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리미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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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롤스로이스 리미티드는 1904년 헨리 로이스와 찰스 롤스의 만남을 통해 설립된 영국의 고급 자동차 제조사이다. 1906년 정식으로 롤스로이스 리미티드로 출범하여 롤스-로이스 10 hp, 실버 고스트 등 혁신적인 모델을 출시하며 명성을 쌓았다. 1931년 벤틀리를 인수했으나, 1971년 RB211 엔진 개발 실패로 재정 위기를 겪어 국유화되었다. 이후 자동차 부문은 롤스로이스 모터스로 분리되어 민영화되었고, 항공기 엔진 부문은 롤스로이스 plc로 재민영화되어 현재까지 세계적인 항공기 엔진 제조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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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로이스 리미티드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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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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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 | 롤스로이스 리미티드 (1906–71) 롤스로이스 (1971) 리미티드 (1971–77) 롤스로이스 리미티드 (1977–87) 롤스로이스 plc (1987) |
형태 | 1906년: 비상장 유한회사 1907년: 상장 유한회사 1971년: 국영 기업 (롤스로이스 (1971) 리미티드) |
산업 분야 | 자동차 제조업 |
운명 | 1971년: 자발적 법정 관리 국영 기업: |
전신 | 롤스와 로이스의 파트너십 (1904–1906) |
후신 | 자동차: 롤스로이스 모터스 항공 우주: 롤스로이스 홀딩스 |
설립 | 맨체스터, 영국 1906년 (비상장 회사) 1971년 (국영 회사) |
해산 | 1987년 4월 |
설립자 | 찰스 롤스 헨리 로이스 |
위치 | 더비 |
국가 | 영국 |
주요 인물 | 클로드 존슨 어니스트 하이브스 애드리안 롬바드 |
제품 | 자동차 민간 및 군용 항공 엔진 해양 추진 시스템 발전 장비 |
자회사 | 주요 자회사 1931년: 벤틀리 모터스 1939년: 파크 워드 1959년: H. J. 멀리너 & Co. 1961년: 멀리너 파크 워드 1966년: 브리스톨 항공기 홀딩스 브리스톨 항공기 회사 브리스톨 시들리 엔진 1973년: 롤스로이스 모터스 |
2. 롤스로이스의 설립 (1904년 ~ 1906년)
헨리 로이스와 찰스 롤스의 만남 이후, 1906년 3월에 롤스로이스 리미티드(Rolls-Royce Limited)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38] 이 회사는 항공기용 엔진과 승용 자동차를 제조하는 영국의 제조사였다.
처음에는 맨체스터의 쿡 스트리트에 있는 로이스의 공장에서 생산이 이루어졌지만, 1908년 더비로 본거지를 옮겼다. 로이스는 2기통 "10HP"와 3기통 "15HP", 4기통 "20HP", 6기통 "30HP"를 제작했다. 이 자동차들은 당시 영국차 중에서 성능이 뛰어났으며, 프랑스 파리 모터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독특한 라디에이터 디자인은 이 무렵에 정착되었다.
20HP는 1905년 맨 섬 TT 레이스에 출전하여 선전했지만 변속기 문제로 2위에 그쳤다. 롤스는 이듬해 T.T. 레이스에서 평균 속도 약 62.76km로 우승했다.
2. 1. 헨리 로이스와 찰스 롤스의 만남
헨리 로이스는 1884년에 전기 및 기계 사업을 시작하여, 1904년 맨체스터 공장에서 자신의 첫 자동차인 2기통 로이스 10을 제작했다. 같은 해 5월 4일, 헨리 로이스는 맨체스터 미들랜드 호텔에서 찰스 롤스를 만났다. 롤스는 풀럼에서 자동차 판매 대리점인 C.S. 롤스 & Co.를 운영하고 있었다.[2]롤스는 3기통 또는 4기통 자동차를 선호했지만, 로이스 10의 성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04년 12월 23일, 롤스는 로이스가 제작하는 모든 자동차를 판매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4가지 모델을 판매했다.
