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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이에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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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이에노리는 1575년에 태어나 1614년에 사망한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다. 158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이었으며, 1587년 이에야스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아 이에노리로 칭했다. 1590년에는 간토 지방으로 이봉된 이에야스를 따라 고즈케국 나바군에 1만 석 영지를 받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미노 이와무라 번 2만 석 영지를 받았다. 이와무라 번주가 된 후에는 세이간지를 이와무라로 이전하고, 류간지를 창건하는 등 통치를 펼쳤다. 그는 강직하고 근면한 인품으로 칭송받았으며,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류간지 내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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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이에노리
기본 정보
씨명마쓰다이라 씨
가문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이름마쓰다이라 이에노리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덴쇼 3년 (1575년)
사망게이초 19년 2월 19일 (1614년 3월 29일)
통칭겐지로
계명다이쇼인덴젠센슈 렌샤조요 도켄다이고지
묘소다이묘 묘지 (기후현에나시)
관위종5위하, 이즈미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고즈케나와 번 → 미노이와무라 번주
부모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네노리, 어머니: 도다 다다시게의 딸
형제이에노리, 사네쓰구
배우자쇼주 (이시카와 야스미치의 딸)
자녀노리나가
도모노리
오쿠보 노리타카 정실
지쿠 나오마사 실

2. 생애

덴쇼 3년(1575년),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의 5대 당주 마쓰다이라 마사노리(신조)의 장남으로 미카와 국 오규 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겐지로(げんずる|겐지로일본어)였다. 덴쇼 10년(158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덴쇼 15년(1587년), 13세에 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 원복(성인식)을 치르고 이에야스로부터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이에노리(家乗)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영지를 옮기면서 이에노리도 따라가 고즈케 국 나와 군 내에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나와 번의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원년(1596년)에는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 관직에 서임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를 따라 종군하여 미카와 국 요시다성의 수비를 맡았다. 전투 후 공적을 인정받아 게이초 6년(1601년), 기존 영지에 1만 석이 더해져 미노 국 이와무라 번의 초대 번주가 되어 총 2만 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게이초 19년(1614년) 2월 19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마쓰다이라 노리나가가 가독과 번주 자리를 이었다. 이에노리는 강직하고 근면하며 법도를 중시하는 인물로, 주군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을 인자하게 다스려 영지가 잘 다스려졌다고 평가받는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백사위 동환구족(전·마쓰다이라 이에노리 소용,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덴쇼 3년(1575년), 오오쿠보 마쓰다이라 가 5대 당주 마쓰다이라 신조의 장남으로 미카와 국 오오쿠보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겐지로(げんずる|겐즈루일본어)였다.

덴쇼 10년(1582년), 아버지 신조가 사망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이에노리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덴쇼 12년(1584년)에 벌어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는 가로(家老)인 마쓰다이라 지카마사가 대신 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같은 해 오와리의 가니에성 전투에서는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성에 틀어박혀 저항했는데, 이때 가신인 가와이 다이토(河合太刀일본어)가 분전하여 오오쿠보 마쓰다이라 가가 공을 세웠다.

덴쇼 15년(1587년), 13세가 된 이에노리는 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 겐푸쿠(元服, 성인식)를 치렀다. 이때 이에야스로부터 이름의 한 글자(편휘, 偏諱)를 받아 이에노리(家乗)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



덴쇼 3년(1575년),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의 5대 당주 마쓰다이라 마사노리의 장남으로 미카와 국 오규 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겐지로(げんずる|겐지로일본어). 덴쇼 10년(1582년), 아버지 마사노리가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에노리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가로인 마쓰다이라 지카마사가 대신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끌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같은 해 오와리 국의 가니에성 전투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농성할 때, 가신 가와이 다이토가 분전하여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공을 세웠다.

덴쇼 15년(1587년), 13세에 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 원복을 하고, 편휘를 받아 이에노리(家乗)라고 칭했다.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면서, 이에노리는 고즈케 국 나와 군 내에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나와 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때 가로였던 마쓰다이라 지카마사는 이에야스의 직속 가신으로 발탁되었다. 덴쇼 19년(1591년), 이에야스의 오슈 출진에 동행했다. 또한 나와에 아버지의 보제사로서 세이간지를 창건했다.

게이초 원년(1596년),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당시 이에야스의 가신 중 제대부는 10명이었는데, 이에노리도 그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를 따라 종군하여 미카와 국 요시다성의 수비를 맡았다. 처음 요시다성 수비를 명받았을 때, 이에노리는 선봉에 서고 싶다고 이에야스에게 청했으나, 이에야스는 요시다성이 오와리 국 지타 군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임을 강조하며 거듭 요시다성 수비를 명했다고 한다. 전투 후에는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이세 국 구와나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항복시켰다.

게이초 6년(1601년) 정월,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으로 1만 석이 가증되어 미노 국 이와무라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고, 에나 군과 도키 군 내에서 총 2만 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이때 사례를 표하기 위해 슨푸성으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할 때, 문지방 밖에 있던 이에노리에게 이에야스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문지방을 넘어 배알했다고 전해진다.

