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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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바논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 근동, 페니키아 시대, 헬레니즘 및 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의 이슬람 시대, 십자군 시대, 맘루크 시대를 겪었다.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 마안 가문과 시하브 가문의 통치를 받았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종파 간 갈등과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위임 통치를 받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독립했다. 독립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레바논 내전(1975-1990)을 겪었으며, 현재는 제2 레바논 공화국으로, 시리아의 영향력과 헤즈볼라의 존재, 주변국과의 갈등 등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크사르 아킬은 베이루트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파른 석회암 절벽 아래의 커다란 바위 그늘이다. 발굴 결과 23.6m 깊이의 퇴적층에서 오랜 기간에 걸친 구석기 시대의 석기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1] 매우 잘 보존된 후기 레발루아-무스테리아 문화 유적은 길고 삼각형 모양의 석기 조각을 특징으로 한다. 이 위층에서는 오리냐크 문화를 포함한 6단계의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 유적에서 발견된 주요 도구 유형인 크사르 아킬 조각과 함께, 구멍이 뚫리고 가장자리가 조각된 조개껍질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펜던트나 구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
카라운 문화 등 레바논의 초기 선사 문화는 기원전 2천년 경 가나안 시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고대 민족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며 땅을 경작하고 정교한 사회를 이루며 살았다. 북부 가나안 사람들은 성경과 다른 셈족 기록에도 언급된다.[176]
2. 선사 시대
이곳은 후기 구석기 시대 기술을 포함하는 가장 초기의 유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약 45,000년 전 또는 그 이전에 이 유적에서 거주했을 수 있다.[2][4] 크사르 아킬에서 발견된 장신구는 엔카푸네 야 무토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동시대로, 행동적 현대성을 시사한다.[2][3]
기준점 아래 약 15.2m 지점에서는 8세 어린이의 완전한 골격 (이그버트라고 불리며, 현재는 미국에서 연구된 후 베이루트 국립 박물관에 소장)이 11.6m 지점에서 역암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1] 또한, 네안데르탈인 상악골 파편이 약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후이저의 연구에 따르면, 후기 레발루아-무스테리아 문화 유적에서는 멸종된 좁은코 코뿔소와 함께 야생 염소와 사슴이 우세한 동물상을 이루었다.[1]
2. 1. 구석기 시대
크사르 아킬은 베이루트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파른 석회암 절벽 아래의 커다란 바위 그늘이다. 발굴 결과 23.6m 깊이의 퇴적층에서 오랜 기간에 걸친 구석기 시대의 석기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1] 매우 잘 보존된 후기 레발루아-무스테리아 문화 유적은 길고 삼각형 모양의 석기 조각을 특징으로 한다. 이 위층에서는 오리냐크 문화를 포함한 6단계의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 유적에서 발견된 주요 도구 유형인 크사르 아킬 조각과 함께, 구멍이 뚫리고 가장자리가 조각된 조개껍질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펜던트나 구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
이곳은 후기 구석기 시대 기술을 포함하는 가장 초기의 유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약 45,000년 전 또는 그 이전에 이 유적에서 거주했을 수 있다.[2][4] 크사르 아킬에서 발견된 장신구는 엔카푸네 야 무토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동시대로, 행동적 현대성을 시사한다.[2][3]
기준점 아래 약 15.2m 지점에서는 8세 어린이의 완전한 골격 (이그버트라고 불리며, 현재는 미국에서 연구된 후 베이루트 국립 박물관에 소장)이 11.6m 지점에서 역암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1] 또한, 네안데르탈인 상악골 파편이 약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후이저의 연구에 따르면, 후기 레발루아-무스테리아 문화 유적에서는 멸종된 좁은코 코뿔소와 함께 야생 염소와 사슴이 우세한 동물상을 이루었다.[1]
3. 고대 근동
가나안인들은 원시 시나이 문자나 우가리트 문자와 같은 초기 30자 알파벳을 줄인 24자 알파벳을 만들었다. 이 가나안 문자는 나중에 페니키아 문자(히브리어, 아람어, 모아비트어의 자매 문자)로 발전하여 지중해 지역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176]
레바논 해안 평원은 셈족 문화의 해안 무역 도시들의 중심지로,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페니키아라고 불렀다. 비블로스, 베리투스(베이루트), 시돈, 사렙타, 티레 등의 고대 유적은 도시 중심지와 정교한 예술을 갖춘 문명 국가를 보여준다. 페니키아는 여러 국가와 문화의 국제적인 중심지였다.[176] 페니키아의 예술, 관습,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돈 왕 에슈문아자르 2세 석관과 타브니트 석관은 페니키아 왕족들이 이집트의 매장 관습을 채택했음을 보여준다.[176]
페니키아 상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계피와 유향과 같은 향신료를 고대 그리스로 수출했다.[5] 이 무역은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에 글쓰기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을 도입했다고 증언한다.[6] 전설에 따르면, 납치된 누이 에우로파를 찾아 그리스로 온 티레의 왕자 카드모스가 알파벳을 가져왔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역사는 그리스 알파벳의 페니키아 기원을 인정하며, 헤로도토스는 델포이에 있는 삼각대에서 페니키아 알파벳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증언했다.[7]
페니키아인들은 항해술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아프리카 대륙을 최초로 일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파라오 네코가 페니키아인들에게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이집트로 돌아오도록 명령했다고 기록했다. 페니키아인들은 3년 만에 항해를 완수했으며, 적도 아래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이 점이 페니키아인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고 본다.[8]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에 다양한 식민지를 세웠다. 가장 유명한 곳은 카르타고(튀니지), 트리폴리(리비아), 가디르(카디스)와 바르셀로나(스페인), 팔레르모(이탈리아), 리스본(포르투갈) 등이다.[9][10][11][12] 페니키아는 기원전 9세기부터 6세기까지 신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불안정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3. 1. 가나안과 페니키아 시대
카라운 문화 등 레바논의 초기 선사 문화는 기원전 2천년 경 가나안 시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고대 민족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며 땅을 경작하고 정교한 사회를 이루며 살았다. 북부 가나안 사람들은 성경과 다른 셈족 기록에도 언급된다.[176]
가나안인들은 원시 시나이 문자나 우가리트 문자와 같은 초기 30자 알파벳을 줄인 24자 알파벳을 만들었다. 이 가나안 문자는 나중에 페니키아 문자(히브리어, 아람어, 모아비트어의 자매 문자)로 발전하여 지중해 지역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176]
레바논 해안 평원은 셈족 문화의 해안 무역 도시들의 중심지로,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페니키아라고 불렀다. 비블로스, 베리투스(베이루트), 시돈, 사렙타, 티레 등의 고대 유적은 도시 중심지와 정교한 예술을 갖춘 문명 국가를 보여준다. 페니키아는 여러 국가와 문화의 국제적인 중심지였다.[176] 페니키아의 예술, 관습,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돈 왕 에슈문아자르 2세 석관과 타브니트 석관은 페니키아 왕족들이 이집트의 매장 관습을 채택했음을 보여준다.[176]
페니키아 상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계피와 유향과 같은 향신료를 고대 그리스로 수출했다.[5] 이 무역은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에 글쓰기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을 도입했다고 증언한다.[6] 전설에 따르면, 납치된 누이 에우로파를 찾아 그리스로 온 티레의 왕자 카드모스가 알파벳을 가져왔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역사는 그리스 알파벳의 페니키아 기원을 인정하며, 헤로도토스는 델포이에 있는 삼각대에서 페니키아 알파벳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증언했다.[7]
페니키아인들은 항해술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아프리카 대륙을 최초로 일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파라오 네코가 페니키아인들에게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이집트로 돌아오도록 명령했다고 기록했다. 페니키아인들은 3년 만에 항해를 완수했으며, 적도 아래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이 점이 페니키아인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고 본다.[8]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에 다양한 식민지를 세웠다. 가장 유명한 곳은 카르타고(튀니지), 트리폴리(리비아), 가디르(카디스)와 바르셀로나(스페인), 팔레르모(이탈리아), 리스본(포르투갈) 등이다.[9][10][11][12] 페니키아는 기원전 9세기부터 6세기까지 신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불안정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4. 고대 시대
'''페르시아 제국 시대'''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레바논 연안의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였다.[177] 다리우스 1세는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키프로스를 포함한 지역을 단일 행정 구역(사트라피)으로 묶어 관리하며 매년 350탈렌트의 공물을 부과했다. 이는 이집트와 리비아가 바치던 700탈렌트에 비해 적은 양이었다.[177][13]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주력을 제공했다.[15] 헤로도토스는 그들을 페르시아 함대에서 "최고의 뱃사람"으로 평가했다.[16] 크세르크세스 1세 치하의 페니키아인들은 크세르크세스 운하 건설에 기여 하기도 했다.[17]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가 패배한 후 페르시아 왕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18]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에 대한 충성심보다 이전 식민지였던 카르타고에 대한 연대감을 더 강하게 보여주며 카르타고 공격 명령을 거부했다.[14] 페르시아는 일부 인구를 카르타고로 이주시키기도 하였으며,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까지 강력한 국가로 존속했다.
