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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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경건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아버지 샤를마뉴의 뒤를 이어 제국을 상속받았지만,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과 잦은 반란으로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840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제국은 분열되어 카롤링거 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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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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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도비쿠스 피우스 |
로마자 표기 | Ludovicus or Hludowicus Pius |
프랑스어 표기 | Louis le Pieux 또는 Louis le Débonnaire |
독일어 표기 | Ludwig der Fromme |
이탈리아어 표기 | Ludovico il Pio |
스페인어 표기 | Luis el Piadoso 또는 Ludovico Pío |
통치 | |
작위 | 로마 황제 |
재위 | 813년–840년 |
대관식 | 813년 9월 11일 아헨에서 아버지에 의해 대관 816년 10월 5일 랭스에서 스테파노 4세에 의해 교황 대관 |
선임자 | 샤를마뉴 |
후임자 | 로타르 1세 |
작위 1 | 프랑크 왕 |
재위 1 | 814년–840년 |
선임자 1 | 샤를마뉴 |
후임자 1 | 로타르 1세 (중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 왕) 카를 2세 (서프랑크 왕) |
작위 2 | 아키텐 왕 |
재위 2 | 781년–814년 |
선임자 2 | 샤를마뉴 (프랑크 왕으로서) |
후임자 2 | 피핀 1세 |
개인 정보 | |
출생일 | 778년 4월 16일 |
출생지 | 카시노길룸, 프랑키아 |
사망일 | 840년 6월 20일 |
사망지 | 잉겔하임, 프랑키아 |
매장지 | 메츠 생 아르눌프 수도원 |
왕가 | 카롤링거 왕조 |
아버지 | 샤를마뉴 |
어머니 | 힐데가르트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에르멘가르트 드 에스베 유디트 폰 바이에른 |
자녀 | 로타르 1세 피핀 루트비히 기젤라 카를 |
2. 생애
루트비히 1세는 778년 4월 16일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이자 프랑크 왕국령 아키텐 푸아티에 부근 샤스뇌유에서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는 아길롤핑 가문 출신이었다. 경건왕(敬虔王, the Pious)이란 별칭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인해 붙여졌다.[3][4]
루트비히의 이름은 게르만 프랑크족의 이름인 클로도비크(Chlodovic)의 라틴어 번역 과정에서 생긴 오류였다. 781년 백작에 임명되었고, 그해 봄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형 피피노 카를로만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 루트비히는 그곳에서 아키텐 지역의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6] 샤를마뉴는 아키텐 귀족들이 독립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명의 행정관을 보내 섭정으로서 통치를 맡게 하였다.
루이는 유아기를 넘긴 샤를마뉴의 세 명의 적출자 중 한 명이었다. 프랑크족의 분할 상속 관습에 따라 루이는 그의 형제들과 상속을 나눌 것으로 예상했다. 806년의 ''Divisio Regnorum''에서 샤를마뉴는 루이의 아키텐 왕국에 셉티마니아, 프로방스, 그리고 부르고뉴의 일부를 추가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다른 적출자들이 사망하면서, 루이는 813년 9월 11일 아헨에서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814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카롤링거 제국 전체를 상속받았다.[9][4][10]
앙주(Anjou)의 두에(Doué) 궁전에 있던 루이 1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11] 급히 아헨(Aachen)으로 달려가 귀족들의 “만세, 황제 루이(Vivat Imperator Ludovicus)”라는 함성 속에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다.[11]
아헨 황궁에 도착한 루이 1세는 불필요하다고 여긴 자들을 궁궐에서 몰아냈다. 카롤루스 대제가 수집했던 옛 게르만 이교(pagan)의 토큰과 문서들을 파괴하고, 도덕적으로 “방탕하다”고 여긴 궁정 인사들과 친척들까지 추방했다.[12] 세프티마니아의 베르나르와 랭스 대주교 에보를 최고 고문으로 삼았다. 에보는 농노 출신으로 루이 1세에 의해 등용되었지만, 나중에 그를 배신했다. 아헨(Aix-la-Chapelle)의 인덴 수도원(Inden Monastery)장으로 임명된 세프티마니아 출신 서고트족인 베네딕투스에게 프랑크 교회 개혁을 맡겼다.[15] 816년, 스테파누스 4세가 랭스(Reims)를 방문하여 10월 5일에 루이 1세를 다시 황제로 책봉했다.[4][14][16]
817년, 아헨 궁궐 일부 붕괴를 신의 뜻으로 여기고[41] 제국계획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하여 제국 영토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다. 그러나 819년 재혼 후 823년에 넷째 아들인 샤를이 태어나면서, 829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 샤를에게 영토를 주기로 결정하면서, 세 형제는 발라 밑에 모였다.[52] 830년, 로타르를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났고, 로타르는 아버지 루트비히를 폐위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42] 그러나 로타르의 독재를 두려워한 피핀과 루트비히가 동맹을 맺고 아버지 루트비히를 복권시켰다.[42] 833년 6월, 다시 황제 루트비히와 세 형제가 대립하여 황제는 로타르에게 붙잡혔다.[54] 같은 해 12월, 황제 지지자들은 황제 석방을 요구했고,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쫓겨났으며[54], 이듬해 834년 2월 루트비히는 석방되어 복권되었다.[42]
만년의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져 정사를 수상과 궁재들에게 넘겼고, 기관지염, 위암, 식도암 등에 걸려 고생했다. 840년 초, 병석에 누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여 그해 6월 20일경 라인강변으로 가 요양하였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루트비히는 제국의 상징물을 모두 장남 로타르 1세에게 보냈다. 840년 6월 20일, 잉겔하임의 라인강변에 있는 페터사우에를 건너던 중 이복형제인 드로고 주교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했다. 사인은 기관지염, 식도암, 위암 등의 후유증이었다. 곧, 이복동생인 메츠 교회 주교 드로고의 집례하에 자신의 어머니 힐데가르트가 안치된 아우스트라시아 메츠에 있는 장크트아르눌프 교회 내에 안치되었다.
2. 1. 젊은 시절
루트비히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778년 4월 16일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이자 프랑크 왕국령 아키텐 푸아티에 부근 샤스뇌유에서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는 아길롤핑 가문 출신이었다. 경건왕(敬虔王, the Pious)이란 별칭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인해 붙여졌다.[3][4]루트비히의 이름은 게르만 프랑크족의 이름인 클로도비크(Chlodovic)의 라틴어 번역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중에 루이, 로도비코, 루이스 등으로 번역된다. 루이와 로타르는 옛 메로빙거 왕조의 이름을 받았는데, 이는 어떤 연관성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5]
781년 백작에 임명되었고, 그해 봄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형 피피노 카를로만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 루트비히는 그곳에서 아키텐 지역의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6] 샤를마뉴는 아키텐 귀족들이 독립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명의 행정관을 보내 섭정으로서 통치를 맡게 하였다.