모델 | 기통 수 | 판매 가격 (1904년) | 판매 가격 (2021년 환산) |
---|---|---|---|
10hp | 2기통 | 395GBP | 약 48700GBP |
15hp | 3기통 | 500GBP | 약 61700GBP |
20hp | 4기통 | 650GBP | 약 80200GBP |
30hp | 6기통 | 890GBP | 약 110000GBP |
이 자동차들은 모두 롤스-로이스 브랜드로 출시되었으며, 롤스가 독점 판매했다. 최초의 롤스-로이스 자동차인 롤스-로이스 10 hp는 1904년 12월 파리 모터쇼에서 공개되었다.
1904년 5월, 찰스 롤스와 클로드 존슨은 맨체스터에서 10HP를 시승하고 그 성능에 감탄했다. 롤스는 "로이스 차의 판매를 전적으로 맡고 싶다"고 제안했고, 로이스도 이를 수락했다. 이후 롤스와 로이스, 클로드 존슨은 함께 고성능 자동차 개발에 힘을 쏟았다.
2. 2. 초기 모델 개발 및 생산
헨리 로이스는 1884년에 전기 및 기계 사업을 시작하여, 1904년 맨체스터 공장에서 첫 번째 자동차인 2기통 로이스 10을 제작했다. 그해 5월 4일 맨체스터 미들랜드 호텔에서 찰스 롤스를 만났고, 롤스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모든 자동차를 가져가기로 합의했다.[2]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4가지 모델이 개발되었다.
모델명 | 기통 수 | 판매 가격 (파운드) |
---|---|---|
롤스-로이스 10 hp | 2기통 | 395GBP |
15hp | 3기통 | 500GBP |
20hp | 4기통 | 650GBP |
30hp | 6기통 | 890GBP |
이 모델들은 모두 롤스-로이스 브랜드로 출시되었으며 롤스에 의해 독점적으로 판매되었다. 최초의 롤스-로이스 자동차인 롤스-로이스 10 hp는 1904년 12월 파리 모터쇼에서 공개되었다.
2. 3. 롤스로이스 리미티드 설립 (1906년)

롤스로이스 리미티드는 1906년 3월 15일에 설립되었으며, 당시에는 자동차 생산을 위한 새로운 부지가 필요했습니다. 맨체스터, 코번트리, 브래드퍼드, 레스터의 부지를 고려한 후, 더비 시의회가 제공한 저렴한 전기 요금 제안으로 인해 그 도시 남쪽 가장자리에 12.7acre 부지를 확보하기로 결정했습니다.[3] 새로운 공장은 주로 로이스가 설계했으며, 1908년 초에 생산이 시작되었고, 1908년 7월 9일 존 몬태규 경의 공식 개관식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회사에 대한 투자는 추가 자본을 필요로 했으며, 1906년 12월 6일, 100000GBP의 신주가 공모되었습니다. 1907년에 롤스로이스는 C.S. 롤스 앤 코를 인수했습니다.[3] 로이스 리미티드의 자동차 외 사업은 별도로 운영되었습니다.
3. 초기 성장과 발전 (1907년 ~ 1931년)
롤스로이스는 1906년 롤스로이스 30 hp보다 강력한 직렬 6기통 모델인 40/50 hp를 개발했다. 1908년 3월, 상업 이사 클로드 존슨의 주도로 이 모델에 집중하기 위해 이전 모델들을 단종시켰다.[2] 존슨은 초기 모델 중 하나를 은색으로 마감하고 '실버 고스트'라고 명명했는데, 이 이름은 1925년 팬텀이 도입될 때까지 40/50 차량 전체를 지칭하는 대중적인 명칭이 되었다.[7] 6,000대 이상 생산된 40/50(실버 고스트)은 롤스로이스의 초기 명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롤스로이스 장갑차의 기반이 되어 세계 대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롤스로이스는 항공기 엔진 제조를 시작했다.[2] 최초의 항공기 엔진 이글은 1915년에 생산되었으며, 앨콕과 브라운의 대서양 횡단 비행에 사용된 비커스 비미 폭격기에 장착되어 대서양 최초 무착륙 횡단에 성공하는데 기여했다.
