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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갈리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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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프 갈리에니는 184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식민지 복무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총독을 역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파리 군사 총독으로서 마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5년 육군 장관을 지냈지만 건강 악화로 사임했으며, 1916년 사망 후 원수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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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갈리에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0년의 갈리에니
1910년의 갈리에니
존칭원수
이름조제프 시몬 갈리에니
출생1849년 4월 24일
출생지생베아, 프랑스 공화국
사망1916년 5월 27일
사망지베르사유, 프랑스 공화국
국적프랑스
배우자마르트 사벨리
자녀테오도르 프랑수아 가에탕 갈리에니
모교에콜 스페시알 밀리테르
프리타네 밀리테르
군 경력
소속제2제국
제3공화국
군종프랑스 육군
해병대
복무 기간1868년 – 1916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참전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정치 경력
직책제112대 육군 장관
임기 시작1915년 10월 29일
임기 종료1916년 3월 16일
대통령레몽 푸앵카레
총리아리스티드 브리앙
지휘 경력
지휘제13군단
제14군단
제5군
서훈
훈장프랑스 원수
레지옹 도뇌르 훈장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12][13][14] 이후 프랑스 식민지군 소속으로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수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총독을 역임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 프랑스군 총사령관 직전까지 올랐으나, 1911년 조프르를 후임으로 추천하고, 1914년 3월 퇴역했다.

2. 1. 출생 및 가계

조제프 갈리에니


갈리에니는 1849년 중앙 피레네 산맥의 오트가론주 생베아트에서 태어났다.[2] 그는 코르시카[3]와 이탈리아 혈통이었으며,[4] 그의 아버지는 Pogliano Milanese|포글리아노 밀라네세ita 출신으로 사병에서 시작하여 대위까지 진급한 군인이었다.[5][6]

그는 학생 시절 라플레슈에 있는 프뤼타네 국립 밀리테르와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다.[7][8][9] 그는 성실하고 학구적인 학생으로 평가받았으며,[7][8][9] 특히 수학과 언어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0][11] 졸업 후 제3해병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하여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12]

갈리에니는 세당 전투에서 싸웠고,[13] 바제유 전투에서 식민지 해병대의 방어전 중 포로로 잡혔다.[14]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독일어를 습득했으며, 훗날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로 "Erinnerungen of my life di ragazzo" ("소년 시절부터의 나의 삶의 추억")라는 제목의 회고록 노트를 남기기도 했다.[15]

2. 2. 교육

갈리에니는 학생 시절 라플레슈에 있는 프뤼타네 국립 밀리테르와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다.[7][8][9] 그는 성실하고 학구적인 학생이었으며,[7][8][9] 특히 수학과 언어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0][11] 이후 보불 전쟁 중 바제유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독일어를 배웠다.[14][15]

2. 3. 초기 군 복무



갈리에니는 학생 시절 라플레슈(La Flèche)에 있는 프뤼타네 국립 밀리테르(Prytanée National Militaire)와 생시르 육군사관학교(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성실하고 학구적인 학생이었으며, 수학과 언어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7][8][9][10][11]

생시르 졸업 후 제3해병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하여 1870년 발발한 보불 전쟁에 참전했다.[12] 그는 세당 전투(Battle of Sedan (1870))에서 싸웠으며,[13] 바제유 전투(Battle of Bazeilles)에서 식민지 해병대의 방어전 중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14] 포로 생활 중에 독일어를 배웠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로 Erinnerungen of my life di ragazzo|에리너룽겐 오프 마이 라이프 디 라가초de("소년 시절부터의 나의 삶의 추억")라는 제목의 노트를 남기기도 했다.[15]

3. 식민지 복무

갈리에니는 프랑스 식민지군 장교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1876년 세네갈 근무를 시작으로[16] 니제르 상류 원정, 레위니옹, 마르티니크 등에서 활동했으며,[16] 특히 서아프리카에서는 무력 충돌 없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18]

이후 프랑스령 수단 총독(1886년[17])으로 부임하여 반란을 진압했고,[18]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통킹 지역 사단장(1892-1896년)으로 활동했다.[19]

그의 식민 통치 경력 중 가장 중요한 시기는 1896년 장군 진급 후 부임한 마다가스카르 총독 시절이다. 그는 현지 반란(메날람바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왕정을 폐지하는[21][22] 등 강력한 통치를 펼쳤다. 식민 통치 방식으로 'tache d'huile|타슈 도일프랑스어'(기름 얼룩) 전술과 'politique des races|폴리티크 데 라세프랑스어'(인종 정책)를 도입했으며,[24] 행정 시스템 구축에도 관여했다.[25] 그러나 원주민에 대한 자의적 처벌을 허용하는 'code de l'indigénat|코드 데 린디제나프랑스어'(원주민법)를 옹호하는 등[26] 강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 총독 임기는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20]

3. 1. 세네갈, 레위니옹, 마르티니크

1873년 소위로 진급한 갈리에니는 1876년 세네갈에서 식민지 군 경력을 시작했다. 1878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니제르 상류 지역으로 원정을 이끌었다. 이후 레위니옹마르티니크에서도 복무했다.[16] 그는 1880년과 1886년에서 1888년 사이에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공개적인 무력 충돌 없이 식민지 침투 활동을 벌였다.[18]

3. 2. 프랑스령 수단 총독

1886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17] 이후 프랑스령 수단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총독으로서 마마두 라민 휘하의 수단 반군에 의한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그는 1880년과 1886년부터 1888년까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공개적인 무력 충돌 없이 식민지 침투를 수행했다.[18]

3. 3.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892년부터 1896년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복무했다. 당시 계급은 대령이었으며, 통킹 지역의 제2 사단을 지휘했다. 1894년에는 베트남 민족주의 지도자 데탐에 맞선 프랑스군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데탐에게 지역 영지가 주어지면서, 추가적인 군사 작전은 식민 행정관에 의해 중단되었다.[19]