샤를마뉴는 아들 루이가 아키텐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 사후 파스트라다와 재혼한 샤를마뉴는 루이가 아키텐에서 동화될 수 있는 관습에 대해 경계하여 785년 루이를 불렀다. 루이는 바스크 의상을 입고 같은 옷을 입은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작센의 왕실 파더보른 공의회에 나타났다.
794년, 샤를마뉴는 루이에게 옛 갈로-로마 빌라 네 곳(두에, 에브뢰이, 앙작, 샤세뇌이)을 주었다. 그는 각각을 차례로 겨울 거처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루트비히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778년 4월 16일 카롤루스 대제의 여섯째 아들이며 프랑크 왕국령 아키텐 푸아티에 부근 샤스뇌유에서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히스파니아 원정 중이던 샤를마뉴의 별장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 로타르는 2세 때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는 카롤루스 대제의 두 번째 부인으로 아길롤핑 가문 출신이었다. 경건왕(敬虔王, the Pious)이란 별칭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인해 부여받은 것이다.[3][4]
루트비히의 이름은 흘로도비쿠스(Hludovicus)로, 원래는 게르만 프랑크족의 이름인 클로도비크(Chlodovic)의 라틴어 번역 과정에서 생긴 오류였다. 나중에 클로도비크의 라틴어 번역인 클로도비쿠스(Chlodovicus)는 클로비스(Clovis)로 번역되었고, 이때 지어진 그의 이름 흘로도비쿠스는 루트비히, 로도비코, 루이스 등으로 번역된다. 루이와 로타르는 옛 메로빙거 왕조의 이름을 받았는데, 이는 어떤 연관성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5]
781년 백작에 임명되었고, 그해 봄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형 피피노 카를로만과 함께 알프스산맥을 넘어 4월 15일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 루트비히는 그곳에서 아키텐 지역의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6] 그 해에 아르눌프 주교를 아키텐으로 보내어 루트비히의 후견인으로 삼게 했다. 샤를마뉴는 나이가 어렸던 루트비히 때문에 아키텐 귀족들이 또다시 독립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루트비히를 대신할 여러 명의 행정관을 보내 섭정으로서 통치를 맡게 하였다. 샤를마뉴는 와이파르(768년 항복)와 이후 위나르 2세의 지휘 아래 아키텐인과 바스크인과의 파괴적인 전쟁 이후 그의 왕국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속왕국을 구성했다. 이 전쟁은 롱세스발레스 전투(778년)로 절정에 달했다. 785년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파더보른 전투에 출정할 때 동행하여 1,000 km를 다녀오기도 했다.
아키텐 궁정에는 아니얀의 베네딕트(Benedikt von Aniane), 서고트 출신으로 메로빙거 왕가의 후손이기도 한 툴루즈 백작 기욤 드 툴루즈 등이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아니얀의 베네딕트와 기욤 드 툴루즈는 788년 루트비히를 대신해서 아키텐에 침입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고 내분을 수습하였다. 루트비히가 평생 각별하게 신뢰했던 아니얀의 베네딕트는 프랑크 왕국의 교회에 베네딕도 회칙 도입에 노력하였으며, 814년 루트비히 1세가 황제가 된 뒤 그의 신앙 활동과 교회 개혁을 보좌하였다. 816년과 817년에는 교회 회의를 통해 교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을 지향했다.
794년, 샤를마뉴는 루이에게 옛 갈로-로마 빌라 네 곳(두에, 에브뢰이, 앙작, 샤세뇌이)을 주었다. 그는 각각을 차례로 겨울 거처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샤를마뉴는 그의 모든 아들들이 그들의 영토 원주민으로 자라나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지역 관습에 따라 통치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각자의 영토로 보내졌다. 변경주, 즉 변방의 공국은 제국의 외부 위협에 대한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이는 에스파냐 변경주를 통치했다. 797년, "마르카"의 가장 큰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총독 자이드가 코르도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프랑크인에게 넘겨주면서 프랑크인의 손에 넘어갔다. 코르도바 당국은 799년에 이를 탈환했다. 그러나 루이는 그의 왕국의 전체 군대, 즉 공작 산초가 이끄는 가스코뉴인들, 라이불프가 이끄는 프로방스인들, 그리고 베라가 이끄는 고트족들을 포함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7개월 동안 바르셀로나를 포위 공격했으며, 800년부터 801년까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고, 그 후 항복을 받아냈다.[7][8] 루이 왕은 14세 되던 791년 공식적으로 갑옷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부여받지 못했는데, 샤를마뉴는 그들에게 원정을 보냄으로써 제국과 통합의 개념을 심어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루이는 그의 형제 피핀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공작 그리몰드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메조지오르노 원정에 적어도 한 번 참여했다.[4]
루이는 유아기를 넘긴 샤를마뉴의 세 명의 적출자 중 한 명이었다. 프랑크족의 분할 상속 관습에 따라 루이는 그의 형제들인 샤를 소 네우스트리아 왕, 페팽 이탈리아 왕과 상속을 나눌 것으로 예상했다. 806년의 ''Divisio Regnorum''에서 샤를마뉴는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의 프랑크 핵심 지역의 통치자로서 샤를 소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한 반면, 페팽에게는 샤를마뉴가 정복으로 소유하게 된 롬바르디아 철왕관을 주었다. 루이의 아키텐 왕국에 셉티마니아, 프로방스, 그리고 부르고뉴의 일부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다른 적출자들은 사망했다. 페팽은 810년, 샤를은 811년에 사망했으며, 루이는 이미 병들어 있던 샤를마뉴와 함께 813년 9월 11일 아헨에서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814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는 카롤링거 제국과 그 소유물 전체를 상속받았다(이탈리아 왕국만 제외; 루이의 제국 내에서 813년 샤를마뉴는 베르나르(페팽의 아들)를 왕으로 만들고 그렇게 부르라고 명령했다).[9][4][10]
2. 1. 2. 아키텐 국왕
781년 루도비쿠스 1세는 백작에 임명되었고, 그해 봄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형 피피노 카를로만과 함께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방문, 교황에게 축성받았다. 루트비히는 아키텐 지역의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샤를마뉴는 아르눌프 주교를 아키텐으로 보내 루트비히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또한 샤를마뉴는 아키텐 귀족들이 독립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명의 행정관을 보내 루트비히의 섭정으로 통치하게 했다. 785년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파더보른 전투에 출정할 때 동행했다.
