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철조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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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철조사부는 1907년 다롄에 설립된 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산하의 조사 기관으로, 만주 및 주변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활동을 수행했다. 설립 초기에는 철도 경영, 산업 개발, 부속지 행정과 함께 만철의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조직 개편을 거쳐 '대조사부'로 확대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러시아 연구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으며,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경제 정책 수립에도 관여했다. 주요 조사 활동으로는 만주·조선 역사 지리 조사, 지나 항전력 조사 등이 있었으며, 다양한 간행물을 발간했다. 1942년과 1943년의 만철 조사부 사건으로 기능이 약화되었고, 1943년 조사국으로 개편된 후 1945년 만철 해체와 함께 사실상 해체되었다. 만철 조사부는 전후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역할과 성과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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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조사부 | |
---|---|
만철조사부 | |
국가 | 일본 제국 |
설립 | 1907년 |
폐지 | 1945년 |
종류 | 조사 기관 |
역할 | 남만주 철도 부속 기관 일본 제국의 대륙 침략 정책 수행 |
목적 | 철도 경영 관련 조사 만주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조사 및 연구 |
주요 활동 | 만주국 건설 및 유지에 기여 각종 통계 자료 수집 및 분석 지역 개발 계획 수립 선전 및 정보 공작 수행 |
조직 및 운영 | |
조직 | 본부: 다롄 지부: 주요 도시에 설치 각 부문별 전문 조사원 |
인력 | 초기: 일본인 중심 후기: 일부 조선인 및 중국인 채용 |
예산 | 막대한 자금 지원 |
주요 연구 분야 | |
정치 | 만주국의 정치 체제 연구 각 지역의 통치 방식 연구 항일 운동 세력 분석 |
경제 | 산업 구조 및 생산량 조사 자원 개발 현황 파악 물가 및 임금 동향 분석 |
사회 | 인구 통계 조사 각 민족의 생활 양식 연구 교육 및 문화 현황 파악 |
문화 | 각 지역의 문화재 조사 민속 및 종교 연구 예술 및 문학 동향 파악 |
영향 및 평가 | |
긍정적 측면 (일본 입장) | 만주국의 안정적인 운영에 기여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 수행에 도움 각종 통계 자료 제공 |
부정적 측면 (한국 및 중국 입장) | 만주국 건설을 정당화하고 침략을 미화 항일 운동 탄압에 기여 지역 주민들의 삶을 왜곡 |
평가 | 논란의 여지가 많은 기관으로 평가 |
2. 연혁
- 1907년 다롄 본사에 조사부 설립.
- 1908년 조사부를 조사과로 개칭. 도쿄 지사에 동아경제조사국, 만주 및 조선 역사 지리 조사부 설립.
- 1910년 중앙 시험소를 만철로 이관. 지질연구소 설립.
- 1918년 다롄 도서관 설립.
- 1919년 지질연구소를 지질조사소로 개칭.
- 1927년 임시 경제 조사 위원회 설립.
- 1930년 동 위원회 폐지.
- 1932년 경제조사회(경조)를 신설. 조사과를 자료과로 개칭.
- 1936년 경조를 폐지하고 자료과 등을 통합하여 산업부 설치.
- 1938년 산업부를 조사부로 개칭.
- 1939년 조사부, 동아경제조사국, 중앙시험소, 다롄 도서관 등을 통합하여 "대조사부" 발족.
- 1943년 조사부는 조사국으로 개편되어 신징으로 이전.
3. 역사
1906년 남만주철도(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가 발족한 다음 해, 만철 조사부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만철 경영을 위한 조사를 시작으로 중국 동북부의 정치, 경제, 지리 등 기초적인 조사·연구를 수행했지만, 이후 일본의 중국 진출 확대에 발맞춰 중국 자체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도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많은 조사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 활동할 곳을 잃은 다수의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이 만철 조사부에 합류했다. 이들의 활동은 군부의 견제를 받아 두 차례의 탄압 사건을 겪으며 축소되었다.
만철 조사부는 당시 일본 최고의 싱크탱크로 평가받는다. 일본 패전과 만주국 소멸로 만철이 해체된 후에도, 만철 조사부 출신 인물 중 상당수가 일본 정계, 재계, 학계에서 활약했다.
