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도를레앙 (18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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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즈 도를레앙은 1812년 4월 3일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와 마리아 아말리아의 장녀로 태어났다. 1832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와 결혼하여 벨기에 왕비가 되었으며, 프랑스 오를레앙 왕가와 벨기에 왕가의 동맹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자선 활동과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1850년 결핵으로 사망하여 라켄의 노트르담 교회에 묻혔다. 그녀는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레오폴 2세는 벨기에의 국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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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도를레앙 (181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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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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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루이즈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이사벨 |
출생일 | 1812년 4월 3일 |
출생지 | 팔레르모, 시칠리아 왕국 |
사망일 | 1850년 10월 11일 (38세) |
사망지 | 오스텐더, 벨기에 |
매장지 | 레이컨 성모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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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
배우자 | 레오폴드 1세 (1832년 결혼) |
자녀 | 루이 필리프, 벨기에 왕세자 레오폴드 2세, 벨기에 국왕 필리프, 플랑드르 백작 샤를로트, 멕시코 황후 |
왕가 | |
가문 | 오를레앙 가문 |
아버지 | 루이 필리프 1세 프랑스 국왕 |
어머니 | 마리아 아말리아 디 나폴리 에 시칠리아 |
왕비 | |
왕비 | 벨기에의 왕비 |
재위 기간 | 1832년 8월 9일 – 1850년 10월 11일 |
2. 생애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3세(훗날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와 양시칠리아 공주 출신의 왕비 마리 아멜리 사이의 장녀로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필리프가 1830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고, 1831년 레오폴드가 초대 벨기에 국왕으로 즉위한 후인 1832년, 콩피에뉴에서 레오폴드와 결혼하여 초대 벨기에 왕비가 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벨기에 왕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는 부르봉 가문 및 합스부르크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아버지의 왕조가 무너진 지 2년 뒤인 1850년, 루이즈는 결핵으로 남편보다 먼저 오스텐데에서 사망했으며, 라켄의 노트르담 교회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12년 4월 3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가 되는 루이 필리프이고, 어머니는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이다. 루이즈는 이들 부부의 장녀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고모인 오를레앙 공녀 아델라이드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교육을 받았다. 특히 고모로부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았으며,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를 배우기도 했다.오를레앙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왕족 공주의 지위를 가졌다.
2. 2. 결혼


1830년 7월 혁명으로 아버지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루이즈의 지위는 국왕의 장녀로 상승했다.
1832년 8월 9일, 20세의 루이즈는 22살 연상의 벨기에의 레오폴 1세 국왕과 콩피에뉴 궁전에서 결혼했다. 레오폴 1세는 첫 번째 부인인 웨일스 공녀 샬롯 (1796–1817)이 1817년 출산 중 사망한 후 혼자 지내고 있었다. 레오폴 1세는 개신교 신자였기에, 결혼식은 가톨릭과 칼뱅주의 의식을 모두 따라 진행되었다.
이 결혼은 레오폴 1세가 그리스 왕위 후보로 거론될 때부터 이미 제안되었던 것이며, 그가 루이즈의 오빠인 네무르 공작 대신 벨기에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추진되었다. 이 결혼은 새롭게 왕위에 오른 두 군주, 즉 루이즈의 아버지 루이 필리프 1세와 남편 레오폴 1세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였기에 정략적으로 적절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루이즈의 어머니 마리 아멜리는 레오폴 1세가 개신교 신자라는 점 때문에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아버지 루이 필리프 1세는 당시 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가 약했기 때문에 이 결혼이 프랑스 오를레앙 왕조의 위상을 높이고, 다른 자녀들이 기존 유럽 왕가들과 혼인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루이즈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결정된 결혼과 정든 프랑스 및 가족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불행함을 느꼈다. 그러나 레오폴 1세는 결혼 초기부터 루이즈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루이즈는 점차 감사함을 느끼며 두 사람의 관계는 조화롭게 발전했다. 그녀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다정한 어머니로 묘사된다. 본래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고, 남편 레오폴 1세 역시 그녀가 조용한 가정생활을 하기를 원했기에 대외적으로 나설 기회는 많지 않았다. 루이즈는 자녀 양육에 힘썼으며, 남편을 위해 스탕달, 샤토브리앙, 바이런, 셰익스피어 등의 문학 작품을 읽어주며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1840년 마지막 아이를 낳은 후, 레오폴 1세와 루이즈는 각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레오폴 1세는 주로 아르덴 지역에서 시간을 보냈고, 루이즈는 오스텐데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1844년부터 레오폴 1세는 아르카디 클라레라는 여성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녀를 브뤼셀 궁전 근처에 살게 했다. 이 일은 이미 출산과 프랑스에 있는 가족들의 불행(1848년 혁명으로 인한 아버지의 퇴위 등)으로 약해져 있던 루이즈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대중의 동정은 루이즈에게 쏠렸다. 당시 아르카디 클라레의 마차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오물 세례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 결혼을 통해 벨기에 왕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는 부르봉 가문 및 합스부르크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는 유럽 내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2. 3. 벨기에 왕비