그의 아키텐 궁정에는 아니얀의 베네딕트, 메로빙거 왕가의 후손 툴루즈 백작 기욤 드 툴루즈 등이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아니얀의 베네딕트와 기욤 드 툴루즈는 788년 루트비히를 대신해 아키텐에 침입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고 내분을 수습하였다. 아니얀의 베네딕트는 프랑크 왕국의 교회에 베네딕도 회칙 도입에 노력하였으며, 814년 루트비히 1세가 황제가 된 뒤 교회개혁을 보좌하였다.[5]
781년부터 813년까지 그는 궁정 행정관들의 자문에 의존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아키텐을 통치했다. 아키텐의 지역 출신 전임 공작들이 프랑크 왕국에 반항했다가 카를 마르텔과 피핀 3세, 샤를마뉴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지역 토호들은 그를 쉽게 다루지 못했다. 소년기 무렵 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를 따라 바스크족 토벌 전쟁과 아키텐 공국 진압 전쟁에 출정하였다. 791년에는 부왕 샤를마뉴를 따라 레겐스부르크 원정에 다녀왔다. 794년 샤를마뉴는 아키텐에 아들 루트비히의 저택과 별장을 마련해 주고 현지에 파견하여 원주민들의 의복을 입고, 아키텐 원주민들의 문화에 동화되도록 지시하였다. 797년에 루트비히는 바르셀로나와 코르도바에서 발생한 바스크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되돌아왔다.
루이는 3살이던 781년 아키텐 왕으로 즉위했다.[6] 이듬해 그는 섭정과 궁정을 동반하여 아키텐으로 보내졌다. 샤를마뉴는 와이파르와 위나르 2세의 지휘 아래 아키텐인과 바스크인과의 전쟁 이후 그의 왕국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속왕국을 구성했다. 샤를마뉴는 루이가 다스릴 지역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 사후 파스트라다와 재혼한 샤를마뉴는 루이가 아키텐에서 동화될 수 있는 관습에 대해 경계하여 785년 루이를 불렀다. 루이는 바스크 의상을 입고 같은 옷을 입은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작센의 왕실 파더보른 공의회에 나타났다. 이는 툴루즈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을 수 있는데, 바스코니아의 바스크인들이 아키텐 군대의 주축이었기 때문이다.[4]
794년, 샤를마뉴는 루이에게 옛 갈로-로마 빌라 네 곳(두에, 에브뢰이, 앙작, 샤세뇌이)을 주었다. 그는 각각을 차례로 겨울 거처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샤를마뉴의 의도는 그의 모든 아들들이 그들의 영토 원주민으로 자라나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지역 관습에 따라 통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각자의 영토로 보내졌다. 변경주——변방의 공국——은 제국의 외부 위협에 대한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이는 에스파냐 변경주를 통치했다. 797년, "마르카"의 가장 큰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총독 자이드가 코르도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프랑크인에게 넘겨주면서 프랑크인의 손에 넘어갔다. 코르도바 당국은 799년에 이를 탈환했다. 그러나 루이는 그의 왕국의 전체 군대, 즉 공작 산초가 이끄는 가스코뉴인들, 라이불프가 이끄는 프로방스인들, 그리고 베라가 이끄는 고트족들을 포함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7개월 동안 바르셀로나를 포위 공격했으며, 800년부터 801년까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고, 그 후 항복을 받아냈다.[7][8] 루이 왕은 14세 되던 791년 공식적으로 갑옷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부여받지 못했는데, 샤를마뉴는 그들에게 원정을 보냄으로써 제국과 통합의 개념을 심어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루이는 그의 형제 피핀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공작 그리몰드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메조지오르노 원정에 적어도 한 번 참여했다.[4]
2. 2. 프랑크 국왕과 황제
앙주(Anjou)의 두에(Doué) 궁전에 있던 루이 1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11] 급히 아헨(Aachen)으로 달려가 귀족들의 “만세, 황제 루이(Vivat Imperator Ludovicus)”라는 함성 속에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다.[11]
아헨 황궁에 도착한 루이 1세는 불필요하다고 여긴 자들을 궁궐에서 몰아냈다. 카롤루스 대제가 수집했던 옛 게르만 이교(pagan)의 토큰과 문서들을 파괴하고, 도덕적으로 “방탕하다”고 여긴 궁정 인사들과 친척들까지 추방했다.[12] 처남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 미혼의 이복자매들과 조카들을 수녀원에 보냈다.[11] 사생아 이복형제들인 드로고, 휴, 테오데릭은 제외하고, 아버지의 사촌인 아달라르와 발라를 강제로 단발(Tonsure#History|삭발)시켜 각각 누아르무티에 섬의 생필리베르(St-Philibert) 수도원과 코르비(Corbie) 수도원으로 추방했다.[13]
세프티마니아의 베르나르와 랭스 대주교 에보를 최고 고문으로 삼았다. 에보는 농노 출신으로 루이 1세에 의해 등용되었지만, 나중에 그를 배신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신하들 중 트리어(Trier) 근처 생막시맹 수도원장 엘리사카르와 쾰른 대주교 힐데볼드는 유임시켰으나, 후에 엘리사카르는 힐두인으로 대체되었다.[14]
아헨(Aix-la-Chapelle)의 인덴 수도원(Inden Monastery)장으로 임명된 세프티마니아 출신 서고트족인 베네딕투스에게 프랑크 교회 개혁을 맡겼다.[15] 베네딕투스는 루이 1세의 영토 내 모든 수도원이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창시한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을 준수하도록 했다. 루이 1세의 주화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초상을 모방하여 제국의 권위와 위신을 보여주었다.[11] 816년, 스테파누스 4세가 랭스(Reims)를 방문하여 10월 5일에 루이 1세를 다시 황제로 책봉했다.[4][14][16] 루이 1세 경건왕이 확립한 관습에 따라, 대부분의 프랑스 국왕들은 랭스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지배했던 제국은 처음에 3분할될 예정이었으나, 카롤루스와 피핀이 사망하고 다른 형제들도 요절하면서 루드비히는 제국 전체를 단독 상속받게 되었다. 813년 공동 황제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아버지 서거 후 프랑크 왕위를 계승하여 단독 황제로서 통치를 시작했다.[34] 같은 시기에 808년·809년에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지배하에 있던 투르투사를 공격했다(투르투사 포위전).