3. 4.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총독

조제프 갈리에니 장군의 명령에 따라 처형된 두 명의 마다가스카르 관리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보 로바 근처의 갈리에니 부조


1896년 장군으로 진급한 갈리에니는 프랑스의 새로운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05년까지 잠시 중단된 기간을 제외하고 마다가스카르에 머물렀으며, 훗날 그의 후임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 되는 조제프 조프르가 당시 그의 밑에서 복무했다.[20]

총독 부임 직후인 1896년 8월, 갈리에니는 프랑스군을 재편성하고 메날람바 반란을 주도한 여러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이듬해인 1897년 초에는 마다가스카르 왕정을 폐지하고 라나발로나 3세 여왕을 레위니옹으로 추방했다.[21][22]

갈리에니는 식민 통치를 위해 두 가지 주요 정책을 시행했다. 첫째는 '타슈 도일'(tache d'huile프랑스어, 문자 그대로 '기름 얼룩') 방식으로, 군사적 점령 지역을 점차 확대해나가는 유지법 전략이다. 이는 오늘날 대반란 이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째는 '폴리티크 데 라세'(politique des races프랑스어, 인종 정책)로,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인종적 위계를 철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프랑스 통치에 저항하는 부족을 탄압하는 정책이었다.[24]

초기에는 군사적 통치에 집중했지만, 점차 도로, 철도, 시장 건설 및 의료 서비스와 학교 설립 등 행정적인 역할에도 관여했다.[25] 그러나 그의 통치는 강압적인 성격을 띠었다. 1905년 갈리에니는 '코드 데 린디제나'(code de l'indigénat프랑스어, 원주민법)를 옹호했는데, 이는 프랑스 행정관이 정식 재판 절차 없이 원주민 개인이나 마을 전체에 대해 신체적 처벌이나 재산 몰수와 같은 즉결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비민주적인 법률이었다.[26]

4. 프랑스 귀환

프랑스 식민지군 소속으로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수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복무했으며, 마다가스카르 총독 임기를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령과 지병 악화로 1914년 3월에 퇴역했다.

그러나 퇴역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벨기에를 돌파한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현역으로 복귀했다. 마른 전투에서는 파리 군사 총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때 파리 시내의 택시를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한 일화는 유명하다. 1915년에는 육군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1916년 3월 사임하고 다시 퇴역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1921년원수 칭호가 추서되었다.

4. 1. 군사 개혁 노력

1905년 갈리에니는 리옹의 군사 지사 겸 알프스 군(제14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에는 프랑스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고위 장군 협의체인 최고 전쟁 위원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프랑스어)의 일원이 되었다.[27][28]

당시 북동부 전선 사령관으로 지명되었고 최고 전쟁 위원회 부의장이었던 빅토르-콩스탕 미셸 장군은 '무제한 공격'(offensive à outrance프랑스어) 전술 교리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시 벨기에로 진격하고, 예비군 연대를 정규 연대에 배속시켜 군대 규모를 늘리는 방안을 주장했다. 갈리에니는 이본 뒤베이, 폴 뒤랑과 함께 아돌프 메시미 국방장관에게 미셸 장군을 해임해야 한다고 건의한 인물 중 하나였다.[29]

미셸 장군이 해임된 후,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제프 카이요는 갈리에니를 선호했으나, 갈리에니는 참모총장직 제안을 거절했다.[30] 그 이유로는 미셸 장군을 몰아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은퇴를 2년 반 앞둔 나이, 그리고 본토 군대가 식민지 군인 출신인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une question de bouton프랑스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거절로 인해 참모총장직은 그의 전 부하였던 조프레에게 돌아갔다.[31][32]

5.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4월 군에서 은퇴했으나,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8월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파리 방어 임무를 맡았다. 특히 1차 마른 전투에서 파리 군사 총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파리 시내의 택시를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한 일화로 유명하다.

1915년에는 제3공화국 정부의 육군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1916년 3월 사임하고 같은 해 5월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1921년에 그의 공적을 기려 원수 칭호가 추서되었다.

5. 1. 마른 전투 이전

갈리에니는 퇴임할 때까지 제5군을 지휘했으며, 벨기에로 진격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고 뫼즈강 유역을 더 강력하게 요새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후임자인 랑르자크 역시 이러한 우려에 공감했다.[33] 갈리에니는 직접 현장을 둘러본 후 뫼즈강 유역의 현대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당국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34]

식민지에서의 경험이 풍부했던 갈리에니는 프랑스군이 사기 진작을 위해 착용하던 눈에 띄는 ''빨간 바지'' 대신 위장 효과가 있는 군복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칙칙한 군복이 적군과 혼동될 수 있고, 군대를 보어인과 같은 민병대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5]

1911년 군사 훈련에서는 항공 정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최고 전쟁 평의회 소속 대령과 참모들을 가상으로 포획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36] 그는 당시 프랑스군의 제한적인 공세 전략에 의문을 제기하며, 요새화, 포병 운용, 항공 정찰 및 정보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식민지 군인 출신에게는 다소 이례적인 견해로 여겨졌다.[37]

같은 해, 갈리에니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고사했고, 대신 조프르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38]

갈리에니의 정확한 퇴임 시기는 1914년 2월[39] 또는 4월[40]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는 1914년 초여름에 세상을 떠났다.[41]

전쟁 발발 전, 갈리에니는 자신의 일기에 조프르에 대해 "오늘 숲에서 그를 만났는데, 평소처럼 걸어 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지. 그는 3년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42]라고 적으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조프르에게 독일군이 뫼즈 강 서쪽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벨기에 깊숙이 우회 기동할 것(단순히 벨기에 남동쪽 아르덴 지역을 통한 얕은 침투가 아닐 것)이라고 정확히 경고했지만, 이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3]

