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신들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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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드비히》는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1973년 영화로, 바이에른 왕국 루트비히 2세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18세에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는 리하르트 바그너를 후원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보였지만, 정치적 무능력과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갈등을 겪는다. 이 영화는 비스콘티 특유의 화려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여러 버전으로 편집되어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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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신들의 황혼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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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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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Ludwig (루트비히) |
감독 | 루키노 비스콘티 |
제작자 | 디터 가이슬러 |
각본 | 루키노 비스콘티 |
촬영 | 아르만도 난누치 |
편집 | 루게로 마스트로이안니 |
음악 | 리하르트 바그너 |
주연 | 로미 슈나이더 |
제작사 | 메가 필름 |
배급사 | 판타 치네마토그라피카 (이탈리아) |
개봉일 | 1973년 1월 18일 (서독) |
상영 시간 | 238분 |
제작 국가 | 이탈리아 |
언어 | 영어 |
제작비 | DM 1200만 |
2. 생애
영화는 1864년, 18세의 나이로 바이에른 왕국의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의 생애를 따라간다. 즉위 직후 그는 평소 깊이 심취했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뮌헨으로 불러들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이는 내각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루트비히는 독립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촌 엘리자베트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지만, 그녀는 거리를 두며 여동생 소피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다. 루트비히는 소피와 약혼했으나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대한 고뇌 끝에 파혼하고, 이후 남성 하인들과의 관계에 몰두하며 가톨릭 신자로서 죄책감을 느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겪으며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은 루트비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궁전, 헤렌킴제 등 동화 같은 성 건축에 막대한 국고를 쏟아부으며 자신만의 꿈의 세계로 도피했다. 그의 기행과 과도한 지출은 결국 내각의 불만을 극대화시켰고, 1886년 정신과 의사 베른하르트 폰 구덴은 내각의 사주를 받아 그를 정신 이상으로 선언했다. 폐위된 루트비히는 베르크 성에 연금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폰 구덴과 함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영화는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고독, 현실과의 불화,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탐미적이면서도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1864년 뮌헨, 18세의 이상주의자 루트비히 2세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바이에른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다.[1][2] 그는 예술이 왕국의 명성을 드높일 것이라 믿었으며, 왕으로서 내린 첫 공식 명령 중 하나는 평소 깊이 심취했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3] 루트비히 2세는 재능은 풍부하지만 빚에 시달리던 바그너에게 호화로운 지원을 약속했고, 바그너는 왕의 요청에 따라 뮌헨에 정착하여 왕의 후원 아래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1][3]2. 2. 통치와 예술 후원
1864년 뮌헨, 18세의 루트비히 2세가 바이에른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첫 공식 조치 중 하나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루트비히는 예술이 왕국의 명성을 높일 것이라 믿었으며, 그의 요청으로 바그너는 뮌헨에 정착했다. 그러나 루트비히의 내각은 예술에 대한 왕의 막대한 지출을 이해하지 못했고, 특히 바그너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으나, 바그너가 지휘자 한스 폰 뷜로프의 아내 코지마 폰 뷜로프와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이 관계는 틀어졌다. 이 스캔들로 인해 바그너는 뮌헨을 떠나야 했지만, 루트비히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바그너와 그의 예술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예술과 꿈의 세계에 몰두하면서 루트비히는 점차 현실 정치에서 멀어졌다. 그는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바이에른이 중립을 지키기를 원했지만, 내각의 결정에 따라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편에 참전했다가 패배했다. 루트비히는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성에 머물렀다. 이후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거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 하에서 많은 주권을 빌헬름 1세와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은 루트비히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성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궁전, 헤렌킴제 등 동화 같은 성들을 짓는 데 국고를 사용했다. 바그너를 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건설 지원과 더불어 이러한 대규모 건축 사업은 '상식을 벗어난 낭비'로 여겨졌으며, 왕국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내각은 은둔하며 비현실적인 계획에 몰두하는 왕의 막대한 빚 때문에 점점 더 큰 좌절감을 느꼈다. 결국 1886년, 정부 각료들은 정신과 의사 베른하르트 폰 구덴의 진단을 근거로 루트비히를 정신 질환자로 선언하고 왕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루트비히의 통치 스타일과 예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리고 현실 정치 외면이 초래한 결과였다.
