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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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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존재했던 USFL(United States Football League)의 미식축구팀이다. 샌디에이고를 연고지로 할 예정이었으나, 경기장 사용 문제로 인해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1983년, 1984년 두 시즌 동안 휴 캠벨 감독과 쿼터백 톰 램지, 스티브 영 등을 영입했으나, 저조한 관중 동원과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5년에는 USFL이 구단을 인수하여 운영했으나, 선수 부상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하위를 기록했고, 결국 1986년 USFL 해체와 함께 팀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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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현재 상태해체됨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로고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로고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헬멧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헬멧
창단 연도1982년
해체 연도1985년
연고지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유니폼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유니폼
상징색익스프레스 파랑, 은색, 버건디, 하양
별칭없음
구단 정보
리그미국 풋볼 리그 (1983–1985)
콘퍼런스서부 콘퍼런스 (1984–1985)
디비전퍼시픽 디비전 (1983–1984)
역사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1983–1985)
홈구장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1983–1985)
운영진
구단주1983 알란 하먼 & 빌 다니엘스
1984 J. 윌리엄 올덴버그
1985 USFL
감독1983 휴 캠벨 (8–10)
1984–1985 존 하들 (14–24)
성적
리그 우승0회
콘퍼런스 우승0회
디비전 우승1회 (1984년)
플레이오프 진출1984년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1회

2. 역사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는 USFL(United States Football League) 소속 미식축구팀으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활동했다. 본래 샌디에이고에 창단될 예정이었으나 경기장 확보 문제로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했다.[1] 창단 초기부터 선수 영입 난항과 저조한 흥행을 겪었으며, 특히 1984년 팀을 인수한 구단주 J. 윌리엄 올덴버그의 대규모 투자에도 불구하고 재정 스캔들에 휘말리며 팀 운영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다.[5][9] 결국 1985 시즌에는 리그가 직접 팀을 운영하는 파행을 겪었고, 시즌 종료 후 운영이 중단되었다. 이후 USFL 자체가 1986년 시즌을 취소하고 해체되면서 익스프레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 창단 배경 (1982)

케이블 TV 사업의 선구자인 앨런 하몬과 빌 다니엘스는 1982년 USFL(United States Football League) 창설 발표와 함께 샌디에이고에 연고를 둔 구단 운영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시는 기존에 잭 머피 스타디움을 사용하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야구), 샌디에고 차저스(NFL), 소커스(NASL)의 반대로 인해 경기장 임대 계약을 승인하지 않았다.[1] 샌디에이고 내에서 사용 가능한 다른 야외 경기 시설은 차저스의 옛 홈구장이었던 발보아 스타디움뿐이었다. 하지만 1915년에 지어진 이 경기장은 시설이 노후했고, 1967년 차저스가 잭 머피 스타디움으로 이전한 뒤로는 주로 고등학교 팀들이 사용하는 수준이어서 프로 스포츠 리그 팀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상태였다.[1]

시즌 개막까지 8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몬과 다니엘스는 리그의 승인을 받아 연고지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리그 관계자들은 하몬과 다니엘스가 케이블 TV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 리그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데이비드 딕슨이 구상한 리그 운영 계획이 텔레비전 중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이 과정에서 리그는 기존에 로스앤젤레스 USFL 구단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짐 조셉에게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권리를 하몬과 다니엘스에게 양보하도록 했다. 조셉은 자신의 구단을 애리조나주 피닉스로 이전하여 애리조나 랭글러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단했다.[1]

2. 2.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시대 (1983-1985)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는 USFL 역사상 첫 번째 선수 지명권을 사용하여 쿼터백 댄 마리노를 지명했으나, 마리노는 마이애미 돌핀스와 계약했다. 또한 에릭 디커슨 영입에도 적극적이었지만, 디커슨은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선택했다. 1983년 4월에는 텔레비전 스타 리 메이저스가 공동 구단주로 합류했다.

