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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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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비아의 비핵화는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2003년, 미국과 서방의 압박, 그리고 이라크 침공의 영향으로 리비아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대량 살상 무기(WMD) 프로그램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리비아는 핵 관련 시설을 사찰에 개방하고, 관련 문서와 장비를 제공했으며, 핵무기 프로그램은 초기 개발 단계에 있었다. 이러한 리비아의 비핵화 결정은 국제 사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 아랍 국가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의 비핵화는 북한 등 다른 국가의 비핵화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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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비핵화
개요
명칭리비아의 비무장화
유형대량살상무기 폐기
관련 국가리비아
미국
영국
기간2003년 ~ 2014년
목표리비아의 모든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제거
결과리비아의 화학 무기 비축량 및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폐기
배경
배경1980년대부터 리비아는 화학 무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핵무기 획득을 시도했음.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은 테러 지원 및 서방과의 관계 악화로 국제적 고립을 겪었음.
과정
2003년무아마르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고 발표. 리비아는 화학 무기 금지 협약에 가입하고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수용함.
2004년 ~ 2011년미국, 영국과 협력하여 리비아의 화학 무기 및 핵무기 관련 장비 폐기. 국제 원자력 기구는 리비아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확인.
2011년리비아 내전 발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붕괴.
2011년 ~ 2014년리비아 정부는 잔존 화학 무기 폐기를 완료하기 위해 노력. 화학 무기 금지 기구의 감독 하에 화학 무기 폐기 작업 진행. 2014년, 리비아는 모든 화학 무기 비축량을 폐기했다고 발표.
결과 및 영향
결과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완전 폐기.
서방과의 관계 개선.
테러 지원국 목록에서 제외.
영향핵확산 금지 노력에 기여.
리비아의 국제적 위상 변화.
화학 무기 금지 협약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

2. 역사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는 1968년 NPT에 서명하고 1975년에 비준했으나,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하에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1979년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과 미국의 테러 지원국 지정, 1988년 팬암기 폭파 사건 등으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면서 핵 개발 의지는 더욱 강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카다피는 국제 사회의 제재 해제를 모색하며 변화를 시도했다.[3]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했으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압박[4]A.Q. 칸의 핵 암시장 네트워크를 통한 부품 조달 시도가 발각된 것[6] 등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2003년 12월 19일,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폐기를 전격 선언했다.[8][9]

비핵화 선언 이후 리비아는 미국, 영국, 러시아IAEA와 협력하여 핵 관련 시설 사찰을 수용하고, 핵 장비와 물질, 관련 문서를 미국으로 이전했다.[9] 화학무기 폐기 작업도 진행되어 2014년까지 상당량이 폐기되었다.[11][12] 이러한 조치에 따라 미국은 리비아와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개선하여 2006년 국교를 정상화하고 대사관을 재개설했다.[9]

리비아의 비핵화는 서방 세계로부터 국제 사회 복귀의 성공 사례로 평가받았으나[4], 2011년 내전 발발과 NATO의 군사 개입, 그리고 카다피의 축출 및 사망[9]으로 이어지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이 사건은 핵무기 포기가 정권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북한 등 일부 국가들이 핵 개발을 고수하는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4][15][14]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는 옐로케이크 등 핵물질 관리 문제[16][17][18]와 지속적인 정세 불안 속에서도 2017년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13]하는 등 비핵화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

2. 1. 핵 개발 추진 배경 (1969년 ~ 2003년)

1969년 카다피 육군 중위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리비아는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1968년 NPT에 서명하고 1975년에 비준했지만, 카다피 정권 하에서 핵무기 확보 노력을 지속한 것으로 평가된다.

카다피 정권의 핵 개발 추진 배경에는 서방과의 적대 관계 심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79년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했다. 1980년에는 미국과 리비아 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특히 1988년 리비아가 일으킨 팬암기 폭파 사건은 국제 사회의 강력한 제재와 리비아의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카다피는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였던 1990년대 초부터 카다피는 국제 사회의 인정을 추구하며 리비아에 대한 제재 해제에 집중하기 위해 기존의 범아랍 및 아프리카 운동 지원을 포기했다는 것이다.[3] 마틴 인디크 전 미국 외교관에 따르면, 카다피는 1999년 비밀 협상에서 대량살상무기(WMD) 포기와 시설 사찰 수용 의사를 미국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3]

