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이지 케루비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이지 케루비니는 176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작곡가로, 6세부터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3세 이전에 종교 음악을 작곡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88년 파리에 정착하여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며, 《로도이스카》, 《메데아》, 《두 날, 또는 물 운반꾼》 등의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1795년 파리 국립 고등 음악·무용학교의 감찰관으로 임명되었고, 1805년 빈으로 초청받아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극장에서의 불운을 겪은 후 종교 음악으로 눈을 돌려 7개의 미사곡과 2개의 레퀴엠을 작곡했으며, 프랑스 왕정 복고 시대에는 왕실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822년 파리 음악원 원장에 취임했고, 1835년에는 《대위법과 푸가 강좌》를 출판했다. 1842년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베토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탈리아의 음악 이론가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초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오페라의 선구자로, 만토바 궁정 활동과 오페라 《오르페오》 초연을 통해 극적인 음악극 장르를 개척하고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 악장으로 교회 음악을 개혁하며 오페라 발전에 기여, 모노디 양식 발전과 불협화음 활용, 악기 편성 혁신 등으로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이탈리아의 음악 이론가 - 주세페 타르티니
    주세페 타르티니는 바로크 시대 후기의 이탈리아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음악 이론가로, 기교적인 연주와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남겼으며, 대표작인 《악마의 트릴》 외에도 다양한 기악곡을 작곡했고, 차음 발견 및 화성론 연구에 기여했다.
  • 1842년 사망 -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는 칠레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최고 지도자로,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칠레 독립을 이끌었으며,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각 후 페루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 1842년 사망 - 스탕달
    스탕달(마리 앙리 베유)은 19세기 프랑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나폴레옹 군대 참여와 이탈리아 생활을 통해 『적과 흑』, 『파르마의 수도원』 같은 심리 묘사와 역사적 배경이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20세기 이후 재평가받아 프랑스 최고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스탕달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남기기도 했다.
  • 1760년 출생 -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은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산업과 과학 기술 기반의 사회 개혁을 주장하며 산업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능력 있는 산업 계급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의 사상은 생시몽주의로 이어져 여러 사상과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760년 출생 -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는 프랑스 혁명 시기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평등을 주장하며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급진 정치 사상가이다.
루이지 케루비니
기본 정보
이름루이지 케루비니
본명마리아 루이지 카를로 제노비오 살바토레 케루비니
출생지피렌체, 이탈리아
출생일1760년 9월 8일
사망일1842년 3월 15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활동 시기고전주의, 낭만주의
로마자 표기Luigi Cherubini
음악가 정보
직업작곡가, 음악 교사
이미지
주세페 사르티의 흉상과 함께 있는 케루비니의 초상화 (프랑수아 뒤몽 그림, 1792년).
로마자 표기 및 발음
IPA/ˌkɛrʊˈbiːni/
발음 표기KERR-uu-BEE-nee
이탈리아어 발음/luˈiːdʒi keruˈbiːni/

2. 생애

6세 때 음악가인 아버지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았고, 13세가 되기 전에 몇몇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1778년부터 1780년까지 볼로냐밀라노에서 음악을 배웠다.[1]

1788년 파리에 정착하여 이듬해 오페라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791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 《로도이스카 (Lodoïska)》가 실감 나는 영웅주의로 칭찬받으며 첫 성공을 거두었다.[1]

이후 케루비니는 《메데아》(1797년)와 《두 날, 또는 물 운반꾼》(1800년)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랑 오페라에서 배척되어 작은 극장에서 작품을 상연해야 했다. 당시 케루비니는 이상주의와 자유분방함 등의 기개, 특히 엄숙하고 고매한 작품 성격 때문에 인기 작곡가가 되지는 못했다. 1795년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의 감찰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운세가 কিছুটা 나아졌다.[1]

1805년 의 초청으로 오페라를 작곡하고 지휘했다. 1806년 《파니스카》 상연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1]

극장에서의 불운에 점차 종교 음악으로 관심을 돌린 케루비니는 7개의 미사곡, 2개의 레퀴엠, 다수의 소품을 작곡했다. 프랑스 왕정 복고 시기에는 "왕실 음악 감독"에 임명되었다. 1815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의뢰로 교향곡, 연주회용 서곡,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는 합창곡을 작곡하고 런던에서 직접 지휘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1]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을 애도하며 작곡한 《레퀴엠 다단조》(1816년)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극찬을 받았다. 한스 폰 뷔로는 이 작품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레퀴엠보다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1]

1822년 파리 음악원 원장에 취임했고, 1835년 제자 자크 알레비의 도움을 받아 《대위법과 푸가 강좌》를 출판했다.[1]

81세로 파리에서 사망한 케루비니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으며, 프레데리크 쇼팽의 무덤 왼쪽에 위치한다.