5. 1. 1. 파리 군사 총독

1914년 4월 군에서 은퇴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8월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1차 마른 전투 이전에 파리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갈리에니는 7월 31일에 "비상시" 조프르의 후임으로 지명되었으나,[44] 조프르 총사령관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갈리에니를 불편하게 여겨 사령부에 두기를 꺼렸다.[45] 8월 14일, 로렌 공세가 시작되자 당시 전쟁 장관 아돌프 메시미는 조프르를 다소 어려워하여, 갈리에니가 조프르를 설득해주기를 기대하며 그를 방문하도록 요청했지만, 조프르는 참모 장교들에게 갈리에니를 상대하게 했다.[46][47]

갈리에니는 파리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는 조건으로 도시 방어를 위해 3개 현역 군단을 요구했다. 전쟁 장관 메시미는 8월 25일 조프르에게 이를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조프르는 이를 전략 간섭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오히려 갈리에니는 메시미로부터 파리 주둔군인 제61 및 제62 보병사단이 모누리의 아미앵 근처 독일군 서쪽 측면 공격을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갈리에니에게 지역 방위군만 남겨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갈리에니는 8월 26일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자신이 요구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직 몰랐다. 그러나 그날 르네 비비아니가 새로운 정부(''신성 동맹'')를 구성했고, 8월 27일 새로운 전쟁 장관 알렉상드르 밀르랑(파리 방어 상태가 좋지 않아 메시미를 대체함)은 조프르를 방문하여 모누리의 공격이 실패할 경우 3개 군단을 제공하겠다고 약속받았다.[48][49][50]

8월 28일, "군사 구역"이 파리 교외까지 확장되었다. 갈리에니는 오전 10시에 유일한 방어 회의를 열었고, 참석한 군사 및 민간 참모들은 선 채로 토론 없이 파리 방어 태세 구축 명령에 서명해야 했다. 그는 부임 초기 이틀 만에 장군 두 명을 해임하는 등 단호하게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51]

9월 2일, 세당 전투 기념일에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떠나 보르도로 이전했고, 밤새 피난이 계속되었다.[52] 파리는 '"요새화된 군사 기지"'가 되었다.[53] 밀르랑 장관은 떠나기 전 갈리에니에게 파리를 ''"아웃트란스"''(끝까지) 방어하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건물과 다리 파괴를 의미한다는 갈리에니의 확인에도 명령을 반복했다. 갈리에니는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남겨졌다고 확신했다고 후에 기록했다.[54] 그날 갈리에니는 조프르에게 3개 군단 없이는 "저항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조프르는 아미앵 지역에서 후퇴 중이던 제6군을 갈리에니의 직접 지휘 아래 "파리 군"으로 배치했다. 갈리에니는 즉시 새로운 지휘부를 시찰하러 나섰고, 피난민들의 모습에 경악했으며 모누리를 방문했다. 갈리에니는 4개의 지역 사단과 제185 지역 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곧 해병 포병 여단과 제84 지역 사단을 추가로 받았다. 제6군은 제3군에서 제4군단을 증원받았다. 모누리는 제7군단의 현역 사단, 5,000명 규모의 모로코 원주민 여단, 4개 예비 사단(61, 62, 55, 56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프르는 또한 알제리에서 온 주아브 제45사단을 추가했는데, 이들은 파리를 행진하며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경찰 청장은 직무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갈리에니는 참모들과 밤새 제6군이 우아즈퐁투아즈 사이에서 전투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 조프르는 9월 2일에 밀르랑에게 갈리에니를 자신의 지휘 아래 두도록 했다.[55][56][57][58]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센 강 뒤로 후퇴하는 전략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믿었고, 독일군이 프랑스군에게 재집결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9월 2일 밤을 리세 빅토르-뒤뤼에서 보냈고, 다음 날 독일군의 공격을 예상했다. 9월 3일 아침, 그는 클루크의 독일 제1군이 파리를 지나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는 프랑스군의 반격에 독일군의 측면을 노출시키는 기회였다.[59][60] 9월 3일 아침, 갈리에니는 첫 공개 포고를 통해 파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술자와 민간 노동자들에게 숲과 나무를 베고, 대포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다리와 건물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3일 동안 콘크리트 타설과 철조망 설치 작업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에펠탑도 철거 준비가 되었다. 파리 방어를 위해 155mm부터 75mm까지 다양한 구경의 대포 2,924문이 배치되었다. 병원과 소방서는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갔고, 3개월분의 전력용 가스, 43일분의 빵, 20일분의 소금, 12일분의 고기가 비축되었다. 메시지 전달용 비둘기는 국가 통제하에 들어갔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중령도 포병으로 복귀했다. 민간인들은 파리를 떠나도록 권고받았고 정찰대가 설치되었다.[61][62][63]

9월 3~4일 밤, 조프르는 갈리에니에게 손으로 쓴 메모를 보냈는데, 모누리의 제6군에게 마른 강 북쪽 제방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원했지만, 날짜는 명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파리에서 베르됭까지의 거대한 포위망을 구상한 그의 ''일반 지시 제4호''(9월 2일) 수정과 일치했으며, 그는 이의 사본을 갈리에니에게 동봉했다.[64]