카다피 정권의 WMD 포기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2001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보낸 메시지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WMD를 제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직접 파괴할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4]

이후 리비아 관리들은 WMD 프로그램 해체를 위해 영국, 러시아, 미국 관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직전 카다피의 특사들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핵 프로그램 해체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달했다.[5] 리비아는 이들 국가 관리들에게 과거 비밀리에 운영되던 10곳의 장소와 수십 개의 연구소 및 군사 공장 방문을 허용하고, 화학, 생물학, 핵, 탄도 미사일 관련 자료들을 제공하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2003년 10월, 미국 정보 기관은 리비아행 유조선에서 원심분리기 관련 부품을 압수했다.[6] 이는 리비아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비핵화 선언 직전까지 가동 중이었음을 시사하는 정황으로 해석되었다. 이 부품들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 아버지로 불리는 A.Q. 칸 네트워크의 기술 지원 아래 말레이시아의 Scomi Precision Engineering 등에서 제조된 것으로 밝혀졌다.[6] 이 밀수 시도 발각 및 실패는 리비아의 핵 개발 의지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6]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리비아는 2003년 비핵화를 공식 선언하고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폐기를 국제 사회에 약속하게 된다.

2. 2. 비핵화 선언과 이행 (2003년 ~ 2011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관 마틴 인디크에 따르면, 무아마르 카다피는 1990년대 초 빌 클린턴 대통령 임기부터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고자 했다.[3] 인디크는 1990년대에 카다피가 다양한 범아랍 및 아프리카 운동 지원을 줄이고 리비아에 대한 제재 해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3] 카다피는 1999년 비밀 회담에서 대량 살상 무기(WMD)를 포기하고 관련 시설을 국제 사찰에 개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3] 카다피의 전 외무 장관 압델 라흐만 샬감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1년에 보낸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직접 파괴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카다피가 WMD 및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4] 이후 리비아 관리들은 영국, 러시아, 미국 관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WMD 프로그램 해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직전 카다피의 특사들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 해체 의사를 전달했다.[5] 카다피의 지시에 따라 리비아 관리들은 이들 국가 외교관들에게 리비아의 화학, 생물학, 핵 및 탄도 미사일 활동 관련 문서를 제공하고, 이전에 비밀리에 운영되던 10곳의 시설과 다수의 연구소 및 군사 공장에 대한 방문 및 사찰을 허용했다.[5]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카다피는 이를 비난하며[7]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했고, 특히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제재 해제에 집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03년 12월 19일, 카다피는 리비아의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폐기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8][9] 리비아 외무부는 다양한 암시장 거래상을 통해 핵 부품을 구매했음을 인정하고, 미국 측에 원심분리기 설계 도면 등을 제공하며 관련 공급자들의 정보를 공개했다.[9]

이 과정에서 2003년 10월, 미국 정보 기관은 지중해에서 리비아로 향하던 유조선을 급습하여 원심분리기 관련 장비를 압수했다.[6] 조사 결과, 해당 부품 다수는 말레이시아의 Scomi Precision Engineering 시설에서 A.Q. 칸 박사 등의 기술 지도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6] 이 사건은 리비아의 핵 개발 의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6] 리비아가 제공한 정보는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A.Q. 칸이 주도한 국제 핵 암시장 네트워크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2004년 파키스탄 정부는 칸 박사를 조사했고, 미국은 IAEA 및 인터폴과 공조하여 칸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인 스위스 국적의 프리드리히 티너를 체포했다.[9]

본격적인 핵 폐기 작업도 진행되었다. 2004년 1월 22일, 미국 군 수송기는 리비아의 핵 및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문서와 장비 약 약 24947.56kg 어치를 테네시주의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ORNL)로 이송했다.[9] 같은 해 3월에는 1,000개 이상의 추가 원심분리기 및 미사일 부품이 리비아에서 반출되었다.[9] 당시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은 초기 개발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10] IAEA 사무총장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리비아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3년에서 7년이 더 필요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0]

리비아의 비핵화 선언 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리비아 비핵화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 과정[9]
연도주요 내용
2004년2월트리폴리에 미국 이익대표부 개설, 워싱턴에 리비아 대표부 개설
2004년6월미국 이익대표부를 연락사무소로 격상 (정식 외교관 파견)
2006년-미국-리비아 국교정상화 선언
2006년-미국 연락사무소를 대사관으로 격상
2008년-트리폴리에 미국 상무부 무역사무소 개설