2. 1. 초기 생애 (1760-1788)

케루비니는 1760년 피렌체에서 '''마리아 루이지 카를로 제노비오 살바토레 케루비니'''(Maria Luigi Carlo Zenobio Salvatore Cherubini)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불확실하지만, 세례 기록과 케루비니 자신이 남긴 기록은 9월 8일이 정확하다는 것을 시사하며, 때때로 언급되는 9월 14일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의 첫 이름인 마리아(Maria)는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 태어난 아이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지는 이름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케루비니는 6세 때 아버지 바르톨로메오(Bartolomeo)로부터 음악 교육을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체발로의 거장"(maestro al cembalo) 즉, 하프시코드를 통해 앙상블을 이끄는 지휘자였다. 신동으로 여겨진 케루비니는 어린 시절부터 대위법과 극적인 스타일을 공부했으며, 13세가 되기 전에 여러 종교 작품을 작곡했다. 1778년부터 1780년까지는 볼로냐밀라노에서 음악을 배웠다.

2. 2. 프랑스 정착과 초기 오페라 (1788-1797)

1788년 케루비니는 파리에 정착했다. 이듬해 오페라 작곡가로서 불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1788년 왕립 음악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Musique)에서 ''데모폰''(Démophoon)의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1]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의 도움으로 케루비니는 1789년 튈르리 궁(Tuileries)의 몽시외 극장(Théâtre de Monsieur)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 3년 후, 뤼 페이도(rue Feydeau)로 이전하고 왕정이 몰락한 후, 극단은 페이도 극장(Théâtre Feydeau)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 이 직책은 케루비니에게 수많은 대본을 읽고 그의 기질에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케루비니의 음악은 더욱 독창성과 대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주요 성공작은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 《로도이스카 (Lodoïska)》(1791)였는데, 이 작품은 실감 나는 영웅주의가 칭찬받았다. 이후 스위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엘리사''(1794)와 케루비니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메데아''(1797)가 뒤를 이었다.[1]

2. 3. 파리 음악원과 후기 (1797-1842)

케루비니는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루이-샤를-제노비-살바토르 케루비니'''를 사용했다. 1790년 이후 그의 이름이 완전히 기록된 모든 기존 문서에 이 이름이 나타난다.[1] 1794년 앤 세실 투레트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케루비니의 생애 말까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는 전 귀족과의 관계를 숨기고 정부의 임명을 추구해야 했다. 비록 나폴레옹이 그를 너무 복잡하다고 여겼지만, 케루비니는 10년 이상 매년 적어도 한 편의 애국적인 작품을 작곡했다.[1] 그는 1805년과 1806년 일부 기간 에서 나폴레옹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여러 편 지휘했다.

1808년 케루비니는 네덜란드 왕립 연구소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5]

''두 날의 이야기 (Les deux journées)'' 이후 파리 관객들은 보이엘디외와 같은 젊은 작곡가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케루비니의 오페라 발레 ''아낙레옹''은 실패했고, 그 이후의 대부분의 무대 작품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06년에 제작된 ''파니스카''는 예외적으로 하이든베토벤에게서 열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극장에서의 칭찬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한 케루비니는 점점 교회 음악으로 눈을 돌려 7개의 미사곡, 2개의 레퀴엠, 그리고 많은 단편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 기간 동안 (복고 왕정 하에서) 그는 ''Surintendant de la Musique du Roi''(왕의 음악 감독)에 임명되었고, 샤를 10세의 몰락(1830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815년 런던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는 그에게 심포니, 서곡, 그리고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의뢰했고, 그는 이 작품들을 지휘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서 명성을 높였다.

