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누엘 2세 (포르투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누엘 2세는 1908년 리스본 국왕 시해 사건으로 아버지 카를루스 1세와 형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가 사망한 후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1910년 10월 혁명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이후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망명 중에도 왕정 복고를 위한 시도를 지원했으나 실패했고, 문학 연구에 몰두하여 포르투갈 문학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1932년 급성 성문 부종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브라간사 왕가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포르투갈의 저술가 - 페르낭 멘드스 핀투
    페르낭 멘드스 핀투는 16세기 동남아시아를 탐험하고 《순례기》를 저술한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작가로, 아시아 문명에 대한 유럽의 시각을 보여주는 사료를 남겼으며, 일본에 조총을 전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 포르투갈의 망명자 - 마르셀루 카에타누
    마르셀루 카에타누는 포르투갈의 정치인이자 학자로, 살라자르의 에스타두 노부 체제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8년부터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포르투갈 총리를 지내며 제한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나 식민지 전쟁 지속으로 불만을 샀다.
  • 포르투갈의 망명자 - 미겔 (포르투갈)
    미겔 마리아 두 파트리시니우 드 브라간사 이 부르봉은 포르투갈의 왕족으로, 절대주의를 옹호하며 권력을 찬탈하여 미겔 1세로서 포르투갈의 국왕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전쟁에서 패배 후 퇴위 및 추방되었다.
마누엘 2세 (포르투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누엘 2세, 포르투갈 왕 (1909년 11월)
마누엘 2세, 1909년경
칭호포르투갈 국왕
재위 기간1908년 2월 1일 – 1910년 10월 5일
즉위 방식칭송
대관식1908년 5월 6일
이전 국왕카를루스 1세
후임왕정 폐지
섭정주앙 프랑쿠
프란시스쿠 페헤이라 두 아마랄
아르투르 캄푸스 엔리케스
세바스티앙 소우사 텔레스
벤세슬라우 드 리마
프란시스쿠 베이가 베이랑
안토니우 테이셰이라 드 소우사
배우자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폰 호엔촐레른 (1913년 9월 4일 결혼)
왕가브라간사 가문 (공식)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 (계통)
아버지카를루스 1세
어머니아멜리 도를레앙
출생일1889년 11월 15일
출생지벨렘 궁전, 리스본, 포르투갈 왕국
사망일1932년 7월 2일
사망지풀웰, 미들섹스, 잉글랜드
매장일1932년 8월 2일
매장지브라간사 왕가의 판테온
종교로마 가톨릭교
서명Assinatura D. Manuel II.svg
기타 정보
별칭"오 파트리오타" (O Patriota, 애국자)
"오 데스벤투라도" (O Desventurado, 불행한 자)

2. 어린 시절

마누엘은 그의 아버지 카를루스 1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리스본의 벨렝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를루스 1세와 오를레앙의 아멜리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이었다.[1]

브라간사 왕가의 일원이었던 그는 며칠 뒤 외할아버지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 마누엘 2세의 아버지 쪽 증조부이자 마누엘이 태어난 날 브라질 왕위에서 폐위된 전 황제 브라질의 페드루 2세가 이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왕이 될 운명이었던 형과는 달리 정치적인 걱정 없이 왕족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마누엘은 상류층의 일원으로 자랐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 민중적인 어조를 띠며 많은 궁정 의례를 버렸다.[2] 그는 역사와 언어를 공부했으며, 어린 나이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3] 그는 신체 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던 형과는 달리 문학과 독서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4] 마누엘은 승마, 펜싱, 조정, 테니스, 정원 가꾸기 등을 배우며 자랐다. 그는 베토벤과 바그너를 특히 좋아하고 피아노를 칠 정도로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5]

어린 시절 마누엘은 피게이로 백작, 갈베이아스 백작의 아이들과 궁정의 다른 가족들과 함께 놀았다. 1902년, 그는 프란츠 케라우슈로부터 라틴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이후 파드레 주앙 다마세누 피아데이루(포르투갈 역사), 마르케스 레이탕(수학), M. 보에예(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 알프레도 킹(영어와 영문학), 파드레 도밍고스 프루투오소(종교와 도덕) 그리고 알렉상드르 레이 콜라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6]