루트비히 1세는 신앙심이 깊었지만,[35] 정치적으로는 평범하고[36]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민 감각을 잊지 않아 많은 설화를 수집, 기록하게 했지만, 루트비히 1세는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을 소각했다. 또한 화려한 생활을 싫어하여 궁정에 남아 있던 자매들을 모두 수도원으로 보냈고,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사촌 (콜베 수도원장 아달베르트와 보비오 수도원장 바라) 등 정치 고문들을 은퇴시켰다.[36][40] 그리고 아키텐 통치 시대에 알게 된 아니앙 수도원장 베네딕토를 정치 고문으로 삼았다.[36][40][35]
817년, 아헨 궁궐 일부 붕괴를 신의 뜻으로 여기고[41] 제국계획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했다. 제국계획령에서는 프랑크족 전통에 따라 제국 영토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다. 장남 로타르에게는 이탈리아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토를, 차남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삼남 루트비히에게는 바이에른 통치를 맡기고, 로타르를 공동 황제로, 나머지 두 사람을 부황제로 하여 황제의 통제를 따르도록 규정했다.[36][40][46] 프랑크 왕국의 분할 상속 관습과 제국 통일 유지[47]라는 두 가지를 모두 실현하려는 타협적인 계획이었다. 이 제국계획령에서는 813년에 이미 이탈리아 왕위를 받았던 피핀의 아들 베르나르가 무시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베르나르는 반란을 일으켰고, 818년에 처형당했으며, 이탈리아는 로타르의 것이 되었다.[48]
819년, 루트비히는 벨프가의 유디트와 재혼하였고, 823년에는 넷째 아들인 샤를이 태어났다. 루트비히 1세는 유디트의 간청에 따라[49][50] 샤를에게도 왕국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고, 829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 로타르의 동의하에[51] 로타르의 영토에서 알레마니아, 알자스, 레티아 및 부르고뉴 일부를 샤를에게 주기로 결정했다.[49] 샤를에게는 베르나르 드 셉티마니가 후견인이 되어 유디트 및 그 형제들과 함께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52] 그러나 이 영토 분할은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의 반발을 샀고, 세 형제는 발라 밑에 모였다.[52] 830년 4월 14일, 브르타뉴 원정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로타르를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났고, 로타르는 아버지 루트비히를 폐위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42] 유디트와 그 형제들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52] 그러나 로타르의 독재를 두려워한 피핀과 루트비히가 동맹을 맺고 아버지 루트비히를 복권시켰고,[42] 831년 2월, 아헨 제국 의회에서 새로운 제국 분할 계획이 결정되었다. 833년 6월, 다시 황제 루트비히와 세 형제가 대립하여 황제는 로타르에게 붙잡혔다.[54] 그러나 같은 해 12월, 황제 지지자들은 황제 석방을 요구했고,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쫓겨났으며[54], 이듬해 834년 2월 루트비히는 석방되어 복권되었다.[42] 837년, 로타르의 합의하에 샤를에게는 프리슬란트에서 마스 강까지의 지역과 부르고뉴가 주어졌다. 838년, 피핀이 사망했고, 839년 보름스에서 피핀 아들들의 상속권이 취소되었고,[54] 제국 대부분은 로타르와 샤를이 나누고,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 상속받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알레마니아를 포함한 라인 강 동안(동쪽)을 요구하며 아버지에게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51] 황제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840년 6월 20일, 프랑크푸르트 근처에서 서거했다.[51] 그의 서거 후, 형제 간의 항쟁은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하여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베르됭 조약 항목 참조).
분열 후 성립한 루트비히의 나라는 동프랑크 왕국이라 불리며,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다. 샤를의 나라는 서프랑크 왕국이 되어 후의 프랑스 왕국으로 이어진다. 로타르가 계승한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사후 더욱 분할된다.
2. 2. 1. 즉위 초반
813년 9월 11일, 루트비히 1세는 아헨에서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국왕 겸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듬해 1월 28일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늑막염과 우울증 등으로 사망하자, 이탈리아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상속받고, 'Vivat Imperator의 Ludovicus'라는 칭호와 함께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후, 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 샤를마뉴의 서자들인 드로고 3세, 테오도리히, 후고 등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사제로 만들었다. 또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누이, 여동생들과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여동생들을 모두 수녀원에 보내 수녀로 만들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첩들도 수녀로 만들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대외 활동보다는 신앙에 의지하려 했고, 가톨릭 성직자들을 채용하여 정치를 위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영주와 기사들은 성직자를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루트비히 1세의 첫 번째 과제는 카롤루스 대제의 유언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국 분할을 우선시하여, 814년 8월에 로타르를 바이에른 국왕, 피핀을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했다. 또한 샤를마뉴가 813년에 자신에게 물려준 피피노 카를로만의 랑고바르드 왕위는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상스의 테오델린트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상스 백작 아르눌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814년 말부터 루트비히 1세는 상속령을 정해 영토를 세 아들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루트비히 독일인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 1세는 베른하르트를 회유하는 척하며 불러들인 뒤 두 눈을 뽑고 근육을 지져 불구로 만들어 쫓아냈다. 이후 로타르를 롬바르디아(이탈리아)의 군주로, 독일인 루트비히를 바이에른 분국왕으로 임명했다.
818년 봄, 루트비히 1세는 아헨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베른하르트를 도운 귀족과 성직자들을 재판했다. 베른하르트의 협력자들과 그를 도운 성직자들은 처벌받았다. 귀족 및 평신도 공모자들은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받았고, 베른하르트에게 협력하거나 군사를 지원한 가톨릭 성직자들은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오를레앙의 테오둘프 주교는 투옥된 뒤 곧 사망했다. 그 외에도 베른하르트에게 협력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인사들은 체포되어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818년 4월 17일,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는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루트비히 1세는 이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루트비히 1세는 샤를마뉴를 총애하던 아인하르트를 중용하여 왕국 내 여러 대수도원장직을 맡겼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이기도 했던 아인하르트는 루트비히 1세가 카롤루스 대제의 유언을 비교적 꼼꼼하게 살펴보고 처리했다고 기록했지만, 동시대의 다른 자료들은 유언 집행이 불명확했다고 전한다.