기원전 350년 또는 345년에는 테네스가 이끄는 시돈의 반란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의해 진압되었다.[19]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시대'''
페르시아의 2세기 통치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 동안 가장 유명한 페니키아 도시인 티레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그는 기원전 332년에 현재의 레바논과 인근 지역을 정복했다.[19]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흡수되었고 코일레-시리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 휘하의 고대 로마 군대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기독교는 이미 1세기에 인접한 갈릴리에서 레바논 해안 평원으로 전파되었다. 이 지역은 시리아의 나머지 지역 및 아나톨리아의 상당 부분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 동안 마론이라는 은둔자가 레바논 산맥 근처에서 일신교와 금욕주의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춘 수도원 전통을 세웠다. 마론을 따르는 수도사들은 그의 가르침을 레바논 원주민 기독교인과 레바논 산과 해안에 남아있는 이교도들에게 전파했다. 이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로마 당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산으로 이동했다.[20] 여러 세기에 걸쳐 지속된 빈번한 로마-페르시아 전쟁 동안 사산 제국은 현재의 레바논을 기원후 619년부터 629년까지 점령했다.[21]
4. 1. 페르시아 제국 시대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레바논 연안의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였다.[177] 다리우스 1세는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키프로스를 포함한 지역을 단일 행정 구역(사트라피)으로 묶어 관리하며 매년 350탈렌트의 공물을 부과했다. 이는 이집트와 리비아가 바치던 700탈렌트에 비해 적은 양이었다.[177][13]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주력을 제공했다.[15] 헤로도토스는 그들을 페르시아 함대에서 "최고의 뱃사람"으로 평가했다.[16] 크세르크세스 1세 치하의 페니키아인들은 크세르크세스 운하 건설에 기여 하기도 했다.[17]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가 패배한 후 페르시아 왕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18]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에 대한 충성심보다 이전 식민지였던 카르타고에 대한 연대감을 더 강하게 보여주며 카르타고 공격 명령을 거부했다.[14] 페르시아는 일부 인구를 카르타고로 이주시키기도 하였으며,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까지 강력한 국가로 존속했다.
기원전 350년 또는 345년에는 테네스가 이끄는 시돈의 반란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의해 진압되었다.[19]
4. 2.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시대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의해 레바논 연안의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완전히 정복되었다.[177] 다리우스 1세 치세 때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키프로스를 포함한 지역은 단일 사트라피로 관리되었고 매년 350탈렌트의 공물을 바쳤는데, 이집트와 리비아는 700탈렌트를 지불했다.[177]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동안 페르시아 함대의 주력을 제공했다.[15] 헤로도토스는 그들을 페르시아 함대에서 "최고의 뱃사람"으로 여겼다.[16] 크세르크세스 1세 치하의 페니키아인들은 크세르크세스 운하 건설의 독창성으로 칭찬을 받았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라미스 해전 이후 페르시아 왕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아케메네스 제국이 패배했다.[18]
기원전 350년 또는 345년에 테네스가 이끄는 시돈의 반란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페르시아의 2세기 통치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 동안 가장 유명한 페니키아 도시인 티레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그는 기원전 332년에 현재의 레바논과 인근 지역을 정복했다.[19]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흡수되었고 코일레-시리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 휘하의 고대 로마 군대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기독교는 이미 1세기에 인접한 갈릴리에서 레바논 해안 평원으로 전파되었다. 이 지역은 시리아의 나머지 지역 및 아나톨리아의 상당 부분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 동안 마론이라는 은둔자가 레바논 산맥 근처에서 일신교와 금욕주의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춘 수도원 전통을 세웠다. 마론을 따르는 수도사들은 그의 가르침을 레바논 원주민 기독교인과 레바논 산과 해안에 남아있는 이교도들에게 전파했다. 이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로마 당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산으로 이동했다.[20] 여러 세기에 걸쳐 지속된 빈번한 로마-페르시아 전쟁 동안 사산 제국은 현재의 레바논을 기원후 619년부터 629년까지 점령했다.[21]
5. 중세 시대
5. 1. 이슬람 시대
7세기에 무함마드가 죽은 직후 무슬림 아랍인들은 시리아를 정복하여 로마인(또는 동로마인이라 불리는 비잔티움인)을 대신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22] 비록 이슬람과 아랍어가 이 새로운 정권 하에서 공식적으로 우세했지만, 일반 대중은 여전히 기독교와 시리아어에서 개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특히 마론파 공동체는 자신의 신앙을 고수했고 시리아에 대한 통치자들의 계승에도 불구하고 큰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22] 7세기에 우마이야 수도가 다마스쿠스에 세워지면서 무슬림의 영향력은 크게 증가했다.644년부터 656년까지 라시둔 칼리파조를 통치한 우트만 시대에 이슬람은 다마스쿠스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는 주로 총독으로 재임한 우트만의 친척인 무아위야 때문이었다. 무아위야는 레바논 해안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여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대했고, 그 결과 해안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22] 그러나 산악 지역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기독교 또는 기타 문화적 전통을 유지했다.[22]
이슬람 정복 이후 지중해 무역은 이슬람 칼리프국과 비잔틴 제국 간의 해상 분쟁으로 인해 3세기 동안 지속적인 쇠퇴를 겪었다. 칼리프국의 해군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분적으로 손상된 항구들은 번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군사 주둔과 새로운 정착민 유입 시도에도 불구하고, 티레, 시돈, 베이루트, 트리폴리의 도시들은 우마이야와 아바스 칼리파조 시대에 각각 몇 천 명의 인구만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23]
758년, 아바스 칼리프 알-만수르는 아랍 타누키드에게 베이루트 주변 언덕의 방어를 맡겼다. 레바논 산의 타누키드는 나중에 최초의 드루즈 영주가 되었다. 845년, 타누크족과 기독교인들이 키스라완에서 충돌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23]
980년대에 파티마 칼리파조는 레바논 산을 지배하게 되었다. 파티마 통치 하에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 및 이탈리아와의 상업적 연계를 통해 레바논 해안을 따라 지중해 무역의 르네상스를 경험했다. 그 결과 트리폴리와 티레는 11세기까지 번성하여 면과 실크 섬유, 설탕, 유리 제품과 같은 제품의 수출을 전문으로 했다.[23]
1020년대에 드루즈 종파는 이스마일 시아파 이슬람교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타누키드 추장들은 "호소"를 받아들여 파티마 칼리프 알-하킴 비-암르 알라를 신으로 인정함으로써 레바논 산에 종파의 기초를 세웠다.[23] 새로운 신앙은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추종자를 얻었다. 마론파와 드루즈는 현대 시대까지 레바논을 분할했다. 아크레, 베이루트 등 해안의 주요 도시들은 무슬림 칼리프들이 직접 통치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아랍 문화에 점점 더 흡수되었다.
5. 2. 십자군 시대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이 투르크족에게 로마/기독교 아나톨리아를 함락시키자, 콘스탄티노플의 로마인들은 로마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서유럽의 라틴 기독교인(주로 프랑스 출신)이 동지중해,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레반트'')의 옛 로마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시작했다. 레바논은 아나톨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제1차 십자군의 주요 경로에 있었다. 프랑크 귀족들은 현재 레바논 지역을 동남부 십자군 국가의 일부로 점령했다. 현재 레바논 남반부는 예루살렘 왕국(1099년 건국)의 북쪽 변경을 형성했고, 북반부는 트리폴리 백국(1109년 건국)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살라딘이 1190년경 성지에 대한 기독교의 지배를 제거했지만, 레바논과 시리아의 십자군 국가는 더 잘 방어되었다.
