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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드브로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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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래드브로크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작전인 허스키 작전의 일환으로, 1943년 7월 9일 밤에 영국 제1공수여단이 폰테 그란데 다리를 점령하기 위해 수행한 글라이더 강습 작전이다. 작전 준비 과정에서 글라이더와 조종사 부족, 야간 착륙의 어려움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으며, 작전 중 강풍, 시야 불량, 대공포 사격 등으로 인해 많은 글라이더가 바다에 추락하고, 목표 지점에서 벗어나는 등 실패했다. 폰테 그란데 다리 전투에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반격에 밀려 다리를 잃었으며, 제1공수여단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작전 이후 영국 육군과 공군은 공수 작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권고안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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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드브로크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분쟁 명칭래드브로크 작전
전체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위치시칠리아 시라쿠사
날짜1943년 7월 9일 ~ 7월 10일
결과영국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1필립 힉스
지휘관 2프리아모 레오나르디
부대 1제1강하여단
부대 2제385해양대대
제75보병연대 1대대
병력 12,075명
병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1313명 전사
174명 부상 및 실종
사상자 2알 수 없음
관련 전투
캠페인 상자코르크스크루 작전
민스미트 작전
바클레이 작전
동물 작전
체스넛 작전
나르시스 작전
퍼스티언 작전
래드브로크 작전
젤라
트로이나
첸투리페

2. 배경

1942년 12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다음 목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1] 많은 미국인들은 북프랑스 침공을 주장했지만, 영국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중장은 사르데냐 섬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2]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시칠리아 섬을 침공하기로 최종 결정했다.[1] 시칠리아 점령은 연합군에게 지중해 해상 수송로와 이탈리아 본토 및 독일에 대한 공습 기지 확보에 유리했다.[3]

2. 1. 연합군의 계획 수립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시칠리아 섬을 침공하기로 최종 결정했다.[1] 허스키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이 시칠리아 침공 계획은 2월에 시작되었다. 초기 계획은 버나드 몽고메리 대장이 지휘하는 영국 제8군이 섬의 남동쪽 모서리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여 시라쿠사 항구를 점령하고, 이틀 후 조지 S. 패튼 중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7군이 섬의 서쪽 모서리에 상륙하여 팔레르모 항구로 이동하는 것이었다.[1]

3월에는 매튜 리지웨이 소장 휘하의 미국 제82 공수사단과 조지 F. 홉킨슨 소장 휘하의 영국 제1 공수사단이 강하병과 군용 글라이더를 통해 수륙 양용 상륙 직전에 투입되어 상륙 부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2][4] 그러나 5월 초, 몽고메리 장군은 연합군이 섬의 양쪽 끝에서 분리 상륙하면 방어하는 추축군이 두 연합군을 차례로 격파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계획을 변경했다.[2] 변경된 계획은 제8군과 제7군이 시칠리아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해안선을 따라 동시에 상륙하는 것이었다.[5]

시칠리아의 지형도, 상륙 지역 및 추축군 위치 상세 정보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당시 상륙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몽고메리는 공수 부대가 시라쿠사 근처에 상륙하여 항구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82 공수사단 포병대 사령관 맥스웰 D. 테일러 준장은 공수 부대가 무장이 가볍고 연합군의 해군 포격으로 인한 '아군 오사'에 취약하기 때문에 섬 해변 뒤에 낙하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6] 수정된 계획에 따라 제임스 M. 개빈 대령이 지휘하는 제505 공수 보병 연대 전투단이 젤라 항구 북동쪽에 낙하하여 추축군 예비 병력의 연합군 교두보로의 이동을 막고, 영국 제1 공수사단은 3개의 여단급 공수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필립 휘트비 힉스 준장 휘하의 제1 공중 상륙 여단은 시라쿠사 남쪽의 폰테 그란데 도로 교량을 점령하고, 어니스트 다운 준장의 제2 공수 여단이 아우구스타 항구를 점령하며, 제럴드 래스버리 준장의 제1 공수 여단은 시메토 강 위의 프리마솔레 교량을 점령 및 확보할 예정이었다.[7]