앙주(Anjou)의 두에(Doué) 궁전에 있던 루이 1세는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접했다.[11] 그는 급히 아헨(Aachen, 프리 제국 도시 아헨)으로 달려가 참석한 귀족들의 “만세, 황제 루이(Vivat Imperator Ludovicus)”라는 함성 속에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다.[11]
아헨의 황궁에 도착한 루이 1세는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자들을 궁궐에서 몰아냈다. 그는 샤를마뉴가 수집했던 옛 게르만 이교(pagan)의 토큰과 문서들을 파괴했다. 또한 그는 도덕적으로 “방탕하다”고 여긴 궁정 인사들,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까지 추방했다.[12]
그는 가능한 강력한 처남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 많은 미혼의 이복자매들과 조카들을 수녀원에 보냈다.[11] 사생아 이복형제인 드로고, 휴, 테오데릭은 제외하고, 아버지의 사촌인 아달라르와 발라를 강제로 단발(Tonsure#History|삭발)시켜 각각 누아르무티에 섬의 생필리베르(St-Philibert) 수도원과 코르비(Corbie) 수도원으로 수도 생활을 하도록 추방했다.[13]
그는 세프티마니아의 베르나르와 랭스 대주교 에보를 그의 최고 고문으로 삼았다. 에보는 농노 출신으로 루이 1세에 의해 그 직책에 올랐지만, 나중에 그를 배신했다. 그는 샤를마뉴의 신하들 중 일부, 예를 들어 트리어(Trier) 근처 생막시맹 수도원의 수도원장 엘리사카르와 쾰른 대주교 힐데볼드를 유임시켰다. 나중에 그는 엘리사카르를 힐두인으로 대체했다.[14]
그는 또한 새로 설립된 아헨(Aix-la-Chapelle)의 인덴 수도원(Inden Monastery)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고 프랑크 교회 개혁을 맡긴 세프티마니아 출신 서고트족인 베네딕투스를 고용했다.[15] 베네딕투스의 주요 개혁 중 하나는 루이 1세의 영토 내 모든 수도원이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창시한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의 통치 초부터 그의 주화는 아버지 샤를마뉴의 초상을 모방하여 제국의 권위와 위신을 보여주었다.[11] 816년, 레오 3세의 뒤를 이은 스테파누스 4세가 랭스(Reims)를 방문하여 10월 5일 일요일에 다시 루이 1세를 황제로 책봉했다.[4][14][16] 그 결과, 루이 1세 경건왕이 확립한 관습에 따라 대부분의 프랑스 국왕들은 랭스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2. 2. 2. 제국 상속령 발표
815년 루트비히 1세는 아들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아헨에서 즉위시켰다. 그는 국토 분할을 막고자 장남인 로타르에게 왕위와 프랑크 전 국토를 양도하고, 차남 피핀과 셋째 루트비히에게는 변방 지역을 주기로 결정했다.[56] 곧 루트비히는 상속령을 발표하여 로타르는 총괄 국왕 겸 황제로, 피핀은 아키텐, 가스코뉴(Gascony), 툴루즈, 카르카손 (Carcassonne), 오툉(Autun), 아발론, 낭베르를,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등을 상속령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분국왕으로 임명된 세 아들이 죽으면 그 세 아들의 아들이 상속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는 바로 제국칙령(Ordinatio imperii)이라는 이름으로 성문화되었다. 그러나 상스의 테오델린트에게서 태어난 아들 아르눌프의 몫은 정해지지 않았다.817년 7월, 루트비히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루트비히를 바이에른 왕으로 봉하고, 다시금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발표한 칙령에서 둘째 아들 피핀은 왕의 칭호와 아키텐, 툴루즈 일대의 통치권을, 셋째 아들 루트비히에게는 바이에른과 카린티아, 보헤미아 및 왕의 칭호와 주권을 부여했다. 그는 살리카 법 대신 장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귀족과 궁재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817년 4월 9일 성목요일, 루이 경건왕과 그의 궁정은 아헨 대성당에서 궁전으로 가는 목조 회랑을 건너던 중 회랑이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루이는 임박한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후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 달 후, 아헨 궁정과 성직자들의 승인을 얻어 그는 18개 조항으로 된 황제 칙령인 「왕국 질서」(Ordinatio Imperii)를 발표하여 질서 있는 왕조 계승 계획을 세웠다. "왕국 질서"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만들어진 현대 용어이며, 이 칙령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당대 사본에서는 "왕국 분할"(divisio imperii)이라고 불린다.[4]
815년에 루이는 이미 두 명의 장남에게 정부의 일부를 맡겼었다. 그는 제국을 세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 로타르는 아헨에서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선포되고 대관식을 치렀으며, 프랑크 왕국의 대부분 영토의 계승을 약속받았고, 그의 형제들과 사촌의 봉건 영주가 되었다.
- 핍팽은 아키텐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그의 영토는 가스코뉴, 툴루즈 주변 지역, 카르카손, 오통, 아발롱, 네베르 백작령을 포함했다.
- 루이 독일인은 막내로 바이에른 왕과 인근 변경 백작령을 받았다.
하급 왕 중 한 명이 사망하면 그의 아들이 계승해야 했으며, 자녀 없이 사망하면 로타르가 그의 왕국을 상속받았다. 로타르가 아들 없이 사망하는 경우, 루이 경건왕의 막내 아들 중 한 명이 "국민"에 의해 그를 대체하도록 선택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제국은 분열되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는 하급 왕들 위에 최고 권력을 행사했으며, 그들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이었다.
이 합의를 통해 루이는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은 제국의 통일성에 대한 그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의 모든 아들에게 지위를 제공하려고 시도했다. 아들에게 지위와 토지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대신, 그는 그의 장남 로타르를 그의 동생들 위에 올려놓고 제국의 가장 큰 부분을 그의 몫으로 주었다.
이 칙령은 베르나르를 누락했기 때문에 질서를 만들지 못했다. 베르나르는 즉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루이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유디트 바이에른(Judit Babariae)의 아들인 샤를 대머리왕에게 유리하도록 변경을 발표하기 시작하자, 그의 아들들인 로타르, 핍팽, 루이는 이를 거부했다. 형제보다 아들이 계승에서 우선하는 규칙은 여전히 변경되지 않았다.[4]
817년에는 아헨의 궁궐 일부가 붕괴되어 파손된 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고[41],「제국계획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했다.「제국계획령」에서는 프랑크족의 전통에 따라 제국 영토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는데, 장남 로타르에게는 이탈리아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토를, 차남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삼남 루트비히에게는 바이에른의 통치를 맡기고, 로타르를 공동 황제로, 나머지 두 사람을 부황제로 하여 황제의 통제를 따르도록 규정했다.[36][40][46]
2. 2. 3. 신앙 정책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루트비히 1세는 항상 예배당을 찾았으며, 성직자 및 성직자와 가까운 세속인들을 수상과 대신으로 중용하였다. 부활절과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은 국가적인 행사로 치루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충실한 조언자인 아니얀의 베네딕트를 통해 세속화된 사회를 정화, 도덕화할 정책을 폈다. 아니얀의 베네딕트는 816년과 817년에 교회회의를 열어 루트비히 집권 초반, 교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과 도덕적 재무장 정책을 실시하였다.817년 1월 교황 스테파노 4세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 즉위한 교황 파스칼 1세는 즉위하자마자 1월 24일 루트비히에게 교황청 대사를 보냈다. 루트비히는 교황청의 대사를 융숭히 대접했고, 교황의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교황권을 확고히 하였다. 교황 파스칼 1세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는 교황청에서 사신이 방문할 때마다 직접 나와서 교황청 사절단들을 맞이한 뒤 이를 융숭히 대접했고, 황제는 교황의 충실한 보호자임을 재확인시켰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그는 교회·수도원을 보호하고 새로 건립하였으며 성직자를 요직으로 등용하였다. 822년에는 유월절 때 아르덴의 부지에(Vouziers)와 아팅기(Attigny)의 수도원에서 교황 파스칼 1세 앞에서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가 죽은 것과 충실한 조언자인 베네딕트의 병사 등에 대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공개 참회와 속죄 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귀족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황제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냐며 조소하였다.