초대 감독으로는 캐나디안 풋볼 리그(CFL)의 에드먼턴 에스키모스에서 6년 연속 그레이 컵 결승 진출(5회 우승)을 이끈 전설적인 인물 휴 캠벨을 영입했다. 1983 시즌 팀은 경쟁력 있는 수비력을 갖추었으나 공격 라인의 약점으로 인해 리그 최악의 러싱 공격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또한 거대한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지만, 평균 관중은 19,000명에 그쳤고 TV 시청률도 저조하여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1]

1984 시즌을 앞두고 초대 구단주였던 빌 하몬과 빌 다니엘스는 팀을 모기지 은행가 J. 윌리엄 올덴버그에게 매각했다. 올덴버그는 베테랑 NFL 임원 돈 클로스터먼을 단장으로, 전 차저스램스 쿼터백 존 헤들을 감독으로 영입하며 대대적인 투자를 예고했다.[1][5] 올덴버그는 "돈은 문제가 아니다"라며 클로스터먼에게 최고의 선수단 구성을 주문했고, 특히 대학 최고의 공격 라인맨 4명을 포함해 31명의 선수를 총 1200만달러에 영입했다.[5] 가장 큰 영입은 브리검 영 대학교 출신 쿼터백 스티브 영으로, 당시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대 규모로 알려진 10년 4000만달러 계약(실제 가치는 연금 형태로 지급되어 명시액보다 적었음)을 맺었다.

화려한 선수단에도 불구하고 익스프레스는 10승 8패의 성적으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미시간 팬서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3번의 연장전 끝에 승리하며 프로 풋볼 역사상 가장 긴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애리조나 랭글러스와의 컨퍼런스 챔피언십에서는 패배했다. 관중 동원은 여전히 부진하여 평균 15,361명으로 감소했고, 팀은 약 1500만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부터 올덴버그의 재정 문제가 연방 수사국(FBI)의 조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5][9] 올덴버그는 결국 시즌 막바지에 팀 운영 자금 지원 불가 통보를 했고, 리그는 비상 자금과 다른 구단주들의 지원으로 간신히 시즌을 마쳤다.[5][1]

1985 시즌은 혼란 속에서 시작되었다. 올덴버그의 운영 포기 이후 제이 룰리에에게 팀을 매각하려 했으나 룰리에 역시 재정 능력 부족이 드러나면서[1], 결국 리그가 직접 팀을 운영하게 되었다. 다른 구단주들이 운영 자금을 지원했지만 선수 급여 외에는 사용할 자금이 거의 없어 팀 운영은 파행을 거듭했다. 훈련 캠프 중 호텔에서 쫓겨나거나 수도 공급이 끊기는 등 기본적인 운영조차 어려웠고[1], 사무실 운영비나 선수들의 테이핑 비용조차 부족했다.[1][5]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수단은 부상과 사기 저하에 시달렸고, 팀은 9연패를 포함해 3승 15패라는 리그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부상 선수를 대체할 자원이 없어 비정상적인 선수 기용이 이어졌고, 스티브 영이 러닝백으로 뛰는 상황까지 발생했다.[1][5] 관중 수는 경기당 평균 8,442명으로 더욱 급감했으며, 마지막 홈 경기를 더 작은 규모의 로스앤젤레스 피어스 칼리지 경기장에서 치르는 실험을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11][1][5] 1985 시즌은 익스프레스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 2. 1. 1983 시즌

익스프레스는 캐나디안 풋볼 리그(CFL)의 에드먼턴 에스키모스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휴 캠벨을 초대 감독으로 영입했다. 캠벨은 에스키모스를 맡아 6년 동안 팀을 6번 연속 그레이 컵 결승으로 이끌었고, 마지막 5번을 우승했다. 텔레비전 스타 리 메이저스는 1983년 4월에 공동 소유자가 되었다.

1983년 익스프레스 팀은 쿼터백 톰 램지와 마이크 레이가 이끌었고 평균 이상의 수비를 갖춘 경쟁력 있는 팀이었다. 두 명의 수비 백이 무릎 부상으로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익스프레스는 리그 전체 수비에서 5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엉성한 공격 라인은 팀의 공격력을 제한했다. 익스프레스는 리그 최악의 러싱 공격을 보였다. 뉴저지 제너럴스의 허셜 워커는 1983년에 익스프레스 팀 전체보다 72야드를 더 돌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시픽 디비전은 너무 약해서 익스프레스는 시즌 종료 2주를 앞두고 디비전 타이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16주차와 17주차에 각각 뉴저지 제너럴스워싱턴 페더럴스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익스프레스는 퍼시픽 디비전 타이틀을 놓치고 오클랜드 인베이더스가 1983년 마지막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남부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익스프레스를 대체로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경기당 19,000명의 관중만을 동원했고, 마지막 4경기에서 17,000명을 넘지 못했다.[1] 당시 95,000명에 가까운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콜리세움의 거대한 규모 때문에 관중은 더 작아 보였다. 프로 풋볼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NFL 팀(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 그리고 그 이전의 램스)에게도 너무 컸고, USFL 팀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너무 넓어서 USFL 기준으로는 괜찮은 규모인 25,000명의 관중조차도 이 환경에 묻혀버렸다. 또한 로스앤젤레스 시장에서 USFL 경기의 텔레비전 시청률이 너무 낮아 리그 평균 텔레비전 시청률을 상당히 낮췄다.[1]

