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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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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공은 1871년에 태어나 1946년에 입적한 한국의 승려이다. 그는 경허의 제자로,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으며, 덕숭산 수덕사 등을 중창하고 선학원 설립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반대하며 저항했다. 만공은 간화선 수행을 강조하고, 제자들에게 무자화두를 전했으며, 《만공어록 (滿空語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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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승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만공
만공, 1940년경
이름만공 (滿空)
출생조선
종교불교
종파선불교
직함선사
학력 및 경력
기타 정보

2. 생애

만공(滿空) 월면은 1871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당시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렸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공주군 동학사로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 성우 1849 ~ 1912)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1904년 천장암에서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만공이 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었고, 만공은 자신이 부른 노래가 곧 법문이라 답하였다. 상좌들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 은유적인 풍자의 뜻을 이해하였다.

만공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불교를 지키기 위해 여러 활동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1937년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조선 31본산 주지 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 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만공은 당시 회의 석상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 하나 조선의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교리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오히려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며 조롱하였다.[1]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만공은 다른 승려들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승려들이 쉬었다 가자고 졸랐다. 그때 만공은 밭에서 일하는 여자를 보고 갑자기 그 여자에게 다가가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었다. 놀란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아버지 또는 남편이 낫을 들고 쫓아왔다. 놀란 승려들은 줄행랑을 쳤고, 두 시간 만에 산사 근처에 도착했다. 만공이 승려들에게 다리가 아프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답했고, 덥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답했다 한다.[1]

1940년 5월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 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간화선 수행의 보급과 전파에 전력하였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암자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계속 전월사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 중얼거린 뒤 잠들듯이 열반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2. 1. 생애 초반

만공(滿空) 월면(月面)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당시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렸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공주군 동학사로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 성우 1849 ~ 1912)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1904년(광무 7년) 천장암에서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만공이 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었고, 만공은 자신이 부른 노래가 곧 법문이라 답하였다. 상좌들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 은유적인 풍자의 뜻을 이해하였다.

2. 1. 1. 출생과 행자 생활

만공 월면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당시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렸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공주군 동학사로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2. 1. 2. 출가와 승려 생활

1884년(고종 20년) 경허(鏡虛, 성우 1849 ~ 1912)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1904년(광무 7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만공이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고 나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으니, 만공은 자신이 부른 그 노래가 바로 법문이라 답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상좌들은 나중에 은유적으로 풍자한 그 뜻을 이해하였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만공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불교를 지키기 위해 여러 활동을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만공은 다른 승려들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주미를 메고 묵묵히 걸어오던 승려들이 만공에게 쉬었다 가자고 졸랐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렸고 갈 길은 멀었는데, 젊은 승려들은 계속 쉬었다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만공은 밭에서 일하는 여자를 보았다. 순간 만공은 갑자기 그 여자에게 다가가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었다. 놀란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아버지 또는 남편이 낫을 들고 "저 땡초놈 잡으라"며 쫓아왔다. 놀란 승려들은 줄행랑을 쳤고, 두 시간 만에 산사 근처에 도착했다. 만공이 승려들에게 다리가 아프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답했고, 덥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답했다 한다.[1]

2. 2. 1. 조선총독부 불교정책에 반발

만공은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1937년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조선 31본산 주지 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 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만공은 당시 회의 석상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 하나 조선의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교리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오히려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며 조롱하였다.[1]

2. 2. 2. 파격적인 일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만공은 다른 승려들과 함께 탁발을 먼 곳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도 하고, 걸어서 하루는 걸리는 산을 오를 때였다고도 한다. 시주미를 메고 묵묵히 걸어오던 만공을 비롯한 승려들 혹은 수행하던 스님들이 만공에게 쉬었다 가자고 졸랐다. 큰스님 쉬었다 가자고 반복하면서 재촉했던 것이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렸고 산에 오르려면 멀었는데, 계속 젊은 스님들은 쉬었다 가자고 졸랐다.

그때 만공은 어느 밭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순간 만공은 갑자기 밭갈이를 하던 여자를 더듬고 입을 맞추었다. 놀란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아버지 또는 남편이 낫을 들고 "저 땡초놈 잡으라"며 분노하여 쫓아왔다. 놀란 스님들은 그길로 줄행랑을 쳤고, 두 시간 만에 산사 또는 산 정상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만공이 스님들더러 다리가 아프냐고 하니 아니오라고 답하였고, 더우냐고 하니까 아니오라고 답했다 한다.