1921년, 롤스로이스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공장을 열고 "스프링필드 고스트"와 팬텀을 생산했다.[9] 이 공장은 10년간 운영되며 2,944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1931년 폐쇄되었다.[9]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제조업체 합병 시도를 피했지만, 불황으로 인해 1922년 더 작고 저렴한 트웬티를 출시하며 단일 모델 정책을 종료했다.[2] 1925년에는 실버 고스트를 대체하는 팬텀을 출시했다.[3]
3. 1. 실버 고스트의 성공 (1907년)
1906년 동안 로이스는 롤스로이스 30 hp보다 더 강력한 직렬 6기통 모델을 개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40/50 hp로 지정되었으며, 이 모델은 롤스로이스의 첫 번째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었다.[5] 1908년 3월, 롤스로이스의 상업 담당 이사이자 때때로 '롤스로이스'의 하이픈으로 묘사되는 클로드 존슨[6]은 로이스와 다른 이사들을 설득하여 롤스로이스가 새 모델에 전적으로 집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따라 이전 모델은 모두 단종되었다.[2] 존슨은 초기 모델 중 하나를 은색으로 마감하고 요트처럼 '실버 고스트'라고 명명했다. 비공식적으로 언론과 대중은 1925년 40/50 팬텀이 도입될 때까지 제작된 모든 40/50 차량에 대해 즉시 실버 고스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7]

40/50 섀시 #60551, 바커가 제작한 반개방형 투어러 차체
새로운 40/50은 6,000대 이상이 제작되어 롤스로이스의 초창기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섀시는 최초의 영국 장갑차의 기반으로 사용되었으며, 세계 대전에 투입되었다.
3. 2. 항공기 엔진 개발 (1914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롤스로이스는 항공기 엔진 제조를 시작했다.[2] 최초의 항공기 엔진 모델인 이글은 1915년에 생산에 들어갔다. 앨콕과 브라운은 이글 엔진 2대를 장착한 비커스 비미 폭격기를 개조하여, 비행기로 대서양을 최초로 무착륙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3. 3. 미국 시장 진출과 좌절 (1921년)
1921년, 롤스로이스는 3년간의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새로운 공장을 열었다. 이곳에서 1,703대의 "스프링필드 고스트"와 1,241대의 팬텀이 추가로 제작되었다.[9] 이 공장은 자회사인 롤스로이스 오브 아메리카, Inc.가 운영했으며 10년 동안 가동되었다. 첫 번째 차량은 1921년 1월 17일에 완성되었으며, 이는 섀시 가격이 11750USD인 실버 고스트였다.[9] 1931년 공장이 폐쇄될 때까지 총 2,944대의 차량이 생산되었다.[9] 이 공장은 헨디 스트리트에 있는 이전 아메리칸 와이어 휠 공장에 위치해 있었고, 행정 사무실은 54 Waltham Ave에 있었다.[8] 스프링필드는 최초의 미국 가솔린 자동차가 제작된 듀리어 모터 왜건 컴퍼니의 이전 위치였다. 미국 조립용 차체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시티의 브루스터 & Co.에서 공급받았다.[9]
3. 4. 소형 모델 "트웬티" 출시 (1922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롤스로이스는 영국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합병 시도를 성공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전쟁 직후 불황으로 40/50 실버 고스트의 판매량이 감소하자, 1922년 더 작고 저렴한 트웬티를 출시하여 1908년부터 유지해 온 단일 모델 정책을 사실상 종료했다.[2]3. 5. "팬텀" 시리즈의 시작 (1925년)
1925년, 롤스로이스는 실버 고스트를 대체하는 새로운 40/50마력 팬텀을 출시했다.[3] 1936년에 출시된 팬텀 III는 마지막 대형 전후 모델이었다.[3] 국가 원수를 위한 팬텀의 제한적인 생산은 1950년에 재개되었고,[3] 팬텀 VI가 1980년대 말에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4. 벤틀리 인수와 제2차 세계 대전 (1931년 ~ 1945년)
1931년, 롤스로이스는 대공황의 여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벤틀리를 인수했다.[2] 롤스로이스는 벤틀리 8리터의 생산을 중단하고 벤틀리의 자산을 처분했으며, 벤틀리의 이름과 명성만을 사용했다. 이후 2년간의 개발을 거쳐 벤틀리 3½리터를 선보였다. 에디 홀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아즈 서킷에서 열린 RAC 관광 트로피 스포츠카 경주에서 롤스로이스의 지원을 받아 가장 빠른 평균 속도를 기록했다.
