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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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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이 직접 지은 차운시를 쓴 10폭 대작 병풍이다. 이 작품은 한용운이 불교적 주제인 심우(尋牛)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1933년에 마련한 그의 거처인 심우장과 관련된다. 1933년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노년의 전형적인 서풍을 보여준다. 이 병풍은 한용운의 제자인 경봉이 소장하다가 전금주에게 넘어가 그의 아들이 현재 소장하고 있으며, 심우, 견적, 견우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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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
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
문화재 정보
이름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 (萬海 韓龍雲 尋牛頌 屛風)
국가대한민국
유형문화재자료
번호73
지정일2018년 10월 18일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62
시대알 수 없음
소유자정문헌
면적알 수 없음
수량1점 (10폭)
전승지알 수 없음
전승자알 수 없음
지도대한민국
꼬리표서울 부암동
너비알 수 없음
설명알 수 없음
웹사이트알 수 없음
문화재청31,00720000,11

2. 지정 사유

이 병풍은 한용운(1879~1944)이 불교의 '심우(尋牛)'를 주제로 직접 지은 칠언절구 10수를 담고 있다.[1] 이 시는 한용운이 1937년 잡지 『신불교』에 「심우장설(尋牛莊說)」의 일부로 발표한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이며, 1933년 서울 성북동에 마련한 그의 거처 심우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1]

한용운의 필적으로는 보기 드문 10폭 병풍의 대작이며,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1] 병풍에 쓰인 글씨는 심우장을 마련한 1933년 이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한용운 노년의 전형적인 서풍(書風)을 잘 보여준다.[1] 이 병풍은 본래 한용운의 제자인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鏡峰, 885~1969) 스님이 간직하던 것으로 전해진다.[1]

한용운은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족 시인으로서 한국 역사와 문화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남긴 유묵(遺墨)인 이 병풍은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1] 현재 만해한용운심우장(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한용운묘소(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 한용운선생생가지(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탑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 한용운 찬) 등이 관련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1]

문화재 명칭은 본래 시의 제목을 따라 '한용운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 병풍'으로 해야 하지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주제를 나타내는 '한용운 심우송(尋牛頌) 병풍' 또는 '한용운 십우송(十牛頌) 병풍'으로 명명하는 것이 적절하다.[1]

2. 1. 심우(尋牛) 주제

'심우(尋牛)'는 불교에서 유래한 주제로, 한용운은 이를 칠언절구 10수로 풀어냈다. 이 시는 『한용운전집』 1권의 「심우장설(尋牛莊說)」에 실려 있으며, 1937년 6월 1일 발행된 잡지 『신불교』 제4집에 처음 발표되었다.[1]

한용운은 불교 학도로서 처음 도를 구하는 마음(初心求道)을 나타내고자 1933년 서울 성북동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 이름을 심우장이라 지었다. 「심우장설」에서 그는 심우의 유래를 간략히 설명하고, 송나라 확암선사(廓庵禪師) 사원(師遠)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이 마음을 닦아 본성을 보는 수심견성(修心見性)의 단계를 소에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하며 이를 번역하고 해설하였다.

이어 한용운은 확암선사의 시에 운을 맞춰(次韻)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10수와 그 번역을 함께 실었다. 이 병풍에 쓰인 글씨는 바로 한용운 자신이 지은 이 차운시로, 그의 심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심우장과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1]

「차확암십우송운」의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 1 尋牛(심우): 此物元非無處尋,(차물원비무처심) 원래 못 찾을 리 없긴 없어도

: 山中但覺白雲深.(산중단각백운심) 산 속에 흰 구름이 이리 낄 줄이야!

: 絶壑斷崖攀不得,(절학단애반부득) 다가서는 벼랑이라 발 못 붙인 체

: 風生虎嘯復龍唫.(풍생호소부용금) 호랑이 용 울음에 몸을 떠느니.

: 2 見跡(견적): 狐狸滿山凡幾多,(호리만산범기다) 여우니 삵괭이니 득실대는 산

: 回頭又問是甚麽.(회두우문시심마) 머리를 돌려 또 묻느니 「이것은 무엇?」

: 忽看披艸踏花跡,(홀간피초답화적) 문득 보니 풀 헤치고 꽃 밟은 자취!

: 別徑何須更覓他.(별경하수갱타멱) 다른 데 가 굳이 찾을 필요 있으랴.

: 3 見牛(견우): 至今何必更聞聲,(지금하필갱문성) 이젠 꼭 그 소리를 들어야 하랴.

: 揖白白兮踏靑靑.(읍백백혜답청청) 푸른 풀밭 딛고 선 희고 흰 모습!

: 不離一步立看彼,(불리일보입간피) 한 걸음을 안 옮긴 채 그를 보느니

: 毛角元非到此成.(모각원비도차성) 저 털 저 뿔 오늘에 됨은 아닐세.