2. 2. 2. 1984 시즌

빌 하몬과 빌 다니엘스는 구단을 매물로 내놓았고, 모기지 은행가 J. 윌리엄 올덴버그에게 팀을 750만달러에 매각했다. 인수 직후 올덴버그는 베테랑 NFL 임원 돈 클로스터먼을 단장으로, 전 차저스램스 쿼터백 존 헤들을 헤드 코치로 영입했다.[1][5]

올덴버그는 클로스터먼에게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선수 40명으로 로스터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클로스터먼은 두 달 만에 총 1200만달러를 들여 31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특히 대학 풋볼 최고의 공격 라인맨 4명을 총 800만달러에 계약하여, 익스프레스는 프로 풋볼 전체에서 가장 비싼 공격 라인을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 계약한 키커 토니 젠데자스는 선수 주차장에 즐비한 고급 자동차들을 보고 놀랐다고 회상했다.[5]

클로스터먼과 올덴버그의 가장 큰 영입 성과는 브리검 영 대학교 출신 쿼터백 스티브 영이었다. 에이전트 레이 스타인버그는 영과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프로 스포츠 계약으로 알려진 10년 계약, 4000만달러 이상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 금액은 향후 42년 동안 매년 100만달러씩 지급하는 연금 형태로 구성되어, 실제 계약 가치는 명시된 액수보다 상당히 적었다.

NFL 역시 익스프레스의 풍부한 선수 자원에 주목했다. 1984년 USFL 및 CFL 선수 NFL 보충 드래프트에서 익스프레스 소속 선수 20명이 지명되었으며, 이 중 1라운드에서만 11명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올스타급 선수 구성에도 불구하고, 팀은 같은 연고지의 레이더스(당시 슈퍼볼 우승팀)와 램스의 인기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익스프레스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15,361명으로, 전년도의 19,713명보다 감소했다. 세 차례 홈 경기에서는 관중 수가 11,000명 미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저조한 관중 수입으로 인해 팀은 약 1500만달러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압도적인 재능과 리그 최고 수준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젊은 선수들은 프로 경기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여러 부상으로 인해 첫 4번의 홈 경기에서 패배하는 등 고전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0승 8패로 마감했다. 이는 퍼시픽 디비전에서 애리조나 랭글러스와 동률을 이루기에 충분했고, 익스프레스는 타이브레이커 규정에 따라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미시간 팬서스와 맞붙었다. 이 경기는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열렸으나 7,964명의 관중만이 입장하여 거대한 경기장이 텅 비어 보였다. 경기는 프로 풋볼 역사상 가장 긴 경기로 기록되었는데, 3번의 연장전 끝에 경기 시작 후 93분 33초 만에 익스프레스가 멜 그레이의 결승 터치다운으로 27-21 승리를 거두었다. (멜 그레이는 이 플레이 과정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컨퍼런스 챔피언십 상대는 휴스턴 갬블러스를 꺾고 올라온 애리조나 랭글러스였다. 본래 익스프레스의 홈 구장인 콜리세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1984년 하계 올림픽 준비로 인해 경기는 랭글러스의 홈인 애리조나주 템피선 데블 스타디움으로 옮겨졌다. 7월 애리조나의 낮 기온이 37°C 이상이었기 때문에, 경기는 선수 보호를 위해 야간 경기로 변경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 동부 해안 기준으로는 오후 11시 30분에 경기가 시작되어 TV 시청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해가 진 후에도 경기 시작 시 기온은 30°C를 넘었다.) 경기는 33,188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익스프레스는 랭글러스에게 23-35로 패배하여 시즌을 마감했다.