2. 3. 정치적 무능력과 갈등
루트비히 2세는 정치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는 바이에른 왕국의 내각과 지속적인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바그너에 대한 막대한 지원과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내각의 불만을 샀으며, 결국 바그너는 뮌헨을 떠나야 했다.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당시 루트비히는 중립을 원했지만, 내각의 결정으로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 참전했다가 패배하여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루트비히는 전쟁 상황을 외면하고 자신의 성에 머물렀으며, 이는 동생 오토와 측근 뒤르크하임 백작의 분노를 샀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는 프로이센 왕국을 지원했지만, 전쟁 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와 재상 비스마르크에게 많은 주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동생 오토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되자 루트비히는 큰 충격을 받고 더욱 현실 도피에 몰두했다.
전쟁 이후 루트비히는 정치에서 더욱 멀어져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궁전, 헤렌킴제 등 호화로운 성 건축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이는 왕국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고, 괴팍하고 은둔적인 왕의 막대한 빚 때문에 내각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결국 1886년, 내각은 정신과 의사 베른하르트 폰 구덴의 진단을 근거로 루트비히를 정신 이상으로 선언하고 폐위를 추진했다. 루트비히는 충성스러운 하인들의 도움으로 잠시 내각 각료들을 체포하기도 했으나, 세상에 대한 염증과 우울감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루트비히는 베르크 성으로 이송되어 연금 상태에 놓였다.
2. 4. 동성애와 사생활
루트비히는 사촌인 엘리자베트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바트 이슐에서의 만남에서 서로 가까워져 키스를 나누기도 했으며, 루트비히는 엘리자베트에게 친애 이상의 감정을 품었다. 엘리자베트 또한 궁정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독을 즐기는 루트비히를 자신과 비슷한 인물로 여겼으나, 한편으로는 거리를 두며 자신의 여동생 소피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다.루트비히는 주변의 권유와 엘리자베트의 영향으로 1867년 1월 소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인지한 직후의 일이었다. 약혼 기간 중, 루트비히의 어머니와 내각은 그에게 성적 경험을 갖게 할 목적으로 여배우를 그의 처소에 보내기도 했으나, 루트비히는 이에 분노하여 여배우를 욕조에 던져버렸다. 결국 루트비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소피에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으로 결혼을 계속 미루다가 파혼했다.
파혼 이후 루트비히는 동성애적 관계에 더 기울어졌다. 그는 자신의 하인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때로는 이들과 함께 난교 파티를 열기도 했다. 또한, 1881년에는 배우 요제프 카인츠가 출연한 ''로미오'' 공연에 감명받아 그와 짧지만 격렬한 우정을 나누었으나, 카인츠는 주로 루트비히의 재정적 지원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동성애 성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트비히에게 깊은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갈등과 실망 속에서 루트비히는 점차 공적인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는 정치나 전쟁에 무관심해졌고,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궁전, 헤렌킴제 등 호화로운 성 건축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으며 현실로부터 도피했다. 그의 생활은 주야가 뒤바뀌는 등 퇴폐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촌 엘리자베트가 방문을 원했을 때조차 만남을 거부할 정도로 고립된 모습을 보였다.
2. 5. 폐위와 죽음
정치와 현실에서 점점 멀어진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궁전, 헤렌킴제 등 호화로운 성 건설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상식을 벗어난 낭비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 은둔적인 생활이 계속되자 바이에른 정부 각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결국 1886년, 정부 각료들은 정신과 의사 베른하르트 폰 구덴과 공모하여 루트비히 2세를 정신질환을 이유로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고, 폰 구덴은 왕을 직접 진찰하지도 않은 채 정신 이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6월 12일,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충성스러운 하인들과 현지 경찰 등의 도움으로 잠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폐위를 위해 파견된 각료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왕을 오랫동안 섬겨 온 뒤르크하임 대령은 군대나 민중에게 호소하면 폐위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왕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은 염증을 느끼고 우울감에 빠져 있던 루트비히 2세는 적극적으로 저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왕의 삼촌인 루이트폴트가 섭정으로 선포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폐위된 루트비히 2세는 슈타른베르크 호수 근처의 베르크 성으로 옮겨져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였다.