: 4 得牛(득우): 已見更疑不得渠,(이견생의부득거) 보고는 못 붙들까 애태웠듯이

: 擾擾毛心亦難除.(요요모심역난재) 잃을세라 이 걱정 끊기 어려워……

: 頓覺其轡已在手,(돈각기비이재수) 깨달으니 그 재갈 손에 있는데

: 大似元來不離居.(대사원리불리거) 본디 같이 있는 듯함 이상도 해라.

: 5 牧牛(목우): 飼養馴致兩加身,(사양순치양가신) 기르고 길들이기 잊지 않음은

: 恐彼野性逸入塵.(공피야성일입진) 행여나 옛 버릇 나 달아날세라.

: 片時不待羈與絆,(편시부대기여반) 어느덧 굴레 씌워 끌지 않아도

: 萬事於今必須人.(만사여금필수인) 온갖 일 따르게 됨 신기하여라.

: 6 騎牛歸家(기우귀가): 不費鞭影任歸家,(불비편영임귀가) 채찍질 함도 없이 돌아가는 것

: 溪山何妨隔烟霞.(계산하방격연하) 안개 늘 끼었은들 상관 있으랴.

: 斜日吃盡長程艸,(사일흘진장정초) 긴 길가 그 많은 풀을 먹어치울 제

: 春風未見香入牙.(춘풍미견향입아) 봄바람의 향기도 입에 씹히네.

: 7 忘牛存人(망우존인): 自任逸蹄水復山,(자임일제수복산) 빠른 걸음 소에 받겨 산이며

: 綠水靑山白日間.(녹수청산백일간) 물을 달리느니 세월은 한가롭기만……

: 雖然已在桃林野,(수연아재도림야) 도림(桃林)을 휘돌던 일 잊고 난 뒤로

: 片夢猶在小窓間.(편몽유재소창간) 간간이 창 밖으로 꿈은 달리네.

: 8 人牛俱忘(인우구망): 非徒色空空亦空,(비도색공공역공) 색(色)만이 공(空) 아니라 공도 또한 공이기에

: 已無塞處又無通.(이무색처우무룡) 막힘도 없으려니 통함인들 있을 줄이……

: 纖塵不立依天劍,(섬전불립의천검) 하늘 높이 빼어 든 칼 먼지 하나 못 않거니

: 肯許千秋有祖宗.(긍허천추유조종) 천추에 조종(祖宗) 있음 그 어찌 용납하리.

: 9 返本還源(반본환원): 三明六通[2]元非功,(삼명육통원비공) 삼명(三明)이라 육통(六通)이라 별것 없거니

: 何似若盲復如聾.(하사약맹복여릉) 소경인 양 벙어린 양 됨만야 하랴.

: 回首毛角未生外,(회수모각미생외) 돌아보니 털도 뿔도 나지 않은 곳

: 春來依舊百花紅.(춘래의구백화홍) 봄이라 활짝 핀 꽃 붉기도 한 빛!

: 10 入鄽垂手(입전수수): 入泥入水任去來,(입니입수임거래) 어디에나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 哭笑無端不盈腮.(곡소부단불영시) 울고 웃고 그 볼엔 흔적도 못 내……

: 他日茫茫苦海裏,(타일망망고해리) 괴로움의 바닷속 언제인가는

: 更敎蓮花火中開.(경교연화화중개) 불길 중에 연꽃을 피게 하리라.

2. 2. 심우장과의 관련성

만해 한용운 심우송 병풍은 불교의 '심우(尋牛)'라는 주제를 다룬 칠언절구 10수를 담고 있다. 이 시는 한용운이 직접 지은 것으로, 1937년 『신불교』 제4집에 「심우장설(尋牛莊說)」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 글은 이후 『한용운전집』1(佛敎文化硏究院, 2005)에도 수록되었다.[1]

「심우장설」에서 한용운은 송나라의 확암선사(廓庵禪師)가 지은 「십우도송(十牛圖頌)」을 번역하고 해설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불교 학도로서 처음 도를 구하는 마음(初心求道)을 나타내고자 1933년 서울 성북동에 마련한 거처의 이름을 '심우장'이라고 지었다고 밝혔다. 또한 확암선사의 시에 차운(次韻, 원 시의 운자를 따서 시를 짓는 것)하여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10수를 지었는데, 이 병풍에 쓰인 글씨가 바로 이 시이다.[1]

따라서 이 병풍은 한용운의 심우(尋牛), 즉 깨달음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시에 1933년에 마련된 그의 거처 심우장의 명명 이유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그 의미를 더한다. 병풍의 글씨는 심우장을 마련한 1933년 이후에 쓰인 것으로 보이며, 한용운 노년의 특징적인 서체를 잘 보여준다.[1]

2. 3. 서예 작품으로서의 가치

이 병풍은 한용운(1879~1944)의 필적으로는 보기 드문 10폭에 달하는 대작이라는 점에서 희귀성이 높다.[1] 또한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여 작품의 가치를 더한다.[1] 필사 시기는 한용운이 심우장을 마련한 1933년(55세) 이후로 추정되며, 그의 노년기 전형적인 서풍(書風, 글씨체)을 잘 보여준다.[1]

한용운은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족 시인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그가 남긴 글씨나 그림인 유묵(遺墨)은 그 자체로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이 병풍 글씨는 한용운의 제자인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鏡峰, 885~1969) 스님이 간직하던 것으로 전해진다.