리비아의 비핵화 결정은 서방 국가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4] 2004년 당시 미국 국무부 검증·준수 담당 차관보였던 파울라 드서터는 "우리는 [리비아의 군축]에서 교훈을 얻고 싶다. 왜냐하면 리비아가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며 리비아 사례의 확산을 기대했다.[4] 서방의 일부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이란, 북한, 시리아 등이 리비아 모델을 따르기를 희망했다.[4] 카다피 자신도 서방으로부터 이란과 북한의 핵 포기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언급했다.[4] 반면, 아랍권 언론 등에서는 카다피가 이스라엘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고 미국의 선제공격 독트린을 정당화했으며, 비핵화의 대가로 충분한 안보 보장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

이에 대해 리비아 정부와 지지자들은 비핵화를 통해 국제 사회에 복귀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보했으며, 막대한 핵 개발 비용을 절감하는 실리를 얻었다고 반박했다.[4]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은 알 샤르크 알 아와사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핵 프로그램 해체의 대가로 리비아에 안보 보장을 약속했으며, 향후 군사 및 안보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4]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카다피는 서방이 리비아에 제공한 것에 환멸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4] 그는 비핵화의 대가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미국이 리비아와의 관계 정상화 및 이스라엘에 대한 비핵화 압박에 소극적인 것에 불만을 품었다.[4] 이러한 불만은 2009년 리비아가 당초 약속했던 농축 우라늄의 해외 반출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4] 카다피는 남은 핵 프로그램 관련 물질을 이용해 더 많은 영향력을 얻으려 했다.[4]

핵무기 외 다른 WMD 폐기도 계속되었다. 2013년 9월 기준으로, 포탄에 장전된 겨자작용제 1.6ton, 굳어진 겨자작용제 2.5ton, 기타 화학무기 원료 846ton이 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1] 2014년 2월, 《뉴욕 타임스》는 미국과 리비아가 이동식 처리 시설을 이용하여 수백 개의 폭탄과 겨자작용제가 담긴 포탄 등 남은 화학무기를 비밀리에 폐기했다고 보도했다.[12]

그러나 이러한 비핵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다피 정권은 내부적인 불안정을 극복하지 못했다. 2011년 2월, 카다피의 42년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며 내전으로 번졌다.[9] 결국 같은 해 10월, 카다피는 나토의 지원을 받은 반군에 의해 트리폴리에서 체포되어 사살되었다.[9]

2. 3. 카다피 정권 붕괴와 그 이후 (2011년 ~ 현재)

2011년 2월, 카다피의 42년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리비아 내전 (2011년)으로 번졌다. 같은 해 10월, NATO의 군사 개입 지원을 받은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고 카다피를 사살하면서 정권은 붕괴했다.

NATO의 군사 개입이 시작되자, 카다피는 과거 리비아의 자발적 비핵화를 내세워 NATO의 작전 중단을 설득하려 시도했다.[4] 그러나 동시에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을 포함한 리비아 정부 관계자들은 과거 비핵화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

NATO의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카다피가 사망하자, 특히 중동 언론을 중심으로 핵무기를 포기할 경우 외부 세력에 의해 정권이 전복될 위험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이란이나 북한 등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것을 더욱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4][15] 실제로 2018년 5월, 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이 주장한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며, 리비아의 사례가 북한에게 부정적인 선례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4]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에도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폐기 노력은 일부 지속되었다. 2013년에는 화학무기 약 800ton이 폐기되었으며,[11] 2016년까지 화학무기를 전량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2013년 9월 기준으로 포탄에 장전된 겨자 가스 1.6ton, 고체화된 겨자 가스 2.5ton, 기타 화학무기 원료 846ton 등이 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1] 2014년 2월 뉴욕 타임스는 리비아에 남아있던 화학무기, 특히 겨자 가스가 담긴 수백 개의 포탄과 폭탄이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이동식 소각 시설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폐기되었다고 보도했다.[12]

한편,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핵물질 관리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었다. 2011년 9월 22일, 내전 막바지에 사바 지역 인근에서 반 카다피 세력은 '방사성(Radioactive)' 표시가 된 드럼통 수천 개와 노란색 가루가 담긴 비닐 봉투들이 보관된 창고를 발견했다.[16][17] IAEA는 이것이 과거 리비아가 신고했던 옐로케이크(우라늄 정광)임을 확인했으며, 리비아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해당 물질에 대한 안전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18] 이는 내전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서 핵물질이 유출되거나 악용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반영한다.