1903년, 마누엘은 어머니와 형과 함께 왕실 요트 ''아멜리아''를 타고 이집트로 여행을 갔다.[7] R. 벤턴에 따르면, 이 여행은 "마누엘이 포르투갈 해군에 입대하여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8] 1904년 여름, 왕자는 포르투갈 해군의 생도가 되었다. 그는 1907년 에스콜라 나발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할아버지인 루이스 1세의 치세 마지막 해에 태어나, 베자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

3. 즉위와 통치

1908년 2월 1일, 리스본 국왕 시해 사건으로 아버지 카를루스 1세와 형 포르투갈 왕세자 루이스 필리페가 암살당하면서 마누엘 2세는 왕위를 계승했다.[1] 왕실 가족이 빌라 비소사 공작 궁전에서 리스본으로 돌아오던 중,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차 등 최소 두 명의 공화주의 혁명 운동가가 총격을 가했다.[1] 이 사건으로 국왕은 즉사하고 왕세자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마누엘은 팔에 부상을 입었다.[1]

즉위 직후, 마누엘 2세는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주앙 프랑코 총리의 사임을 요청하고, 프란시스쿠 조아킹 페레이라 두 아마랄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국민 통합 정부를 구성했다.[2] 1908년 5월 6일에는 왕립 법원 회의를 열어 헌법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3]

마누엘 2세는 포르투, 브라가, 비아나두카스텔루 등 포르투갈 북부 지역을 순방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국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했다.[4] 1908년 국왕의 전국 여행 중 포르투 방문은 그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마누엘 2세는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6] 그는 프랑스 사회학자 레옹 푸앵사르를 초청하여 포르투갈의 사회 환경을 조사하게 했으며,[6] 노동자 계층의 권익 보호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6]

4. 1910년 혁명과 망명

1910년 8월 28일 입법 선거에서 공화당이 14석을 얻으며 약진했지만, 세투발 의회(1909년 4월 24~25일)에서 이미 무력으로 권력을 잡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1] 저명한 공화주의자의 살해는 오랫동안 준비된 쿠데타의 계기가 되었다.[2]

1910년 10월 4일에서 5일 사이, 리스본에서 공화 혁명이 일어났다. 군인들이 시작한 군사 쿠데타에 일부 시민과 시위대가 합세하여 왕궁을 공격했고, 순양함 NRP ''아다마스토르''의 포격이 더해졌다. 네세시다데스 궁전이 폭격을 받자 마누엘 2세는 마프라 국립 궁전으로 피신해야 했고, 그곳에서 어머니 아멜리아 왕비, 할머니 사보이의 마리아 피아 왕비와 합류했다.

마누엘 2세와 포르투갈 왕가는 에리세이라 절벽 아래 해변에서 왕실 요트 ''아멜리아 4세''로 도주하여 혁명에서 살아남았다.


하루 뒤, 공화당이 국가를 장악했음이 분명해지자, 마누엘 2세는 에리세이라에서 왕실 요트 ''아멜리아 4세''를 타고 포르투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왕가는 지브롤터에 상륙했고, 이후 망명을 떠났다.[3] 영국에 도착하여 조지 5세 국왕의 영접을 받았다.

마누엘 2세는 국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붕괴를 향해 가는 브라간사 왕가를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유 선거가 치러진 후,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5. 망명 생활과 왕정 복고 운동

마누엘 2세는 망명 중에도 포르투갈 정치 상황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제1차 포르투갈 공화국의 불안정한 상황을 우려했는데, 이는 스페인의 개입을 유발하고 국가의 독립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1911년과 1912년에는 왕당파의 왕정 복고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특히 1912년의 침략은 더 잘 준비되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공화주의 외교관들에게 갈리시아의 왕당파 야영의 불법성을 양보하고 자국 영토 내 잔존 전투원을 무장 해제하면서 실패로 끝났다.[2] 마누엘 2세는 무력으로 왕정을 복고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당파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기 위해 내부적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에는 도버 밀약을 통해 미겔 1세의 후손들과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했으나,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마누엘 2세와 미겔 2세가 1912년 1월 30일 도버에서 만났다는 증거는 없으며, 회동 결과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19년 1월 19일, 엔히크 미첼 드 파이바 코세이루의 지휘 아래 왕당파 군대가 포르투를 점령하고 북부 군주국을 선포하며 입헌 군주제 복원과 마누엘 2세의 옹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공화주의 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1922년에는 파리 협약을 통해 두아르테 누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루지타누 통합주의는 이 협약이 전통 군주제의 재건에 대한 언급을 누락했다는 이유로 지지를 철회했다.