1886년 6월 13일 저녁, 베르크 성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을 정신 이상으로 진단했던 의사 폰 구덴과 함께 성 주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두 사람은 슈타른베르크 호수의 얕은 물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루트비히 2세가 호수에 들어가 자살하려 했고, 폰 구덴이 이를 막으려다 함께 익사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여전히 불분명하며, 타살설을 포함한 여러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3. 유산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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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화 "루트비히"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로, 『지옥에 떨어진 용사들』,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함께 그의 "독일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이 영화는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의 즉위부터 의문의 죽음까지의 생애를 사실에 기반하여 그려낸 역사 대작이다.
비스콘티 감독 중기 이후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화려하고 호화로운 귀족 취미가 극대화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고독을 즐겼던 루트비히 2세의 이지성과 광기, 독선적인 예술가 바그너와의 불안정한 관계, 사촌 엘리자베트에 대한 연모와 동성애를 포함한 탐미적인 애증 관계 등을 복합적으로 묘사하며 매우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4. 1. 영화 줄거리
뮌헨, 1864년. 18세의 이상주의자 루트비히 2세가 부왕의 서거로 바이에른 왕국의 왕위에 오른다. 왕으로서 그의 첫 공식 명령은 평소 심취했던 작곡가 바그너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루트비히는 예술이 왕국의 명성을 높일 것이라 믿었고, 그의 요청에 따라 바그너는 뮌헨에 호화로운 저택을 하사받고 정착하여 작곡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내각 관료들은 예술에 대한 왕의 막대한 지원과 바그너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에 불만을 품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서 충실한 친구를 찾으려 했지만, 왕 몰래 바그너는 자신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프의 아내 코지마 폰 뷜로프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결국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바그너는 뮌헨을 떠나야 했고, 루트비히는 이후에도 바그너와 그의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했지만 그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루트비히에게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그의 사촌이자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였다. 바트 이슐에서 열린 귀족 가문 모임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키스를 나누기도 했지만, 엘리자베트는 루트비히를 자신과 같은 고독한 부류로 여기면서도 냉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여동생인 소피와 루트비히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루트비히는 소피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바그너와 엘리자베트에게 실망한 루트비히는 점차 공적인 활동에서 멀어져 자신만의 꿈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이 중립을 지키길 원했지만, 내각은 오스트리아 편에 서기로 결정했고 전쟁은 결국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다. 루트비히는 전쟁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성에 머물렀고, 이는 그의 남동생 오토와 측근 뒤르크하임 백작의 불만을 샀다. 뒤르크하임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에게 결혼을 권유했다.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자각한 직후인 1867년 1월, 루트비히는 갑작스럽게 소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소피에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지 회의감을 느끼고 결혼을 계속 미루다 결국 파혼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남성 하인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을 지원했지만, 전쟁 후 이어진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1세와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많은 주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전쟁 직후 동생 오토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들의 치료를 받게 되자 루트비히는 큰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 루트비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궁전, 헤렌킴제 등 호화로운 성을 짓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그의 괴팍하고 은둔적인 생활과 늘어나는 빚에 내각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1881년에는 배우 요제프 카인츠가 공연한 ''로미오''에 감명받아 그와 짧지만 강렬한 우정을 나누지만, 카인츠는 주로 왕의 돈에 관심을 보였다. 루트비히는 또한 하인들과 함께 난교 파티를 열며 퇴폐적인 생활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사촌 엘리자베트가 방문을 원했을 때도 그는 만나기를 거부했다.