리비아는 2017년 9월 20일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하며 비핵화 의지를 다시 한번 표명했지만, 아직 국내 비준 절차는 완료하지 않은 상태이다.[13]

3. 리비아 비핵화의 주요 내용



2003년 12월 19일,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리비아가 보유하고 개발 중이던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8][9] 이는 9·11 테러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국제 사회의 제재 해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7]

리비아가 폐기하기로 한 주요 대상은 다음과 같다.


  • 핵무기 프로그램: 당시 초기 개발 단계에 있던 핵무기 관련 시설, 장비, 기술 및 관련 문서들이 포함되었다. 리비아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고 관련 장비와 자료를 미국 등으로 이전했다.[10] 2004년 1월과 3월에 걸쳐 핵 프로그램 관련 장비 및 문서(약 24947.56kg 이상)가 미국으로 반출되었다.
  • 화학무기 비축분: 보유하고 있던 화학 작용제와 관련 시설의 폐기를 약속했으며, 화학 무기 금지 기구(OPCW)의 감독 하에 폐기 절차를 진행했다.
  •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 핵 프로그램과 함께 탄도 미사일 관련 장비, 부품, 문서 등도 폐기 대상에 포함되어 2004년 미국으로 반출되었다.


이 선언에 따라 리비아는 국제기구의 검증을 받으며 WMD 프로그램 해체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는 이후 리비아-미국 관계 정상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



2001년 9·11 테러에 대해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7]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대응하자, 카다피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며 미국의 대 리비아 제재 해제에 집중했다.

2003년 12월 19일, 카다피는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전면 해체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하여 국제 사회를 놀라게 했다.[8][9] 리비아 외무부는 리비아가 다양한 암시장 경로를 통해 핵 부품을 구매했음을 인정하고, 미국 측에 여러 종류의 원심분리기 설계 도면과 공급업체 명단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저명한 핵 과학자 A.Q. 칸이 운영한 국제적인 핵 암시장의 역할이 드러났다. 리비아의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2004년 파키스탄 정부는 A.Q. 칸을 심문했고, 미국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 및 인터폴과 공조하여 전 리비아 핵 프로그램 책임자와 스위스 국적자 프리드리히 티너를 스위스에서 체포했다.

핵 프로그램 해체 작업의 일환으로, 2004년 1월 22일 미국 군 수송기는 리비아의 핵무기 및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약 약 24947.56kg의 문서와 장비를 미국 테네시주의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ORNL)로 이송했다. 이어 2004년 3월에는 1,000개가 넘는 추가 원심분리기 및 미사일 부품이 리비아에서 반출되었다.

리비아가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당시, 해당 프로그램은 초기 개발 단계에 있었다.[10] 당시 IAEA 사무총장이었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직감''"으로는 리비아가 성공적인 핵무기 개발까지 3년에서 7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0]

3. 2. 화학무기 폐기

리비아는 2003년, 모든 대량살상무기(WMD)를 폐기하겠다고 선언하며 화학무기 폐기 절차에 착수했다.[1] 이후 실제 폐기 작업이 진행되어, 2013년에는 화학무기 800ton이 폐기되었다.[1] 리비아는 2014년에 2016년까지 보유한 화학무기 전량을 폐기 완료하겠다고 발표했다.[1]

3. 3. 탄도 미사일 폐기

2003년, 리비아는 비핵화를 선언하고 모든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발표했다.

4. 국제사회의 역할과 평가

리비아대량살상무기(WMD) 폐기 과정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요 국가들과 국제 원자력 기구(IAEA)와 같은 국제기구가 관여하였다. 각 행위자들은 제재, 압박, 외교, 검증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러한 국제사회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의 역할과 국제사회의 평가는 후속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4. 1. 미국의 역할

미국리비아의 비핵화 과정에서 제재, 압박, 외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979년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과 리비아의 테러 지원국 지정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되어 1980년 단교에 이르렀다. 1988년 팬암기 폭파 사건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 카다피는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당시 외교관이었던 마틴 인디크에 따르면, 카다피는 1990년대 초부터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을 탈피하고 존경을 얻으려 했으며, 리비아에 대한 제재 해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3] 인디크는 카다피가 1999년 비밀 회담에서 대량살상무기(WMD) 포기와 시설 사찰 수용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3]