2. 3. 생애 후반

1940년 5월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 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간화선 수행의 보급과 전파에 전력하였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암자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계속 전월사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 중얼거린 뒤 잠들듯이 열반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2. 4. 사후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은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3. 사상과 신념

만공은 이론보다 실천적인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무념,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탐구하는 간화선법을 강조했으며, 제자들에게는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권했다.

만공은 개인의 참된 본질이 우주 만물의 본체와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존재의 본체를 마음, 자성, 불성, 여여불, 허공, 주인공, 본래면목, 자심, 동그라미 등으로 표현하였다. 만공에 따르면 불교의 핵심은 인간이 스스로 마음을 깨닫는 데 있으며, 가치 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수행을 통해 차별이나 분별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으며, 이때의 그가 바로 부처이자 스승이라고 했다.

만공은 수도승들을 지도할 때 침묵, 방망이질, 할, 격외의 대화, 동그라미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했다.

3. 1. 환경과 수행의 중요성

그는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념,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참선을 위해서는 행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보조적 요건도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환경과 배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설파하였다. 만공에 의하면 참선의 보조 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그는 좋은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속세에서도 역시 배경과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배경과 환경적 요인도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3. 2. 깨달음과 실천

만공은 존재의 본체를 마음, 자성(自性), 불성(佛性), 여여불(如如佛), 허공,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심(自心), 동그라미(○)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개인의 참된 본질이 우주 만물의 본체와 하나라고 보았다. 만공에 의하면 불교의 진수는 인간이 스스로 마음을 깨닫는 데 있으며, 인간의 가치 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그는 수행을 통하여 차별이나 분별의 관념에서 벗어나면 편벽됨이 없이 두루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며, 이때의 그가 바로 부처이며 스승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와 자비를 구하는 수행법으로는 참선을 으뜸으로 보았다.

만공은 수도승들을 지도할 때 침묵, 방망이질〔棒〕, 할(喝), 격외(格外)의 대화, 동그라미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4. 제자

만공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전강(田岡), 용음(龍吟), 고봉(古峰), 포산당 혜천(惠天) 금봉, 혜암, 춘성, 금오(金烏), 벽초, 금봉, 춘성(春城), 서경(西耕), 혜암(惠庵), 벽초, 원담 등이 있다. 비구니 제자로는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 등이 있다.

만공이 처음으로 전법게를 전한 제자는 수제자인 보월이다. 그러나 보월은 40세로 요절했다.

1924년 12월 보월선사가 죽자 보월선사의 스승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1925년 2월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건당식(建幢式: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법회)을 베풀어주고 금오선사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주었다.

:덕숭산맥 아래 德崇山脈下

:무늬 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今付無文印

: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寶月下桂樹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아가네. 金烏徹天飛

그 후 1929년 수덕사 현문(玄門 1884~1985)스님은 [語默動靜] 화두로 대각견성하여 당시 조실(祖室) 만공(滿空)스님으로부터 새로이 인가를 받고 전법게(傳法偈)와 혜암(惠菴)이란 법호를 받고 정식으로 법통을 이었다. 만공스님이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구름과 산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또한 대가(大家)의 가풍(家風)도 없구나

:이와 같은 글자 없는 인(印)을

:혜암 너에게 주노라.

:雲山無同別

:亦無大家風

:如是無文印

:分付惠菴汝

5. 연표


  • 1871년 - 전라북도 태인군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송(宋)이다.
  • 1895년 - 충청남도 아산 봉곡사에서 크게 깨달았다(24세).
  • 1904년 - 경허에게서 전법게를 받았다(33세).
  • 1914년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간월암을 중창했다.
  • 1934년 -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이 설립될 때 이사로 참여했고, 이사장 선출에서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부이사장은 방한암이었다.

6. 저서


  • 《만공어록》
  • 《만공법어》
  • 《현양매구》

7. 만공이 등장한 작품

8. 사진

전월사, 1941

참조

[1] 뉴스 Wolmyeon Mangong http://www.ibulgyo.c[...] 2005-01-12
[2] 뉴스 Temple plaque of Zen Master Mangong http://www.hyunbulne[...] 200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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