1886년, 왕의 폐위를 획책하던 내각의 사주를 받은 정신과 의사 베른하르트 폰 구덴은 루트비히가 정신 이상이라고 선언했다. 충성스러운 하인들의 도움으로 루트비히는 잠시 내각 인사들을 체포하기도 하고, 측근들은 정신 이상이라는 비난에 맞서 싸우라고 조언했지만, 세상에 지친 그는 우울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결국 그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바이에른의 섭정으로 선포되었다. 루트비히는 슈타른베르크 호수 근처의 베르크 성으로 이송되어 구금 상태로 정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틀 후인 6월 13일, 루트비히와 폰 구덴은 폭우 속에서 성을 나와 산책을 나섰다가 몇 시간 뒤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로 남게 되었다.
4. 2. 출연진
배역 |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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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 헬무트 베르거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 (시시) | 로미 슈나이더 |
리하르트 바그너 | 트레버 하워드 |
코지마 폰 뷜로 | 실바나 망가노 |
호프만 신부 | 게르트 프뢰베 |
뒤르크하임 백작 | 헬무트 그림 |
폰 홀슈타인 백작 | 움베르토 오르시니 |
오토 왕자 | 존 모더-브라운 |
여왕 어머니 | 이자벨라 텔레진스카 |
조피 공주 | 소니아 페트로바 |
요제프 카인츠 | 폴커 보넷 |
베른하르트 폰 구덴 교수 | 하인츠 모그 |
릴라 폰 불리오프스키 (여배우) | 아드리아나 아스티 |
리하르트 호르니히 (루트비히의 하인) | 마크 포렐 |
페렌치 백작 부인 | 노라 리치 |
한스 폰 뷜로 | 마크 번스 |
국무 장관 | 알렉산더 알레르손 |
아돌프 폰 프레츠슈너 재무부 장관 | 쿠르트 그로스쿠르트 |
마이어 (루트비히의 하인) | 마우리치오 보노글리아 |
베버 (루트비히의 하인) | 베르트 블로흐 |
루도비카 공주, 엘리자베트의 어머니 | 안네-마리 한슈케 |
루이트폴트 공 | 제라르 에르테르 |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에마누엘 공작 | 얀 린하르 |
헬레네 공주 | 클라라 모스타우체스키 |
카를 헤셀슈베르트 | 게르노트 뫼너 |
크라일스하임 백작 | 볼프람 셰르프 |
폰 할센 궁정 장관 | 프리드리히 폰 레데부르 |
카를 테오도어 공 | 군나르 바르너 |
마틸데 공주 | 라이카 유리 |
원장 수녀 | 클라라 콜로시모 |
뮐러 박사 | 카를-하인츠 빈트호르스트 |
4. 3. 제작 과정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은 마르가레테 폰 바이에른과 페데리코 1세 곤차가를 통해 루트비히 2세와 먼 친척 관계였다. 그는 외톨이이자 심미주의 군주였던 루트비히 2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으며, 그를 "정치보다는 예술로 통치하려 했던 마지막 절대 군주"로 보았다.[2] 비스콘티는 본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화화를 오랫동안 준비했으나, 예산 문제로 무산되자 대신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영화 촬영은 이탈리아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와 서독 바이에른 현지에서 진행되었다. 주요 촬영 장소로는 로젠인젤, 베르크 성, 슈타른베르크 호, 헤렌킴제, 호엔슈방가우 성, 린더호프 궁전, 퀴빌리에 극장, 님펜부르크 궁전, 에탈 수도원, 카이저 빌라, 노이슈반슈타인 성 등이 있다. 촬영은 1972년 1월 말에 시작되어 6개월간 이어졌다.
비스콘티는 이전 작품들처럼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사용자)을 고려하여 영화를 영어로 촬영했다. 촬영은 소리 없이 진행하고(MOS) 후반 작업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더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독일어권 배우들은 독일어판 개봉을 위해 직접 더빙했지만, 주연 헬무트 베르거는 오스트리아 억양 때문에 다른 배우가 독일어 더빙을 맡았다. 이탈리아어판에서는 잔카를로 잔니니가 베르거의 목소리를 더빙했다.