갈리에니는 파리가 노출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결정했다. 9월 4일 09:10에, 전날 파리 비행사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그는 이 보고서를 조프르에게 전달했고, 그의 권한으로, 모누리에게 그날 오후(이제 드뤼드의 제45보병사단으로 증강됨)에 군대를 이동할 준비를 하고 회의를 위해 파리에 올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먼저 대통령 푸앵카레에게 보르도에서 알리고(투크만은 조프르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오전 9시 45분에 조프르가 전화를 받지 않고 갈리에니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보좌관들을 통해 일련의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갈리에니는 나중에 "진정한 마른 전투는 전화로 치러졌다"고 기록할 것이다. 그는 독일군이 얼마나 더 진격하도록 허용할지에 따라, 9월 6일에 마른 강 북쪽을 공격하거나 9월 7일에 마른 강 남쪽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65][66][67]

조프르의 답신은 남쪽 옵션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는데(이는 제6군이 마른 강 남쪽으로 건너야 하기 때문에 하루 더 걸리지만 제6군과 영국 원정군(BEF)이 강에 의해 분리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갈리에니에게 도착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영국의 협력을 보장하기 위해 갈리에니는 모누리를 동반하여 파리에서 오후 1시에 멜룅의 영국 원정군 GHQ로 운전했는데, 파리를 떠나는 남쪽으로 향하는 차량 행렬을 지나갔다. 그는 이미 연락 장교 빅토르 위게로부터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이 영국 원정군 참모장 머레이의 영향을 받았고, 하부 센 강을 따라 보급선에 대해 우려하고 있어서, 어떤 공세에도 참여할 것 같지 않다는 조언을 받았다. 그들은 오후 3시에 도착했고, 어려움 끝에 머레이를 찾았는데, 그는 영국 I 군단을 방문 중인 존 경이 언제 돌아올지 전혀 몰랐고 그의 부재 중에 어떤 결정도 내리려 하지 않았다. 3시간의 회의에서 프랑스 장군들은 제6군이 그날 오후에 이동하여 9월 5일에 독일 제4 예비군단의 서쪽 측면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잠정 협약이 작성되었고, 사본은 모누리, 갈리에니, 그리고 조프르의 승인을 위해 GQG로 가져갈 Brecard 중령이 보관했다. 프랑스인들은 영국군이 협력하지 않을 것이고 머레이가 그들에게 ''"une grande repugnance"''(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는 실제로 계획을 존 경에게 전달했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윌슨 (영국 원정군 부참모장)은 프랑셰 데스페레 (제5군, 영국군의 오른쪽에)와 별도의 계획을 협상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6군이 마른 강 ''북쪽''을 공격하는 것을 구상했다.[68][69][70][71]

프랑셰 데스페레로부터 소식이 없자, 조프르는 가믈랭 소령에게 모누리가 9월 7일에 마른 강 남쪽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날 저녁, 파리로 돌아온 갈리에니는 그날 초 조프르의 메시지와 윌슨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조프르에게 직접 전화하여 모누리 군대의 이동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알렸다. 조프르는 연합군의 공세를 9월 6일로 앞당기고 제6군이 대신 마른 강 북쪽을 공격하도록 동의했는데, 나중에 그는 모누리가 9월 5일에 독일군과 접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렇게 했지만, 하루 더 늦었으면 독일군이 더 "불리한" 위치에 놓였을 것이라고 썼다. 투크만은 그가 단순히 갈리에니의 지배적인 성격, 그의 전 상관에게 설득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후 8시 30분에 갈리에니는 모누리 군대의 공격을 명령했는데, 실제로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오후 10시에 조프르는 ''일반 명령 제6호''를 발령하여 연합군 일반 공세를 명령했다.[72][73][74][75]

9월 5일, 갈리에니는 모누리에게 후퇴는 없다고 알리고, 퐁뇌프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포함한 파리의 중요한 지역을 파괴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76]

9월 7일, 갈리에니는 모누리의 제6군이 개방된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파리가 취약해졌다고 우려하여 보르도에 있는 정부에 전보를 보내 파리 교외의 민간인 대피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장관과 경찰에게 그들을 위한 "비상 위치"를 찾도록 명령했다.[77] 그날 갈리에니는 정부와 직접 소통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조프르가 많은 장군을 해임했고, 갈리에니가 그의 유일한 경쟁자였기에 조프르에게 "전적인 권한"을 부여했다(갈리에니의 표현).[78] 같은 날, 갈리에니는 영국군이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틈으로 진격하는 속도가 느린 것에 좌절하여, 라르티그의 제8 보병 사단을 영국 원정군(BEF)의 ''우익'' 측면에 보내 BEF와 프랑셰 데스페레의 제5군 사이의 연락을 유지하게 했다(1914년의 프랑스와 영국 장군들은 세당과 메츠에서 프랑스군에게 일어난 일 이후, 군대가 포위되고 포위될 가능성에 극도로 우려했다). 조프르는 갈리에니가 존 경의 "민감함"을 자극할까 우려하여, 키치너 경 (영국 전쟁 장관)에게 존 경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는 전보를 보냈다.[79]

전날 저녁에 징발된 택시를 이용하여 7/8일 밤에 제103 보병 연대와 제104 보병 연대(5개 대대, 트렌티니안의 제7 보병 사단의 일부, 자체적으로 제4 군단의 일부; 포병을 포함한 제7 보병 사단의 대부분은 전날 밤 기차와 트럭으로 전선으로 보내졌음)를 전선으로 보낸 것은 갈리에니의 결정이었다. 이른바 '마른의 택시'로 불리는 이 일화는 유명하지만, 사단의 공격은 실패했고 택시 병력 수송이 실제 전투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헤르비히는 "갈리에니에게 큰 홍보 효과가 있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택시 군대"가 병력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것을 보고 갈리에니는 "''Eh bien, voilà au moins qui n'est pas banal!''"("음, 적어도 여기는 평범하지 않군!")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80][81][82]

갈리에니가 전날 파리를 대피시키려는 비상 계획을 알게 된 조프르는 밀레랑에게 (8일) 갈리에니의 "위험한" 메시지를 취소하라고 요구하고, 갈리에니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정부와 직접 소통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전보를 보냈다.[83] 8일, 갈리에니는 폰 클루크의 강력한 압박을 받는 모누리에게 그의 위치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조프르는 모누리가 필요하다면 좌익을 철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독일군은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틈을 우려하여 9일에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는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전략적 승리를 안겨주었다.[84]

5. 1. 2. 반격 계획

1914년 4월 군에서 은퇴한 그는 1차 마른 전투 이전 파리의 방어를 돕기 위하여 8월에 소환되었다.