1933년, 롤스로이스는 라디에이터 모노그램의 색상을 빨간색에서 검은색으로 변경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항공기 엔진 생산에 집중했다.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은 스핏파이어, 허리케인 등 영국 군용기와 미국의 P-51 머스탱 전투기( 팩커드에서 라이선스 생산)에 탑재되었다.[2] 멀린 엔진을 개량한 미티어 엔진은 크롬웰 전차 등 지상 차량에도 사용되었다.[2]
4. 1. 벤틀리 인수 (1931년)
1931년, 롤스로이스는 스포츠카 제조사이자 잠재적 경쟁자였던 벤틀리를 인수했다. 벤틀리는 대공황의 여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 롤스로이스는 벤틀리 8리터의 생산을 중단했는데, 이는 당시 판매 중이던 팬텀의 판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는 벤틀리의 자산을 처분하고 벤틀리의 이름과 명성만을 사용했다.
2년간의 개발 끝에 롤스로이스는 새롭고, 매우 세련된 중형 벤틀리인 벤틀리 3½리터를 선보였다. "조용한 스포츠카"로 광고되었으며 롤스로이스 스타일과 매우 유사했다. 에디 홀이 개인적으로 참가한(롤스로이스의 지원을 받음) 1934년, 1935년, 1936년 아즈 서킷에서 열린 RAC 관광 트로피 스포츠카 경주에서 매년 가장 빠른 평균 속도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2002년까지, 표준 벤틀리와 롤스로이스 자동차는 대개 거의 동일했다. 벤틀리는 배지 엔지니어링되었으며, 라디에이터 그릴과 사소한 세부 사항만 달랐다.
4. 2. 롤스로이스 라디에이터 모노그램 변경 (1933년)
1933년, 롤스로이스는 라디에이터 모노그램의 색상을 빨간색에서 검은색으로 변경했다.4.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항공기 엔진 생산에 집중했다. 롤스로이스의 멀린 엔진은 스핏파이어, 허리케인 등 주요 영국 군용기에 탑재되어 큰 활약을 했다.[2] 미국의 P-51 머스탱 전투기에도 팩커드에서 라이선스 생산한 멀린 엔진이 탑재되었다.[2]멀린 엔진을 개량한 미티어 엔진은 크롬웰 전차 등 지상 차량에도 사용되었다.[2]
5. 전후 재건과 발전 (1946년 ~ 1971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생산을 재개하고 가스 터빈 엔진 설계 및 제조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12] 특히 ''다트''와 ''타인'' 터보프롭 엔진은 항공사의 단거리 여행 시간을 단축하고, 제트 여객기가 장거리 노선에 도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다트 엔진은 여러 항공기에 사용되었으며, 타인 엔진은 SR.N4 호버크라프트 등 다양한 기종에 동력을 공급했다.[12] 이 시기 제트 엔진 중에는 RB163 스페이가 있었으며,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등에 동력을 공급했다.