제작 막바지인 1972년 7월 27일, 비스콘티 감독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각본가 엔리코 메디올리는 다큐멘터리 ''루키노 비스콘티 백작의 삶과 시대''에서 오스트리아 시골의 추위와 치네치타 스튜디오의 더위를 오가는 급격한 환경 변화가 발병 원인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비스콘티는 힘든 재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완성했지만, 왼쪽 반신 마비 후유증은 평생 남게 되었다.
이 영화는 비스콘티 감독의 집념으로 완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약 4시간 분량이었던 것이 배급사의 요구로 인해 감독 본인이 약 3시간으로 편집했고, 이후 제3자에 의해 약 140분까지 단축되기도 했다. 1980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는 감독의 본래 의도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4시간 버전이 처음 공개되었으며, 1995년에는 훼손된 원본 네거티브 필름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지옥에 떨어진 용사들』,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함께 비스콘티의 "'''독일 3부작'''" 중 마지막 영화로 꼽힌다. 영화는 중기 이후 비스콘티 작품 특유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귀족적 미학을 잘 보여준다. 독일 3부작 중에서는 가장 많은 독일권 배우를 기용했으며, 독일어판도 존재하지만 많은 국가에서는 이탈리아어판으로 공개되었다.
4. 4. 음악
이 영화는 오리지널 스코어 대신 기존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을 사용하였다. 주요 사용된 음악은 리하르트 바그너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탄호이저》의 발췌곡), 자크 오펜바흐, 로베르트 슈만의 관현악 작품들이다. 특히, 바그너가 작곡했으나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던 피아노 작품 《내림 A장조 비가》가 프랑코 만니노[3]의 연주로 삽입된 것이 특징이다.[4]4. 5. 평가 및 수상 내역
미국에서는 대폭 편집된 버전이 개봉되어 영화는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5] 로저 이버트는 ''시카ゴ 선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어쩌면 비스콘티만이, 쇠퇴의 어두운 면에 집착하는 듯 보이는 비스콘티만이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2세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6] 빈센트 캔비는 ''뉴욕 타임스''에서 "비스콘티는 과거에 매우 지적인 영화 제작자였기에, '루드비히'가 이토록 아이디어가 빈약할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고 언급했다.[7]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로버트 마조코는 "비스콘티 자신의 고뇌에 찬 낭만주의의 무의식적인 패러디, '특권적인 자유'에 대한 비판, 자유로운 영혼이 저주받은 영혼인 옛 도덕극—소화 불량에 걸린 비스콘티가 스스로에게 설교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하지만 영화의 완전한 감독판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긍정적으로 변했다. ''필름 코멘트''의 조나단 로니는 "오늘날 이 완전한 길이의 ''루드비히''는... 최소한 이미지와 형태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그림처럼 느껴진다."고 썼다.[8] 빌지 에비리는 "주로 중간 클로즈업과 어두운 실내를 중심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주인공 자신의 정신 상태와 일치하는 고립감을 만들어낸다."고 평가했다.[9]
상 | 연도 | 부문 | 후보 | 결과 |
---|---|---|---|---|
아카데미상 | 1974 | 최우수 의상 디자인 | 피에로 토시 | 후보 |
다비드 디 도나텔로 상 | 1973 | 최우수 작품상 | 수상 (영화 알프레도, 알프레도와 공동 수상) | |
최우수 감독상 | 루키노 비스콘티 | 수상 | ||
특별 다비드상 | 헬무트 베르거 | 수상 | ||
독일 영화상 | 1973 | 최우수 남우주연상 | 후보 | |
최우수 여우주연상 | 로미 슈나이더 | 후보 | ||
은곰상 | 1974 | 최우수 감독상 | 루키노 비스콘티 | 후보 |
최우수 제작자상 | 우고 산탈루치아 | 후보 | ||
최우수 각본상 | 루키노 비스콘티, 엔리코 메디올리, 수소 체키 다미코 | 후보 | ||
최우수 여우조연상 | 실바나 망가노 | 후보 | ||
최우수 촬영상 | 아르만도 난누치 | 수상 | ||
최우수 프로덕션 디자인상 | 마리오 키아리 | 수상 | ||
최우수 의상 디자인상 | 피에로 토시 | 수상 | ||
바야돌리드 국제 영화제 | 1973 | 황금 스파이크 | 루키노 비스콘티 | 수상 |