다장조 레퀴엠 (1816년)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 기념일을 기리는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베토벤, 슈만, 브람스의 큰 찬사를 받았다. 1836년 케루비니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될 레퀴엠 (단음조)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남성 합창단만을 위한 것인데, 종교 당국이 이전 작품에서 여성 목소리의 사용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1822년 케루비니는 파리 음악원 원장이 되었고, 1835년에는 그의 교과서인 『대위법과 푸가 강좌(Cours de contrepoint et de fugue)』를 완성했다. 파리 음악원에서의 그의 역할은 젊은 헥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아돌프 아담(Adolphe Adam)은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성격이 매우 고르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항상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루비니는 시마노프스카, 로시니, 쇼팽을 포함한 많은 친구들을 두었고, 화가 앵그르와 친분이 있었다.

루이지 케루비니와 서정시의 뮤즈 (루브르 박물관)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작.


케루비니는 생전에 프랑스에서 가장 높고 권위 있는 영예를 받았다. 여기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 슈발리에(Chevalier, 1814년)와 미술 아카데미 회원(Membre de l'Académie des Beaux-Arts, 1815년)이 포함된다. 1841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꼬망되르(Commandeur de la Légion d'honneur)가 되었는데, 이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음악가였다.[6]

케루비니는 1842년 파리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묻혔는데, 그의 친구 쇼팽으로부터 불과 4미터 떨어진 곳이다. 그의 묘는 건축가 아쉴레 르클레르가 디자인했고, 조각가 오귀스탱-알렉상드르 뒤몽(Augustin-Alexandre Dumont)이 제작한 "음악"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작곡가의 흉상에 화환을 씌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케루비니의 묘

3. 주요 작품

루이지 케루비니는 오페라, 관현악곡, 실내악, 종교 음악, 합창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오페라


  • 루이지 케루비니의 오페라 목록 참조
  • Démophoon|데모폰영어 (1788년)
  • Lodoïska|로도이스카영어 (1791년)
  • Eliza (Cherubini)|엘리자, 또는 몽생미셸 빙하로의 여정영어 (1794년)
  • 메데아 (1797년)
  • L'hôtellerie portugaise|포르투갈의 여관영어 (1798년)
  • Les deux journées|이틀, 또는 물 나르는 사람영어 (1800년)
  • Anacréon (Cherubini)|아낙레온, 또는 도망자의 사랑영어 (1803년) - 현재는 서곡이 많이 연주된다.
  • Faniska|파니스카영어 (1806년)
  • Les Abencérages|아벤세라주족영어 (1813년)
  • Ali Baba (Cherubini)|알리 바바영어 (1833년)

관현악곡

  • G장조 서곡 (1815)
  • D장조 교향곡 (1815)
  • 장송 행진곡 (1820)
  • 콘체르토 서곡
  • 종교 행진곡
  • 호른과 현악 합주를 위한 소나타
  • 교향곡 D장조 - 유일한 교향곡. 토스카니니 등에 의한 녹음이 있다.

실내악

  • 현악 사중주: 6곡


번호조성작곡 연도비고
제1번내림마장조1814년
제2번다장조1829년D장조 교향곡 편곡, 새로운 2악장 추가
제3번라단조1834년
제4번마장조1835년
제5번바장조1835년
제6번라단조1837년


  • 현악 오중주: 1곡


조성작곡 연도악기 구성
미단조1837년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2


종교 음악케루비니는 극장에서의 칭찬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하여 교회 음악으로 눈을 돌려 7개의 미사곡, 2개의 레퀴엠, 그리고 많은 단편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복고 왕정 하에서 ''Surintendant de la Musique du Roi''(왕의 음악 감독)에 임명되어 샤를 10세의 몰락(1830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815년 런던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는 그에게 심포니, 서곡, 그리고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의뢰했고, 그는 특별히 이 작품들을 지휘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서 명성을 높였다.

다장조 레퀴엠 (1816년)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 기념일을 기리는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베토벤, 슈만, 브람스의 큰 찬사를 받았다. 1836년 케루비니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될 레퀴엠 (단음조)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남성 합창단만을 위한 것인데, 종교 당국이 이전 작품에서 여성 목소리의 사용을 비판했기 때문이다.[7]

제목작곡 연도비고
미사 5곡1773년~1776년분실됨
B♭장조 단축 엄숙 미사곡1805년미확인
8성부와 오르간을 위한 a capella 신경1806년
3성부를 위한 A장조 미사곡1809년미확인
F장조 시메이 미사곡1809년
D단조 대미사곡1811년에스터하지 공작을 위해 작곡
C장조 미사곡 (제4 엄숙 미사곡)1816년
D장조 신경1816년
C단조 레퀴엠1816년혼성합창, 루이 16세를 추모
E장조 대미사곡1818년
G장조 미사곡1819년루이 18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
B♭장조 미사곡1821년미확인
A장조 엄숙 미사곡1825년샤를 10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
D단조 남성합창을 위한 레퀴엠1836년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7]