마누엘 2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전에 포르투갈 왕위의 후계자로 두아르테 누누를 지명했다.

6. 결혼

1913년 9월 4일, 마누엘 2세는 독일 호엔촐레른 가문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지크마린겐 성에서 거행된 결혼식에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 8세)과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를 비롯하여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루마니아 등 유럽 각국 왕족 대표들이 참석했다. 결혼식은 마누엘에게 세례를 주었던 리스본의 총대주교가 집전했다. 마누엘 2세는 가터 훈장 메달과 세 개의 포르투갈 훈장 띠를 착용하고,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흙이 담긴 상자 위에 서서 예식을 치렀다. 이틀간 축제가 열렸고, 부부는 뮌헨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으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가 병에 걸려 공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7. 문학 연구와 사망

마누엘 2세는 망명 기간 동안 문학 연구에 몰두하여 포르투갈의 중세르네상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여유 시간이 많아지자, 왕정주의 단체와의 교류 외에도 이러한 연구에 전념했다. 처음에는 전기 작가에 관심이 있어, 다른 역사가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믿었던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전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19년, 이 프로젝트를 위해 오래된 책을 찾기 위해 서지학자 모리스 에팅하우젠(Maurice Ettinghausen)과 계약했으며, 공화국 시행 이후 많은 개인 소장품이 해체되면서 도움을 받았다.

1926년까지 마누엘은 전기 집필의 아이디어를 포기하고 자신의 서재에 있는 오래된 책들에 대한 묘사에 집중했다(자체적으로 오래된 작품의 완벽한 서재).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마누엘은 이 작품을 통해 포르투갈의 영광을 기술할 수 있었고, 단순히 서지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 그들의 저작의 맥락에 대한 고찰도 담았다. 그의 해석은 과학적으로 엄격했고, 민족주의와 조상들의 가치 옹호로 특징지어지는 최종 결과물을 낳았다. 그의 예시는 제한적이었으며,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작성된 작품의 팩시밀리 사본으로 삽화되었다.

그의 작품인 ''Livros Antigos Portuguezes 1489–1600, da Bibliotheca de Sua Magestade Fidelíssima Descriptos por S. M. El-Rey D. Manuel em Três volumes''의 첫 번째 권은 1929년에 출판되었다. 마누엘은 윈저 성에서 친구인 조지 5세에게 직접 이 작품의 사본을 전달했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왕은 1540년부터 1569년까지의 기간을 다룬 두 번째 권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1932년, 마누엘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조기에 종료되었다. 세 번째 권은 그의 사서인 마저리 윈터스의 감독하에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완성된 작품은 왕에게 포르투갈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평판을 안겨주었고, 그의 흉상은 리스본의 포르투갈 국립 도서관 입구 아트리움에 추가되었다.

마누엘 2세는 1932년 7월 2일, 그의 거주지에서 "급성 성문 부종"으로 인한 질식으로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이는 후두의 좁은 입구 부위의 부종[3] 또는 기관 부종[4]이었다. 당시 안토니우 올리베이라 드 살라자르가 이끌던 포르투갈 정부는 국장 후 그의 리스본 매장을 승인했다. 그의 시신은 1932년 8월 2일 영국 순양함 HMS ''컨코드''에 실려 리스본에 도착했다. 이 배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전 국왕의 관을 운반하기 위해 테주 강으로 들어왔다. 시신은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맞이되었고, 그곳에는 관을 상 비센테 데 포라 수도원까지 따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장례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로 도로가 가득 찼다. 그의 시신은 브라간사 왕가의 상 비센테 데 포라 수도원에 있는 브라간사 왕가 왕실 판테온에 안치되었다.