1948년에는 C 시리즈 디젤 엔진 제품군 설계를 시작해 1951년에 디젤 엔진 생산을 시작했다. 1955년까지 자동차, 철도, 산업, 토목 및 해양 분야에 디젤 엔진을 공급했다.[2]
1966년, 롤스로이스는 브리스톨 시들리를 인수하여 군용 엔진 분야의 입지를 강화했다. 브리스톨 시들리는 콩코드에 사용될 Olympus 593 Mk610영어 엔진을 SNECMA와 협력하여 제조하는 등 다양한 군용 엔진을 생산했다.[2]
5. 1. 자동차 생산 재개와 크루 공장 이전 (1946년)
1946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자동차 생산은 크루로 이전되었다. 그곳에서 프레스 강철 회사(W. A. 로보섬 참조)가 제작한 차체 프레스를 사용하여 완전한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자동차를 조립하기 시작했다.[2] 이전에는 섀시만 제작하고 차체는 전문 코치 빌더(차체 제작 업체)에게 맡겼다. 1939년, 롤스로이스는 1936년부터 롤스로이스와 협력하여 벤틀리 섀시에 짧은 생산 라인의 올 메탈 살롱 차체를 제작해 온 파크 워드(Park Ward Limited)의 남은 자본을 인수하여 전문 코치 빌더 중 하나를 완전히 사내로 들였다.1959년, 롤스로이스는 코치 빌더 H J 멀리너를 인수했고,[2] 두 회사는 합쳐져 H J 멀리너 파크 워드가 되었다.
5. 2. 디젤 엔진 사업 진출 (1951년)
1948년, C 시리즈 디젤 엔진 제품군 설계를 시작하고 개발한 후, 롤스로이스는 1951년에 디젤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55년까지 자동차, 철도, 산업, 토목 및 해양 분야에 디젤 엔진을 공급했다.[2]1956년, 센티넬(슈루즈베리) 리미티드를 인수했다. 센티넬은 공작 기계와 산업용 기관차를 제작했다. 롤스로이스는 디젤 엔진 생산을 위해 센티넬의 슈루즈베리 공장을 인수했고, 모든 디젤 관련 업무를 그곳으로 이전했다.[2]
1963년, 디젤 셔틀 기관차 제조업체인 웨스트 라이딩의 토마스 힐 (로더럼) 리미티드를 인수했다.[2]
5. 3. 제트 엔진 개발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롤스로이스는 가스 터빈 엔진 설계 및 제조에 있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12] 특히 ''다트'' 및 ''타인'' 터보프롭 엔진은 항공사가 단거리 여행 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동시에 제트 여객기가 장거리 노선에 도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다트 엔진은 암스트롱 휘트워스 AW.660 아르고시, 애브로 748, 포커 F27 Friendship, 핸들리 페이지 헤럴드 및 비커스 바이카운트 항공기에 사용되었으며, 더 강력한 타인은 브레게 아틀란티크, 트랜스올 C-160, 쇼트 벨파스트, 비커스 뱅가드 및 SR.N4 호버크라프트에 동력을 공급했다.[12]이 시기의 제트 엔진 중에는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BAC One-Eleven, 그루먼 걸프스트림 II 및 포커 F28 펠로우십에 동력을 공급하는 RB163 스페이가 있었다.
5. 4. 브리스톨 시들리 인수 (1966년)
1966년 롤스로이스는 브리스톨 시들리를 인수하여 군용 엔진 분야에서 입지를 강화했다. 브리스톨 시들리는 바이퍼, 페가수스 등 다양한 군용 엔진을 생산했다.[2] 콩코드에 사용될 Olympus 593 Mk610영어 엔진은 SNECMA와 협력하여 제조했다.[2]6. 국유화와 분할 (1971년 ~ 1987년)
1971년, 롤스로이스는 RB211 엔진 개발 비용 증가와 프랫 & 휘트니(Pratt & Whitney),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재정 문제에 직면하여 국유화되었다.[16][14]
같은 해 5월, 가스 터빈 엔진 관련 사업 및 자산을 인수하기 위해 롤스로이스 (1971) 리미티드가 설립되었고,[2] 원래 회사인 롤스로이스 리미티드는 10월 4일에 청산되었다.[2]
1973년, 자동차 사업부는 롤스로이스 모터스로 분리되어 기업 공개(IPO)를 통해 상장되었다.[18] 1980년에는 비커스 리미티드(Vickers Limited)와 합병되었으며,[28] 1984년에는 롤스로이스 디젤 사업 부문이 퍼킨스 엔진스(Perkins Engines)에 매각되었다.[1]
6. 1. RB211 엔진 개발과 재정 위기 (1971년)

국유화 40년 후에도 이 엔진의 버전은 운항 중인 장거리 항공기의 약 절반에 동력을 공급했다.