루트비히는 814년 자신이 강제로 수도사로 만든 드로고 3세는 메츠의 주교에, 후고는 생 퀘틴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친척들인 삼촌 베른하르트의 친손자들 아달하르트(Adalhard)와 왈라(Wala 또는 Walacho)는 엑샹 라샤펠 수도원에 보냈다. 또한 각 수도원과 성당에 각종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과 친인척인 니타르트 등 친척을 중용하였다. 그밖에 유산 상속을 우려하여,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과 친척들을 결혼 협정을 맺기 위해 다른 지역이나 인접국가로 시집보내는 대신에 수녀로 만들어 수녀원에 보냈고, 몇몇 이복형제들과 조카들, 친척들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사제와 수녀로 삼았다.
그는 세프티마니아(Septimania)의 변경백 베르나르(베르나르 드 세프티마니아)와 랭스 대주교 에보(Ebbo)를 그의 최고 고문으로 삼았다. 에보는 농노 출신으로 루이 1세에 의해 그 직책에 올랐지만, 나중에 그를 배신했다. 그는 샤를마뉴의 신하들 중 일부, 예를 들어 트리어(Trier) 근처 생막시맹 수도원(St. Maximin's Abbey, Trier)의 수도원장 엘리사카르(Elisachar)와 쾰른 대주교 힐데볼드(Hildebold)를 유임시켰다. 나중에 그는 엘리사카르를 많은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힐두인(생드니의 힐두인)으로 대체했다.[14]
그는 또한 새로 설립된 아헨(Aix-la-Chapelle)의 인덴 수도원(Inden Monastery)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고 프랑크 교회 개혁을 맡긴 세프티마니아 출신 서고트족인 베네딕투스(베네딕투스 아니아네)를 고용했다.[15] 베네딕투스의 주요 개혁 중 하나는 루이 1세의 영토 내 모든 수도원이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창시한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2. 2. 4. 외교와 대외 정책
824년 불가리아의 공작 오무르탁이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다.[18] 824년 2월 불가리아의 사신들이 프랑크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방문하자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출신의 막켈름(Machelmum)을 불가리아 사신들과 함께 불가리아 칸 오무르탁에게 보냈다.[18] 824년 12월 오무르탁은 사신을 다시 보냈으며 루트비히는 불가리아인들과 이웃하여 사는 다키아(Dacia)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아보드리트족을 비밀리에 불러 불가리아 왕 오무르탁의 저의를 파악하려 하였다.[18] 아보드리트족은 불가리아의 부당한 침략을 프랑크 왕국에 호소하였고, 루트비히는 불가리아 사신을 돌려보냈다.[18]그 후 루트비히는 825년 5월 프랑크 왕국과 국경 문제를 논하러 아헨을 방문한 불가리아 사신을 만났다. 루트비히는 싸움을 피하려 했고 협상을 시도했다.[18] 불가리아 왕 오무르탁은 826년과 824년에 보냈던 사신 대표를 다시 바이에른으로 보내 양국 사이의 국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어길 시는 전쟁도 불사하겠노라고 하였다.[18] 그러나 판노니아 백작 발데리히(Balderich)와 게롤트(Gerold)는 불가리아 군대의 침략 가능성이 없음을 보고하였다.[18] 그러나 827년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탁은 프랑크 제국의 동남부를 침략하여 판노니아 땅을 점령했다.[18] 프랑크 왕국에 의해 멸망한 아바르 카간국의 유민들은 오무르탁에게 협력하여 제국의 동남부를 위협하는 데 가담했다.[18]
루트비히는 818년 아들 로타르 1세를 롬바르디아의 분국왕으로 임명한 뒤 이탈리아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의 귀족들은 샤를마뉴 시대에 이미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루이는 베네벤토의 공작인 그리몰드 4세나 후임 공작 시코 등으로부터 충성 맹약을 받았지만 이는 모두 형식적인 것이었다.
루이의 통치 초기, 그의 국경 지대에 거주하는 많은 부족들—덴마크인, 오보트리트인, 슬로베니아인, 브르타뉴인 그리고 바스크인—은 프랑크 황제의 권력에 여전히 압도되어 감히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816년에 서보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서 슬라보미르가 이끄는 오보트리트인들이 뒤따랐다. 슬라보미르는 자신의 백성에게 버려지고 사로잡혔으며, 818년에 체아드라그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곧 체아드라그 또한 프랑크인에 대항하여 덴마크인과 동맹을 맺었는데, 덴마크인들은 곧 프랑크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더 큰 슬라브족의 위협이 남동쪽에서 커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부 파노니아 공작 류데비트는 드라바 강과 사바 강 국경을 괴롭히고 있었다. 프리울리 변경백 카돌라가 그에게 파견되었지만, 그는 원정 중에 사망했고, 820년에 그의 변경백령은 슬로베니아인들에게 침략당했다. 821년에 달마티아 공작 보르나와 동맹을 맺었고, 류데비트는 제압되었다. 824년에 불가리아 북서부의 여러 슬라브 부족들이 루이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그가 불가리아 통치자 오무르타그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자, 827년에 불가리아인들이 파노니아 변경령의 프랑크인을 공격하여 그들의 땅을 되찾았다.[18]
그의 광대한 영토의 남쪽 끝에서 루이는 샤를마뉴가 결코 정복하지 못한 롬바르디아 베네벤토 공작을 통제해야 했다. 그는 그리몰드 4세와 시코 공작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남서부 국경에서는 812년경 루이 경건왕이 팜플로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쪽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원정대는 북쪽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바스크인들이 롱세보 언덕의 고갯길에서 매복을 시도했지만, 그가 취한 예방 조치, 즉 인질 덕분에 간신히 탈출했다. 세기 가스코뉴 공작은 816년에 루이에 의해 폐위되었는데, 아마도 서쪽 피레네 산맥 남쪽의 바스크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거나 이와 공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바스크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크 황제가 닥스에서 진압했다. 세기는 루푸스 3세로 대체되었는데, 그는 818년에 황제에 의해 축출되었다. 820년 퀴에르지쉬르와즈에서 열린 회의에서 코르도바 칼리파(827년)에 대한 원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백작들인 투르 백작 위그와 오를레앙 백작 마트프리드는 행동이 느렸고, 원정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2. 2. 5. 아들들의 반란
831년,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등은 반란을 일으켜 한때 루트비히 1세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19] 그러나 교황의 지지로 834년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이 일은 종내 부자 형제간의 분쟁을 야기하고 프랑크의 국력을 쇠하게 했다. 당초 로타르는 두 동생의 지원을 업고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했다. 그러나 830년 10월에 열린 네이메헨 의회는 루트비히 1세를 복위시켰으며, 831년 2월 아헨의 제국 의회가 개입해서 상속령을 정해 2차 분배에서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만을 배당받았다. 그리고 로타르의 북부 로트링겐, 프로방스 등의 영토를 대머리 카를에게 준다고 명시했다.831년 피핀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측근인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사주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화해하였다. 832년 루트비히 1세는 피핀에게서 아키텐 영지를 빼앗아 카를에게 주었다. 이에 피핀은 강력 반발했고 그의 계비인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의 지원을 얻어 거병, 반란을 일으켰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아버지를 폐위했다.
