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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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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시훈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프로 바둑 기사이다. 1986년 일본으로 건너가 1988년 입단했으며, 1994년 천원전 우승으로 최연소 7대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웠다. 일본 천원전 4회 우승, 왕좌전, NEC배 등에서 우승했으며, 기원 신인상, 우수 기사상 등을 수상했다. 2002년 기성전 제5국에서 논란이 있었고, 1998년 삼성화재배, 동양증권배 등 국제 기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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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류시훈
본명류시훈
한글 표기류시훈
한자 표기柳時熏
로마자 표기Ryu Si-hun
출생일1971년 12월 8일
출생지서울
거주지도쿄
국적대한민국
기사 정보
소속일본기원 도쿄 본원
스승오에다 유스케
입단1988년
9단
타이틀 정보
타이틀 합계8회
왕좌1기 (1996)
천원4기 (1994-96, 2000)
기성전 리그도전 (2002)
본인방전 리그도전 (1996)

2. 생애

류시훈은 1971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198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88년에 입단, 1994년 6단으로 승단 후 제9회 일본 NEC배에서 우승하고 천원전 3연패를 달성했다. 1996년 7단 승단, 2000년 제12기 일본 천원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꺾고 다시 천원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2년 제26기 일본 기성전(棋聖戰)에서 왕리청 9단에게 패해 준우승했다. 2003년 9단으로 승단 후 제22회 NEC배에서 우승했다.[2]

2. 1. 탄생 및 바둑 입문

1971년 12월 8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류종렬과 어머니 신용주는 한국여성바둑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여동생 류지인은 아마 4단이다. 유성룡의 후손 가문이며[2], 본관풍산 류씨이다.[3] 부모님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바둑을 시작, 6학년 때 한국 소년 대회에서 우승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제1회 세계 청소년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4위를 기록했다. 14세에 한국기원 연구생이 되어 이창호 9단과 함께 전영선 6단 문하에서 수학했다.

2. 2. 일본으로 건너가다

1986년 윤기현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오에 문하에 들어갔다. 일본기원 원생 생활을 거쳐 1988년 프로 바둑 기사가 되었다.[2]

2. 3. 일본에서의 활동 및 업적

1990년 역대 2위의 공식전 24연승을 포함, 42승 6패의 성적으로 기원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젊은 기사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 1991년 병역 면제를 받았고, 1992년까지 기성전 4단전에서 연속 우승했다. 같은 해 최고기사결정전에 최연소로 출전했으며, 신예 토너먼트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2] 1994년 6단으로 천원전 도전자 자리에 올라 린하이펑 천원과의 5번기에서 23세 생일인 12월 8일 4국에서 승리, 3-1로 천원위를 획득했다. 이는 사상 최연소이자 입단 후 6년 8개월 만에 7대 타이틀을 획득한 최단 기록이었다. 이후 천원전 3연패를 달성했다.[2] 1995년 이창호와의 특별 3번기에서 2연패했다.[2]

1996년 7단으로 승단, 같은 해 본인방전 리그에서 5-2를 기록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이시다 요시오 이후 25년 만에 리그 첫 참가로 도전자 자리에 올랐으나, 조치훈과의 7번기에서 2-4로 패했다. 같은 해 왕리청을 3-0으로 꺾고 왕좌를 획득, 천원과 함께 2관왕이 되어 조치훈, 이다 노리모토와 함께 3강으로 불렸다. 상금 랭킹에서 자기 최고 3위를 기록했다.[2]

1997년 기성전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했으나 이다 노리모토에게 0-2로 패했다. 2000년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3국 연속 반집승으로 천원위를 되찾았다.[2]

2002년 기성전에서 왕리청에게 도전했지만 2-4로 패했다.[2]

2003년 승단 제도 개정으로 천원 4기, 왕좌 1기의 실적을 인정받아 9단으로 승단했다.[2]

2010년 6년 만에 기성전 리그에 진출했고, 2013년 11기 만에 8번째로 명인전 리그에 진출했다.[2]

2005년부터 일본기원 넷 대국 서비스 "유현의 방"에서 우메자와 유카리와 함께 "프로 기사 랭킹전"을 주최했다.[2]

린쯔위안, 린한지에 등과 "어설픈 요세 연구회"를 진행했다.