기타 합창곡


  • 칸타타 《암피온》 (1786)
  • 칸타타 《키르케》 (1789년 초연)
  • 《세 개의 합창곡》(Trois chœrs): 장-바티스트 푸주의 희곡 《미라보의 죽음》(La Mort de Mirabeau)을 위한 부수 음악 (1791)
  • 칸타타 《클리템네스트라》 (1794)
  • 칸타타 《봄의 찬가》 (1815)
  • 《팡테온 찬가》 (1794)[8]
  • 모테트 38곡
  • 장엄 미사곡 다장조 "시메이에서" (1809년)
  • 에스터하지 왕자를 위한 장엄 미사곡 라단조 (1811년)
  • 장엄 미사곡 다장조 (1816년)
  • 장엄 미사곡 변라장조 (1816년)
  • 레퀴엠 제1번, 하단조 (1816년)
  • 장엄 미사곡 마장조 (1818년)
  • 루이 18세 대관식을 위한 장엄 미사곡 사장조 (1819년)
  • 소 장엄 미사곡 변시장조 (1821년)
  • 샤를 10세 대관식을 위한 장엄 미사곡 가장조 (1825년)
  • 레퀴엠 제2번 라단조 (1836년)

저서

제목출판사초판 년도재판 년도
대위법과 푸가에 관한 논문1841
『대위법과 푸가 강좌』(Cours de Contrepoint et de Fugue)슐레쟁젤(Schlesinger) -> 위제르(L'Haye)18351863
『화성 행진곡』(Marches d'Harmonie)트루페나스(Troplenas) -> 위제르(L'Haye)18471851



케루비니가 집필한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쇼팽과 슈만 부부도 사용할 정도였다.[9] 작례에는 푸크스, 마르풀크, 알브레히츠베르거, 주세페 살티와 같은 거장들이 나란히 등장한다. 파리 음악원은 물론, 영국 왕립 음악 대학[10] 등 다른 학교의 수업에서도 채택되었다.

케루비니의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1835년 초판, 1863년 제2판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프랑수아-조제프 페티스의 『대위법 교본』(1824년)보다 11년 후에 출판된 것이다. 페티스의 교본보다 내용이 훨씬 쉽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합창과 두 대의 오르간을 위한 주세페 살티의 푸가로 교본이 마무리된다. 교본이 끝난 후 연습 문제를 대량으로 싣는 관습[11]은 케루비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교본의 특징으로는 삼전음[12]이나 연속 5도[13]에 관한 규칙이 느슨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케루비니의 『화성의 반복 진행 강좌』는 테오도르 뒤부아가 참고 문헌으로 채택했으며, 그 영향은 마르셀 비슈의 『조성 화성 개요』까지 미치고 있다.

3. 1. 오페라


  • 루이지 케루비니의 오페라 목록 참조

  • Démophoon|데모폰영어 (''Démophoon'', 1788년)
  • Lodoïska|로도이스카영어 (''Lodoïska'', 1791년)
  • Eliza (Cherubini)|엘리자, 또는 몽생미셸 빙하로의 여정영어 (''Eliza'', 1794년)
  • 메데아 (''Médée'', 1797년)
  • L'hôtellerie portugaise|포르투갈의 여관영어 (''L'hôtellerie portugaise'', 1798년)
  • Les deux journées|이틀, 또는 물 나르는 사람영어 (''Les deux journées'', 1800년)
  • Anacréon (Cherubini)|아낙레온, 또는 도망자의 사랑영어 (''Anacréon'', 1803년) - 현재는 서곡이 많이 연주된다.
  • Faniska|파니스카영어 (''Faniska'', 1806년)
  • Les Abencérages|아벤세라주족영어 (''Les abencérages'', 1813년)
  • Ali Baba (Cherubini)|알리 바바영어 (''Ali-Baba'', 1833년)

3. 2. 관현악곡


  • G장조 서곡 (1815)
  • D장조 교향곡 (1815)
  • 장송 행진곡 (1820)
  • 콘체르토 서곡
  • 종교 행진곡
  • 호른과 현악 합주를 위한 소나타
  • 교향곡 D장조 - 유일한 교향곡. 토스카니니 등에 의한 녹음이 있다.