이 지역에서 십자군 전쟁의 가장 지속적인 영향 중 하나는 십자군(주로 프랑스)과 마론파 간의 접촉이었다. 지역의 다른 대부분의 기독교 공동체와 달리, 마론파는 콘스탄티노플 또는 다른 지역 총대주교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선언했다. 따라서 프랑크족은 그들을 로마 가톨릭 형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초기 접촉은 나중에 이 지역의 십자군 국가가 몰락한 후에도 수 세기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로부터 마론파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졌다.
5. 3. 맘루크 시대
13세기 후반 레바논에 대한 무슬림 지배는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하에서 재건되었고, 수니파 이슬람의 지배가 다시 확립되었다.[23] 맘루크는 초기에 십자군 도시를 약탈하고 산악 지역의 이교도와 이단자들을 처벌했지만, 이후에는 행동에 더 신중을 기했다. 그들은 시돈 남쪽의 덜 요새화된 항구를 파괴하고 시돈, 베이루트, 트리폴리를 재건했다. 이로 인해 티레가 쇠퇴하고 트리폴리가 이 지역의 주요 항구 도시로 부상했다. 현재 지방 수도인 트리폴리는 수니파 종교 교육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시리아의 장거리 무역의 주요 허브가 되었다. 맘루크는 또한 내륙 중심지로서 바알베크에 투자했다.[23]1348~1349년 흑사병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하고 2세기 이상 경제 활동이 위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맘루크는 십자군 트리폴리 시타델의 복원과 석조 건물 및 모스크 건설을 포함하여 이 지역의 지속적인 건축 유산에 기여했다.[23]
6. 오스만 제국 시대
13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인은 발칸반도, 중동,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제국을 형성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 (1516년~20년)는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후 맘루크를 정복했다. 시리아를 침공한 그의 군대는 1516년 알레포 북쪽의 마르즈 다비크에서 맘루크의 저항을 진압했다.[179][24]
맘루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분쟁 동안, 레바논의 아미르들은 다마스쿠스 총독 가잘리의 운명과 연결되었다.[179][24] 가잘리는 마르지 다비크에서 오스만 제국 편에 서서 싸우면서 오스만 제국의 신뢰를 얻었고, 레바논 아미르들의 행동에 만족한 듯, 다마스쿠스에 입성할 때 셀림 1세에게 그들을 소개시켰다.[179][24] 셀림 1세는 레바논 아미르들에게 반자치적인 지위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179][24]
레바논 산의 산악 지역은 역사적으로 마론파 기독교 다수와 드루즈 공동체를 포함하여 소수 민족과 박해받는 집단의 피난처였다.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자치 지역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중반까지 마안과 시하브 가문을 통해 레바논을 통치했다.[24] 오스만 통치 기간 동안 시리아라는 용어는 현재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대략적인 지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179][24]
마안 가문은 1120년에 레바논에 정착한 카흐타니 아랍 부족이자 왕조였으며, 곧 드루즈교를 받아들였다.[25] 이들의 권력은 파크르 앗딘 1세 때부터 커져 오스만 당국으로부터 군대 조직을 허락받았고, 파크르 앗딘 2세(1570–1635) 때 절정에 달했다.[25]
파크르 앗딘 2세는 1608년 토스카나 대공국과 경제 및 군사 조항을 포함한 동맹을 맺었다.[25] 그의 야망과 외교 관계는 오스만 제국을 불안하게 했고, 1613년 다마스쿠스 주지사 하피즈 아흐메드 파샤는 파크르 앗딘 2세를 공격했다. 파크르 앗딘 2세는 토스카나로 망명하여 코시모 2세 대공의 환영을 받았고, 이후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스페인 부왕인 오수나 공작의 손님으로 3년을 더 보냈다.[25]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고향을 해방하기 위한 "십자군"에 유럽의 도움을 구했으나 실패하고, 유럽이 성지 회복보다 오스만 제국과의 무역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618년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변화로 파크르 앗딘 2세는 레바논으로 돌아와 레바논 산맥 너머의 모든 영토를 재통합했다. 그는 시돈, 트리폴리, 베카아 등 1613년에 포기했던 영토를 되찾았다. 그의 통치 하에 인쇄기가 도입되었고, 예수회 사제와 가톨릭 수녀들이 학교를 열도록 장려되었다.[25]
섬네일 데이르 엘 카마르]]
1623년 파크르 앗딘 2세는 마제델 안자르 전투에서 다마스쿠스 총독 무스타파 파샤를 격파하고 포획하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25]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그의 권력과 유럽과의 관계 확장에 불편함을 느꼈다. 1632년 쿠추크 아흐메드 파샤가 다마스쿠스의 무하피즈로 임명되었고, 술탄 무라드 4세는 쿠추크 아흐메드 파샤와 해군에게 레바논을 공격하고 파크르 앗딘 2세를 폐위하라고 명령했다. 파크르 앗딘 2세는 패배 후 제즈진의 동굴로 피신했다가 항복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2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1635년 4월 13일에 처형되었다.[25]
파크르 앗딘 2세는 레바논의 군사 및 경제 발전을 크게 향상시켰고, 종교적 관용으로 다양한 종교 그룹을 통합하려 했다. 그는 토스카나와 비밀 협정을 맺고, 강력한 군대를 건설했으며, 이탈리아 문화를 접하고 국가 현대화 조치를 시작했다. 그는 토스카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탈리아 건축가, 관개 기술자, 농업 전문가를 초빙하여 국가 번영을 촉진했다. 또한 시리아의 팔미라까지 요새를 건설하고 팔레스타인을 장악하여 레바논의 전략적 지위를 강화했다.
시하브 가문은 1697년 아인 다라 전투 이후 마안 가문을 계승했다.[28] 이 전투는 레바논의 모습을 바꾼 사건으로, 카이시스와 예메니라는 두 드루즈 가문 간의 충돌로 발발했다. 아흐마드 시하브가 이끄는 드루즈 카이시스가 승리하여 예메니를 레바논에서 시리아로 몰아냈고, 이로 인해 레바논 산맥의 드루즈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기독교인들이 인구학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28] 시하브 가문은 원래 시리아 남서부의 하우란 지역에 거주했으며 레바논 남부의 와디 알-타임에 정착했다.[28]
1768년부터 1774년까지의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레바논 지역 당국은 잠시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려 시도했다.[29]
가장 저명한 시하브는 바시르 시하브 2세로,[28] 1789년부터 1840년까지 레바논 산맥의 아미르로 통치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에서 레바논 산, 베카 계곡, 자발 아밀의 "왈리" 또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및 시리아 원정의 1799년의 사건은 그의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시험했다. 아크레를 포위했을 때, 나폴레옹과 아크레의 총독인 알 자자르 모두 시하브 지도자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바시르는 중립을 유지하며 어느 쪽에도 지원을 거부했다.[28] 아크레를 정복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돌아갔고, 1804년 알 자자르의 죽음으로 바시르의 이 지역 주요 반대자가 제거되었다.[28]
시하브는 원래 수니 이슬람교 가문이었지만, 18세기 말에 기독교로 개종했다.[28] 바시르 2세는 경쟁자들을 꺾기 위해 세금을 개혁하고 봉건 제도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경쟁자는 바시르 줌블라트였는데, 그는 바시르 2세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재산과 봉건적 후원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드루즈 공동체에서 지지가 증가하고 있었다.
1822년 다마스쿠스의 오스만 왈리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동맹을 맺은 아크레와 전쟁을 벌였다. 이 갈등의 일환으로, 드루즈군에 의한 마론파 기독교도 대학살이 발생했다. 1825년 바시르 2세는 오스만 제국과 제자르의 도움을 받아 심카니예 전투에서 그의 라이벌을 물리쳤다. 바시르 줌블라트는 제자르의 명령으로 아크레에서 죽었다.