그러나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 리비아 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리비아를 압박했다. 카다피의 전 외무 장관 압델 라흐만 샬감은 부시 대통령이 2001년 카다피에게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하거나 [미국이] 논의 없이 직접 파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WMD 포기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했다.[4]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직전 카다피의 특사들은 미국, 러시아, 영국 정상에게 핵 프로그램 해체 의사를 전달했다.[5] 이후 리비아는 이들 국가 관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화학, 생물학, 핵, 탄도 미사일 관련 정보와 문서를 제공하고, 관련 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했다.

2003년 10월, 미국 정보 기관은 리비아로 향하던 유조선을 급습하여 원심분리기 관련 장비 화물을 압수했다.[6] 이 조사를 통해 말레이시아의 Scomi Precision Engineering 시설에서 부품이 제조되었고,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A.Q. 칸과 유럽 국적자들이 기술 지원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다.[6] 이 사건은 리비아의 핵 개발 의지를 크게 약화시켰다.[6]

카다피는 2001년 9·11 테러를 비난하고[7],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며 미국의 대 리비아 제재 해제에 집중했다. 마침내 2003년 12월 19일, 카다피는 리비아의 모든 WMD 프로그램을 폐기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8][9] 리비아 외무부는 암시장 상인들로부터 핵 부품을 구매했음을 인정하고 관련 정보를 미국 측에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A.Q. 칸의 역할이 밝혀졌고, 이는 파키스탄 정부의 칸에 대한 조사와 스위스에서의 관련자 체포로 이어졌다.

미국은 리비아의 비핵화 선언 이후 후속 조치를 주도했다. 2004년 1월 22일, 미국 군 수송기는 리비아의 핵 및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문서와 장비 약 약 24947.56kg을 테네시주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ORNL)로 이송했다. 같은 해 3월에는 1,000개 이상의 추가 원심분리기 및 미사일 부품이 리비아에서 반출되었다.

이러한 비핵화 조치와 함께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 2004년 2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미국 국무부 이익대표부 개설, 워싱턴에 리비아 대표부 개설.
  • 2004년 6월: 미국 이익대표부를 연락사무소로 격상.
  • 2006년: 미국 국무부, 리비아와 국교정상화 선언 및 연락사무소대사관으로 격상.
  • 2008년: 트리폴리에 미국 상무부 무역사무소 개설.


리비아의 핵 폐기 당시, IAEA는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이 아직 초기 개발 단계에 있었다고 평가했다.[10]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당시 IAEA 사무총장은 리비아가 핵무기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기까지 3년에서 7년이 더 걸렸을 것으로 추정했다.[10] 미국의 지속적인 압박과 외교적 노력이 리비아의 비핵화 결정과 이행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4. 2. 국제기구의 역할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와 같은 국제기구의 구체적인 역할(핵 사찰, 검증 활동, 기술 지원 등)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리비아가 핵확산방지조약(NPT)에 서명(1968년)하고 비준(1975년)한 사실은 있으나, 이는 국제 조약 가입에 대한 내용으로, 특정 국제기구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공된 정보만으로는 해당 섹션의 내용을 상세히 작성하기 어렵습니다.

4. 3. 국제사회의 평가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결정은 서방 국가들로부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아랍 세계에서는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4] 2004년 당시 미국 검증 및 준수 담당 국무차관보였던 파울라 드서터는 "우리는 [리비아의 군축]에서 교훈을 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리비아가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라고 언급하며, 리비아 사례가 다른 국가들에게 긍정적인 선례가 되기를 기대했다.[4] 일부 서방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이란, 북한, 시리아 등 다른 국가들도 리비아의 비핵화 모델을 따르기를 희망했다.[4] 무아마르 카다피 자신도 서방으로부터 이란과 북한에게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조언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밝혔다.[4]

반면, 아랍권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알 자지라 방송 등에서는 카다피가 너무 성급하게 군축에 동의했다고 비판했다.[4] 주요 비판 내용은 리비아의 결정이 이스라엘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고, 미국의 선제공격 교리를 정당화하며, 군축의 대가로 리비아와 아랍 세계 전체를 위한 실질적인 안보 보장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4]