3. 3. 실내악


번호조성작곡 연도비고
제1번내림마장조1814년
제2번다장조1829년D장조 교향곡 편곡, 새로운 2악장 추가
제3번라단조1834년
제4번마장조1835년
제5번바장조1835년
제6번라단조1837년


조성작곡 연도악기 구성
미단조1837년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2


3. 4. 종교 음악

극장에서의 칭찬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한 케루비니는 점점 교회 음악으로 눈을 돌려 7개의 미사곡, 2개의 레퀴엠, 그리고 많은 단편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 기간 동안 (복고 왕정 하에서) 그는 ''Surintendant de la Musique du Roi''(왕의 음악 감독)에 임명되었고, 샤를 10세의 몰락(1830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815년 런던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는 그에게 심포니, 서곡, 그리고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의뢰했고, 그는 특별히 이 작품들을 지휘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서 명성을 높였다.

다장조 레퀴엠 (1816년)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 기념일을 기리는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베토벤, 슈만, 그리고 브람스의 큰 찬사를 받았다. 1836년 케루비니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될 레퀴엠 (단음조)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남성 합창단만을 위한 것인데, 종교 당국이 이전 작품에서 여성 목소리의 사용을 비판했기 때문이다.[7]

케루비니의 주요 종교 음악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작곡 연도비고
미사 5곡1773년~1776년분실됨
B♭장조 단축 엄숙 미사곡1805년미확인
8성부와 오르간을 위한 a capella 신경1806년
3성부를 위한 A장조 미사곡1809년미확인
F장조 시메이 미사곡1809년
D단조 대미사곡1811년에스터하지 공작을 위해 작곡
C장조 미사곡 (제4 엄숙 미사곡)1816년
D장조 신경1816년
C단조 레퀴엠1816년혼성합창, 루이 16세를 추모
E장조 대미사곡1818년
G장조 미사곡1819년루이 18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
B♭장조 미사곡1821년미확인
A장조 엄숙 미사곡1825년샤를 10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
D단조 남성합창을 위한 레퀴엠1836년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7]


3. 5. 기타 합창곡


  • 칸타타 《암피온》 (1786)
  • 칸타타 《키르케》 (1789년 초연)
  • 《세 개의 합창곡》(Trois chœrs): 장-바티스트 푸주의 희곡 《미라보의 죽음》(La Mort de Mirabeau)을 위한 부수 음악 (1791)
  • 칸타타 《클리템네스트라》 (1794)
  • 칸타타 《봄의 찬가》 (1815)
  • 《팡테온 찬가》 (1794)[8]
  • 모테트 38곡
  • 장엄 미사곡 다장조 "시메이에서" (1809년)
  • 에스터하지 왕자를 위한 장엄 미사곡 라단조 (1811년)
  • 장엄 미사곡 다장조 (1816년)
  • 장엄 미사곡 변라장조 (1816년)
  • 레퀴엠 제1번, 하단조 (1816년)
  • 장엄 미사곡 마장조 (1818년)
  • 루이 18세 대관식을 위한 장엄 미사곡 사장조 (1819년)
  • 소 장엄 미사곡 변시장조 (1821년)
  • 샤를 10세 대관식을 위한 장엄 미사곡 가장조 (1825년)
  • 레퀴엠 제2번 라단조 (1836년)

3. 6. 저서

제목출판사초판 년도재판 년도
대위법과 푸가에 관한 논문1841
『대위법과 푸가 강좌』(Cours de Contrepoint et de Fugue)슐레쟁젤(Schlesinger) -> 위제르(L'Haye)18351863
『화성 행진곡』(Marches d'Harmonie)트루페나스(Troplenas) -> 위제르(L'Haye)18471851



케루비니가 집필한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쇼팽과 슈만 부부도 사용할 정도였다.[9] 작례에는 푸크스, 마르풀크, 알브레히츠베르거, 주세페 살티와 같은 거장들이 나란히 등장한다. 파리 음악원은 물론, 영국 왕립 음악 대학[10] 등 다른 학교의 수업에서도 채택되었다.