갈리에니는 7월 31일에 "비상시" 조프르의 후임으로 지명되었다.[44] 그러나 조프르는 갈리에니를 자신의 사령부에 두는 것을 불편해하며 "Il m’a toujours fait mousser|프랑스어" (그는 항상 나를 성가시게 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45] 8월 14일, 로렌 공세가 시작되자 갈리에니는 전쟁 장관 아돌프 메시미의 요청으로 조프르를 방문했다. 메시미는 조프르를 어려워했기에, 조프르가 전 상관인 갈리에니의 말은 더 잘 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갈리에니는 참모 장교 벨린 장군과 그의 부관 앙리 마티아스 베르트호에게 실무를 맡겼다.[46][47]

9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 조프르는 갈리에니에게 손으로 쓴 메모를 보내 마노리의 제6군에게 마른 강 북쪽 제방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구체적인 날짜는 명시하지 않았다. 이는 파리에서 베르됭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포위 작전을 구상한 조프르의 ''일반 지시 제4호''(9월 2일 자) 수정안과 일치하는 내용이었고, 조프르는 이 지시서 사본을 갈리에니에게 함께 보냈다.[64]

갈리에니는 파리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9월 4일 오전 9시 10분, 전날 파리 비행사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독일군의 동향을 파악한 그는 이 보고서를 조프르에게 전달했다. 동시에 자신의 권한으로 마노리에게 그날 오후 즉시 군대를 이동할 준비를 하고 회의를 위해 파리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먼저 보르도에 있던 대통령 푸앵카레에게 상황을 보고했는데, 이는 조프르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오전 9시 45분부터 조프르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조프르가 전화를 받지 않자, 갈리에니는 보좌관들을 통해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그는 나중에 "진정한 마른 전투는 전화로 치러졌다"고 기록했다. 갈리에니는 독일군의 진격 상황에 따라 9월 6일에 마른 강 북쪽을 공격하거나, 9월 7일에 마른 강 남쪽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65][66][67]

조프르의 초기 답신은 9월 7일 남쪽 공격 옵션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제6군이 마른 강을 건너야 하므로 하루가 더 걸리지만, 제6군과 영국 원정군(BEF)이 강에 의해 분리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답신은 갈리에니에게 늦게 도착했다. 영국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갈리에니는 마노리를 동반하여 9월 4일 오후 1시에 멜룬에 있는 영국 원정군 총사령부(GHQ)로 직접 차를 몰고 갔다. 그는 이미 연락 장교 빅토르 위게로부터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이 참모장 머레이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하부 센 강을 따라 형성된 보급선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공세 참여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조언을 들은 상태였다. 오후 3시에 도착한 그들은 어렵게 머레이를 만났으나, 그는 영국 I 군단을 방문 중인 존 프렌치 경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며 그의 부재 중에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3시간의 회의 끝에 프랑스 장군들은 제6군이 그날 오후 이동하여 9월 5일에 독일 제4 예비군단의 서쪽 측면을 공격할 계획을 제안했다. 잠정적인 협약이 작성되었고, 조프르의 승인을 받기 위해 사본이 전달되었다. 프랑스 측은 영국군이 협조적이지 않으며 머레이가 자신들에게 une grande repugnance|프랑스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머레이는 실제로 존 프렌치 경에게 계획을 전달했다. 한편, 영국 원정군 부참모장 헨리 윌슨은 프랑셰 데스페레 (제5군, 영국군의 오른쪽에 위치)와 별도로 제6군이 마른 강 ''북쪽''을 공격하는 계획을 협상하고 있었다.[68][69][70][71]

프랑셰 데스페레로부터 소식이 없자, 조프르는 가믈랭 소령에게 마노리가 9월 7일에 마른 강 남쪽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날 저녁 파리로 돌아온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메시지와 윌슨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조프르에게 직접 전화하여 마노리 군대의 이동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알렸다. 결국 조프르는 연합군의 공세를 9월 6일로 앞당기고 제6군이 마른 강 북쪽을 공격하도록 동의했다. 조프르는 나중에 마노리가 9월 5일에 독일군과 접촉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하루 더 늦었더라면 독일군이 더 불리한 위치에 놓였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역사가 바버러 터크먼은 조프르가 단순히 갈리에니의 강한 성격과 전 상관이라는 점 때문에 설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오후 8시 30분, 갈리에니는 마노리 군대의 공격을 명령했고, 이는 사실상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오후 10시, 조프르는 마침내 ''일반 명령 제6호''를 발령하여 연합군의 전면적인 공세를 명령했다.[72][73][74][75]

9월 5일, 갈리에니는 모누리에게 후퇴는 없다고 알리고, 퐁뇌프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포함한 파리의 중요한 기반 시설을 파괴하라는 비밀 명령을 준비했다.[76]