권력을 잡은 바시르 2세는 동맹을 찾았는데, 이들은 이 지역 전체를 "오리엔트"로 보고, 충성을 요구하지 않고, 끝없는 내부 갈등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무역, 무기, 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드루즈를 무장 해제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1832년 레바논에 입성하여 공식적으로 지배권을 인수한 이집트 파샤 무함마드 알리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19세기 동안 베이루트는 남쪽의 아크레를 대체하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이는 주로 레바논 산이 유럽 수출용 실크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업은 이 지역을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유럽과의 관계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실크가 마르세유로 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드루즈와 기독교인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대체로 화합과 평화로운 공존으로 특징지어졌으나,[31][32][33][30] 1860년 레바논 산 내전과 같이 갈등이 발생한 시기도 있었다.[34][35] 1841년, 드루즈와 마론파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여 데이르 알 카마르에서 기독교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은 레바논 산을 기독교 지역과 드루즈 지역으로 나누어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각 종파에게 지리적 권력 기반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섬네일 중 기독교 난민]]
1860년, 마론파가 오스만 제국의 권위에 반대하면서 갈등은 종파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는 마론파를, 영국은 드루즈를 지원하면서 종교적, 경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드루즈는 마론파 마을을 공격했고, 마론파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점차 수세에 몰렸다. 유럽 열강 회의가 개입하여[36] 위원회를 설립하고,[37] 프랑스 군대가 파견되어 최종 결정이 시행되었다.
프랑스는 드루즈의 통제권을 인정했고, 마론파는 레바논 산 주변의 반 자치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레바논 주는 마론파가 통제하게 되었지만, 다마스쿠스 총독의 직접 통치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의 감시를 받았다. 데이르 알-카마르 포위전 이후, 유럽의 개입 위협에 터키 정부는 갈등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나폴레옹 3세는 7,000명의 병력을 베이루트로 파견하여 분할을 강요했다. 1861년 유럽 열강 회의에서 비준된 협정에 따라 마론파는 고립된 지역으로 강제되었고, 베카와 베이루트로부터 단절되어 빈곤이 심화되었다.
섬네일
유세프 베이 카람[38]은 이 시기 레바논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1. 오스만 제국의 지배
13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인은 발칸반도, 중동,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제국을 형성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 (1516년~20년)는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후 맘루크를 정복했다. 시리아를 침공한 그의 군대는 1516년 알레포 북쪽의 마르즈 다비크에서 맘루크의 저항을 진압했다.[179][24]맘루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분쟁 동안, 레바논의 아미르들은 다마스쿠스 총독 가잘리의 운명과 연결되었다.[179][24] 가잘리는 마르지 다비크에서 오스만 제국 편에 서서 싸우면서 오스만 제국의 신뢰를 얻었고, 레바논 아미르들의 행동에 만족한 듯, 다마스쿠스에 입성할 때 셀림 1세에게 그들을 소개시켰다.[179][24] 셀림 1세는 레바논 아미르들에게 반자치적인 지위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179][24]
레바논 산의 산악 지역은 역사적으로 마론파 기독교 다수와 드루즈 공동체를 포함하여 소수 민족과 박해받는 집단의 피난처였다.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자치 지역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중반까지 마안과 시하브 가문을 통해 레바논을 통치했다.[24] 오스만 통치 기간 동안 시리아라는 용어는 현재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대략적인 지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179][24]
6. 2. 마안 가문 (1517-1697)
마안 가문은 1120년에 레바논에 정착한 카흐타니 아랍 부족이자 왕조였으며, 곧 드루즈교를 받아들였다.[25] 이들의 권력은 파크르 앗딘 1세 때부터 커져 오스만 당국으로부터 군대 조직을 허락받았고, 파크르 앗딘 2세(1570–1635) 때 절정에 달했다.[25]파크르 앗딘 2세는 1608년 토스카나 대공국과 경제 및 군사 조항을 포함한 동맹을 맺었다.[25] 그의 야망과 외교 관계는 오스만 제국을 불안하게 했고, 1613년 다마스쿠스 주지사 하피즈 아흐메드 파샤는 파크르 앗딘 2세를 공격했다. 파크르 앗딘 2세는 토스카나로 망명하여 코시모 2세 대공의 환영을 받았고, 이후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스페인 부왕인 오수나 공작의 손님으로 3년을 더 보냈다.[25]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고향을 해방하기 위한 "십자군"에 유럽의 도움을 구했으나 실패하고, 유럽이 성지 회복보다 오스만 제국과의 무역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618년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변화로 파크르 앗딘 2세는 레바논으로 돌아와 레바논 산맥 너머의 모든 영토를 재통합했다. 그는 시돈, 트리폴리, 베카아 등 1613년에 포기했던 영토를 되찾았다. 그의 통치 하에 인쇄기가 도입되었고, 예수회 사제와 가톨릭 수녀들이 학교를 열도록 장려되었다.[25]
섬네일 데이르 엘 카마르]]
1623년 파크르 앗딘 2세는 마제델 안자르 전투에서 다마스쿠스 총독 무스타파 파샤를 격파하고 포획하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25]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그의 권력과 유럽과의 관계 확장에 불편함을 느꼈다. 1632년 쿠추크 아흐메드 파샤가 다마스쿠스의 무하피즈로 임명되었고, 술탄 무라드 4세는 쿠추크 아흐메드 파샤와 해군에게 레바논을 공격하고 파크르 앗딘 2세를 폐위하라고 명령했다. 파크르 앗딘 2세는 패배 후 제즈진의 동굴로 피신했다가 항복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2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1635년 4월 13일에 처형되었다.[25]
파크르 앗딘 2세는 레바논의 군사 및 경제 발전을 크게 향상시켰고, 종교적 관용으로 다양한 종교 그룹을 통합하려 했다. 그는 토스카나와 비밀 협정을 맺고, 강력한 군대를 건설했으며, 이탈리아 문화를 접하고 국가 현대화 조치를 시작했다. 그는 토스카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탈리아 건축가, 관개 기술자, 농업 전문가를 초빙하여 국가 번영을 촉진했다. 또한 시리아의 팔미라까지 요새를 건설하고 팔레스타인을 장악하여 레바논의 전략적 지위를 강화했다.
6. 3. 시하브 가문 (1697-1842)
시하브 가문은 1697년 아인 다라 전투 이후 마안 가문을 계승했다.[28] 이 전투는 레바논의 모습을 바꾼 사건으로, 카이시스와 예메니라는 두 드루즈 가문 간의 충돌로 발발했다. 아흐마드 시하브가 이끄는 드루즈 카이시스가 승리하여 예메니를 레바논에서 시리아로 몰아냈고, 이로 인해 레바논 산맥의 드루즈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기독교인들이 인구학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28] 시하브 가문은 원래 시리아 남서부의 하우란 지역에 거주했으며 레바논 남부의 와디 알-타임에 정착했다.[28]1768년부터 1774년까지의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레바논 지역 당국은 잠시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려 시도했다.[29]
가장 저명한 시하브는 바시르 시하브 2세로,[28] 1789년부터 1840년까지 레바논 산맥의 아미르로 통치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에서 레바논 산, 베카 계곡, 자발 아밀의 "왈리" 또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및 시리아 원정의 1799년의 사건은 그의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시험했다. 아크레를 포위했을 때, 나폴레옹과 아크레의 총독인 알 자자르 모두 시하브 지도자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바시르는 중립을 유지하며 어느 쪽에도 지원을 거부했다.[28] 아크레를 정복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돌아갔고, 1804년 알 자자르의 죽음으로 바시르의 이 지역 주요 반대자가 제거되었다.[28]
시하브는 원래 수니 이슬람교 가문이었지만, 18세기 말에 기독교로 개종했다.[28] 바시르 2세는 경쟁자들을 꺾기 위해 세금을 개혁하고 봉건 제도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경쟁자는 바시르 줌블라트였는데, 그는 바시르 2세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재산과 봉건적 후원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드루즈 공동체에서 지지가 증가하고 있었다.