케루비니의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1835년 초판, 1863년 제2판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프랑수아-조제프 페티스의 『대위법 교본』(1824년)보다 11년 후에 출판된 것이다. 페티스의 교본보다 내용이 훨씬 쉽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합창과 두 대의 오르간을 위한 주세페 살티의 푸가로 교본이 마무리된다. 교본이 끝난 후 연습 문제를 대량으로 싣는 관습[11]은 케루비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교본의 특징으로는 삼전음[12]이나 연속 5도[13]에 관한 규칙이 느슨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케루비니의 『화성의 반복 진행 강좌』는 테오도르 뒤부아가 참고 문헌으로 채택했으며, 그 영향은 마르셀 비슈의 『조성 화성 개요』까지 미치고 있다.

4. 평가 및 영향

로시니의 화려한 오페라가 파리에 상륙하면서 글룩, 스폰티니처럼 고전주의 엄숙함을 지닌 케루비니의 오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 《메데아》는 뛰어난 가수가 있다면 종종 무대에 올려졌다. 1953년 피렌체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주연을 맡고 비토리오 구이가 지휘한 공연은 《메데아》를 현대에 부활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 다른 오페라 《아벤세라주족》(Les Abencérages)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지휘로 1957년 피렌체 공연에서 이탈리아어로 부활했다. 《레퀴엠 사단조》는 1950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녹음으로 유명해졌다.

리카르도 무티는 케루비니의 이름을 딴 케루비니 오케스트라(Orchestra Giovanile Luigi Cherubini)를 창설하여 그의 음악을 기리고 있다. 또한, 무티를 비롯한 여러 지휘자들이 케루비니의 미사곡을 녹음하고 있으며, 고음악 오케스트라들은 하이든 추모 음악, 레퀴엠, 《메데아》 등을 연주하고 있다.

케루비니의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쇼팽과 슈만 부부도 사용할 정도로 음악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9] 이 책은 파리 음악원을 비롯한 여러 음악 학교에서 교재로 채택되었다.[10] 케루비니는 연습 문제를 대량으로 싣는 관습을 시작했으며,[11] 그의 화성 진행 강좌는 테오도르 뒤부아를 거쳐 마르셀 비슈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4.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1822년 케루비니는 파리 음악원 원장이 되었고, 1835년에는 그의 교과서인 『대위법과 푸가 강좌(Cours de contrepoint et de fugue)』를 완성했다. 파리 음악원에서의 그의 역할은 젊은 헥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베를리오즈는 회고록에서 늙은 작곡가를 심술궂은 독선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베이실 딘(Basil Deane)과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베를리오즈의 묘사가 후세에 케루비니의 이미지를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는 케루비니의 개인적인 과민함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는데, 아돌프 아담(Adolphe Adam)은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성격이 매우 고르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항상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루비니는 시마노프스카, 로시니, 쇼팽을 포함한 많은 친구들을 두었고, 무엇보다도 화가 앵그르와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케루비니는 열렬한 아마추어 화가였고, 앵그르는 바이올린 연주를 즐겼다. 1841년 앵그르는 늙은 작곡가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실내악이 그의 작품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그가 작곡한 작품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빌헬름 알트만(Wilhelm Altmann)은 그의 『현악사중주 연주자를 위한 안내서(Handbuch für Streichquartettspieler)』에서 케루비니의 6개의 현악사중주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들이 일류 작품이며 1번과 3번을 걸작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그의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두 대의 첼로를 위한 현악 5중주 또한 일류 작품으로 여겨진다.

케루비니는 생전에 프랑스에서 가장 높고 권위 있는 영예를 받았다. 여기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 슈발리에(Chevalier, 1814년)와 미술 아카데미 회원(Membre de l'Académie des Beaux-Arts, 1815년)이 포함된다. 1841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꼬망되르(Commandeur de la Légion d'honneur)가 되었는데, 이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음악가였다.[6]

케루비니는 1842년 파리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묻혔는데, 그의 친구 쇼팽으로부터 불과 4미터 떨어진 곳이다. 그의 묘는 건축가 아쉴레 르클레르가 디자인했고, 조각가 오귀스탱-알렉상드르 뒤몽(Augustin-Alexandre Dumont)이 제작한 "음악"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작곡가의 흉상에 화환을 씌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1820년대에 로시니의 화려한 성악 기교를 뽐내는 빛나고 열정적인 오페라가 파리에 상륙하자, 고전적인 엄숙함을 지닌 케루비니의 오페라는 글룩이나 스폰티니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메데아》는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가수가 있다면 가끔 부활하기도 했다. 현대에서 이 작품의 부활에 가장 기여한 것은 1953년 비토리오 구이(Vittorio Gui)의 지휘로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가 주역을 맡은 피렌체 공연으로 여겨진다. 또 다른 오페라 《(Les Abencérages)》은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Carlo Maria Giulini)의 지휘로 1957년 피렌체 공연에서 이탈리아어로 부활했다.