주차요일날짜PT현지상대경기장관중TV 중계최종 점수승/패기록
정규 시즌
1일요일1984년 2월 26일덴버 골드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32,08210–270–1
2일요일1984년 3월 4일버밍햄 스탤리온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4,789ABC14–210–2
3일요일1984년 3월 11일오클랜드 인베이더스오클랜드-앨라메다 카운티 콜리세움23,479ABC10–01–2
4토요일1984년 3월 17일샌안토니오 건슬링거스알라모 스타디움9,82113–122–2
5일요일1984년 3월 25일잭슨빌 불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8,0007–132–3
6일요일1984년 4월 1일뉴저지 제너럴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9,853ABC10–262–4
7월요일1984년 4월 9일덴버 골드마일 하이 스타디움19,115ESPN27–352–5
8토요일1984년 4월 14일멤피스 쇼보츠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0,049ESPN23–17 연장3–5
9금요일1984년 4월 20일시카고 블리츠솔저 필드11,71329–493–6
10월요일1984년 4월 30일휴스턴 갬블러스휴스턴 애스트로돔30,727ESPN27–24 연장4–6
11토요일1984년 5월 5일피츠버그 모울러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6,78920–125–6
12일요일1984년 5월 13일필라델피아 스타스베테랑스 스타디움22,391ABC14–185–7
13일요일1984년 5월 20일미시간 팬서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0,193ABC14–176–7
14토요일1984년 5월 26일애리조나 랭글러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1,702ESPN24–177–7
15일요일1984년 6월 3일워싱턴 페더럴스RFK 스타디움5,26335–218–7
16일요일1984년 6월 10일오클라호마 아웃로스스켈리 스타디움22,017ABC17–109–7
17금요일1984년 6월 15일오클랜드 인베이더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4,79424–1910–7
18토요일1984년 6월 23일애리조나 랭글러스선 데블 스타디움35,258ESPN10–3510–8
플레이오프
지구
플레이오프
토요일1984년 6월 30일미시간 팬서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7,964ABC27–21 3 연장
컨퍼런스
챔피언십
토요일1984년 7월 7일애리조나 랭글러스선 데블 스타디움33,188ABC23–35



시즌 중반, 연방 수사국(FBI)이 올덴버그의 재정 거래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 타임스''의 여러 폭로 기사를 통해 올덴버그가 저축 및 대출 기관을 이용한 의심스러운 거래 전력이 있으며, 그가 주장해 온 만큼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5][9] USFL은 잠재적 구단주에 대한 철저한 실사를 강조했지만, 리그 확장과 로스앤젤레스라는 거대 시장에 구단주를 확보하려는 조급함 속에서 올덴버그의 재정 상태를 피상적으로 검토하는 데 그쳤다. 올덴버그가 1억달러의 순자산을 주장했지만, 이는 부풀려진 수치였다.[5][1]

시즌 막바지에 올덴버그는 리그 관계자들에게 더 이상 구단 운영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리그는 비상 자금 명목으로 각 구단주에게 요구했던 130만달러의 신용장을 사용하여 익스프레스의 비용을 충당했다.[5] 또한 다른 구단주들이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팀 운영을 위해 50만달러를 추가로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덴버그가 장비 회사에 1.3만달러를 지불하지 못해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 이후 장비가 압류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올덴버그가 팀을 떠날 무렵에는 사무실 직원과 조경업자의 임금조차 체불된 상태였다.[1]

2. 2. 3. 1985 시즌

시즌 중반 올덴버그의 재정 문제가 심화되면서[5][9] 리그가 팀 운영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올덴버그가 더 이상 팀 운영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고 밝히자[5], 리그는 ABC 스포츠와의 텔레비전 계약 유지를 위해 로스앤젤레스 팀을 존속시켜야 했기에[1], 다른 구단주들의 출자로 1985 시즌 운영을 결정했다. 이는 부동산 재벌 제이 룰리에에게 팀을 매각하려던 시도가 룰리에의 재정 능력 부족 의혹으로 무산된[1] 직후였다. 빌 맥셰리가 명목상 팀 사장을 맡았다.