1822년 다마스쿠스의 오스만 왈리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동맹을 맺은 아크레와 전쟁을 벌였다. 이 갈등의 일환으로, 드루즈군에 의한 마론파 기독교도 대학살이 발생했다. 1825년 바시르 2세는 오스만 제국과 제자르의 도움을 받아 심카니예 전투에서 그의 라이벌을 물리쳤다. 바시르 줌블라트는 제자르의 명령으로 아크레에서 죽었다.
권력을 잡은 바시르 2세는 동맹을 찾았는데, 이들은 이 지역 전체를 "오리엔트"로 보고, 충성을 요구하지 않고, 끝없는 내부 갈등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무역, 무기, 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드루즈를 무장 해제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1832년 레바논에 입성하여 공식적으로 지배권을 인수한 이집트 파샤 무함마드 알리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19세기 동안 베이루트는 남쪽의 아크레를 대체하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이는 주로 레바논 산이 유럽 수출용 실크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업은 이 지역을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유럽과의 관계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실크가 마르세유로 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6. 4. 종파 분쟁과 유럽의 개입
드루즈와 기독교인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대체로 화합과 평화로운 공존으로 특징지어졌으나,[31][32][33][30] 1860년 레바논 산 내전과 같이 갈등이 발생한 시기도 있었다.[34][35] 1841년, 드루즈와 마론파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여 데이르 알 카마르에서 기독교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은 레바논 산을 기독교 지역과 드루즈 지역으로 나누어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각 종파에게 지리적 권력 기반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섬네일 중 기독교 난민]]
1860년, 마론파가 오스만 제국의 권위에 반대하면서 갈등은 종파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는 마론파를, 영국은 드루즈를 지원하면서 종교적, 경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드루즈는 마론파 마을을 공격했고, 마론파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점차 수세에 몰렸다. 유럽 열강 회의가 개입하여[36] 위원회를 설립하고,[37] 프랑스 군대가 파견되어 최종 결정이 시행되었다.
프랑스는 드루즈의 통제권을 인정했고, 마론파는 레바논 산 주변의 반 자치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레바논 주는 마론파가 통제하게 되었지만, 다마스쿠스 총독의 직접 통치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의 감시를 받았다. 데이르 알-카마르 포위전 이후, 유럽의 개입 위협에 터키 정부는 갈등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나폴레옹 3세는 7,000명의 병력을 베이루트로 파견하여 분할을 강요했다. 1861년 유럽 열강 회의에서 비준된 협정에 따라 마론파는 고립된 지역으로 강제되었고, 베카와 베이루트로부터 단절되어 빈곤이 심화되었다.
섬네일
유세프 베이 카람[38]은 이 시기 레바논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7. 19세기 말 ~ 20세기 초
마론파 가톨릭교와 드루즈는 18세기 초 "마론파-드루즈 이원주의"로 알려진 통치 및 사회 시스템을 통해 현대 레바논을 건국했다. 레바논 산악 자치주.[50] 19세기 후반에는 베이루트 아메리카 대학교의 설립과 오스만 제국 자유화를 위한 시도와 관련된 문학적, 정치적 활동의 번성을 보이며, 무슬림, 드루즈, 마론파 그룹이 경제 및 문화 발전에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세기 말에 극도로 가혹한 정부와 높은 세율에 대한 짧은 드루즈 봉기가 있었지만, 세기 초에 이 지역을 달구었던 폭력은 훨씬 적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면서 베이루트는 다양한 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파리에서 열린 아랍 시리아 회의와 프랑코-시리아 회의에 대표단을 보냈다. 범아랍 민족주의부터 베이루트의 분리주의, 오스만 정부 내에서 안정과 개혁을 추구하는 여러 현상 유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청년 투르크 혁명은 이러한 운동을 전면에 내세웠고, 오스만 제국의 개혁이 더 광범위한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로 인해 레바논은 시리아가 점령한 다른 지역보다 중동 분쟁의 무게를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압도적으로 마론파 신자들이었던 레바논 산악 지역 인구의 약 절반이 굶어 죽었으며(총 40만 명 중 20만 명 사망), 이는 오늘날 레바논 대기근으로 알려져 있다.[52]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작물 실패, 징벌적인 통치 행위, 연합국의 해안 봉쇄, 그리고 오스만 군의 시리아에서 레바논으로의 수출 금지 등의 복합적인 결과였다.[53]
8.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시대 (1920-1939)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국제 연맹은 현재 레바논을 구성하는 5개의 주를 프랑스의 직접 통치로 위임했다.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 아랍어 사용 지역의 분할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지만, 최종 처분은 1920년 산 레모 회담에서 이루어졌으며, 위임통치령, 그 경계, 목적 및 조직에 대한 결정은 1921년 국제 연맹에 의해 비준되었고 1922년에 발효되었다.
산 레모에서 합의된 내용에 따르면, 프랑스는 1920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프랑스가 시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았다. 모든 이전 오스만 지역과 마찬가지로 시리아는 "...독립 국가로서의 존재가 임시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발전 단계에 도달했으며,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위임통치령의 행정적 조언과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간주되는 A급 위임통치령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행정 구역을 포함하여 당시 전체 프랑스 위임통치령 지역은 "시리아"라고 불렸다. 프랑스는 직접 통치하에 있는 지역을 극대화하고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 시리아를 포함하며 방어 가능한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레바논-시리아 국경을 안티 레바논 산맥으로 이동시켰다. 이곳은 베카 계곡 동쪽에 위치하며 수백 년 동안 다마스쿠스 지방에 속해 있었고 문화와 영향력 면에서 베이루트보다 다마스쿠스에 훨씬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는 베이루트의 통제 하에 있는 영토를 두 배로 늘렸으며, 이는 시리아가 될 지역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10월 27일, 마론파 총대주교 엘리아스 피터 호야크가 이끄는 레바논 대표단은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 레바논의 염원을 담은 각서를 제출했다.[57] 여기에는 레바논산 무타사리프령의 국경선 확장이 포함되었으며,[57] 이러한 추가 지역이 확대된 국가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명확한 다수를 차지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의 자연적인 일부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57] 베카와 아카르의 농지를 병합하려는 노력은 레바논산 대기근 이후 존재론적 공포에 의해 촉진되었다.[58] 마론파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은 국민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국가를 원했다.[58] 무타사리프령에 추가될 지역에는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레의 해안 도시와 각 부속 내륙 지역, 모두 베이루트 빌라예트에 속했으며, 시리아 빌라예트의 4개 카자 (바알베크, 베카, 라샤야, 하스바야)가 포함되었다.[57]
이로 인해 레바논의 인구 통계가 크게 바뀌었으며, 추가된 지역에는 주로 무슬림이나 드루즈인들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마론파가 가장 큰 하위 그룹을 이루는 레바논 기독교인은 이제 인구의 50%를 약간 넘게 차지하게 되었고, 레바논의 수니파 무슬림은 8배, 시아파 무슬림은 4배 증가했다. 1926년에 작성된 레바논 헌법은 다양한 종교 단체 간의 권력 균형을 명시했지만, 프랑스는 기독교 동맹국의 정치적 지배를 보장하도록 설계했다. 대통령은 기독교인(실제로 마론파)이어야 하고, 총리는 수니파 무슬림이어야 했다. 1932년 인구 조사를 바탕으로 의회 의석은 기독교/무슬림 비율이 6:5로 나뉘었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의회에서 승인된 모든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하여 인구 분포가 변경될 경우 6:5 비율이 개정되지 않도록 보장했다. 1960년까지 무슬림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정치 시스템에 대한 무슬림의 불안을 야기했다.
프랑스가 1862년에 그린 첫 번째 지도는 1920년 대 레바논의 국경선 템플릿으로 사용되었다.[55] 두 번째 지도는 현대 레바논 지도에 종교 집단의 분포를 나타낸 위에 1861–1918년 레바논산 무타사리프령의 국경선을 보여준다.[55]
9. 제2차 세계 대전 및 독립 (1939-1946)
1940년 비시 정부가 프랑스 영토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면서 앙리 덴츠 장군이 레바논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는 1941년 4월 에밀 에데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졌다.[59] 5일 후, 덴츠는 알프레드 나카체를 3개월 임기의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59] 비시 당국은 나치 독일이 시리아를 통해 영국군에 대항하는 항공기와 보급품을 이라크로 옮기는 것을 허용했고, 영국은 독일이 비시 정부를 압박하여 레바논과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군대를 보냈다.[59]
레바논에서 전투가 끝난 후, 샤를 드골 장군은 그 지역을 방문하여 레바논 안팎의 정치적 압력으로 레바논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11월 26일, 조르주 카트루 장군은 레바논이 자유 프랑스 정부의 권한 하에 독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9]
1943년 선거 후, 1943년 11월 8일 레바논 새 정부는 일방적으로 위임 통치를 폐지했다. 프랑스는 새 정부를 감옥에 투옥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나, 국제적인 압력에 직면하여 1943년 11월 22일 정부 관리들을 석방하고 레바논의 독립을 수용했다.