《레퀴엠 다단조》를 현대에 부활시킨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0년 2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지휘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NBC Symphony Orchestra)의 녹음이다. 현재는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등에 의해 미사곡 녹음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음악 오케스트라에 의해 하이든 추모 음악과 레퀴엠, 《메데아》가 녹음되고 있다.

또한, 무티는 케루비니의 이름을 딴 유스 오케스트라인 케루비니 오케스트라(Orchestra Giovanile Luigi Cherubini)를 창설했다.

4. 2. 음악 교육에 대한 영향

베토벤은 케루비니를 당시 가장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로 여겼다. 케루비니가 집필한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쇼팽과 슈만 부부도 사용할 정도였다.[9] 작례에는 푸크스, 마르풀크, 알브레히츠베르거, 살티와 같은 거장들이 나란히 등장한다. 파리 음악원은 물론, 영국 왕립 음악 대학[10] 등 다른 학교의 수업에서도 채택된 흔적이 있다.

케루비니의 『대위법과 푸가 강좌』는 1835년 초판, 1863년 제2판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프랑수아-조제프 페티스의 『대위법 교본』(1824년)보다 11년 후에 출판된 것이다. 즉, 이 책은 케루비니가 페티스 학파에 속했음을 보여준다. 페티스의 교본보다 내용이 훨씬 쉽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합창과 두 대의 오르간을 위한 주세페 살티의 푸가로 교본이 마무리된다. 후대의 파리 음악원에서는 푸가 과목과 대위법 과목을 분리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제를 실습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증거로 왁스(Paul Wachs), 뒤플레, 뒤부아의 교본에는 이 항목이 없다. 교본이 끝난 후 연습 문제를 대량으로 싣는 관습[11]은 케루비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교본의 특징으로는 삼전음[12]이나 연속 5도[13]에 관한 규칙이 느슨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후대의 이론가들은 이것들을 금지하고 있다.

케루비니의 『화성의 반복 진행 강좌』는 테오도르 뒤부아가 참고 문헌으로 채택했으며, 그 영향은 마르셀 비슈의 『조성 화성 개요』까지 미치고 있다.

4. 3. 현대적 재조명

1820년대에 로시니의 화려한 성악 기교를 뽐내는 오페라가 파리에 상륙하자,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이나 가스파레 스폰티니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엄숙함을 지닌 케루비니의 오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메데아》는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가수가 있다면 가끔 부활하기도 했다. 현대에 이 작품을 부활시키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1953년 비토리오 구이의 지휘로 마리아 칼라스가 주역을 맡은 피렌체 공연이다. 또 다른 오페라 《아벤세라주족》(Les Abencérages)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지휘로 1957년 피렌체 공연에서 이탈리아어로 부활했다.

《레퀴엠 사단조》를 현대에 부활시킨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0년 2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녹음이다. 현재는 리카르도 무티 등에 의해 미사곡 녹음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음악 오케스트라에 의해 하이든 추모 음악과 레퀴엠, 《메데아》가 녹음되고 있다.

무티는 케루비니의 이름을 딴 유스 오케스트라인 케루비니 오케스트라(Orchestra Giovanile Luigi Cherubini)를 창설했다.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Luigi Cherubini | Biography, Compositions,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9-10
[3] 서적 Sohlmans Musiklexikon
[4] 서적
[5] 웹사이트 Marie Louis Charles Zenobie Salvator Cherubini (1760 - 1842) http://www.dwc.knaw.[...] Royal Netherlands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2016-10-05
[6] 서적
[7] 서적
[8] 문서 ''Hymne du Panthéon: Grand Chœur à la gloire des martyrs de la liberté et de ses défenseurs''
[9] 서적 ケルビーニ 対位法とフーガ講座 アルテスパブリッシング 2013-05-31
[10] 서적 ケルビーニ対位法とフーガ講座
[11] 서적 『対位法とフーガ講座』原著第2版 ウジェル社
[12] 서적 『対位法とフーガ講座』原著第2版 ウジェル社
[13] 서적 『対位法とフーガ講座』原著第2版 ウジェル社
[14] 서적 『ケルビーニ 対位法とフーガ講座』 アルテスパブリッシン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