3. 1. 설립 초기
남만주철도(만철)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는 "문장적 무비"라는 만주 경영 구상을 내세웠다. 이는 "문사적 시설을 갖추어 다른 침략에 대비하고, 일단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무단적 행동을 돕는 편의를 함께 마련해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상 하에 만철에서의 조사 활동은 철도 경영, 산업 개발, 부속지 행정과 함께 "4대 업무"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1]1907년 만철 조사부가 설치된 후, 초기에는 만철 경영을 위한 조사를 시작으로 중국 동북부 지역의 정치, 경제, 지리 등 기초적인 조사·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중국 진출 확대에 따라 중국 자체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도 수행하게 되었다.[1]
창립 초기에 발족한 만철의 조사 기관으로는 조사부 외에도 동아경제조사국, 만주 및 조선 역사 지리 조사부, 중앙시험소, 지질연구소가 있었다. 중앙시험소는 1907년에 관동도독부 관할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나 만철로 이관되었고, 지질연구소는 같은 해 만철 광업부 내의 지질과로 설치된 것이 독립된 기관이다.[1]
3. 2. 러시아 혁명의 영향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일본은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 몽골 지역에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만철 조사부는 조사과 러시아계 주임 미야자키 마사요시를 중심으로 이 지역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여 "러시아 연구의 메카"로 불렸다. 1910년대 말에는 많은 제국대학 졸업자들이 조사부에 들어왔다. 1919년 도쿄 제국 대학 신인회 출신 사노 마나부가 입사했고, 이토 타케오 등도 그의 영향을 받아 입사했다. 오카와 슈메이, 카사기 요시아키 등 훗날 우익 단체 행지사를 결성하는 인물들도 이 시기 조사부에서 활동했다.3. 3. 경제조사회
1932년 만주국 성립과 함께, 남만주철도(만철)는 관동군으로부터 만주국의 경제 정책 입안을 요청받았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경제조사회(경조)였으며, 소고 신지 위원장(만철 이사)을 중심으로, 미야자키 마사요시, 사사키 요시타케 등이 참여했다. 경제조사회는 단순한 조사 기관이 아니라 정책 입안 기관으로서 "관동군의 수족"이 되어 활동했다.[1] 경조 멤버는 이후 기획원으로 출향하는 등,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기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이 경조에서 활약한 것은 훗날 만철 사건에 연루되는 오오가미 스에히로 등의 신입 사원들이었다. 이들은 1933년부터 『만주 경제 연보』 편집에 관여하여, 협작사(合作社) 정책에 의한 농촌 구제와 "만주 산업 개발 영년 계획"을 주장하며[1], 경조파 혹은 연보파라고 불리는 그룹을 형성했다.
만주국의 정책 입안이 일단락되자, 경조는 일본군에 의한 분리 공작이 진행되던 화북 지역의 조사 활동에 점차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1936년에는 산업부로 개편, 이어서 조사부로 개칭되었다.
3. 4. "대조사부"의 성립
1937년 만철 개조에 따라 사내 조사 업무의 비중이 커지자, 마쓰오카 요스케 총재의 구상에 따라 1939년에 동아경제조사국, 북지사무소, 상하이 사무소 조사과, 중앙시험소, 만몽자원관, 다롄 도서관 등이 조사부에 통합되어, 이른바 "대조사부"가 발족했다. 이 체제 하에서 "지나 항전력 조사"를 시작으로 일련의 종합 조사가 실시되었다. 대조사부 발족 전후로 조사부에서는 대폭적인 인원 증강이 이루어졌으며, "사상적 전력자" 즉 좌익 운동에서 전향한 자들이 즉시 전력으로 대량 입사하게 되었다. 이시도 기요노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부분 조사부 내의 자료과에 배속된 그들은 외래파라고 불리는 그룹을 형성하여, 종합과를 거점으로 한 경조파와의 사이에서 중일 전쟁의 인식과 만주 사회의 변혁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다소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지만, 『만주 경제 연보』에 오에 스에히로가 강좌파의 방법으로 만주 사회를 분석한 논문을 집필하고, 그것을 스즈키 고베이가 비판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만주 경제 논쟁"의 배경에는 이러한 대립 관계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상과 같은 조사부에서의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침투를 "만철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3. 5. 만철 조사부의 해체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발생한 제2차 만철 조사부 사건으로 조사부원 대부분이 관동헌병대에 검거되었다. 이로 인해 조사부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고, 1943년 5월 조사국으로 개편되어 활동이 대폭 축소되었다. 패전으로 만철이 해체되기 전, 조사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4. 주요 조사 활동
- 만주·조선 역사 지리 조사 (1908년~1914년)
: 고토 신페이의 지원으로 일본의 문헌학적 동양학 기초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발족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키치 등 창성기의 동양학자가 다수 참여했으며, 1914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으로 이관되었다.