1960년대 말, 롤스로이스는 록히드 항공사(Lockheed Aircraft Corporation)의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Lockheed L-1011 TriStar)에 탑재될 RB211 터보팬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와 예상보다 훨씬 커진 개발 비용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16] 당시 롤스로이스는 8만 명의 직원을 고용한 영국에서 14번째로 큰 회사였으며, RB211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15]
1971년 새해, 롤스로이스는 더 이상 자력으로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국 1971년 2월 4일에 자발적으로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16] 이는 프랫 & 휘트니(Pratt & Whitney) 및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의 치열한 경쟁[14] 속에서 RB211 엔진 개발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였다.
당시 최고 경영자는 롤스로이스 스페이(Rolls-Royce Spey) 엔진 출시 당시의 성공을 바탕으로 계산했다고 회고했다.[17]
6. 2. 국유화와 롤스로이스 (1971) 리미티드 설립 (1971년)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합병과 소멸로 인해 몇몇 국가에만 소수의 주요 항공기 제조업체가 남게 되었고, 이들의 엔진 공급을 위한 매우 큰 계약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값비싼 연구 개발이 필수적이었으며, 실제 이윤은 한 세대 이후에 최고조에 달할 수 있는 유지보수 계약에서 발생했다. 1980년대에는 각 세대의 항공기 엔진 비용이 부모 세대의 약 10배에 달한다고 했다.[13]당시 롤스로이스는 8만 명의 직원을 고용했으며, 인력 기준으로 영국에서 14번째로 큰 회사였다. 프랫 & 휘트니(Pratt & Whitney) 및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의 치열한 재정 경쟁으로, RB211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4][15]
1971년 새해, 록히드 항공사(Lockheed Aircraft Corporation)의 새로운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Lockheed L-1011 TriStar)를 위해 설계 및 개발된 RB211 터보팬 엔진 개발로 인해 발생한 재정 문제는, 여러 차례의 정부 지원금 지급 이후에도 롤스로이스가 더 이상 자원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1971년 2월 4일에 자발적으로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16]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과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영국 총리 사이에 격렬한 전화 통화가 있었다고 전해졌지만, 이는 나중에 부인되었다. 최고 경영자는 계산 시 롤스로이스 스페이(Rolls-Royce Spey) 엔진 출시 시의 추정 성공에 따라 결정했다고 조언했다.[17]
정부가 롤스로이스를 국유화했다면 록히드에 대한 의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18]
상황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자산은 현금으로 매각되었고, 이 경우 정부에 매각되었으며, 막대한 부채는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사용하여 롤스로이스 리미티드가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상황이 더 명확해질 때까지 자산의 구매 가격을 확정하지 않았는데, 지속적인 사업이 없으면 자산의 가치가 없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19][20][21] 그동안 정부는 자산을 사용하여 국가 방위, 다른 국가와의 공동 프로그램, 많은 공군 및 민간 항공사에 중요한 항공기 엔진, 해양 및 산업용 가스 터빈 및 소형 엔진 부서의 활동을 계속했다.[22] 1971년 5월에는 가스 터빈 엔진과 관련된 롤스로이스의 4개 부서의 사업 및 자산의 실질적인 전부를 구매하기 위해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었다. 원래 회사인 롤스로이스 리미티드는 1971년 10월 4일에 청산되었다.[2]
록히드는 자신들의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프랫 & 휘트니 또는 제너럴 일렉트릭 엔진으로 전환하면 생산이 6개월 더 지연되고 록히드가 파산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23]
기업회생 관리인은 록히드와 협상하여 공장 폐쇄를 허용하는 손해 배상 청구를 포기하기로 동의했다. 무역 채권자들의 지속적인 지원 또한 기업회생 관리인이 달성했는데, 이는 즉시 전액 지불을 요구하고 공급을 철회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최초로 매각된 자산은 브리티시 항공기 공사(British Aircraft Corporation)였으며, 이는 비커스와 GEC가 동등하게 구매했다. 기업회생 관리인은 1973년에 롤스로이스 모터스를 상장했다.[18]
새로운 소유주인 롤스로이스(1971) 리미티드의 이사진에는 콜 경 (전 유니레버 회장), 아놀드 와인스톡 경(GEC 전무이사), 휴 콘웨이(롤스로이스 가스터빈 전무이사), 스탠리 후커 박사(롤스로이스 브리스톨), 윌리엄 쿡 경(국방부 장관 자문), 세인트 존 엘스터브 경(임페리얼 메탈 인더스트리 전무이사), 그리고 찰스 엘워시 경(전 공군 원수)이 포함되어 있었다.[24]
6. 3. 롤스로이스 모터스 분할 및 민영화 (1973년)
1971년 4월 25일, 롤스로이스가 파산 보호에 들어간 지 2개월 반 만에 롤스로이스 모터스 리미티드가 설립되었다. 롤스로이스 모터스는 파산 관리인 소유 하에 자동차, 디젤 및 가솔린 엔진, 코치워크 및 기타 품목을 제조하고, 하청 계약을 통해 정밀 엔지니어링 작업을 수행했다.[2] 1971년 6월, 롤스로이스의 자동차 및 디젤 부문과 멀리너 파크 워드에서 사용하던 모든 사업과 자산을 인수했으며, 롤스로이스 상표 사용 범위는 매우 정확하게 정의되었다.[2]1972년 말, 롤스로이스 모터스의 영국 내 직원은 자동차 부문 5,855명, 디젤 부문 2,311명으로 총 8,166명이었다.[2] 1973년 5월, 사업은 기업 공개를 준비하기 위해 롤스로이스 모터스 홀딩스 리미티드에 매각되었다.[2]
6. 4. 비커스와의 합병 (1980년)
1980년 8월 6일, 롤스로이스 모터스 홀딩스와 비커스 리미티드의 합병에 대한 주주 동의가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졌다.[28]6. 5. 퍼킨스 엔진에 디젤 사업 매각 (1984년)
1984년, 롤스로이스 디젤 사업은 비커스에서 퍼킨스 엔진스에 매각되었다.[1] 이후 퍼킨스는 이글 디젤 엔진을 개량하여 퍼킨스 TX 엔진 시리즈를 개발하였다.7. 재민영화와 현재 (1987년 ~ 현재)