9월 7일, 모누리의 제6군이 개방된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파리가 취약해졌다고 우려한 갈리에니는 보르도에 있는 정부에 전보를 보내 파리 교외의 민간인 대피 가능성을 논의하고, 장관과 경찰에게 비상 대피 장소를 마련하도록 지시했다.[77] 그러나 같은 날, 갈리에니는 정부와 직접 소통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조프르가 많은 장군을 경질한 상황에서 갈리에니가 유일한 경쟁자로 부상하자, 조프르에게 "전적인 권한"(갈리에니 자신의 표현)을 실어주려는 조치였다.[78] 또한 7일, 갈리에니는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틈으로 진격하는 영국군의 속도가 느리다고 판단하여, 라르티그의 제8 보병 사단을 영국 원정군(BEF)의 우측 측면에 보내 BEF와 프랑셰 데스페레의 제5군 사이의 연결을 유지하도록 했다. 조프르는 갈리에니의 조치가 존 프렌치 경의 "민감함"을 건드릴까 우려하여, 키치너 경 (영국 전쟁 장관)에게 존 프렌치 경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전문을 보냈다.[79]

9월 7일 밤에서 8일 새벽 사이, 전날 저녁 징발된 파리 택시를 이용하여 제103 보병 연대와 제104 보병 연대(제7 보병 사단의 일부) 병력을 전선으로 긴급 수송한 것은 갈리에니의 결정이었다. 이 "택시 군대"는 마른 전투의 상징적인 일화가 되었지만, 실제 전투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역사가 로버트 허비히는 이를 두고 "갈리에니에게는 큰 홍보 효과를 가져다주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중요성이 미미했다"고 평가했다. 택시들이 병력을 실어 나르는 광경을 본 갈리에니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를 남겼다. "Eh bien, voilà au moins qui n'est pas banal!|프랑스어" ("음, 적어도 여기는 평범하지 않군!").[80][81][82]

갈리에니가 전날 파리 대피 계획을 세우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조프르는 8일, 전쟁 장관 밀레랑에게 갈리에니의 "위험한" 메시지를 취소하라고 요구하고, 갈리에니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정부와 직접 소통할 권한이 없음을 상기시키는 전보를 보냈다.[83] 같은 날, 갈리에니는 폰 클루크의 강력한 압박을 받는 모누리에게 위치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반면 조프르는 모누리가 필요하다면 좌익을 철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독일군은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격 노출을 우려하여 9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는 1차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로 이어졌다.[84]

5. 2. 마른 전투

1914년 4월 군에서 은퇴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파리에 육박하자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는 1차 마른 전투 이전에 파리 방어를 돕기 위해 1914년 8월 소환되었다. 1차 마른 전투에서는 파리 군사 총독으로서 프랑스군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특히 파리 시내의 택시를 징발하여 병력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5. 3. 마른 전투 이후

독일 군함 ''괴벤''과 ''브레슬라우''가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을 때, 갈리에니는 터키 해협 공격을 제안했다.[85]

1914년 12월 초, 갈리에니의 지지자들은 그를 조프르 대신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전쟁 장관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6]

갈리에니는 발칸반도에 대한 원정군 파병을 초기에 지지한 인물 중 하나였다.[87] 1915년 초, 그는 프랑셰 드 에스페레와 아리스티드 브리앙 (당시 법무부 장관)이 제안한 살로니카 원정을 지지했다. 갈리에니는 이 원정을 통해 먼저 터키를, 다음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분리시켜 독일을 "파멸"시키기를 희망했다. 푸앵카레 대통령은 1915년 1월 7일, 조프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을 지지했다.[88]

6. 전쟁 장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 10월 29일, 브리앙비비아니 내각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갈리에니를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다.[89] 이는 조프르 총사령관의 유보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전쟁 장관 취임 후 갈리에니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와 권한 문제를 두고 지속해서 갈등했다. 조프르는 1915년 7월부터 모든 전선에 대한 최고사령관 지위를 요구했으며, 푸앵카레 대통령과 브리앙 총리의 지지 아래 1915년 12월,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군의 최고사령관으로 공식 임명되었다.[90][91][92][93] 이로 인해 전쟁 장관의 군 통제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갈리에니는 전쟁 장관으로서 편한 후방 보직의 군인들을 전선으로 보내고, 총 5만 명 규모의 아프리카 식민지 병력을 서부 전선에 재배치하는 것을 승인했다.[94] 또한 철도역에 군인들을 위한 '병사의 휴게실'을 도입했다.[95] 살로니카 전선 문제에도 관여하여 원정을 지지했지만, 현지 사령관 사라이유의 능력에는 회의적이었으며, 전선 유지 및 병력 운용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96][97][98][99][100]

그러나 조프르와의 갈등은 베르됭 전투를 전후하여 심화되었고,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작전 수행 능력과 베르됭 방어 준비 미흡을 강하게 비판했다.[106][107][108] 결국 건강 악화와 조프르 및 정부와의 불화로 인해 1916년 3월 전쟁 장관직을 사임하고 퇴역했다.[109][110] 그는 같은 해 5월 사망했으며, 사후 1921년 원수 칭호가 수여되었다.

6. 1. 임명

비비아니 내각은 들카세 외무장관의 사임, 가을 공세의 실패, 그리고 불가리아의 동맹국 측 참전 등으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리앙조프르 총사령관에게 갈리에니가 밀레랑의 후임 전쟁 장관으로 적합한지를 문의했다. 조프르는 "열 명 중 아홉 명의 장군은 형편없는 전쟁 장관이 될 것"이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갈리에니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애매한 답변을 했다. 그러나 다른 유력 정치인들이 비비아니 내각 참여를 거부하자, 브리앙은 결국 1915년 10월 29일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면서 갈리에니를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다.[89]

한편, 조프르는 1915년 7월부터 다르다넬스와 살로니카에 파견된 병력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군에 대한 최고사령관직을 요구하고 있었다. 1915년 11월, 푸앵카레 대통령이 조프르의 요구에 설득되었고, 브리앙 역시 처음에는 갈리에니와의 관계를 고려해 주저했지만 결국 동의했다. 브리앙은 푸앵카레에게 갈리에니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고,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강화된 역할을 수락하며 조프르에게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브리앙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여 형식적인 화해를 이끌어냈다.[90][91]