리그 구단주들은 팀 운영을 위해 50만달러씩을 분담했으나, 이는 선수 급여 지급 외에는 거의 사용될 수 없었다. 특히 부상 선수를 대체할 자금은 배정되지 않았다.[1] 팀은 재정난으로 인해 기본적인 운영조차 어려움을 겪었다. 훈련 캠프 중 비용 미납으로 호텔에서 쫓겨나고, 수도 요금 미납으로 물 공급이 끊기는가 하면[1], 사무실 전화와 전등이 끊기거나 우편 요금을 내지 못해 시즌 티켓 갱신조차 외부 회사에 의존해야 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치어리더를 해고하고, 경기장 아나운서 없이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1][5] 선수들은 고급 차를 타고 구찌 가방을 들고 팀 본부에 나타났지만, 정작 훈련장 잔디는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1][5]

시즌 초반 휴스턴 갬블러스와의 개막전에서 20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4-33으로 패하는 등[10] 3번의 접전 끝 패배 이후 잠시 3승을 거두며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스티브 영을 포함한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팀은 급격히 무너졌다.[5] 선수단 내부에서는 리그가 팀을 계속 운영할지, 특히 1986년 가을 이전 계획에 팀이 포함될지에 대한 불안감이 퍼졌고, 이는 NFL 진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상을 우려한 소극적인 플레이로 이어지기도 했다.[1][5] 팀은 이후 9연패를 당하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고, 이 과정에서 덴버 골드에게 51-0으로 패하며 리그 역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 기록을 세웠다. 부상 선수를 대체할 자원이 없어 39세 트럭 운전사를 선발 태클로 기용하거나[1], 올랜도 레니게이드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스티브 영이 후반전 대부분을 러닝백으로 뛰는 등[1][5] 비정상적인 선수 운용이 불가피했다.

계속되는 저조한 관중 동원 문제(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의 8경기 평균 관중 8,442명) 해결과 잠재적 인수자 물색을 위해, 리그 커미셔너 해리 어셔는 마지막 홈 경기를 샌 페르난도 밸리에 위치한 로스앤젤레스 피어스 칼리지 캠퍼스의 존 셰퍼드 스타디움에서 치르도록 했다.[11] 그러나 경기 당일 팀 버스 운전사가 현금 선불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하는 소동 끝에 간신히 경기장에 도착했고[1], 경기장 상태는 돌과 구덩이가 많고 일부는 흙으로 덮인 열악한 수준이었다.[1][5] 8,200명의 관중이 애리조나 아웃로스에게 21-10으로 패하는 것을 지켜봤는데[1], 이는 콜리세움 마지막 두 경기보다는 많았지만 경기장 수용 인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실험은 리그에 큰 당혹감을 안겼다.[1][5]

시즌 마지막 경기인 올랜도 레니게이드 원정에서도 17-10으로 패배했으며, 이 경기에서도 영은 러닝백으로 뛰어야 했다.[1][5] 경기 후에는 전세 비행기 조종사가 비용 선지급을 요구하여 선수단이 올랜도에 발이 묶일 뻔한 일도 있었다.[5] 최종 성적은 3승 15패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

요일날짜PT현지상대경기장관중방송최종 점수승/패기록
프리시즌
1토요일1985년 2월 2일vs. 덴버 골드롱비치, 캘리포니아17–17T0–0–1
2경기 없음
3토요일1985년 2월 16일vs. 포틀랜드 브레이커스존 셰퍼드 스타디움
로스앤젤레스 피어스 칼리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5,50038–171–0–1
정규 시즌
1일요일1985년 2월 24일휴스턴 갬블러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8,82833–340–1
2토요일1985년 3월 2일at 포틀랜드 브레이커스시빅 스타디움25,232ESPN10–140–2
3일요일1985년 3월 10일at 뉴저지 제너럴스자이언츠 스타디움58,741ABC24–350–3
4토요일1985년 3월 16일샌안토니오 건슬링어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0,41038–71–3
5토요일1985년 3월 23일at 애리조나 아웃로스선 데블 스타디움20,835ESPN13–271–4
6일요일1985년 3월 31일오클랜드 인베이더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1,6196–301–5
7일요일1985년 4월 7일볼티모어 스타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5,637ABC6–171–6
8일요일1985년 4월 14일at 휴스턴 갬블러스휴스턴 애스트로돔20,19318–17 OT2–6
토요일1985년 4월 20일at 덴버 골드마일 하이 스타디움연기됨; 4월 21일 재편성.
9일요일1985년 4월 21일at 덴버 골드마일 하이 스타디움13,1650–512–7
10토요일1985년 4월 27일포틀랜드 브레이커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8,41017–123–7
11토요일1985년 5월 4일탬파베이 반디츠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4,912ESPN14–243–8
12토요일1985년 5월 11일at 오클랜드 인베이더스오클랜드-알라메다 카운티 콜리세움12,482ESPN6–273–9
13일요일1985년 5월 19일버밍햄 스탤리온스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4,6587–443–10
14토요일1985년 5월 25일at 잭슨빌 불스게이터 볼 스타디움51,033ESPN7–213–11
15목요일1985년 5월 30일덴버 골드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3,059ESPN20–273–12
16일요일1985년 6월 9일at 샌안토니오 건슬링어스알라모 스타디움4,96327–313–13
17토요일1985년 6월 15일vs. 애리조나 아웃로스존 셰퍼드 스타디움,
로스앤젤레스 피어스 칼리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8,20010–213–14
18금요일1985년 6월 21일at 올랜도 레니게이드캠핑 월드 스타디움22,865ESPN10–173–15


