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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시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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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는 1377년 아버지 프레데리코 3세의 사망으로 시칠리아 여왕이 되었으며, 즉위 초기에 귀족들의 대리 통치를 받았다. 1390년 아라곤의 마르틴과 결혼 후 1392년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대립하던 귀족들을 격파했으며, 1401년 사망할 때까지 남편 마르티노 1세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마리아 사후, 마르티노 1세는 빌뇌브 조약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시칠리아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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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시칠리아)
기본 정보
마리아 1세
칭호시칠리아 여왕
통치 기간1377년 7월 27일 – 1401년 5월 25일
대관식1377년, 팔레르모
선임자페데리코 단순왕
후임자마르티노 1세
섭정마르티노 1세 (1390년부터)
섭정 유형공동 통치자
배우자마르티노 1세
자녀페드로
왕가아라곤 가문
아버지페데리코 단순왕
어머니콘스탄사 데 아라곤 이 나바라
출생일1363년 7월 2일
출생지카타니아, 시칠리아 왕국
사망일1401년 5월 25일
사망지렌티니, 시칠리아 왕국
매장지성 아가타 대성당, 카타니아, 시칠리아 왕국
이름
시칠리아어Maria di Sicilia

2. 시칠리아 왕위 계승

카타니아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아라곤의 콘스탄스와 프레데리코 3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상속녀였다. 1377년 아버지 프레데리코 3세가 사망하면서 13세의 어린 나이로 시칠리아 여왕으로 즉위했다.

마리아 즉위 초기, 아르탈레 알라고나를 포함한 네 가문의 귀족들이 스스로를 "대리인"이라 칭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시칠리아와 아라곤 파벌 간의 권력을 대표하고 균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2. 1. 섭정 알라고나

아르탈레 알라고나는 프레데리코 3세에 의해 섭정으로 임명된 인물 중 하나였다. 1360년, 알라고나는 시라쿠사카타니아의 병력을 동원하여 아우구스타를 파괴했다.[1] 알라고나의 섭정은 "시칠리아"와 "아라곤" 파벌 간의 갈등으로 실패했고, 다른 세 명의 대리인과 함께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3. 총독 통치 기간의 혼란

1377년부터 시칠리아 왕국은 미스트레타 백작 아르탈레 1세 알라고나, 제라치 시굴로 백작 프란체스코 2세 벤티밀리아, 모디카 백작령 백작 만프레디 3세 키아라몬테, 칼타벨로타 백작 구글리엘모 페랄타, 이렇게 4명의 총독이 통치했다. 총독단은 "시칠리아"와 "아라곤" 세력의 대표자들을 동등하게 포함하도록 구성되었으나, 네 명의 총독은 각자 자신의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3. 1. 구글리엘모 라이몬도 3세 몬카다의 납치 사건

1379년, 여왕 마리아는 몰타고조 후작이자 아라곤 몽카다 가문의 일원인 시칠리아 귀족 구글리엘모 라이몬도 3세 몬카다에게 납치되었다. 몬카다는 마리아가 밀라노 공작 잔갈레아초 비스콘티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아우구스타에서 2년간, 그 다음 리카타에 억류했다. 몬카다의 행동은 마리아의 할아버지인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승인을 받았지만, 알라고나와 키아라몬테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1381년, 몬카다는 마리아를 페드로 4세의 사절에게 넘겼고, 1382년에는 아라곤 함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녀는 먼저 사르데냐로 옮겨졌고, 1384년에는 아라곤으로 갔다.

4. 아라곤의 마르티노 1세와의 공동 통치

1390년, 마리아는 후안 1세의 조카인 젊은 마르틴(마르티노 1세)과 결혼했다. 1392년, 마르티노 1세(늙은 마르틴)와 젊은 마르틴 부자는 마리아와 함께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대립하던 귀족들을 격파했다. 이후 젊은 마르틴(마르티노 1세)은 마리아와 함께 시칠리아를 공동 통치했고, 1401년 마리아가 렌티니에서 사망하자 빌뇌브 조약을 무시하고 시칠리아의 단독 왕이 되었다.

4. 1. 계승 위기

마리아와 마르티노 1세의 외아들 페드로는 1400년에 요절하여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프레데리코 3세는 딸의 혈통이 끊길 경우 사생아인 구글리엘모(몰타 백작)를 추정 상속자로 지명했으나, 구글리엘모는 1380년경 사망했다. 구글리엘모의 딸 조반나는 삼촌 마르티노 1세의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마르티노 1세는 사망할 때까지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5. 마리아의 죽음

시칠리아의 마리아는 1401년 렌티니에서 사망했다.[1] 그녀는 외아들인 페드로(1398–1400)보다 오래 살았다.[1] 왕국에는 왕세자가 남아 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남편 마르티노 1세에게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1] 마르티노 1세는 마리아와 공동으로 시칠리아를 통치했고, 마리아 사후에는 빌뇌브 조약을 파기하고 단독으로 통치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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