8. 유산

마누엘 2세는 '애국자', '불운한 자', '학자', '그리운 왕'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5] 그의 죽음은 테니스를 치고 겉보기에 건강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게 의심스럽게 여겨졌다.[5]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성문 부종[3] 또는 기관 부종[4]으로 인한 질식 때문이었다.

마누엘 2세의 죽음으로 브라간사 왕가의 직계는 단절되었으며, 포르투갈 왕위 계승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도버 조약이나 파리 조약 모두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를 증명하는 알려진 문서가 없었기 때문에 폐지된 왕위의 직접적인 상속자는 없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주의자 인테그랄리슈모 루시타노 운동은 1932년에 두아르테 누누, 브라간사 공작을 포르투갈 왕으로 지지했다.

마누엘 2세는 자신의 개인 소장품과 재산을 브라간사 가문 재단을 통해 포르투갈 국민에게 기증했다.[6] 그의 문학 연구 업적은 포르투갈 역사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흉상은 리스본의 포르투갈 국립 도서관 입구 아트리움에 전시되어 있다.

9. 가계

마누엘 2세는 카를루스 1세와 오를레앙의 아멜리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브라간사 왕가의 일원이었던 그의 증조부는 페르난두 2세였고, 조부는 루이스 1세였다. 1913년 9월 4일,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공작빌헬름의 딸 아우구스타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관계이름
증조부페르난두 2세
조부루이스 1세
카를루스 1세
오를레앙의 아멜리
배우자아우구스타 빅토리아


10. 참고 문헌


  • Benton, Russell Earl. "한 왕의 몰락: 포르투갈의 도밍 마누엘 2세". LSU 역사 논문 및 논문. 2818. 1975. https://repository.lsu.edu/cgi/viewcontent.cgi?article=3817&context=gradschool_disstheses
  • Ferro, António. "D. 마누엘 2세, 불운한 자". Lisbon: Livraria Bertrand, 1954. (D. Manuel II, o Desventuradopt)
  • Guerreiro, Luís. "왕살해 기념관". Lisbon: Aliança Internacional Monárquica Portuguesa, 2007. https://web.archive.org/web/20100529093154/http://www.regicidio.org/ (2010년 5월 29일 보존됨)
  • Hindley, Geoffrey. "유럽 왕족". London: McGraw-Hill Book Company, 1979. ISBN 0-07-093530-0
  • Honrado, Fernando. "에리세이라에서 지브롤터까지 왕이 간다". Lisbon: Acontecimento, 1993. 91–93쪽. (Da Ericeira a Gibraltar vai um Reipt)
  • Mayflower Books Inc. "위대한 왕조". New York: Mayflower Books Inc., 1980. ISBN 0-8317-3966-5
  • Newitt, Malyn. "브라간사 가문: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지배 왕조의 흥망성쇠, 1640–1910". Reaktion Books, 2019년 10월 15일. ISBN 978-1-78914-165-8 (The Braganzas: The Rise and Fall of the Ruling Dynasties of Portugal and Brazil, 1640–1910영어)
  • Nobre, Eduardo. "왕실의 열정". Lisbon: Quimera Editores Lda., 2002. (Paixões Reaispt)
  • Proença, Maria Cândida. "D. 마누엘 2세". Lisbon: Círculo de Leitores, 2006. (D. Manuel IIpt) (포르투갈의 왕들)
  • Rezende, João Vieira. "가파냐 지의 모노그래피". Ílhavo: Gráfica Ilhavense, 1936. (Monografia da Gafanhapt)

참조

[1] 웹사이트 King Manoel II of Portugal: Royal exile at Fulwell Park https://web.archive.[...] Twickenham Museum 2014-11-22
[2] 웹사이트 A history of Roman Catholicism in Strawberry Hill https://web.archive.[...] Strawberry Hill Residents Association 2014-03-05
[3] 서적
[4] 서적
[5] 웹사이트 Centenário do Regicídio http://www.regicidio[...] 2007–2010
[6] 간행물 Diário do Governo 1950-05-27
[7] 논문 King Dom Manuel II in the Great War and his Honours https://www.academia[...] 2016
[8] 서적 Calendario generale del regno d'Italia https://books.googl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