2. 3. 해체 (1986)

익스프레스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즌 중반, 연방 수사국(FBI)이 구단주 올덴버그의 재정 거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 타임스''는 여러 차례 폭로 기사를 통해 올덴버그가 저축 및 대출 기관을 동원해 의심스러운 거래를 일삼았으며, 알려진 것만큼 자산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냈다.[5][9]

USFL은 리그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잠재적 구단주들에게 철저한 실사를 거치고 엄격한 자본 요건을 충족하도록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983년 시즌 이후 리그를 18개 팀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특히 리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인 로스앤젤레스에 안정적인 구단주를 확보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기존 구단주 후보였던 하몬과 다니엘스가 물러나고 올덴버그가 유일한 후보로 남자, 리그는 그의 재정에 대해 형식적인 검토만 진행했다. 올덴버그는 리그 내에서 '문제아'로 통했지만, FBI와 언론 조사를 통해 그가 사실상 빈털터리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를 사기꾼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익스프레스 인수 신청 당시 1억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조사 결과 이는 대부분 부동산을 할인된 가격에 매입한 뒤 자신이 소유한 소규모 은행에 실제 가치의 10배 가격으로 되파는 방식으로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5][1]

시즌이 끝나갈 무렵, ''타임스''의 보도가 나온 지 며칠 만에 올덴버그는 리그 관계자들에게 더 이상 익스프레스의 운영 자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리그는 모든 구단주에게 비상 상황 대비를 위해 130만달러 상당의 신용장을 예치하도록 요구했는데, 리그는 익스프레스의 신용장을 사용하여 밀린 비용을 충당했다.[5] 구단주들은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팀 운영을 위해 추가로 5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족하여, 올덴버그가 장비 회사에 1.3만달러를 지불하지 못해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 이후 장비가 압류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올덴버그가 팀을 떠날 무렵에는 사무실 직원들과 조경업자들의 임금조차 체불된 상태였다.[1]

10월, 부동산 재벌이자 휴스턴 갬블러스의 소수 지분 소유주였던 제이 룰리에가 팀 인수에 대한 예비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익스프레스를 둘러싼 혼란은 계속되었고, 리그 관계자들과 기자들은 뛰어난 선수단에도 불구하고 팀이 언제, 어떻게 붕괴될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예상된 붕괴는 1985년 2월 현실이 되었다. 룰리에 측 변호사가 리그 전무 이사이자 법률 고문인 빌 맥셰리와 룰리에의 재정 상태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리자, 리그 관계자들은 의심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결과, 룰리에 역시 올덴버그처럼 자신의 순자산에 대해 리그를 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거의 가진 돈이 없었으며, 팀을 훈련 캠프에 보내기 위해 리그 관리 계정에 남아있던 자금을 사용했다. 결국 리그 관계자들은 룰리에를 퇴출시키고 팀 운영권을 직접 장악했다.[1]