루이즈 왕비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에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벨기에는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군주국이었기 때문에, 왕비의 역할에 대한 확립된 전통이 아직 없었다. 남편 레오폴 1세는 왕실의 대외 활동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루이즈에게 공개적인 역할을 거의 부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루이즈 왕비는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주로 자녀 양육을 감독하고 프랑스에 있는 친정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개인 고해 신부인 피에르 드 코닝크 신부와 함께 종교적인 생활에 집중했다. 그녀에게는 네 명의 시녀가 배정되었는데, 귀부인으로는 메로데의 루이즈-잔 드 테잔 드 푸졸 백작부인이 있었고, 세 명의 궁정 귀부인으로는 스타사르 남작부인 캐롤라인 뒤 마스 고스윈, 호흐포르스트의 왈 마스부르그 엠마누엘 남작부인 캐롤라인 드, 빌레인 조에 백작부인이 있었다.
레오폴 1세는 대외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루이즈의 참여는 더욱 드물었지만, 왕립 라켄 궁전에서는 귀족들을 위한 리셉션, 무도회, 국빈 만찬 등 사적인 왕실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었다. 초기에는 벨기에 귀족들이 여전히 네덜란드의 오렌지 가문에 충성하는 경향이 있어 대부분 영국인 손님들이 참석했지만, 점차 벨기에 귀족들도 왕실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왕실 행사에 초대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루이즈가 벨기에에서 교류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들이었다. 이 작은 집단 안에서 루이즈는 점차 수줍음을 극복하고 가면 무도회를 즐겼다.
루이즈 왕비는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매일 아침 시녀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며, 직접 그들의 집을 방문하여 위로와 함께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때로는 자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하여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시녀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가 오면, 비서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830년대에 쇠퇴기에 있던 레이스 제작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레이스 제작 학교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며 큰 도움을 주었다.
레오폴 1세는 루이즈가 벨기에 내를 여행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녀는 특히 플랑드르 해안 도시, 그중에서도 오스텐더를 가장 좋아했다. 그곳에서 승마를 즐기고, 해수욕을 하며, 해변을 따라 걸으며 조개껍데기를 모으곤 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1841년 런던에서 열린 빅토리아 공주의 세례식에 동행하고 싶어 했으나 레오폴 1세는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1841년 파리에서 부모님을 방문하고, 1843년 브륄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으며, 1844년에는 버킹엄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생일을 축하했고, 1847년 런던 국빈 방문에도 동행했다.
수줍은 성격 탓에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지만, 사적으로는 강한 의지와 뚜렷한 주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정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당시 독일 언론은 그녀가 "정치 문제에 극심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브뤼셀에서 불만의 원인"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1] 실제로 레오폴 1세는 시간이 지나면서 국정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구했고, 루이즈는 외교 문제에 대해 조언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레오폴 1세는 그녀의 능력을 신뢰하여 자신이 국외에 부재할 경우 루이즈를 공식 섭정으로 임명할 것을 정부에 제안하기도 했다.[3] 그러나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철회되었다.[4]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에 있던 부모님이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 루이즈 왕비는 벨기에 국민들의 동정을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영국으로 망명한 부모님을 방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벨기에 내에서 국왕 부부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으며, 벨기에 지방을 순회하며 국민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2. 4. 사망
루이즈 여왕은 1850년 10월 11일, 옛 오스텐데 왕궁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5] 그녀의 사망은 샤를 로지에와 빅토르 테쉬 장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라켄으로 옮겨졌고, 오스텐데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라켄 성모 마리아 교회의 왕실 지하 묘지에 묻혔다.3. 자녀
루이즈와 레오폴 1세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사진 | 이름 | 생년 | 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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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필리프 | 1833년 7월 24일 | 1834년 5월 16일 | 요절 |
![]() | 레오폴 2세 | 1835년 4월 9일 | 1909년 12월 17일 | 벨기에의 국왕 |
![]() | 필리프 | 1837년 3월 24일 | 1905년 11월 17일 | 플랑드르 백작, 알베르 1세의 아버지 |
![]() | 샤를로트 | 1840년 6월 7일 | 1927년 1월 19일 | 멕시코의 황후 (막시밀리아노 1세와 결혼) |
3. 1. 루이 필리프 왕세자
1833년 7월 24일에 태어나 1834년 5월 16일에 9개월의 나이로 요절하였다.3. 2. 레오폴 2세

레오폴 2세는 1835년 4월 9일에 태어나 1909년 12월 17일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벨기에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루이즈 도를레앙이며, 아버지는 레오폴 1세이다. 형제로는 요절한 형 루이 필리프, 동생 필리프, 여동생 샤를로트가 있다.
마리 헨리에테 폰 외스터라이히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3. 3.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왕자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왕자는 1837년 3월 24일에 태어나 1905년 11월 17일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마리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인 알베르 1세는 훗날 벨기에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3. 4. 벨기에의 샤를로트
샤를로트 공주는 1840년 6월 7일에 태어나 1927년 1월 19일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와 결혼하여 멕시코의 황후가 되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4. 훈장
5. 가계
루이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즈 앙리에트
(콩티 공녀)
루이즈 마리
루이 장 마리, 팡티에브르 공작
마리아 테레사
(모데나 공녀)
마리아 아말리아
페르디난도 1세
카를로스 3세
마리아 아말리아
(작센 공녀)
마리아 카롤리나
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