그러나 최고 국방 위원회 회의(1915년 11월 24일)에서 조프르와 갈리에니 사이의 권한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조프르는 자신의 작전 지휘권("자유")에 대한 위원회의 논의 자체에 반발하며, 간섭이 계속될 경우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갈리에니는 자신의 일기에 정치인들이 조프르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12월 1일, 푸앵카레와 브리앙은 갈리에니를 만나 중재에 나섰다. 그들은 전쟁 장관의 권한을 강화하려던 갈리에니 참모들의 제안을 거부했는데, 브리앙은 하원에서 작전 문제에 대해 직접 답변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결국 갈리에니는 조프르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915년 12월 2일, 대통령령을 통해 조프르는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전선의 "프랑스군 최고사령관"(대원수)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 결정은 상당한 논의 끝에 12월 9일 하원에서 406 대 67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인되었다.[92][93] 이 과정에서 드 카스텔노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조프르에게 집중되었다.

6. 2. 정책

비비아니 내각이 들카세 외무장관의 사임, 실패한 가을 공세, 불가리아의 참전 등으로 위기에 처하자, 조프르는 갈리에니가 밀레랑의 전쟁 장관 자리를 맡을 가능성에 대해 "어쩌면", "그럴지도"라고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앙은 1915년 10월 29일, 갈리에니를 전쟁 장관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89]

전쟁 장관이 된 갈리에니는 조프르와의 관계 설정에 직면했다. 조프르는 1915년 7월부터 모든 프랑스군의 최고사령관직을 요구해왔다. 푸앵카레 대통령과 브리앙 총리는 결국 이를 수용하기로 했고, 갈리에니 역시 브리앙의 설득 끝에 조프르의 강화된 역할을 받아들였다. 갈리에니는 조프르에게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90][91]

그러나 최고 국방 위원회 회의(1915년 11월 24일)에서 조프르는 자신의 작전 지휘권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며 사임 위협까지 하는 등 갈등이 표출되었다. 갈리에니는 정치인들이 조프르에게 맞서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결국 12월 1일 푸앵카레와 브리앙의 중재로, 조프르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되 전쟁 장관의 지시를 받는 참모총장(드 카스텔노)을 두는 방안에 합의했다. 1915년 12월 2일 대통령령으로 조프르는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전선의 "프랑스군 최고사령관"(대원수)으로 공식 임명되었고, 이는 12월 9일 하원에서 승인되었다.[92][93]

전쟁 장관으로서 갈리에니는 몇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편한 후방 직책에 있던 군인들을 전선으로 보내고, 파리의 극장 3곳을 운영하던 육군 장교들을 교체했다. 또한 서부 전선에 총 5만 명의 흑인 아프리카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을 승인했으며,[94] 철도역을 이용하는 군인들을 위한 대기실인 '병사의 휴게실'을 도입했다.[95]

살로니카 원정에 대해서는 지지 입장이었으나, 현지 사령관인 사라이유의 능력에 대해서는 조프르와 마찬가지로 낮게 평가했다. 11월 12일 갈리에니는 사라이유에게 가능한 한 많은 세르비아 군대와 함께 살로니카로 후퇴하라고 명령했고, 사라이유가 정치권에 로비를 통해 증원군을 얻으려 하자 11월 19일에는 그가 원했던 4개 군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11월 20일에는 사라이유에게 최신 세르비아 공격 지원 여부와 살로니카 철수 시기를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하는 등 다소 모호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96][97][98] 갈리폴리 교두보 철수가 논의될 때는 마지막 공세를 위해 살로니카의 병력을 갈리폴리로 전환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99]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영국-프랑스 회담에서는 그레이 영국 외무장관, 키치너 영국 전쟁 장관, 조프르, 브리앙과 함께 살로니카에 연합군 주둔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갈리에니는 조프르에게 사라이유가 요구한 2개 사단이 아닌, 추가 프랑스 사단을 살로니카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100]

6. 3. 사임

브리앙은 1915년 10월 29일, 비비아니를 국무원 부통령(부총리)으로, 갈리에니를 전쟁 장관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89] 그러나 갈리에니는 곧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조프르와 권한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조프르는 1915년 7월부터 다르다넬스살로니카의 병력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군의 최고사령관 지위를 요구했고, 푸앵카레 대통령과 브리앙 총리는 결국 이를 수락했다.[90][91]

최고 국방 위원회 회의(1915년 11월 24일)에서 조프르는 자신의 작전 지휘권 "자유"를 침해하려 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하며 갈리에니의 권한에 제동을 걸었다. 갈리에니는 일기에 정치인들이 조프르에게 맞서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격렬하게 불평했지만, 결국 1915년 12월 2일 대통령령으로 조프르는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 최고사령관"(대원수)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12월 9일 하원에서 승인되었다.[92][93] 갈리에니는 병사들과 정치인들을 통합하고, 자원 공급에 집중하는 실질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노력했으나[101], 전립선암으로 인한 고통과 샹파뉴 제2차 전투 및 하르트만스빌러코프 전투에서의 실패 이후 커진 정치적 불안 속에서 비판에 덜 관대해졌다.[102][103]