일본에서는 제작 후 8년, 비스콘티 사후 4년째인 1980년에 비스콘티 편집판(3시간 분량)이 '''루트비히/신들의 황혼'''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에서 비스콘티의 인기는 『산고양이』 등 귀족을 다룬 영화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흐름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복원판은 2006년 비스콘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루트비히【완전 복원판】'''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상영되었다. 참고로, 일본 개봉 시 사용된 부제 '신들의 황혼'은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장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바그너와의 관계를 부각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원제에는 없는 표현이기에 최근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4. 6. 검열 및 다양한 버전
장기간의 촬영 중 비스콘티 감독은 병으로 쓰러졌으나, 힘든 재활을 거쳐 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얻은 왼쪽 반신 마비 후유증은 평생 남게 되었다.이렇게 완성된 영화는 처음에는 약 4시간 분량이었으나, 배급사는 상영 시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단축을 요구했다. 이에 비스콘티 감독은 본인 스스로 약 3시간 분량으로 편집했으며, 더 나아가 제3자에 의해 약 140분으로 단축되었다.
1980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는 비스콘티의 당초 의도에 최대한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4시간판이 처음 공개되었고, 1995년에는 열화된 오리지널 네거티브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영화는 주연 배우를 포함하여 독일권 배우가 다수 출연했으며, 이에 맞춰 배우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한 독일어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 등 많은 나라에서는 이탈리아어판으로 공개, 판매(DVD 등의 경우 제1언어로서)되고 있으며, 보통은 이쪽을 오리지널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헬무트 버거의 이탈리아어 목소리는 배우 잔카를로 잔니니가 더빙했다.)
일본에서는 제작 후 8년, 비스콘티 사후 4년째인 1980년, 비스콘티 편집판(3시간판)이 『'''루트비히/신들의 황혼'''』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복원판은 2006년에 『'''루트비히【완전 복원판】'''』이라는 제목으로, 비스콘티 탄생 100주년 기념 특집으로 공개되었다. 참고로, 일본어 제목은 앞서 언급했듯이 『신들의 황혼』이 부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의 장 제목이며, 바그너와의 교류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원제에 없는 단어이므로 사용되지 않는다.
5. 기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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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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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8
[2]
웹사이트
Family tree of Luchino Visconti di Modrone
https://gw.geneanet.[...]
2021-10-06
[3]
웹사이트
Last Original Work for Piano (Original Soundtrack)
https://www.youtube.[...]
DRG Records
2021-04-09
[4]
웹사이트
Wagner at the piano: Wilhelm Latchoumia
https://www.classict[...]
2021-04-09
[5]
웹사이트
Ludwig
https://www.rottento[...]
2022-12-13
[6]
웹사이트
Ludwig movie review & film summary (1973) {{!}} Roger Ebert
https://www.rogerebe[...]
2022-12-13
[7]
뉴스
Screen: 'Ludwig,' a Study in Depravity, Arrives
https://www.nytimes.[...]
2022-12-13
[8]
웹사이트
Film of the Week: Ludwig
https://www.filmcomm[...]
2022-12-13
[9]
웹사이트
Experience the Mad Opulence of Visconti's "Ludwig" on a Big Screen
https://www.villagev[...]
2022-12-13
[10]
뉴스
Herren der Schere
http://www.spiegel.d[...]
1993-04-04
[11]
웹사이트
Ludwig (1972) – Luchino Visconti | Synopsis, Characteristics, Moods, Themes and Related | AllMovie
https://www.allmovie[...]
[12]
웹사이트
Ludwig Blu-Ray Limited Edition Review
https://www.blu-ray.[...]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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