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시 내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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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료시 내친왕은 고시라카와 천황과 후지와라노 시게코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이다. 1156년 내친왕 선하를 받고 재궁으로 선발되었으나, 고시라카와 천황의 양위로 재궁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안토쿠 천황, 고토바 천황, 준토쿠 천황의 준모가 되었으며, 1187년 인푸몬인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1192년 출가 후, 모치히토 왕의 아들인 도손을 양자로 삼아 엔카코인을 건립했다. 1216년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푸몬인노 타이후, 쿄고쿠노츠보네, 켄노고젠 등이 료시 내친왕을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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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시 내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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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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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료시/아키코 내친왕 (亮子内親王) |
이명 | 인푸몬인 (殷富門院) |
황후 정보 | |
입후 근거 | 제81대 안토쿠 천황, 제82대 고토바 천황의 준모 |
황후 즉위 | 1182년 9월 13일 |
여원호 | 인푸몬인 |
여원호 선하 | 1187년 8월 4일 |
생몰 정보 | |
출생 | 1147년 |
사망 | 1216년 4월 27일 |
사망 장소 | 헤이안쿄 (교토) |
가계 정보 | |
아버지 | 고시라카와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시게코 |
관직 정보 | |
직위 | 이세 신궁 사이구 |
재궁 재임 기간 | 1156년 - 1158년 |
선임 | 기시 내친왕 (호리카와 천황의 황녀) |
후임 | 고시 내친왕 (1148년) |
기타 정보 | |
내친왕 선하 | 1156년 5월 10일 |
궁정 여방 | 인푸몬인 다이스케 |
2. 생애
료시 내친왕은 고시라카와 천황과 타카쿠라노산미 시게코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황녀이다. 1155년(규주 2년)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이듬해인 1156년 4월 19일에 10세의 나이로 내친왕 선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에 다이젠시키로 재궁에 들어갔으며, 같은 달 15일에 노노미야로 옮겨졌다. 1158년(호겐 3년) 8월 11일, 고시라카와 천황의 양위로 재궁에서 물러났다.
안겐 3년(1177년) 어머니 시게코가 사망하였고, 지쇼 4년(1180년)에는 동복 동생 모치히토 왕이 헤이케 타도를 위해 거병했지만 패사하였다. 주에이 원년(1182년) 8월 14일, 안토쿠 천황의 준모로써 황후궁에 책립되었다. 헤이케가 사이고쿠로 도망간 후 이듬해 (1183년) 고토바 천황의 황위 계승에 의해 고토바 천황의 준모가 되었다.
분지 3년 (1187년) 6월 28일 원호 선하를 받아 인푸몬인(殷富門院)이 되었다. 겐큐 3년 (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자 출가하였다. 겐닌 원년 (1201년) 12월 18일에는 고토바 상황의 요청으로 동궁 모리나리 친왕(훗날의 준토쿠 천황)의 준모가 되기도 했다(『이쿠마 관백기(猪隈関白記)』). 모치히토 왕의 아들 도손을 양자로 삼았다.
겐포 4년 (1216년) 4월 2일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료시 내친왕의 뇨보로는 가인으로 알려진 인푸몬인노 타이후가 있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고시라카와 천황과 타카쿠라노산미 시게코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황녀이다. 1155년(규주 2년) 아버지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함에 따라, 이듬해인 1156년 4월 19일에 10세의 나이로 내친왕 선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에 다이젠시키로 재궁에 들어갔으며, 같은 달 15일에 노노미야로 옮겨졌다. 1158년(호겐 3년) 8월 11일, 고시라카와 천황의 양위로 인해 재궁에서 물러났다.2. 2. 가족의 죽음과 헤이케 멸망
안겐 3년(1177년) 어머니 시게코가 사망하였고, 지쇼 4년(1180년)에는 동복 동생 모치히토 왕이 헤이케 타도를 위해 거병했지만 패사하였다. 주에이 원년(1182년) 8월 14일, 안토쿠 천황의 준모로써 황후궁에 책립되었다. 헤이케가 사이고쿠로 도망간 후 이듬해 (1183년) 고토바 천황의 황위 계승에 의해 고토바 천황의 준모가 되었다. 겐큐 3년(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의 죽음으로 출가하였다.2. 3. 인푸몬인과 출가
분지 3년 (1187년) 6월 28일 원호 선하를 받아 인푸몬인(殷富門院)이 되었다. 겐큐 3년 (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자 출가하였다. 겐닌 원년 (1201년) 12월 18일에는 고토바 상황의 요청으로 동궁 모리나리 친왕(훗날의 준토쿠 천황)의 준모가 되기도 했다(『이쿠마 관백기(猪隈関白記)』). 모치히토 왕의 아들로 슈카쿠 법친왕의 제자로 들어가 있던 도손을 양자로 삼았으며, 말년에 고쇼 안이도노에 건립한 엔카코인은 도손을 개기로 하여 후에 "안이 몬제키(安井門跡)"로 불렸다.2. 4. 만년과 죽음
겐큐 3년 (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나자 출가하였다. 겐닌 원년 (1201년) 12월 18일에는 고토바 상황의 요청에 따라 동궁 모리나리 친왕 (후의 준토쿠 천황)의 준모가 되기도 했다 (『이쿠마 관백기(猪隈関白記)』). 모치히토 왕의 아들로 슈카쿠 법친왕의 제자로 들어가 있던 도손을 양자로 하여, 말년에 고쇼 안이도노에 건립한 엔카코인은 도손을 개기로 하여 후에 "안이 몬제키(安井門跡)"로 불렸다. 겐포 4년 (1216년) 4월 2일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료시 내친왕의 뇨보로는 가인으로 알려진 인푸몬인노 타이후가 있었고,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누나인 쿄고쿠노츠보네와 켄노고젠도 섬기고 있었다 (『메이게츠키(明月記)』).
3. 료시 내친왕을 섬긴 사람들
료시 내친왕은 고시라카와 천황과 뇨고 후지와라 시게코의 딸이자, 다카쿠라 천황의 여동생이었다. 료시 내친왕은 안토쿠 천황과 고토바 천황의 명예 어머니로 임명되었으며, 명예 황후로서 그들이 재위하는 동안 황후의 궁정 역할을 수행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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