3. 주요 타이틀 및 수상 경력

류시훈은 1988년에 입단해 1994년 일본 천원전 3연패를 달성했고, 2002년 제26기 일본 기성전에서 왕리청 9단에 패해 준우승[1], 2003년 제22회 NEC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

연도수상
1990년기원 신인상
1991년기원 최다 대국상 (59국)
1994년기원 우수 기사상
1995년저널리스트 클럽상
1996년기원 우수 기사상


3. 1. 타이틀

타이틀보유 연도
현재6
천원1994–1996, 2000
왕좌1996
NEC배2003
폐지2
신예1992
NEC 순영배1994
8


3. 2. 준우승

준우승패배 연도
현재8
기성2002
본인방전1996
천원1997, 2001
왕좌1997
NEC배2005
신진왕전1991
용성1993
폐지1
NEC 순영배1993
대륙4
중일 천원전1995–1997, 2001
13


3. 3. 수상

연도수상
1990년기원 신인상
1991년기원 최다 대국상 (59국)
1994년기원 우수 기사상
1995년저널리스트 클럽상
1996년기원 우수 기사상


4. 국제 기전 성적

대회년도결과상대비고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1998년4강
동양증권배 세계 선수권 대회1998년4강
동양증권배 세계 선수권 대회1997년8강
중일 바둑 교류1991년4승 2패 1무마샤, 양사해, 차저우우, 사오웨이강, 창하오, 캉잔빈, 장원둥
중일 슈퍼 바둑1995년창하오
중일 슈퍼 바둑1996년창하오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2004년원성진


5. 2002년 기성전 제5국 논란

2002년 왕리청 9단과의 기성전 7번기 제5국은 2승 2패로 맞선 가운데 2월 20일과 21일에 열렸다. 이틀째 대국에서 종국 직전, 다메(공배)를 메우는 것만 남은 상황에서 흑을 잡은 류시훈 9단이 9집 우세한 것으로 여겨졌다.[1] 298수째(이미 다메를 메우는 단계)에 왕리청 9단이 6점에 장문을 쳤지만, 류시훈 9단은 299수째에 이를 잇지 않았다.[1] 그러자 왕리청 9단은 "저는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라며 입회인 이시다 요시오 9단을 불렀다.[1] 이시다 9단과 주최사 요미우리 신문 측은 협의 후 비디오 판독을 통해 종국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했다.[1] 왕리청 9단이 장문의 6점을 따내자, 류시훈 9단은 기권했다.[1]

이 사건에 대해 왕리청 9단은 후에 "넉다운된 정신 상태"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발생한 일이라고 말했다.[1] 류시훈 9단은 "집중력을 잃은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제7국이 아니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1] 이후 류시훈 9단은 제6국에서도 패배하며 기성위 획득에 실패했다.[1]

이 사건은 바둑계에서 처음으로 비디오를 사용해 재정(裁定)한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종국 시 규칙 및 매너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 사건 이전에는 다메를 메우는 것을 집을 세기 위한 작업 정도로 여겼고, 때로는 두 대국자가 검토하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한쪽 대국자가 2수 이상 연속으로 메우는 등 다소 느슨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 그러나 현재 바둑 규칙에서는 "다메를 메우는 것은 착수(着手)의 일부"로 간주하며(단, 기보에는 다메를 메우기 직전의 착수까지만 기록됨), 두 대국자가 마지막 다메까지 번갈아 메우고 종국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

6. 저서

바둑에 불타다 류시훈 호국선|바둑에 불타다 류시훈 호국선일본어일본기원 1995년

참조

[1] 뉴스 (바둑)유시훈 일본 天元타이틀 탈환 https://www.donga.co[...] 東亜日報
[2] 서적 秋山賢司「飛び出した若手棋士群像 第1回 柳時熏四段」
[3] 웹사이트 "[한국의 종가/풍산 류씨] 영국여왕이 찾는 `대표 종가'" https://www.chosun.c[...] 1999-03-23
[4] 웹인용 "[바둑]유시훈 일본 天元타이틀 탈환" https://www.donga.co[...] 20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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