이와무라 번주가 된 후, 나와에 있던 보제사 세이간지를 이와무라성 아래로 옮기고 아기 촌의 30석을 사찰령으로 기증했다. 또한 이와무라성 북쪽 기슭에 정련사(浄蓮寺)를 세우고 류간지(龍巌寺)도 나와에서 옮겨와 도미타 촌의 50석을 사찰령으로 기증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2월 19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류간지 내의 묘지에 묻혔다. 장남 마쓰다이라 노리나가가 뒤를 이었다.

이에노리는 강직하고 근면한 인품으로 알려져 있다. 법도를 중시하고 화려함을 싫어했으며,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중했다고 한다. 윗사람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어머니에게는 효도를 다했으며,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하고 백성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영지가 잘 다스려졌다고 평가받는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 이후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참전하여 미카와의 요시다성 수비를 맡았다. 처음 이에노리는 요시다성 수비 임무를 받았을 때,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이에야스에게 전했으나, 이에야스는 요시다성이 오와리 국 지타 군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임을 강조하며 다시 한번 요시다성 수비를 명했다고 한다.

전투 후에는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이세의 쿠와나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항복시켰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게이초 6년(1601년) 정월, 기존 영지에 1만 석이 추가되어 미노 이와무라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고, 에나 군과 토키 군 내에서 총 2만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슨푸성으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할 때, 원래는 문지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에야스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문지방을 넘어 배알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와무라 번주가 된 후에는 고즈케 국 나바에 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보제사인 세이간지를 이와무라성 아래로 옮기고, 아기촌의 30석을 사찰 영지로 기증했다. 또한 이와무라성 북쪽 기슭에는 정련사를 세우고 구옹산 류간지(龍巌寺, 용암사)도 나바에서 옮겨와 토미타촌의 50석을 사찰 영지로 기증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2월 19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해는 구옹산 류간지(용암사) 내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에노리는 강직하고 근면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법도를 중시하고 화려함을 멀리했으며,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윗사람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어머니에게는 효도를 다했으며,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하게 대하고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그의 통치 아래 이와무라 번은 잘 다스려졌다고 전해진다.

2. 4. 이와무라 번 통치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미카와 국의 요시다성 수비를 담당했다. 처음 이에노리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이에야스는 요시다성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강조하며 수비를 맡겼다. 전투 후에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이세 국 쿠와나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항복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게이초 6년(1601년) 정월, 기존 영지에 1만 석이 더해져 미노 이와무라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고, 에나 군과 토키 군 내에서 총 2만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슨푸성으로 가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이와무라 번주가 된 후, 이전 영지였던 고즈케 국 나바에 있던 아버지의 보제사인 세이간지를 이와무라성 아래로 옮기고, 아기촌의 30석을 사찰 영지로 기증했다. 또한 이와무라성 북쪽 기슭에 정련사를 세우고, 조부의 보제사였던 구옹산 류간지(龍巌寺)도 나바에서 옮겨와 토미타촌의 50석을 사찰 영지로 주었다.

게이초 19년(1614년) 2월 19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류간지(룡암사) 내 묘지에 묻혔다. 장남 마쓰다이라 노리나가가 뒤를 이었다.

이에노리는 강직하고 근면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법도를 중시하고 화려함을 멀리했으며, 작은 행동 하나에도 신중을 기했다고 전해진다. 주군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어머니에게는 효를 다했으며,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함을, 백성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그의 통치 아래 이와무라 번은 잘 다스려졌다고 평가받는다.

2. 5. 사망과 묘소

게이초 19년(1614년) 2월 19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신은 이와무라번의 이와무라성 아래에 있던 보제사 구옹산 류간지(龍巌寺, 류암사) 내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후 간에이 15년(1638년), 2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토시가 하마마쓰번으로 영지를 옮기면서 류간지(龍巌寺, 류암사)도 하마마쓰로 이전했지만, 이에노리의 묘는 이와무라에 그대로 남겨졌다. 같은 해, 새로 이와무라 번주가 된 니와 우지노부는 류간지의 옛 건물 터에 오와리 이와사키성 아래에 있던 니와 가문의 보리사 묘센사를 옮겨왔다. 겐로쿠 15년(1702년), 니와 우지토모가 에치고 다카야나기번으로 옮겨가면서 묘센사 역시 이와무라를 떠나 에치고 다카야나기로 이전했다.

그 후, 노리마사 계통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노리노리가 고모로번에서 이와무라번으로 오면서, 묘센사의 옛 건물 터에 시나노 고모로성 아래에 있던 보리사 조세이사(乗政寺)를 옮겨왔다. 이로 인해 이에노리의 묘는 조세이사의 경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조세이사가 폐사되고 건물도 철거되면서 절은 사라졌지만, 그 터에는 이에노리를 비롯한 여러 이와무라 번주와 그 가족, 중신들의 묘가 남아 '다이묘 묘지'(조세이사 묘지)로 불리고 있다.

3. 계보

다이묘 묘지에 있는 마쓰다이라 이에노리의 묘(기후현 에나시 이와무라 정)

  • '''부모'''
  • * 아버지: 마쓰다이라 신조
  • * 어머니: 토다 타다시게의 딸
  • '''정실'''
  • * 쇼주 (이시카와 야스미치의 딸)
  • '''자녀'''
  • * 장남: 마쓰다이라 노리히사
  • * 차남: 마쓰다이라 토모노리
  • * 딸: 오쿠보 노리타카의 정실
  • * 딸: 지쿠 나오마사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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