로타르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는데 성공, 롤페르트로 끌고갔다가 말렘으로, 말렘에서 메츠로, 메츠에서 다시 수아송까지 끌고 갔다가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동시에 이복동생 대머리 카를은 부모에게서 떼어내 아르덴 근처 프륌 수도원에 보냈다.


그러나 834년 3월 루트비히 1세는 다시 황제 지지파들의 지원으로 제위에 복귀했으며 피핀 및 독일인 루트비히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834년 말 로타르 1세는 혼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롬바르디아로 패주했다.
835년에는 아들들에 의해 수아송의 한 성에 투옥되었으나 감시병들이 조는 틈을 타서 이들을 베고 탈출하기도 했다. 반란들을 진압함에 따라 837년 아헨 제국 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 의회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영토 일부를 떼어 더 많은 영토를 아들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로타르,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2. 3. 생애 후반
834년 루트비히 1세는 세 아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가 극적으로 복귀하였다. 836년 바이킹이 위흐레흐트와 안트워흐를 약탈했지만, 루트비히 1세는 막지 못했다. 837년 봄, 대머리 카를을 알레만니아와 부르고뉴의 왕으로 봉했으나, 이에 반발한 루트비히 독일인이 반란을 일으켰다.837년 바이킹족이 로리크를 침투하자, 루트비히 1세는 이들을 몰아냈다. 838년 12월, 차남 아키텐의 피핀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839년 5월 보름스 의회에서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에게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 차지하게 되었다. 839년 봄, 독일인 루트비히와 손자 피핀 2세가 다시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갔다. 루트비히 1세는 바이킹과 조약을 체결하여 프리슬란트의 프리시아를 내주었다.
루트비히 1세는 니타르트에게 왕실 역사를 편찬하게 하고, 비밀리에 어린 카를의 후견을 부탁했다. 838년 아들 피핀이 죽자 아키텐을 카를 2세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키텐 귀족들은 반발했고, 루트비히 1세도 결정을 취소하고 피핀의 아들 피핀 2세를 아키텐 분국왕으로 봉했다. 이는 후일 카를 2세와 피핀 2세 간 아키텐의 권리를 두고 860년대까지 내전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838년 6월,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에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다투었다. 838년 9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몫을 대머리 카를에게 넘긴다고 선언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했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 것에 대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군사를 이끌고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판노니아로 퇴각하였다.
839년 봄, 독일인 루트비히는 카를을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루아르에서 군사를 일으켜 피핀 2세를 지원했다. 로타르 1세는 루트비히 경건왕의 편에 서서 이들과 싸웠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1세의 아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결국 루트비히 경건왕은 대머리 카를에게 아키텐을 주려는 결정을 취소하게 된다.
그해 프리슬란트와 덴마크에 있던 바이킹이 제국 동부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고 바이킹은 수시로 동북방 프로이센 지방을 약탈하였다. 839년 말, 독일인 루트비히는 5월 30일의 보름스 의회 결정에 반발,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 선언을 하였다. 840년 초 독일인 루드비히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경건왕 루트비히가 진압군을 보내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840년 3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다시 셋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켜 돌려보냈다.

만년의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져 정사를 수상과 궁재들에게 넘겼고, 기관지염, 위암, 식도암 등에 걸려 고생했다. 840년 초, 병석에 누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여 그해 6월 20일경 라인강변으로 가 요양하였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루트비히는 제국의 상징물을 모두 장남 로타르 1세에게 보냈다. 루트비히 1세는 840년 7월 1일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가 열리기 전 잉겔하임의 라인강변에 있는 페터사우에를 건너던 중 성직자와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복형제인 드로고 주교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했다. 사인은 기관지염, 식도암, 위암 등의 후유증이었다. 곧, 이복동생인 메츠 교회 주교 드로고의 집례하에 자신의 어머니 힐데가르트가 안치된 아우스트라시아 메츠에 있는 장크트아르눌프 교회 내에 안치되었다.
루이는 마지막 승리의 전투 직후 병이 들었고, 잉겔하임 궁전 근처 라인강의 섬에 있는 여름 사냥 별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840년 6월 20일 많은 주교와 성직자들 앞에서, 그리고 그의 이복형제 드로고의 팔 안에서 사망했는데, 그는 그의 아들 루이를 용서하고 로타르를 황제로 선포하며 멀리 있는 샤를과 유디트를 그의 보호에 맡겼다.
곧 분쟁이 남은 형제들을 또 다른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843년 베르됭 조약 체결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제국을 세 개의 주권 독립체로 분할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은 각각 현대 프랑스와 독일의 핵심이 되었다. 중프랑크 왕국은 부르고뉴, 저지대 및 북부 이탈리아 등을 포함했지만, 855년까지 짧은 기간만 존속했고, 나중에 로타링기아로 재편되었다.[28] 아키텐 왕위를 둘러싼 분쟁은 860년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4][14][29]
루이는 메스의 생 아르눌 대수도원에 매장되었다.[30]
2. 3. 1. 치세 후반
834년 세 아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루트비히 1세는 폐위되었으나 극적으로 복귀하였다. 836년 바이킹이 위흐레흐트와 안트워흐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되돌아갔으나, 루트비히 1세는 이를 막지 못했다. 837년 봄, 루트비히 1세는 대머리 카를을 알레만니아와 부르고뉴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영지가 축소된 것에 반발한 루트비히 독일인이 반란을 일으켰다.837년 바이킹족이 침투하여 로리크가 침투하자, 루트비히 1세는 직접 이들을 영역 동북방으로 몰아냈다. 이들은 프리슬란트의 프리시아까지 자신들의 영토라고 요구했다. 838년 12월, 차남 아키텐의 피핀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아키텐은 대머리 카를에게 넘어가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839년 봄, 둘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와 손자이자 피핀의 아들 피핀 2세가 다시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갔다. 바이킹은 계속 프리슬란트와 프리시아를 요구했고, 결국 루트비히 1세는 839년 바이킹족이 요구한 조약을 체결하여 프리슬란트의 프리시아를 그들에게 주는 조건으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
루트비히 1세는 니타르트 등을 시켜 왕실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는 한편, 비밀리에 니타르트에게 어린 카를의 후견을 부탁하기도 했다. 838년 아들 피핀이 죽자 아키텐을 다시 카를 2세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발했고, 루트비히 1세도 결정을 취소하고 피핀의 아들 피핀 2세를 아키텐 분국왕으로 봉했다. 이는 후일 카를 2세와 피핀 2세간 아키텐의 권리를 두고 860년대까지 내전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838년 6월,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에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다투었다. 838년 9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몫을 대머리 카를에게 넘긴다고 선언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했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 것에 대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군사를 이끌고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판노니아로 퇴각하였다.