10. 레바논 공화국
10. 1. 독립 이후 (1946-1975)
레바논의 독립 이후 역사는 정치적 안정과 혼란이 번갈아 나타났으며, 베이루트는 금융 및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베이루트는 국제 상업 및 금융 기관과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고,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중동의 파리"라는 명성을 얻었다.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레바논에는 11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었다. 1958년에는 카밀 샤문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에 반발하여 봉기가 일어났고, 레바논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해병대가 베이루트에 급파되었다. 위기 이후 푸아드 체합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다.
1960년대 레바논은 베이루트를 중심으로 관광 및 은행 부문이 번영하며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1960년대 중반, 레바논은 경제적 성공의 정점에 도달하여,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의 자금 유입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66년 유세프 베이다스의 인트라 은행 붕괴로 경제적 안정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추가 유입되었고, 요르단 내전에서 패배한 후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지휘 아래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무장 대원들이 레바논에 재집결하였다. 1968년부터 팔레스타인 무장 대원들은 남부 레바논을 이스라엘 공격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8년 7월 조지 하바쉬의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은 이스라엘 엘 알 민간 항공기를 납치했고, 12월에는 PFLP 무장 대원 2명이 아테네에서 엘 알 항공기에 총격을 가하여 이스라엘인 1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특공대가 베이루트 국제 공항에 침투하여 민간 항공기 12대 이상을 파괴했다.
이스라엘은 PFLP를 지원한 책임이 레바논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며 보복을 정당화했지만, 이는 레바논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친팔레스타인 세력과 반팔레스타인 세력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 분쟁은 기독교인과 무슬림 공동체 간의 긴장을 고조시켜 1975년 내전 발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드 알 나세르는 1969년 아라파트와 레바논 정부 간의 "카이로 협정" 협상을 도왔다. 이 협정으로 PLO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와 이스라엘 북부 접근 경로에 대한 자율성을 얻었지만, 마론파는 이에 불만을 품고 팔랑헤당 등 친위 무장 단체가 결성되었다.
1970년 술레이만 프란지에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76년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가 레바논에 개입했다. PLO는 남부 레바논에 "미니 국가"를 건설하고 이스라엘 북부 정착촌을 공격했으며, 1970년 요르단 탄압을 피해 도망친 아라파트와 파타 운동을 포함한 무장 팔레스타인 무장 대원들이 레바논으로 유입되었다. PLO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은 1968년 이후 더욱 악화되어 내전, 외세 침략, 국제적 개입으로 이어졌다.
1974년, 시아파 정당 아말 운동이 무사 알 사드르와 후세인 엘 후세이니에 의해 창설되어 레바논의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개선을 목표로 활동했다.
10. 2. 레바논 내전 (1975-1990)
레바논 내전은 오스만 제국 이후 레바논의 갈등과 정치적 타협, 변화하는 인구 통계, 종교 간 갈등, 그리고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이스라엘과의 인접성으로 인해 악화되었다.[67] 1975년 레바논은 마론파, 동방 정교회, 수니파, 시아파 등 다양한 종교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아랍 민족주의, 냉전 시대의 아랍 사회주의, 아랍-이스라엘 분쟁, 바트주의, 이란 혁명,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 요르단 흑사건, 이슬람 근본주의, 이란-이라크 전쟁 등이 레바논 내전의 주요 배경이다.
1975년 종파 간 갈등, 팔레스타인 문제, 외부 세력 개입 등으로 내전이 발발했다.[67] 1970년대 중반, 기독교도 정부에 대한 무슬림과 좌익의 불만이 커지면서 1975년 4월 군사 충돌로 이어졌다. 1976년 시리아의 개입으로 시리아군이 레바논에 주둔하게 되었다.[67]

남부에서는 이스라엘과 PLO 간의 군사적 충돌이 잦았고, 이스라엘은 1978년 레바논을 침공하여 리타니 강 남쪽 대부분을 장악했다.[68][69]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425호를 통과시켜 유엔 레바논 임시군(UNIFIL)을 창설했다.[69]

1982년 이스라엘은 갈릴리 작전으로 다시 레바논을 침공하여 베이루트 외곽까지 진출했다.[71] 레바논 다국적군이 PLO 철수와 민간인 보호를 위해 파병되었다.[71] 바시르 게마옐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 직전 암살되었고,[70] 이후 사브라 및 샤틸라 학살이 발생했다.[71][72][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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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이스라엘 방위군은 남부로 철수했고, 슈프 지역에서 진보 사회당과 레바논 군대 간의 산악 전쟁이 발발했다. 1983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와 1983년 베이루트 막사 폭탄 테러로 미국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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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89년까지 난민촌 전쟁이 벌어졌고, 시아파 아말 운동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1987년 베이루트에서 전투가 재개되었고, 1988년에는 아말과 헤즈볼라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1989년 타이프 협정으로 내전 종식의 시작을 알렸고,[75] 르네 무아와드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곧 암살되었다. 1990년 시리아는 레바논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내전 기간 동안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9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수천 명이 지뢰로 인해 사지를 잃었다.[67]
10. 3. 제2 레바논 공화국 (1990-현재)
종전 이후 레바논은 여러 차례 선거를 치렀고, 대부분의 민병대는 약화되거나 해산되었으며, 레바논군(LAF)은 국가의 약 3분의 2에 걸쳐 중앙정부 권한을 확장했다. 헤즈볼라만이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점령에 맞서 레바논을 지켜왔기 때문에 레바논 의회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시리아는 레바논의 대부분 지역에 군사 주둔을 유지했으며, 레바논 내 여러 정부 기관들을 보유하며 점령을 강화했다. 이스라엘군은 2000년 5월 마침내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했다.1992년 11월 초, 새로운 의회가 선출되었고, 라피크 하리리 총리는 내각을 구성했고, 재정 포트폴리오를 유지했다. 성공한 억만장자 사업가가 이끄는 정부의 형성은 레바논이 국가 재건과 경제 살리기의 우선순위를 둘 것이라는 신호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베이루트 시내를 재건하기 위해 설립된 민간 부동산 회사인 솔리데르는 경제 회복을 민간 부문 투자와 연결시키려는 하리리의 전략의 상징이었다. 1998년 당시 레바논군 사령관이었던 에밀 라후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셀림 호스는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2000년 11월 하리리는 총리직에 복귀했다. 기본적인 인프라와 정부 서비스에 대한 문제가 지속되고 있고, 현재 레바논은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내전 피해의 상당 부분은 전국적으로 복구되었고, 많은 외국인 투자자와 관광객들이 돌아왔다.
전후 경제적 불확실성과 레바논 통화의 붕괴로 인한 사회 및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1992년 5월 오마르 카라미 총리도 재임 2년이 채 되지 않아 사임했다. 그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치러진 레바논 의회 선거를 감독할 관리인으로 널리 알려진 라치드 솔 전 총리로 교체되었다.