리그는 ABC 스포츠와의 텔레비전 중계 계약 조건 때문에 익스프레스를 즉시 해체할 수 없었다. 계약에는 미국 3대 시장(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에 팀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4년 시즌 후 시카고 블리츠가 해체되었을 때 ABC는 문제를 삼지 않았지만, 리그 소유주들은 익스프레스마저 사라지면 ABC가 중계 계약을 파기하여 리그 전체가 존폐 위기에 처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익스프레스의 막대한 선수 급여 부담 때문에 새로운 인수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결국 다른 구단주들은 1985년 시즌 동안 리그의 보호 아래 익스프레스를 운영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빌 맥셰리가 명목상 팀 사장을 맡았고, 각 구단주들은 팀 운영을 위해 50만달러씩을 각출했다. 이 자금은 선수 급여를 지급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부상 선수를 대체하는 등 다른 운영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1]

결국 익스프레스를 인수할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한 USFL은 1986년 시즌에 팀 운영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설령 리그가 NFL과의 소송에서 승리하여 1986년 가을 시즌 운영 자금을 확보했더라도, 1985년 내내 익스프레스를 괴롭혔던 재정 문제와 운영 불안정성을 고려할 때 팀이 다시 복귀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게다가 가을 시즌으로 전환할 경우, 익스프레스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두 NFL 팀(레이더스, 램스)과 직접 경쟁해야 했으며, 만약 콜리세움으로 복귀한다면 레이더스 및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트로잔스 축구팀과 경기장을 공유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USFL은 1986년 시즌 전체를 취소했고, 다시는 리그가 열리지 않으면서 익스프레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주요 선수

부문선수기록연도
러싱 야드케빈 넬슨830 야드1984
리시빙 야드조조 타운셀889 야드1984
패싱 야드스티브 영2,361 야드1984


4. 역대 홈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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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사용기간수용인원장소비고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1983년~1985년93,607명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5. 기타


  • 1985년 시즌 후, 스티브 영과 게리 짐머만은 USFL을 떠나 NFL에서 활동했으며, 두 선수 모두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은 2013년 제안된 A-11 풋볼 리그 팀 이름으로 잠시 고려되었으나, 2014년 4월 캘리포니아의 노동자 보상 문제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 리그 해체 직전, 팀의 마지막 마케팅 활동 중 하나는 USC 학생들에게 시즌권을 100USD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 팀의 최고 운영 책임자(COO)는 전 NFL 스타 선수였던 프레드 "컬리" 모리슨이었다.
  • 팀의 약칭인 'LAX'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IATA 공항 코드와 같아 이를 이용한 말장난이 있었으며, 이 약칭은 나중에 XFL의 로스앤젤레스 익스트림 팀에서도 사용되었다.
  • 스티브 영은 익스프레스 소속 시절, 프로 미식축구 역사상 최초로 한 경기에서 약 274.32m 이상 패스하고 약 91.44m 이상 러싱을 기록한 쿼터백이 되었다.
  • 훗날 프로 레슬러로 활동한 리사 모레티는 익스프레스의 치어리더 출신이다.

참조

[1] 서적 The United States Football League, 1982–1986 McFarland & Company 2017
[2] 웹사이트 statscrew.com 1983 Los Angeles Express Game-by-Game Results https://www.statscre[...]
[3] 웹사이트 usflsite.com 1983 USFL Season http://www.usflsite.[...]
[4] 웹사이트 profootballarchives.com 1983 Los Angeles Express (USFL) https://www.profootb[...]
[5] 서적 Football For A Buck: The Crazy Rise and Crazier Demise of the USFL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8
[6] 웹사이트 statscrew.com 1984 Los Angeles Express Game-by-Game Results https://www.statscre[...]
[7] 웹사이트 usflsite.com 1984 USFL Season http://www.usflsite.[...]
[8] 웹사이트 profootballarchives.com 1984 Los Angeles Express (USFL) https://www.profootb[...]
[9] 뉴스 The Unraveling of a 'Billionaire' https://www.nytimes.[...] 1984-06-03
[10] 웹사이트 'The Greatest Game No One Saw,' which featured Jim Kelly and Steve Young, turns 35 https://touchdownwir[...] 2020-09-22
[11] 간행물 Yesterday In L.A. : Here Comes Kareem; There Goes O.J. – Free Online Library http://www.thefreeli[...]
[12] 웹사이트 statscrew.com 1985 Los Angeles Express Game-by-Game Results https://www.statscre[...]
[13] 웹사이트 usflsite.com 1985 USFL Season http://www.usflsite.[...]
[14] 웹사이트 profootballarchives.com 1985 Los Angeles Express (USFL) https://www.profoo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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