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쿠고 마사카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쿠고 마사카네는 혼조 번의 10대 번주 로쿠고 마사토요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아 혼조 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는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쇼나이 번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혼조 성을 잃었지만, 이후 탈환에 성공하여 공적을 인정받아 영세 1만 석을 하사받았다. 판적봉환으로 혼조 번 지번사가 되었으나 폐번치현으로 해임된 후 도쿄로 이주했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 만년에는 고향인 혼조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60세에 사망했으며, 사후 정3위로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혼조번주 (데와국) - 로쿠고 마사나가
로쿠고 마사나가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형의 폐적 후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49세에 사망하여 장남이 어렸기에 조카가 가문을 이었다. - 혼조번주 (데와국) - 로쿠고 마사카쓰
로쿠고 마사카쓰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혼조 번의 2대 번주이며 야마가타 성 수비를 맡았고, 자연재해와 영지 교환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교고쿠 다카미쓰의 양녀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 로쿠고씨 - 로쿠고 마사나가
로쿠고 마사나가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형의 폐적 후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49세에 사망하여 장남이 어렸기에 조카가 가문을 이었다. - 로쿠고씨 - 혼조번 (데와국)
혼조번은 로쿠고 마사노리가 데와국 혼조 지역에 봉해지면서 성립되어 로쿠고 가문이 다스렸으나, 보신 전쟁에서 패배 후 폐번치현으로 아키타현에 편입되었다. - 1907년 사망 - 최익현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켰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외세 침략에 저항하다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 1907년 사망 - 이준 (1859년)
이준은 대한제국의 법조인, 외교관, 독립운동가로서, 독립협회 활동, 민족 계몽 운동, 헤이그 특사 활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여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독립 의지를 고취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로쿠고 마사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로쿠고 마사카네 (六郷政鑑) |
출생 | 1848년 10월 29일 |
사망 | 1907년 7월 23일 |
사망 장소 | 혼조, 아키타현, 일본 |
아버지 | 로쿠고 마사타다 |
관직 | |
작위 | 자작 |
옛 봉록 | 9,000 석 |
가문 | 로쿠고 씨 |
관위 | 종삼위 |
정치 경력 | |
혼조 번 제11대 다이묘 | 임기 시작: 1861년 임기 종료: 1868년 이전: 로쿠고 마사타다 이후: 폐지 |
혼조 번 제11대 번주 | 임기 시작: 분큐 원년(1861년) 임기 종료: 메이지 4년(1871년) |
혼조의 지사 | 임기 시작: 1869년 임기 종료: 1871년 이전: 이후: |
가계 | |
부모 | 아버지: 로쿠고 마사타다, 어머니: 오카베 나가카즈의 양녀・가코 |
배우자 | 오카베 나가히로의 양녀・다케코 |
자녀 | 마사카타, 가코(다나카 고타로의 처) |
생애 | |
유년명 | 간마루(鑑丸), 초고로(長五郎) |
묘소 | 아키타현유리혼조시데토마치의 에이센지 |
기타 정보 | |
막부 | 도쿠가와 이에모치 → 요시노부 → 메이지 천황 |
씨족 | 로쿠고 씨 |
계명 | 쇼료인 다이기 쇼칸(政亮院大義照鑑) |
2. 생애
로쿠고 마사토요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1861년 가독을 상속하여 혼조 번의 번주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 보신 전쟁에서는 처음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다가 삿초 동맹의 신정부 측으로 가담하여 쇼나이 번과 싸웠다. 이 과정에서 군사적 열세로 패배하여 혼조성을 잃고 피신하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1871년 폐번치현 이후에는 도쿄로 이주했으며, 1884년 화족 제도가 시행되자 자작위를 받았다. 만년에는 고향인 혼조로 돌아가 지내다 1907년 사망했다. 사후 정3위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기시와다 번 번주 오카베 나가히라의 딸이다. 장남 六郷政賢|로쿠고 마사카타일본어(1872~1926)가 로쿠고 가문의 당주 자리를 이어받고 자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묘는 아키타현 유리혼조에 있는 永禅寺|에이젠지일본어에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가에이 원년(1848년) 10월 3일, 제10대 번주 로쿠고 마사토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분큐 원년(1861년) 6월 5일, 아버지 마사토요가 사망하면서 가독을 상속받아 혼조 번의 번주가 되었다. 분큐 2년(1862년) 12월 1일,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알현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종5위하 효고노카미(兵庫頭)에 서임되었다.2. 2. 메이지 유신과 보신 전쟁
게이오 2년(1866년) 4월 15일, 에도성 경비를 명받았다. 게이오 4년(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잠시 참가했으나 곧바로 동맹을 탈퇴하고 삿초 동맹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 측에 가담했다. 같은 해 7월, 새롭게 들어선 메이지 정부의 명령에 따라 구 막부 세력인 쇼나이 번 공격에 참여했다. 하지만 혼조 번은 병력 수가 적고 무기도 구식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쇼나이 번 군대에 맞서기 어려웠다. 결국 쇼나이 번의 반격에 밀려 8월 6일 혼조성에 불을 지르고 구보타 번으로 피신했다. 이후 9월 11일, 오우 진무 총독부로부터 위문금 3,000료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하순, 메이지 정부의 지원군과 함께 반격에 나서 혼조성을 되찾았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12일, 보신 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메이지 정부로부터 영세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2. 3. 폐번치현 이후
메이지 2년(1869년) 6월 22일, 판적봉환에 따라 혼조 번의 지번사로 임명되었다.[1] 메이지 4년(1871년) 7월 15일, 폐번치현으로 인해 지번사에서 해임되었고,[1] 같은 해 8월 22일에는 도쿄로 이주하였다.[1]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1] 만년에는 고향인 혼조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1] 메이지 40년(1907년) 7월 23일, 향년 60세로 사망하였다.[1] 사후 조정으로부터 정3위로 추증되었다.[2]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로쿠고 마사타다 | |
어머니 | 카코(賀子), 테이쥬인(貞樹院) | 오카베 나가카즈의 양녀, 오카베 나가사다의 딸 |
정실 | 오카베 타케코(岡部武子) | 오카베 나가히로의 양녀, 오카베 나가츠미의 딸 |
장남 | 로쿠고 마사카타 | |
장녀 | 로쿠고 카코(六郷香子) | 다나카 쿠니타로(田中邦太郎)의 아내. 생모는 정실 오카베 타케코. |
4. 묘소
로쿠고 마사카네의 묘소는 아키타현 유리혼조에 있는 永泉寺|에이젠지일본어에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大名の花押
https://www.archives[...]
国立公文書館
2014-05-09
[2]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