- 지나 항전력 조사 (1939년~1940년)
: 구시마 겐자부로, 이토 타케오, 나카니시 이사오, 오자키 호츠미 등이 조사에 참여했다. 보고서는 "총편", "정치편", "전시 경제 정책편", "오지 경제편", "외원편"의 총 5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일 전쟁에서 일본군이 장제스 정권에 대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일만지 블록 인플레이션 조사 (1940년~1941년)
: 일본 제국 세력권 아래의 인플레이션의 구체적인 상황 파악과 그 대책 수립을 위해 실시되었다.
- 화북 농촌 관행 조사 (중국 농촌 관행 조사; 1940년~1944년)
: 동아연구소와의 공동 사업으로, 중국 사회의 특성 해명을 목표로 농촌의 법적 관행을 조사했다. 화북 지역(허베이성, 산둥성)에서 현지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만철 조사부 측은 하타 다케시, 스기노하라 슌이치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전황 악화로 조사는 중도에 중단되었으며, 전후에 보고서의 일부분이 『중국 농촌 관행 조사』로 간행되었다.
- 남방 점령지 조사 (1942년 이후)
: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남방 점령지에서 군정이 시작되자, 각 점령 지역에서 군정을 위한 현지 조사가 조직되었다. 만철 조사부는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버마를 담당했으며, 전 2자에는 에다요시 이사무, 후자에는 에마 에모리를 반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5. 주요 간행물
- 조사과·경조·산업부·조사부·조사국 발행 잡지
발행 기간 | 잡지명 | 발행 부서 |
---|---|---|
1919년 1월 - 1930년 1월 | 조사시보(調査時報) | 조사과 |
1930년 2월 - 1931년 8월 | 만몽사정(満蒙事情) | 조사과 |
1931년 9월 - 1944년 2월 | 만철조사월보(満鉄調査月報) | 조사과→조사국자료과 |
- 베이징 공소·상하이 사무소 발행 잡지
발행 기간 | 잡지명 | 발행 부서 |
---|---|---|
1924년 - 1929년 | 베이징 만철월보(北京満鉄月報) | 베이징 공소 연구실 |
1929년 - 1933년 | 만철 지나월지(満鉄支那月誌) | 상하이 사무소 연구실 |
1937년 | 상하이 만철 계간(上海満鉄季刊) | 상하이 사무소 |
- 도서관 발행 잡지
- 연보
6. 전후 평가 및 영향
1960년 중앙공론 12월호에 발표된 코다마 다이조(고바야시 쇼이치의 필명)의 "비록 만철 조사부"는 조사부가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의 양면성을 지니며, 군 협력 여부에 따라 내부 대립이 존재했음을 지적했다. 이는 널리 알려진 만철 조사부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다.[2]
1964년 간행된 이토 타케오의 『만철에 살다』는 좌익 지식인들에게 "자유로운 낙원"이라는 "조사부 신화"를 정착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토는 만철 경제 조사회 소속으로 조사부 주류에 있던 인물이었다.[2]
이러한 신화화에 이시도 기요노리와 노노무라 카즈오는 "만철 마르크스주의"의 비실천성에 회의를 표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경조파·외래파를 포함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2]
만철 조사부는 종전과 함께 소멸했지만, 구성원들은 전후 산업계, 학술계, 정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46년에는 전 관계자들이 규슈 경제 조사 협회를 결성했고,[2] 1958년에는 만철 조사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통상산업성 산하 아시아경제연구소가 설립되었다.[2]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진보 진영은 만철 조사부의 경제 조사 및 개발 경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를 한국 경제 발전 모델의 참고 사례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민의힘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만철 조사부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한 기관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1]
논문
長岡新吉「満州国」臨時産業調査局の農村実態調査について」經濟學研究
[2]
웹사이트
https://newswitch.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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