.net[...] Mall.cnki.net 2012-02-03
[12] 기타 中华诗词-全宋诗-释慧性 http://book.guq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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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建長寺創建750年記念 鎌倉 禅の起源 東京国立博物館 2003
[20] 논문 蘭渓道隆の頂相 ―建仁寺西来院調査報告を中心に 勉誠出版 2014-11-18
[21] 웹사이트 指定文化財|県指定有形文化財|性西法身像 蘭渓道隆像 明極聰愚像 - 宮城県公式ウェブサイト http://www.pref.miya[...]
[22] 서적 日本7 鎌倉II 平凡社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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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墨跡について 芸術新聞社 2009
[26] 설명
[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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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建長寺創建750年記念 鎌倉 禅の起源 東京国立博物館 2003年
[35] 논문 蘭渓道隆の頂相 ―建仁寺西来院調査報告を中心に 勉誠出版 2014年11月18日
[36] 웹인용 指定文化財|県指定有形文化財|性西法身像 蘭渓道隆像 明極聰愚像 - 宮城県公式ウェブサイト。 https://www.pref.miy[...] 2021-03-05
[37] 서적 日本7 鎌倉II 平凡社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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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서적 書道辞典 東京堂出版 1975
[40] 서적 墨跡について 芸術新聞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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