레바논이 지난 10년 동안 장기 레바논 내전의 기반 시설에 대한 재앙적 피해로부터 부분적으로 회복했다면, 그 갈등을 야기하고 지속시킨 사회적 정치적 분열은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의회 선거와 최근 지방선거는 분쟁의 직접적인 여파보다 더 적은 부정행위와 더 많은 대중의 참여로 치러지고 있으며, 레바논 시민사회는 일반적으로 아랍 세계의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시리아와 다른 외부 영향에 대한 종파간 긴장과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정부는 자국 군인들을 공격한 북부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조치를 취했고,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 조직과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아스바트 알 안사르와 같은 단체들에 대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2002년 1월 24일, 사브라-샤틸라 학살과 관련된 또 다른 전직 레바논 군인 엘리 호베이카가 베이루트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레바논 내전 동안 시리아의 레바논 주둔은 아랍 연맹의 지원을 받은 타이프 협정에 의해 레바논 의회에서 합법화되었으며, 1990년 10월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15년 동안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는 내부 및 외부 안보 위협에 직면한 레바논군의 지속적인 약점과 타이프 협정의 모든 헌법 개혁을 이행하기 위한 레바논 정부와의 합의를 이유로 시리아의 레바논 내 지속적인 군사 주둔을 정당화했다. 헤즈볼라 민병대는 결국 해체될 예정이었고, LAF는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따라 배치될 수 있었다. 레바논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391에 따라 남부 국경을 따라 배치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96에 의해 이를 촉구받았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59에 의해 배치가 요구되었다. 레바논 내 시리아의 군사 및 정보 존재는 레바논 내외의 일부 우파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내전의 재발을 막고 이스라엘의 침략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존재와 영향력이 레바논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만 축소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요 강대국인 미국과 프랑스는 레바논 정부의 동의를 받아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다는 시리아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들은 레바논 정부가 협력했고 실제로는 레바논 정부가 시리아의 꼭두각시라고 주장했다.
2005년까지 14,000~15,000명(35,000명에서 감소)의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 주둔해 있었지만, 타이프 협정은 1992년 9월까지 시리아와 레바논 정부 간에 레바논 베카 계곡으로의 재배치에 대한 합의를 요구했다. 이스라엘이 2000년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한 후 시리아가 레바논에서 철수를 거부한 것은 처음에는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인과 드루즈인 사이에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많은 레바논의 수니파 무슬림이 이에 동참했다. 반면에 레바논의 시아파는 오랫동안 시리아의 주둔을 지지해 왔으며, 헤즈볼라 민병대와 정당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시리아에 점령을 종료하고 레바논 내부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2004년, 많은 사람들은 시리아가 레바논 의원들에게 임기 제한을 개정하고 레바논의 친시리아 대통령 에밀 라후드가 세 번째 임기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믿는다. 프랑스, 독일, 영국은 많은 레바논 정치인들과 함께 시리아의 개입 혐의를 비난했다.
2004년 9월 2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례적인 협력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미국이 작성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59를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레바논에서 철수할 것을 모든 남아 있는 외국 군대에 촉구"하고 "모든 레바논 및 비레바논 민병대의 해산 및 무장을 해제"할 것을 촉구했다.

2000년 5월 25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에 따라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일반적으로 셰바 농장으로 불리는 50제곱킬로미터의 산악 지형은 이스라엘의 통제를 받고 있다. 유엔은 이스라엘의 철수를 인증했으며, 셰바 농장을 점령된 시리아 영토로 간주하는 반면, 레바논과 시리아는 이 지역을 레바논 영토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2005년 1월 20일 유엔 사무총장의 레바논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셰바 농장 지역에서 블루 라인이 유효하지 않다는 레바논 정부의 지속적인 입장은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사회는 결의안 425(1978)에 따라 이스라엘의 철수를 확인하는 데 있어 블루 라인이 유효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레바논 정부는 이사회가 당사자들에게 블루 라인을 완전히 존중하라는 반복적인 요청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결의안 425에서 유엔은 레바논 정부가 "해당 지역에서 효과적인 권한을 회복"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는데, 이는 레바논군의 공식적인 주둔을 필요로 한다. 또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59는 헤즈볼라 민병대의 해산을 요구한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블루 라인을 따라 계속 배치되어 있다. 유엔에 따르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모두 블루 라인을 여러 번 위반했다. 가장 일반적인 폭력 패턴은 헤즈볼라의 셰바 농장 지역 침입과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 공습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은 "헤즈볼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정부가 이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도록 억제"할 것을 촉구했다. 남부 레바논 유엔 사무총장의 개인 대표인 스타판 데 미수라는 "헤즈볼라와의 충돌 중에 이스라엘의 블루 라인 침범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이스라엘 당국에 그러한 위반을 중단하고 블루 라인을 완전히 존중할 것을 촉구"했다. 2001년 데 미수라는 헤즈볼라가 블루 라인을 위반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레바논 총리에게도 유사한 우려를 표명하며, 유엔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 철수를 완료했다고 인증한 유엔 결의안 425를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1월 28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83은 레바논 정부에 블루 라인을 포함하여 해당 지역 전체에 충분한 수의 레바논 군대 및 보안군을 배치하여 해당 지역 전체에 평온한 환경을 보장하고, 자국 영토 및 자국 영토에서 무력 사용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는 등 남부 전역에서 유일하고 효과적인 권한을 완전히 확장하고 행사할 것을 촉구했다.
2006년 1월 23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레바논 정부에 자국 영토를 더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민병대를 해산하는 데 더 많은 진전을 이루도록 촉구하는 한편, 시리아에도 이러한 노력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1월 의장인 탄자니아의 어거스틴 마히가가 낭독한 성명에서, 이사회는 또한 시리아에 레바논으로의 무기 및 인력 이동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2004년 9월 3일, 국회는 친시리아 대통령 에밀 라후드가 임기 제한을 9년으로 연장하여 3년 더 임기를 연장할 수 있도록 헌법을 수정하는 데 찬성 96표, 반대 29표로 투표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시리아가 라후드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헌법을 수정하도록 레바논 의회에 압력을 가한 두 번째 사례로 간주했다(첫 번째는 LAF 사령관에서 사임한 직후인 1998년에 그를 선출하도록 허용한 경우). 세 명의 내각 장관이 투표에 불참했고 나중에 사임했다. 미국은 시리아가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 국회에 압력을 행사했다고 비난했고, 많은 레바논인들은 이를 거부하며 헌법과 그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에는 마론파의 가장 저명한 종교 지도자인 마론파 총대주교 나스랄라 부트로스 스페이르와 드루즈인 지도자 왈리드 줌블라트가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개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라피크 하리리 총리가 마침내 이를 수락한 것으로 보였고, 그의 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이 개정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그는 그 직후 암살되었고, 삼나무 혁명을 촉발했다. 이 개정은 레바논에서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촉구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59와 불일치한다.
2004년 10월 1일, 에밀 라후드의 임기 연장에 반대하는 주요 반대 목소리 중 하나였던, 최근 사임한 드루즈인 출신 전 장관 마르완 하마데가 베이루트 자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량 속도를 늦추는 동안 자동차 폭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하마데 씨와 그의 경호원은 부상을 입었고, 그의 운전사는 이 공격으로 사망했다. 드루즈인 지도자 왈리드 줌블라트는 침착함을 호소했지만, 자동차 폭탄은 반대파에게 보내는 명백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이 공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2004년 10월 7일,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안전 보장 이사회에 시리아가 레바논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아난 씨는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적대 행위가 종료된 지 14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철수한 지 4년이 지난 지금, 관련 당사자 모두 과거의 남은 잔재를 제쳐두어야 할 때입니다. 외국군 철수와 민병대 해산 및 무장 해제는 레바논 역사의 슬픈 장을 완전히 종식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004년 10월 19일, 유엔 사무총장의 보고서에 따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유일한 아랍 회원국인 알제리의 지지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만장일치로 시리아에 결의안 1559에 따라 레바논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 10월 20일, 라피크 하리리 총리가 사임했고, 다음 날 친시리아파 오마르 카라미 전 총리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2005년 2월 14일, 하리리 전 총리는 자동차 폭탄 공격으로 암살되어 21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했다. 2005년 2월 21일, 수만 명의 레바논 시위대는 시리아의 평화 유지군 철수를 요구하고 시리아와 친시리아 대통령 라후드를 살인 혐의로 비난하는 시위를 암살 현장에서 열었다.
하리리의 살해는 시리아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증가시켰다.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공동 성명에서 살인을 규탄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 1559의 완전한 이행을 촉구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아일랜드 경찰 부국장 피터 피츠제럴드가 이끄는 조사팀을 암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아랍 연맹 수장 암르 무사는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가 2년 동안 단계적인 철수를 약속했다고 밝혔지만, 시리아 정보부 장관 마흐디 다클랄라는 무사 씨가 시리아 지도자를 오해했다고 말했다. 다클랄라 씨는 시리아가 단지 군대를 레바논 동부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독일,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모두 시리아군 철수를 촉구했다.