공수여단 3개가 동시에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수송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폰테 그란데 다리 점령을 목표로 하는 ''래드브로크 작전''이 먼저 수행되기로 결정되었다.[8] 필립 힉스 준장의 지휘하에 7월 9일 밤에 수행될 예정이었고, 나머지 두 작전은 그 다음 이틀 밤에 걸쳐 진행되었다.[8] 제1공수여단은 시라쿠사 항구와 그에 인접한 도시 지역을 점령하고, 수륙 양용 상륙 작전의 사정거리에 있는 해안 포대도 파괴하거나 압수하는 임무를 추가로 받았다.[9]

훈련이 시작되자 몽고메리는 공수 부대가 연합 지상군으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시라쿠사 점령을 위해 투입되는 부대가 최대한의 화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글라이더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강하산 강하 계획을 글라이더 강습으로 변경했다.[10] 영국 공군의 쿠퍼 단장은 경험이 없는 공수 승무원과 함께 야간에 글라이더 착륙을 수행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결정은 변경되지 않았다.[10]

전면 조종석이 올라가고 지프차 4명이 안으로 밀어넣는 와코 글라이더
제1공수여단의 지프 중 하나가 와코 하드리아누스 글라이더에 실리고 있다.

2. 2. 글라이더 작전 준비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칠리아 침공의 일환으로, 1943년 7월 9일 밤 영국군 제1공수여단이 군용 글라이더를 이용해 시칠리아 남쪽의 폰테 그란데 다리를 점령하는 래드브로크 작전이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결정에 따라 글라이더를 이용한 야간 착륙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했다.

우선, 글라이더 경험이 부족한 미군 제51수송기대가 제1공수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원래 제52수송기대가 제1공수사단과 함께, 제51수송기대가 제82공수사단과 함께 작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라쿠사 공격을 글라이더 기반으로 전환하면서 경험이 부족한 제51수송기대가 제1공수여단을 맡게 된 것이다.[11]

글라이더와 글라이더 조종사 확보에도 문제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에는 사용 가능한 글라이더가 부족했고, 골드 코스트에서 온 와코 글라이더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4월에 더 많은 미국 글라이더가 도착했지만, 상자 하역 문제와 조립 인력 부족으로 즉시 사용이 어려웠다.[12] 6월 12일까지 346대의 글라이더가 조립되었고, 호사 글라이더 27대가 영국에서 터키 버자드 작전을 통해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다.[14] 그러나 훈련에 사용할 수 있는 글라이더는 충분하지 않았고, 꼬리 배선 결함 등으로 인해 훈련은 더욱 제한되었다.[12]

영국 글라이더 조종사들은 경험이 매우 부족했다. 글라이더 조종사 연대에서 파견된 이들은 와코 글라이더와 야간 작전 경험이 없었고, 평균 글라이더 비행 경험은 8시간에 불과했다.[11] 글라이더 조종사 연대 사령관은 이들이 작전에 부적합하다고 항의할 정도였다.[15]

결국 제1공수여단은 136대의 와코 글라이더와 8대의 호르사 글라이더를 할당받았지만, 공간 부족으로 여단 전체를 투입할 수 없었다.[19]

3. 작전

1943년 7월 9일, 2,075명의 영국군과 7대의 지프, 6문의 대전차포, 10문의 박격포로 구성된 병력이 튀니지에서 글라이더에 탑승하여 18:00에 시칠리아로 향했다.[22] 제1 공수 여단에는 136대의 와코 글라이더와 8대의 호르사 글라이더가 할당되었다.[19] 와코 글라이더는 15명, 호르사 글라이더는 3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공간 부족으로 여단 전체를 투입할 수는 없었다.[17]

Seven British soldiers only one facing the camera, wearing hot climate uniform in a desert terrain
제1보병대대 소속 병사들, 보더 연대, 1943년 7월 9일, 이륙 직전. 공수용 접이식 자전거에 주목


상륙 전 몇 시간 동안 레이더 재밍 장비를 갖춘 12대의 보잉 B-17과 6대의 비커스 웰링턴이 시라쿠사-리카타 지역 해안을 왕복했다. 21:00에서 21:30 사이에 55대의 비커스 웰링턴이 시라쿠스와 공항을 기만 폭격하여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를 냈는데, 여기에는 이탈리아 해군 기지 사령관 주세페 잔노티도 포함되었다.[21] 낙하 지역 북쪽에는 낙하산병 복장을 한 꼭두각시 280명을 투입하여 이탈리아 방어를 속이려 했다.[21]