이에 대해 리비아 정부와 지지자들은 핵 포기를 통해 리비아가 국제 사회에 복귀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 지위를 확보했으며, 핵 프로그램 유지 비용을 절감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반박했다.[4]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은 알 샤르크 알 아와사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핵 프로그램 해체의 대가로 리비아에 안보 보장을 약속했으며, 향후 미국과의 군사 및 안보 협력을 기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다피는 서방이 제공한 보상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4] 그는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한 대가가 너무 적다고 여겼으며, 미국이 리비아와의 관계 정상화 및 이스라엘에 대한 비핵화 압박에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표했다.[4] 세이프 알 이슬람에 따르면, 이러한 불만은 카다피가 2003년 약속했던 농축 우라늄의 국외 반출을 2009년에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카다피는 남은 핵 프로그램 관련 요소를 이용해 더 많은 협상력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4]

이후 리비아 모델은 북한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도 언급되었다. 2018년 5월, 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존 볼턴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한 비핵화가 리비아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14]

5. 리비아 모델과 북한 비핵화

리비아의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선언은 소위 '리비아 모델'로 불리며, 특히 북한의 비핵화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모델은 핵 개발 프로그램을 먼저 완전히 폐기하면 이후 국제 사회의 제재 해제와 관계 개선 등 보상을 제공하는 '선(先) 핵 포기, 후(後) 보상' 방식으로 요약된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리비아의 결정을 크게 환영하며, 이 모델이 이란, 북한, 시리아 등 다른 핵 개발 의심 국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4] 당시 미국 국무부의 파울라 드서터 차관보는 "리비아가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

그러나 2011년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고 NATO의 군사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하고 카다피 본인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4][15], 리비아 모델의 유효성과 신뢰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핵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몰락한 리비아의 사례는, 핵무기를 체제 생존의 중요한 보루로 여기는 국가들에게 핵 포기가 오히려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강력한 반면교사가 되었다.[4][15]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18년 5월,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이 북한 비핵화 해법으로 리비아 모델을 다시 언급하자, 북한은 외무성 부상 김계관의 담화를 통해 이를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거부했다.[14] 북한은 리비아의 운명을 언급하며, 일방적인 핵 포기를 전제로 하는 리비아식 해법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북한이 체제 안전 보장이 담보되지 않는 비핵화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리비아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리비아 모델은 북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실패한 선례이자, 체제 보장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사례로 더 많이 인용되고 있다.

5. 1. 리비아 모델의 특징

리비아 모델은 카다피 정권이 2003년 전격적으로 핵 개발 포기를 선언하고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폐기를 약속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선(先) 핵 포기, 후(後) 보상'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리비아는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서명하고 1975년 비준했으나, 이후 핵 개발을 추진해왔다. 1979년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 1988년 팬암기 폭파 사건 등으로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어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되고 1980년에는 단교 상태에 이르렀다.

핵 포기 선언 이후, 리비아는 국제사회의 제재 해제와 관계 개선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미국은 2004년 2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이익대표부를 개설하고, 같은 해 6월 이를 연락사무소로 격상시켰다. 2006년에는 양국 간 국교 정상화가 선언되었고, 연락사무소는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2008년에는 미국 상무부 무역사무소가 트리폴리에 개설되었다.[4] 리비아는 화학무기 폐기도 진행하여 2013년 9월 기준으로 포탄에 장전된 겨자 수포 작용제 1.6ton, 굳어진 겨자 작용제 2.5ton, 화학 무기 성분 846ton이 파괴를 기다리고 있었으며[11], 2014년 2월까지 잔여 화학무기를 모두 폐기했다고 발표했다.[12]

리비아의 결정은 서방 세계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당시 미국 국무부 파울라 드서터 차관보는 "리비아가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되기를 바란다"며 리비아식 해법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4] 일부 서방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이란, 북한, 시리아 등 핵 개발 의혹 국가들이 리비아 모델을 따르기를 희망했다.[4] 리비아 정부와 지지자들은 핵 포기를 통해 리비아가 국제 사회로 복귀하고, 임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으며, 핵 프로그램 중단으로 비용을 절감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4]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은 미국이 핵 프로그램 해체의 대가로 리비아에 안보 보장을 약속했으며, 향후 군사 및 안보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4]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카다피가 이스라엘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고, 미국의 선제적 전쟁 교리를 정당화했으며, 군축의 대가로 충분한 안보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