1987년 4월, 영국 정부는 롤스로이스 plc의 주식을 모두 매각하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진행된 이 주식 발행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34]
롤스로이스는 장기간 사업을 영위했다. 민간 항공기 엔진은 실용화까지 4~6년, 군용 엔진은 그보다 더 오랜 개발 기간이 소요되었다. 엔진 생산이 종료된 후에도 부품 생산은 최대 5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1]
7. 1. 경쟁 환경
롤스로이스의 주요 경쟁사는 GE와 프랫 & 휘트니(UTC)였다. 당시 항공 엔진은 주요 산업 그룹으로서 GE와 UTC 활동의 일부에 불과했다.[1]그 외 경쟁사로는 유럽의 SNECMA, 터보메카, MTU, 피아트 아비아지오네와 미국의 Avco, Garrett, 그리고 제너럴 모터스의 앨리슨이 있었다. 경쟁이 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롤스로이스와 마찬가지로 GE 또는 다른 소규모 제조업체들과 협력하고 있었다.[1]
1987년의 마케팅 조사에 따르면 코카콜라만이 롤스로이스보다 더 널리 알려진 브랜드였다.[35]
7. 2. 롤스로이스 모터스의 소유권 변동
1980년 8월 6일, 롤스로이스 모터스 홀딩스와 비커스 리미티드의 합병에 대한 주주 동의가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졌다.[28] 1998년, 비커스는 폭스바겐 그룹에 롤스로이스 모터스를 매각했지만, 롤스로이스 상표권은 항공기 엔진 회사에서 관리했기에 벤틀리 모터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후 BMW는 롤스로이스 모터 카라는 새로운 제조사를 설립했다.8. 롤스로이스의 유산
롤스로이스는 혁신적인 기술과 뛰어난 품질을 바탕으로 자동차 및 항공기 엔진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롤스로이스의 이름은 고급스러움과 명성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유산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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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rolls-ro[...]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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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st bit of kit we ever 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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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ual Stolly swimming
[12]
뉴스
Historic Pub is up for sale
2020-02-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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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for the unsentimental
The Daily Tele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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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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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Rules That Led to the Downfall of Rolls-Royce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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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서
The Rolls-Royce RB.211 22m, developed for Lockheed, was a different engine than originally proposed to McDonnell Douglas for the DC-10. The RB211 was a member of the Advanced Technology Engine family that included the RB.207 for the Airbus A.300 and the RB.203 for the FH-22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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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collapse: state takeover move
The Times
1971-02-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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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former chief defends signing of RB 211 contract with Lockheed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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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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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a juicy liquidation
The Times
1977-12-2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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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 chairman pleads for full Rolls-Royce assets price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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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문서