무로 디 포르코 곶에는 약 150명이 착륙하여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했다. 지역 이탈리아 사령관은 방송국을 점거했던 자들의 경고와 임박한 글라이더 상륙 경고에 따라 반격을 명령했지만, 그의 부대는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 착륙이 분산된 것은 연합군의 이점으로 작용하여 즉시 지역의 모든 전화선을 끊을 수 있었다.[23] 여단 부사령관 O. L. 존스 대령을 태운 글라이더는 이탈리아 해안 포병대 옆에 착륙했다. 해가 뜨자 참모 장교와 무선 통신병들이 공격하여 포대의 5문 대포와 탄약고를 파괴했다.[27] 다른 고립된 연합군들은 이탈리아 방어를 공격하고 증원군을 목표로 삼았다.[28] 3문의 149/35 mm 이탈리아 해안 포대에 가한 낙하산병 부대의 공격은 실패했고, 포대는 7월 10일 6:15에 연합군 상륙정과 병력에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21] 9:15에 이탈리아 제75보병연대("나폴리" 사단) 제1대대가 팔라촐로 아크레이데–시라쿠사 도로에서 160명의 미군 공수부대를 점령했다. 또 다른 낙하산병 부대는 제126포병대 사령관 파올리 소령이 이끄는 이탈리아 순찰대를 공격하여 파올리 소령을 사살하고 부대를 궤멸시켰다. 이로 인해 파올리 소령의 부대는 다리 근처에서 영국 전차와의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21]

1943년 7월 10일 밤, 약 2시간의 전투 끝에 영국 코만도 250명이 점령한 ''람바 도리아'' 해안 포대의 잔해


제75보병연대 제1대대는 포병이 없어 영국 전차에 대항할 수 없었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퇴각해야 했다.[21] 제1공수여단의 생존자들은 7월 13일에 북아프리카로 철수했다.[30] 상륙 중에 제1공수여단의 손실은 참여한 모든 영국 부대 중 가장 심각했다.[31] 사상자는 사망 313명, 실종 또는 부상 174명이었다.[30] 14명의 동반 글라이더 조종사가 사망했고 87명이 실종 또는 부상당했다.[30]

3. 1. 글라이더 강하

글라이더는 강풍, 시야 불량, 그리고 때때로 대공포 사격을 받았다.[22]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예인 항공기 조종사들은 사격과 탐조등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이 상승하거나 회피 기동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여 일부 글라이더는 너무 일찍 분리되어 65대가 바다에 추락했고, 약 252명이 익사했다.[22]

나머지 글라이더 중 12대만이 정확한 위치에 착륙했다. 59대는 최대 약 40.23km 떨어진 곳에 착륙했고, 나머지는 격추되거나 분리에 실패하여 튀니지로 돌아갔다.[22]

3. 2. 폰테 그란데 다리 전투

폰테 그란데 다리 근처에는 스태포드 연대 보병 1개 소대가 탑승한 호르사 글라이더 한 대만 착륙했다. 지휘관 위더스 중위는 부하들을 둘로 나누어 한 그룹은 강을 헤엄쳐 건너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다리는 양쪽에서 동시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고, 이탈리아 수비군은 북쪽 둑에 있는 참호를 포기했다.[23] 영국 소대는 다리에 설치된 폭파 장치를 제거하고 증원군을 기다리기 위해 참호를 팠다.[23] 다른 호르사 글라이더는 다리에서 약 약 182.88m 떨어진 곳에 착륙했지만 폭발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쿠 드 메인'' 부대를 태운 다른 호르사 글라이더 3대는 다리에서 약 3.22km 이내에 착륙했고, 탑승자들은 결국 현장에 도착했다.[25] 증원군이 다리에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06:30까지 그 수는 87명에 불과했다.[26]

다리에 대한 첫 번째 반격은 이탈리아 해군 2개 중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영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탈리아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응하여 더 많은 병력을 모아 연합군이 통제하는 폰테 그란데 다리에 포병과 박격포를 투입했다.[26] 영국 수비군은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받았고, 예상된 영국 제5보병사단의 지원군은 계획대로 10:00에 나타나지 않았다.[29] 11:30에 이탈리아 제385해안대대가 다리에 도착했고, 곧이어 제75(나폴리) 보병연대 제1대대가 도착했다. 이탈리아군은 세 방향에서 다리를 공격하도록 배치되었다. 14:45까지 다리를 방어하던 영국군은 15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중 4명은 장교였고 11명은 병사였다. 15:30에 탄약을 다 소모한 영국군은 전투를 중단했다. 다리 남쪽에 있던 일부 병사들은 시골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26] 다리가 다시 이탈리아군의 손에 들어가자, 제5보병사단에서 온 제2대대, 로열 스코츠 퓨질리어스, 제17보병여단이 16:15에 다리에 도착하여 성공적인 반격을 감행했는데,[29] 이는 다리에서 폭파 장치를 미리 제거하여 이탈리아군에 의한 파괴를 막았기 때문에 가능했다.[29]