2. 3. 2. 혼란과 최후
839년 봄, 독일인 루트비히는 카를을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루아르에서 군사를 일으켜 피핀 2세를 지원했다. 로타르 1세는 루트비히 경건왕의 편에 서서 이들과 싸웠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1세의 아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결국 루트비히 경건왕은 대머리 카를에게 아키텐을 주려는 결정을 취소하게 된다.[11]그해 프리슬란트와 덴마크에 있던 바이킹이 제국 동부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고 바이킹은 수시로 동북방 프로이센 지방을 약탈하였다. 839년 말, 독일인 루트비히는 5월 30일의 보름스 의회 결정에 반발,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 선언을 하였다. 840년 초 독일인 루드비히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경건왕 루트비히가 진압군을 보내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840년 3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다시 셋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켜 돌려보냈다.
만년의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져 정사를 수상과 궁재들에게 넘겼고, 기관지염, 위암, 식도암 등에 걸려 고생했다. 840년 초, 병석에 누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여 그해 6월 20일경 라인강변으로 가 요양하였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루트비히는 제국의 상징물을 모두 장남 로타르 1세에게 보냈다. 루트비히 1세는 840년 7월 1일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가 열리기 전 잉겔하임의 라인강변에 있는 페터사우에를 건너던 중 성직자와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복형제인 드로고 주교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했다. 사인은 기관지염, 식도암, 위암 등의 후유증이었다. 곧, 이복동생인 메츠 교회 주교 드로고의 집례하에 자신의 어머니 힐데가르트가 안치된 아우스트라시아 메츠에 있는 장크트아르눌프 교회 내에 안치되었다.
루이는 마지막 승리의 전투 직후 병이 들었고, 잉겔하임 궁전 근처 라인강의 섬에 있는 여름 사냥 별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840년 6월 20일 많은 주교와 성직자들 앞에서, 그리고 그의 이복형제 드로고의 팔 안에서 사망했는데, 그는 그의 아들 루이를 용서하고 로타르를 황제로 선포하며 멀리 있는 샤를과 유디트를 그의 보호에 맡겼다.
곧 분쟁이 남은 형제들을 또 다른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843년 베르됭 조약 체결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제국을 세 개의 주권 독립체로 분할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은 각각 현대 프랑스와 독일의 핵심이 되었다. 중프랑크 왕국은 부르고뉴, 저지대 및 북부 이탈리아 등을 포함했지만, 855년까지 짧은 기간만 존속했고, 나중에 로타링기아로 재편되었다.[28] 아키텐 왕위를 둘러싼 분쟁은 860년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4][14][29]
루이는 메스의 생 아르눌 대수도원에 매장되었다.[30]
3. 평가와 비판
루트비히 1세는 경건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신앙심이 깊어 종교적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통치 능력은 좋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60] 샤를마뉴에게서 물려받은 넓은 영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60] 정치적으로 무능력하여 제국 분열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822년 아티니에서 파스칼 1세 교황과 성직자, 귀족들이 모인 의회 앞에서 베르나르의 죽음에 대해 공개 참회한 사건은 테오도시우스 1세를 본받은 행동이었지만, 당시 세속 통치자들은 신경 쓰지 않던 사소한 범죄 목록까지 낭독해 프랑크 통치자로서의 명성을 떨어뜨렸다.[4]
3. 1. 긍정적 평가
루도비히 1세는 경건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59] 이는 그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60]그는 신앙심이 깊고 교회에 대해 관대했으며, 교회 일에 많은 관심을 쏟았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다. 리무쟁의 어느 천문학자는 사서에서 그가 역경에 처했을 때도 좌절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강조했다. 트리어 대주교 테카누스는 그의 성격과 재능, 그리스도교적 자비심, 경건함, 사냥 실력 등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에르몰두스 니겔루스의 시는 그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3. 2. 부정적 평가
루트비히 1세는 신앙심이 깊어 종교적으로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통치 능력은 좋지 않았다.[60] 샤를마뉴 대제로부터 물려받은 넓은 영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60] 그는 정치적으로 무능력하여 제국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루트비히 1세는 평화롭게 제국을 물려받았지만, 내부 혼란을 야기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분쟁이 없었고, 데인족 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그러나 너무 일찍 상속령을 발표하면서 829년부터 네 아들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이 발생했다.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한 후에도 로타르 1세, 독일인 루트비히 2세, 피핀 2세, 대머리왕 카를 2세와 그 후손들 간의 갈등과 음모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이는 카롤링거 왕조를 약화시키고, 바이킹, 마자르족, 데인족, 슬라브족 등의 침략과 이탈리아와 독일 지역 귀족들의 난립을 초래하여 결국 제국이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다.
822년, 독실한 신자였던 루트비히 1세는 아티니에서 파스칼 1세 교황과 왕국의 성직자, 귀족들이 모인 의회 앞에서 베르나르의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1세를 본받은 행동이었지만, 당시 세속 통치자들은 신경 쓰지 않던 사소한 범죄 목록까지 낭독하면서 프랑크 통치자로서의 명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4]
4.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 | |
어머니 |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 | |
배다른 형 | 곱사등이 피핀 | |
형 | 피핀 카를로만 | 이탈리아의 왕 |
형 | 청년왕 샤를 | |
형 | 로타르 | 태어나자 마자 죽음, 쌍둥이 형 |
누이 | 아델라이드 | |
누이 | 베르타 | 샤를마뉴의 궁정시인 앙겔베르트와 결혼 |
배우자 | 에르망가르드 드 에스바이 | 첫 번째 부인, 794년경 결혼 |
아들 | 로타르 1세 | 중프랑크 왕국의 왕 |
아들 | 페팽 1세 | 아키텐의 왕 |
딸 | 아델라이드 | |
딸 | 로트루드 | 오베르뉴 백작 제라르와 결혼 |
딸 | 힐데가르트 (마틸다) | |
아들 | 루트비히 2세 | 동프랑크 왕국의 왕 |
배우자 | 바이에른의 유디트 | 두 번째 부인 |
딸 | 기젤라 | 프리울리의 에버하르트와 결혼 |
아들 | 샤를 2세 | 서프랑크 왕국의 왕 |
사생아 아들 | 센의 아르눌프 | [1] |
사생아 딸 | 파리의 알파이스 | [2] |
5. 기타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후계자를 지목하고 상속령을 제정한 것은 60대의 일이었지만, 루트비히는 즉위 직후 상속령을 정했고 이는 아들들의 반란의 원인이 됐다. 루트비히는 자신이 평화롭게 상속받았던 제국을 내부 혼란에 빠뜨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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