The price for the aero engines division was not fixed until June 1973 but more than seven years passed before the liquidation was complete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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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B challenges Rolls val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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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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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pendent inquiry for any dispute on R-R ass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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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heed warning on bankrupt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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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211 negot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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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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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Star engines surprisingly qu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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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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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ence for TriStar, the 'quietest jetliner#REDIRECT
The Times
1972-04-1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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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signs of R-R Motors sell-out by institutions
The Times
1973-08-02
[28]
뉴스
Vickers
The Times
1980-09-26
[29]
문서
After initially being dissolved in 2004, it was returned to the [[Companies House|companies register]] in 2010, 2015 and 2021 under court orders with its name being its original company registration number as 00087989 Limited
[30]
뉴스
Rolls-Royce drops 1971 from title
The Times
1976-12-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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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 Royce
The Times
1978-03-17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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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Prospectus
The Daily Telegraph
198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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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Appointments
The Times
1986-09-11
[34]
뉴스
R-R surges to 62p premium
The Times
198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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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s-Royce shares will fly
The Times
198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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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Rolls Royce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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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문서
日本における正規代理店による表記。英語圏では「ロールズ・ロイス」{{IPA|roulz rɔis}} と発音する。(三省堂『固有名詞英語発音辞典』より)
[38]
서적
『ワールド・カー・ガイド27ロールス・ロイス&ベントレー』pp.21-50「創業から戦前」
[39]
서적
『世界の自動車-22 ロールス・ロイス ベントレー - 戦後』pp.36-45「ベントレーマークVI Rタイプ」
[40]
서적
『世界の自動車-22 ロールス・ロイス ベントレー - 戦後』pp.5-13「はじめに」
[41]
문서
このサーボブレーキは元々1919年に開発されたスペインの大型高級車[[イスパノ・スイザ]]「H6B」に同社の主任技師マルク・ビルキヒトの着想で装備されたプロペラシャフト出力方式で、とあるユーザーがイスパノから取り外して「シルヴァーゴースト」に装備し、[[フレデリック・ヘンリー・ロイス]]に見せたのが導入のきっかけである。ロイスはイスパノ式サーボの価値を認めてシルヴァーゴースト末期型から正式採用、以後ロールス・ロイスでは約半世紀にわたって一部油圧化などの変更を受けながら使用された。エンジン負圧を利用する一般的ブレーキサーボと異なり、車速に単純比例してより強力にブレーキがきく。
[42]
서적
『世界の自動車-21 ロールス・ロイス - 戦前』pp.65-92、「40/50HP ファンタムII」
[43]
서적
『ワールド・カー・ガイド27ロールス・ロイス&ベントレー』pp.171-185「スペック」
[44]
서적
『ワールド・カー・ガイド27ロールス・ロイス&ベントレー』pp.51-66「シルヴァー・ゴー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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