3. 3. 이탈리아군의 저항

폰테 그란데 다리는 이탈리아군 제206해안사단이 방어하는 지역 바로 바깥에 있었으며, 이들은 영국군의 해상 상륙에 맞서 싸울 예정이었다. 준장 프리아모 레오나르디가 요새 사령관이었고, 육군 부대는 대령 마리오 다미아니가 지휘했다.[20] 아우구스타-시라쿠사 해군 요새 지역은 제206해안사단을 포함하여 6개의 중형 및 6개의 대형 해안 포대와 11개의 추가 다목적 해안 및 대공 포대, 6개의 대공포 포대로 보호받고 있었다. 요새에는 120mm 포 4문을 장착한 장갑 열차도 있었다.[20] 육군 부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된 제121해안 방어 연대였다. 해군 및 공군 대대도 동원 가능했으며,[20] 필요할 경우 제54보병사단 "나폴리"가 증원을 보낼 수 있었다.[26]

다리에 대한 첫 번째 반격은 이탈리아 해군 2개 중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영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탈리아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응하여 더 많은 병력을 집결시켜 연합군이 점령한 폰테 그란데 다리에 포병과 박격포 사격을 가했다.[26] 11시 30분에 이탈리아 제385해안대대가 다리에 도착했고, 곧이어 제75(나폴리) 보병연대 제1대대가 도착했다. 이탈리아군은 세 방향에서 다리를 공격했다. 15시 30분에 탄약이 떨어진 영국군은 전투를 중단했다. 다리 남쪽에 있던 일부 병사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26]

4. 결과

영국군은 폰테 그란데 다리를 점령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작전 중 사망 313명, 실종 또는 부상 174명이 발생했다. 글라이더 조종사도 14명이 사망하고 87명이 실종 또는 부상당했다.[32]

4. 1. 작전의 교훈

래드브로크 작전 이후 시칠리아에서의 공수 작전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영국 육군과 영국 공군은 다음과 같은 권고안을 제출했다.[32]

  • 항공 승무원은 낙하산 및 글라이더 작전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 주력 부대보다 먼저 길잡이 부대가 착륙하여 비콘을 설치해야 한다.
  • 착륙 계획은 시칠리아에서 사용되었던 더 작은 대대 착륙 구역 대신, 완전한 여단이 강하 구역에 착륙하는 것으로 단순화되었다.[32]
  • 글라이더는 더 이상 물 위에서 야간에 해제되지 않아야 한다.
  • 착륙 구역은 여유 공간을 포함하여 항공기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어야 한다.[33]


연합군 호송대에 대한 아군 오사 사건 이후, 함선 승무원에게는 항공기 식별에 대한 더 많은 훈련이 제공되었고, 연합군 항공기는 세 개의 큰 흰색 줄무늬로 칠해졌다.[34] 글라이더 조종 연대 조종사에 대한 훈련이 강화되었고, 더 나은 항공기 간 통신을 포함하여 글라이더 개선이 구현되었다.[35]

공중으로 지프와 포병을 전달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영국 공군은 항공기의 폭탄창에 지프와 총기를 실어 낙하산을 사용하여 전투에 투입하는 방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36] 제38 수송대대와 달리 다양한 항공기를 사용하지 않고 더글러스 다코타로만 구성된 두 번째 영국 공군 수송 그룹인 제46 수송대대가 창설되었다.[37] 영국 공군 그룹은 총 362대의 항공기(예비로 보유한 항공기는 제외)인 88대의 알버말, 88대의 스털링, 36대의 핼리팩스 및 150대의 다코타를 공급할 수 있었다.[37]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간행물 L'invasione dal cielo 2011-05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1971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Lake
[37] 서적 Tugwell
[38] 서적 Tug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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