결과적으로 카다피 자신도 서방이 제공한 보상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그는 핵 포기의 대가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이 관계 정상화와 이스라엘 비핵화 압박에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표했다.[4] 이러한 불만은 2009년 리비아가 농축 우라늄의 해외 반출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결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카다피는 남은 핵 프로그램의 잔재를 이용해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4]

2011년 리비아 내전 발발과 카다피 정권의 붕괴는 리비아 모델의 성공 여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2018년 5월, 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존 볼턴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장한 북한 비핵화의 리비아 모델 적용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며, 리비아식 해법이 북한의 상황에는 맞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14]

리비아는 2017년 9월 20일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했지만, 아직 비준하지는 않은 상태이다.[13]

5. 2. 북한 비핵화에 대한 시사점

리비아의 비핵화 결정은 서방 세계로부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아랍 세계에서는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4] 2004년 당시 미국 검증 및 준수 담당 국무차관보였던 파울라 드서터는 "우리는 [리비아의 군축]에서 교훈을 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리비아가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라고 언급하며, 리비아 사례가 다른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기를 기대했다.[4] 실제로 일부 서방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이란, 북한, 시리아 등이 리비아의 비핵화 모델을 따르기를 희망했다.[4] 카다피 역시 서방으로부터 이란과 북한에 핵 프로그램 포기를 조언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4]

그러나 아랍권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알 자지라 방송 등에서는 카다피가 너무 성급하게 군축에 합의했다고 지적했으며, 일부 아랍인들은 카다피의 결정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고 미국의 선제 공격 독트린을 정당화했으며, 리비아나 아랍 세계를 위한 실질적인 안보 이익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4]

이에 대해 리비아 정부와 지지자들은 비핵화 덕분에 리비아가 국제 사회에 복귀하고 임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의석을 확보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핵 프로그램 포기로 비용을 절감했다고 반박했다.[4]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은 알 샤르크 알 아와사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핵 프로그램 해체의 대가로 리비아에 안보 보장을 약속했으며, 향후 미국과의 군사 및 안보 협력을 기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카다피는 서방이 제공한 대가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4] 그는 핵 프로그램 포기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및 이스라엘에 대한 비핵화 압박이 지연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4] 이러한 불만은 2009년 리비아가 농축 우라늄의 해외 반출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남은 핵 프로그램 관련 자산을 이용해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는 의도였다.[4]

리비아의 사례는 이후 북한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2018년 5월, 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이 주장한 '선 비핵화 후 보상' 방식의 리비아 모델을 명백히 거부했다.[14] 이는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을 자국의 상황에 맞지 않으며, 체제 안전 보장이 담보되지 않는 방식으로는 비핵화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리비아는 결국 2011년 내전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었고, 이후에도 화학무기 폐기 등의 과정을 거쳤다.[11][12] 리비아는 2017년 9월 20일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했으나 아직 비준하지는 않았다.[13]

5. 3. 존 볼턴의 '리비아 모델' 주장에 대한 비판

2018년 5월, 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미국의 국가 안보 보좌관 존 볼턴이 북한의 비핵화가 리비아의 군축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14] 이는 리비아가 비핵화를 선언한 지 약 8년 만인 2011년, NATO의 군사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하고 카다피 본인이 사살당한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NATO의 군사 개입이 이루어지자 카다피는 리비아가 과거 자발적으로 비핵화를 선택했음을 강조하며 NATO의 작전 중단을 설득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당시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을 포함한 리비아 정부 관계자들은 과거 비핵화 결정을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

이러한 리비아의 사례는 국제사회, 특히 중동 언론을 중심으로 핵 포기가 오히려 정권의 안보를 약화시키고 외부의 군사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선례로 인식되었다. 즉, 리비아가 핵 프로그램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정권이 전복되고 지도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결과는, 핵무기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다른 국가들, 특히 이란이나 북한 등이 핵을 포기하는 것을 더욱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4][15] 북한이 존 볼턴의 '리비아 모델' 제안을 즉각 거부한 배경에는 이러한 리비아의 비극적인 결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리비아의 비핵화 결정 자체도 발표 당시부터 논란이 있었다. 서방 세계는 이를 높이 평가했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4] 특히 카다피는 이스라엘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고, 미국의 선제 공격 독트린을 정당화했으며, 비핵화의 대가로 충분한 안보 보장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4] 리비아 정부는 국제 사회 복귀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 등을 성과로 내세웠고,[4]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은 미국으로부터 안보 보장을 약속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그러나 카다피 자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이 제공한 보상에 대해 환멸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4] 그는 핵 포기의 대가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이 관계 정상화와 이스라엘 비핵화 압박에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표출했다.[4] 이러한 불만은 2009년 리비아가 보유 중이던 농축 우라늄의 해외 반출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결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4] 이는 핵 프로그램의 남은 부분을 이용해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4]