갈리에니는 샹티이 회의(1915년 12월 6일~8일)에서 제안된 솜 대공세를 포함한 조프르의 전략에 회의적이었을 수 있으며[104], 장군 임명권, 조프르가 전쟁성 대신 영국 장군들과 직접 소통하는 관행 등 여러 사안에서 마찰을 빚었다.[105] 결정적으로, 1915년 가을 하원 의원이자 샤쇠르 여단 지휘관인 에밀 드리아 중령이 베르됭 방어 태세의 문제점(대포와 수비대 제거, 요새 해체 준비 등)을 제기하자 갈리에니는 조사를 요구했고, 이는 조프르의 강한 반발을 샀다.[106][107] 갈리에니는 조프르에게 베르됭 등의 참호 상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냈다(1915년 12월 16일 또는 18일).[108]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의 공격이 시작된 후(1916년 2월 21일), 파리에서는 조프르가 베르됭 포기를 명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갈리에니는 관련 서류 열람을 요구했지만, 조프르는 그러한 명령을 서면으로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결국 갈리에니는 1916년 3월 7일 국무회의에서 지난 18개월간 조프르의 작전 수행을 강하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장관직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정부를 상대로 군사적 장악을 시도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푸앵카레는 갈리에니가 조프르의 사임을 강요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브리앙 총리는 보고서가 공개될 경우 사기 저하와 정부 붕괴를 우려했다.[109][110]

갈리에니는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직무를 유지했으며, 조프르의 반대가 없음을 확인한 후 피에르 로크가 후임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11] 이는 조르주 클레망소가 1917년 말 총리가 되어 군 통제권을 강화하기 전까지, 군에 대한 장관(문민)의 통제를 주장하려던 마지막 시도로 평가된다.[112] 갈리에니는 결국 1916년 3월 병세 악화로 퇴역했고, 같은 해 5월 사망했다.

7. 말년 및 사망

1914년 3월, 고령과 지병 악화로 퇴역했으나,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벨기에를 돌파한 독일군이 파리에 육박하자 현역으로 복귀했다. 마른 전투에서는 파리 군사 총독으로서 프랑스군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이때 파리 시내의 택시를 징발하여 병력 수송에 활용한 일화로 유명하다.

1915년에는 육군 장관에 취임했지만, 고위직을 수행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는 이미 약해진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갈리에니는 전립선암을 앓고 있었으며, 결국 1916년 3월 병세 악화로 장관직에서 사임하고 다시 퇴역했다. 이후 베르사유의 클리닉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같은 해 5월 27일에 사망했다.

갈리에니의 회고록은 1920년에 사후 출판되었다.[113] 1921년에는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생라파엘에 안장되었다. 말리 카티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 있는 프랑스군 기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아비장의 갈리에니 기지는 현재 코트디부아르 군사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114][115]

8. 유산

클레이턴은 갈리에니를 건조하고 정확한 사람이며, 그의 식민지 정책에 영향을 미친 세속적인 공화주의자이면서도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인물로 평가했다.[116] 헤르비히는 그를 "강력한" 인물이자 "프랑스 최고의 군인"으로 묘사하며, 그의 "외모만으로도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항상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고 정복을 착용했다고 한다.[117]

갈리에니가 조프르베르됭 전투 지휘에 불만을 제기할 무렵, 1914년 마른 전투에서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이미 대중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이 논쟁에는 정치적인 동기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118] 처칠은 갈리에니가 독일군을 우회할 기회를 포착하고, 마누리의 제6군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며, 다소 패배주의적이었던 조프르를 설득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처칠은 "그는 파리 주변의 국지적인 상황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를 생각하며 행동하며, 행동하는 천재의 즉흥적인 자신감을 보인다"고 칭찬했다.[119] 갈리에니 자신도 회고록에서 마른 전투 승리의 공을 주장했으며, 조르주 블롱, 바질 리델 하트, 앙리 이슬랭과 같은 역사가들은 그를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핵심적인 지성으로 평가했다.[119]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1938년 리에 대위가 그의 저서 ''조프르와 갈리에니, 마른 전투''에서 반박하면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역사가 이안 시니어는 "갈리에니의 주장"을 "완전한 헛소리"라고까지 강하게 비판하며, 리에의 책을 "그것들을 설득력 있게 반박하는 훌륭한 분석"이라고 평가했다.[120] 조프르 자신은 마른 전투에 대해 Je ne sais pas qui l'a gagnée, mais je sais bien qui l'aurait perdue.|주 느 세 파 키 라 가녜, 메 주 세 비앵 키 로레 페르뒤.fra (나는 누가 그 전투에서 이겼는지 모르지만, 누가 그것을 잃었을지는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121] 도티는 마른 전투에 대해 "갈리에니의 역할은 중요했지만, 핵심 개념과 결정은 조프르에게 있었다"고 평가하며 양측의 역할을 절충적으로 보았다.[122] 전쟁 말년, 클레망소는 "갈리에니가 없었다면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123]

9. 민족학

갈리에니는 식민지에서 활동하던 초기부터 민족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프랑스령 수단마다가스카르에서 수집한 방대한 양의 물품들을 툴루즈 박물관에 기증했다.

10. 저술


  • ''프랑스령 수단 여행, 1879-1881'', 파리, 아셰트, 1885, 에두아르 리우가 나무에 새긴 140개의 조각 그림 포함
  • ''프랑스령 수단에서의 두 차례의 작전, 1886-1888'', 파리, 아셰트, 1891
  • ''통킹의 세 개의 기둥, 1894-1895'', 1899
  • ''마다가스카르의 평정, 조직, 식민지에 관한 전체 보고서, 1896-1899'', 파리, 샤를-라보젤, 1900
  • ''1896년부터 1905년까지의 마다가스카르'', 타나나리브: 공식 인쇄소, 1905, 2권
  • ''마다가스카르에서의 9년'', 1906
  • ''갈리에니 장군의 회고록 - 파리 방어 (1914년 8월 25일 - 9월 11일)'', 파리, 파요 앤 컴퍼니, 1920[124]
  • ''갈리에니의 노트'', 그의 아들 가에탕 갈리에니가 발행, 피에르-바르텔레미 게우시의 주석 포함, 파리, 알뱅 미셸, 19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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