지역 레바논의 압력도 높아졌다. 시리아 점령에 반대하는 일일 시위가 25,000명으로 증가함에 따라 일련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시위는 아랍 세계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고, 90년대에는 대부분의 반시리아 시위대가 주로 기독교인이었지만, 새로운 시위는 기독교인과 수니파가 주도했다. 2월 28일, 친시리아 총리 오마르 카라미의 정부가 사임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카라미 씨는 발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정부가 이 나라의 선을 원하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간절히 원합니다." 베이루트 순교자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은 발표를 환호했고, "카라미가 무너졌고, 라후드, 그리고 당신 바샤르의 차례가 올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야당 의원들 또한 카라미의 사임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리아의 완전한 철수를 계속 압박했다. 2004년 10월 1일 유사한 자동차 폭탄 테러에서 살아남은 전 장관이자 국회의원인 마르완 하마데는 "저는 이 정부를 선동, 태만, 최소한의 과실, 그리고 계획의 은폐, 계획 실행이 아닌 것으로 고발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틀 후 시리아 지도자 바샤르 아사드는 군대가 "향후 몇 개월 내에" 레바논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대해 야당 지도자 왈리드 줌블라트는 다마스쿠스에서 철수에 대한 더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좋은 제스처이긴 하지만 '향후 몇 개월'은 매우 모호합니다. 명확한 일정이 필요합니다."
3월 5일, 시리아 지도자 아사드는 텔레비전 연설에서 시리아가 군대를 레바논 동부의 베카 계곡으로 철수시키고, 그 다음에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국경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사드는 레바논에서 시리아군의 완전한 철수에 대한 일정을 제공하지 않았다. 14,000명의 군인과 정보 요원이 있었다. 한편,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레바논이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저항이 필요하다"며 "저항은 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유엔 결의안 1559에 반대하는 "대규모 대중 집회"를 화요일에 열 것을 촉구했고, "유엔 결의안의 모든 조항은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지만, 이제 범죄에 대해 보상을 받고 모든 요구를 충족하는 이스라엘 적에게 무료 서비스를 제공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나스랄라의 요청에 반대하여 3월 7일 월요일에는 최소 70,000명(일부 추산은 두 배)이 중앙 순교자 광장에 모여 시리아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했다.
다음 날, 친시리아 시위는 헤즈볼라가 베이루트의 리아드 솔 광장에 400,000~500,000명의 시위대를 집결하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이들 대부분은 시아파가 다수인 레바논 남부와 동부 베카 계곡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 이 권력 과시는 헤즈볼라의 영향력, 부, 그리고 시리아가 민병대 보유를 허용한 유일한 레바논 정당으로서의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나스랄라는 연설에서 헤즈볼라의 민병대 해산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59를 외세의 개입이라고 비난했다. 나스랄라는 또한 "이 적에게 다시 말한다. 여기에는 당신의 자리가 없고 우리 사이에는 당신의 삶이 없다.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고 말하며 이스라엘 파괴에 대한 이전의 요청을 반복했다. 헤즈볼라가 매우 성공적인 집회를 조직했지만, 야당 지도자들은 헤즈볼라가 레바논 정부와 시리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신속하게 지적했다. 민주주의 지지 시위대는 시위자들이 되돌아가거나 순교자 광장까지 먼 거리를 행진해야 하는 도로 봉쇄에 대처해야 했던 반면, 헤즈볼라는 사람들을 리아드 솔 광장으로 직접 버스로 실어올 수 있었다. 야당 지도자인 도리 샤문은 "우리 시위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도보로 도착하는 반면, 헤즈볼라 시위에서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도착한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야당 의원은 친시리아 정부가 사람들에게 참석을 강요했고 일부 보도에 따르면 시리아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버스로 실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루트로 향하는 산길에서는 시리아 번호판이 달린 버스 한 대만이 수도로 향하는 친시리아 지지자들의 호송대에서 발견되었고, 헤즈볼라 관계자들은 혐의를 부인했다.
야당 국회의원 아크람 셰하예브는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들이 이 사람들에게 와서 오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여기로 데려온 반면, 야당의 지지자들은 스스로 여기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위는 자발적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의가 있습니다. 그들의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했다.

하리리의 살해 한 달 후, 거대한 반시리아 시위가 베이루트의 순교자 광장에 모였다. 여러 뉴스 매체는 군중을 800,000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수니파 무슬림, 기독교인 및 드루즈인 공동체를 위한 힘의 과시였다. 이 시위는 지난 주 헤즈볼라가 조직한 대부분 시아파 친시리아 시위의 두 배 규모였다. 하리리의 여동생이 레바논이 "점령된 골란 고원에서 주권을 회복하고 시리아를 지지해야 한다"는 친시리아 노선을 취하자, 군중은 그녀를 조롱했다. 이러한 정서는 레바논과 시리아의 이해 관계가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헤즈볼라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자밀 알 사이예드는 레바논 안보 부대에서 시리아의 동맹이었으며, 마지막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에서 철수하기 불과 하루 전인 4월 25일에 사임했다.
2005년 4월 26일, 마지막 250명의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을 떠났다. 철수 기념식에서 시리아 참모총장 알리 하비브는 시리아 대통령이 레바논 군대가 "견실한 국가적 기반 위에서 재건되어 국가를 보호할 수 있게 된 후" 그의 군대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세네갈의 무하마두 칸지가 이끄는 유엔군은 레바논으로 보내져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559호에 따라 군대 철수를 확인했다. 레바논의 이마드 앙카가 이들을 안내했다.
시리아가 철수한 후, 시리아에 반대하는 진영에 속한 레바논 정치인과 언론인에 대한 일련의 암살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폭탄 테러가 발생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와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시리아가 레바논의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암살에 대한 국내외의 격렬한 비난 속에 레바논에서 철수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유엔 조사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유엔 조사관 데틀레프 메흘리스는 레바논의 시리아 정보 기구를 지목했지만, 유엔 레바논 국제 독립 조사 위원회(UNIIIC)가 암살 배후로 의심하는 시리아 관리들에게 완전한 접근 권한을 아직 부여받지 못했다. UNIIIC는 최근 보고서에서 시리아 관리들이 위원회에 이전에 제공한 증언을 철회한 증인의 가까운 친척들을 체포하고 위협했으며, 조사를 받은 두 명의 시리아 용의자가 레바논에 대한 모든 시리아 정보 문서를 불태웠다고 밝혔다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리아에 반대하는 진영과 관련된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민간 지역 사회에 대한 폭탄 공격 캠페인은 유엔과 다른 곳에서 시리아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05년 12월 15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UNIIIC의 임기를 연장했다.
2005년 12월 30일, 시리아의 전 부통령 압둘 할림 카담은 "하리리가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위협을 받았다"고 말했다. 시리아가 레바논에서 철수하기 전에 카담 씨는 시리아의 레바논 정책을 담당했고, 시리아가 레바논의 자원을 남용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카담이 부패와 협박의 역사를 청산할 기회를 잡았다고 믿는다.
의회는 2005년 봄에 선거가 치러진 이후 첫 번째 회기에서 전 레바논 군대 군벌 사미르 게가의 석방을 찬성했다. 게가는 내전 기간 동안 그 분쟁과 관련된 범죄로 기소된 유일한 지도자였다. 미셸 아운의 귀환으로 2005년 2월 14일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가 암살된 후, 국가를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처를 치유할 적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가는 2005년 7월 26일에 석방되어 의료 검사를 받고 요양하기 위해 밝혀지지 않은 유럽 국가로 즉시 떠났다.
레바논 삼나무 혁명 기간 동안 헤즈볼라는 친 시리아 집회를 조직했다. 헤즈볼라는 2005년 선거 이후 레바논 정부의 일부가 되었지만, 민병대를 해산하라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1559의 요구에 대해 기로에 서 있다. 2005년 11월 21일,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의 국경 전체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철수 이후 5년 반 만에 가장 격렬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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