6. 연표


  • 1968년: NPT 서명
  • 1969년: 27세의 카다피 육군 중위, 쿠데타로 국가원수가 됨
  • 1975년: NPT 비준
  • 1979년: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에 방화 사건 발생
  • 1979년: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
  • 1980년: 미국이 리비아와 단교
  • 1988년: 리비아가 팬암기 폭파 사건을 일으킴
  • 2003년: 비핵화 선언,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약속
  • 2004년 2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미국 국무부 이익대표부 개설, 워싱턴에 리비아 대표부 개설. 대표는 민간인 신분.
  • 2004년 6월: 미국 국무부 이익대표부를 연락사무소로 격상. 정식 외교관의 보호를 받음.
  • 2006년: 미국 국무부, 리비아와 국교정상화 선언
  • 2006년: 미국 국무부 연락사무소를 대사관(Embassy)으로 격상. 수교를 해야 대사관 설립이 가능.
  • 2008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미국 상무부 무역사무소 개설
  • 2011년 2월: 카다피의 42년 장기집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 발생 (리비아 내전 (2011년) 참조)
  • 2011년 10월: 시위대가 나토(NATO) 지원의 반군으로 무장, 트리폴리에서 카다피를 체포해 사살
  • 2013년: 화학무기 800ton 폐기
  • 2014년: 2016년까지 화학무기 전량 폐기 완료 선언

참조

[1] 웹사이트 Libya | Country Profiles http://www.nti.org/c[...] NTI 2013-10-09
[2] 웹사이트 Libya destroys last of Gaddafi's chemical weapons - France http://www.france24.[...] France 24 2014-02-05
[3] 뉴스 The Iraq War did not Force Gadaffi's Hand | Brookings Institution http://www.brookings[...] Brookings.edu 2004-03-09
[4] 간행물 Libya's Nuclear Disarmament: Lessons and Implications for Nuclear Proliferation https://archive.org/[...] Marine Corps University 2013-02-10
[5] 웹사이트 How Gadhafi Lost His Groove: The complex surrender of Libya's WMD http://www.judithmil[...] Judith Miller 2013-10-09
[6] 웹사이트 Libya: Nuclear Programme Overview http://www.nti.org/e[...] 2011-11-08
[7] 뉴스 Libya rebels: Gaddafi could be right about al-Qaeda http://www.theweek.c[...] 2011-03-24
[8] 웹사이트 Gadhafi's Leap of Faith http://www.judithmil[...] Judith Miller 2013-10-09
[9] 뉴스 Chronology of Libya's Disarmament and Relations with the United States http://www.armscontr[...] 2013-01-01
[10] 뉴스 Libya'S Atom Bid In Early Phases -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 2013-10-09
[11] 뉴스 Destruction of Libyan Chemical-Loaded Arms Remains on Hold http://www.nti.org/g[...] 2013-09-11
[12] 뉴스 Libya's Cache of Toxic Arms All Destroyed https://www.nytimes.[...] 2014-02-04
[13] 웹사이트 UNODA Treaties https://treaties.uno[...]
[14] 뉴스 North Korea's statement on Trump summit https://www.bbc.co.u[...] 2018-05-16
[15] 서적 Relinquished Nuclear Powers: A Case Study of Libya https://www.mcu.usmc[...] Middle East Studies 2015-06-10
[16] 웹사이트 Libya military site yields possible radioactive material http://edition.cnn.c[...] Edition.cnn.com 2013-10-09
[17] 웹사이트 Libya's Ex-PM Held As Chemical Weapons Found http://news.sky.com/[...] News.sky.com 2013-10-09
[18] 뉴스 Raw uranium stored near Libya's Sabha - IAEA https://af.reuters.c[...] 201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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