3. 조사 보고서

이 병풍은 한용운(1879~1944)이 불교의 깨달음 과정을 소에 비유한 심우(尋牛)를 주제로 직접 지은 칠언절구 10수,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을 쓴 10폭짜리 대작이다.[1] 이 시는 1937년 6월 1일 발행된 잡지 『신불교』 제4집에 「심우장설(尋牛莊說)」이라는 글과 함께 처음 발표되었으며[1], 한용운이 1933년 서울특별시 성북동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 심우장과도 관련이 깊다.[1]

병풍은 한용운의 필적으로는 보기 드문 대작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필사 시기는 심우장을 마련한 1933년(한용운 55세) 이후로 추정되며, 그의 노년기 전형적인 서풍을 잘 보여준다.[1] 본래 이 병풍은 한용운의 제자인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후 경봉 스님의 상좌였던 전금주(錢金周)의 아들(현 소장자)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1]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민족 시인, 독립운동가인 한용운의 유묵(遺墨)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 지정 필요성이 제기되었다.[1] 현재 한용운 관련 문화재로는 만해한용운심우장(서울 기념물 7), 한용운묘소(등록문화재 519), 한용운선생생가지(충남 기념물 75),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탑비(경남 유형문화유산 492, 한용운 찬) 등이 있다.[1]

문화재 명칭은 시의 제목을 그대로 쓴 '한용운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 병풍'이 정확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어 '한용운 십우송(十牛頌) 병풍' 또는 '한용운 심우송(尋牛頌) 병풍'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다.[1]

3. 1. 유물 소장 경위

이 병풍 글씨는 한용운(1879~1944)의 제자인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이 간직하던 것이다.[1] 이후 경봉 스님은 자신의 상좌였던 전금주(錢金周)의 아들(현 소장자)에게 이 병풍을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1]

병풍의 내용은 심우(尋牛)라는 불교적인 주제를 다룬 칠언절구 10수로, 한용운이 직접 지은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을 쓴 것이다.[1] 이 시는 『한용운전집』 1권(불교문화연구원, 2005)의 「심우장설(尋牛莊說)」에 실려 있으며, 1937년 『신불교』 제4집에 기고되었음이 밝혀져 있다.[1] 한용운은 「심우장설」에서 송나라 확암선사(廓庵禪師) 사원(師遠)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을 번역 및 해설하고, 자신의 거처를 심우장이라 명명한 이유와 함께 확암선사의 시를 차운(次韻)한 칠언절구 10수와 그 번역을 실었다.[1]

이 병풍은 한용운의 심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1933년에 마련한 그의 거처 심우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1] 그의 필적으로는 보기 드문 10폭 대작으로 평가받으며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 필사 시기는 심우장을 마련한 1933년 이후로 추정되며, 그의 노년기 전형적인 서풍을 잘 나타낸다.[1]

3. 2. 작품 내용 분석

이 병풍에 쓰인 글은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칠언절구 10수,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이다. 이 시는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尋牛)'를 주제로 다룬다. 한용운은 송나라 확암선사(廓庵禪師) 사원(師遠)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을 차운하여 이 시를 지었으며, 불교 학도로서 처음 도를 구하는(初心求道)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밝혔다.[1]

이 시는 한용운이 1933년 서울특별시 성북동에 마련한 거처인 심우장(尋牛莊)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시는 1937년 6월 1일 발행된 잡지 『신불교』 제4집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한용운전집』1(佛敎文化硏究院, 2005)의 「심우장설(尋牛莊說)」에도 실려 있다.[1]

「차확암십우송운」은 깨달음의 과정을 다음과 같은 10단계로 나누어 묘사한다.

  • 1. 심우(尋牛): 본성을 찾아 나서는 단계.
  • 2. 견적(見跡): 본성의 자취(발자국)를 발견하는 단계.
  • 3. 견우(見牛): 본성(소)을 직접 보는 단계.
  • 4. 득우(得牛): 본성(소)을 붙잡아 얻는 단계.
  • 5. 목우(牧牛): 얻은 본성(소)을 길들이는 수행 단계.
  • 6. 기우귀가(騎牛歸家): 본성(소)을 타고 본래의 집으로 돌아오는 단계.
  • 7.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잊고 사람만 남는 단계로, 본성과 하나가 된 상태.
  • 8.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주체)과 소(객체)를 모두 잊는 단계로, 모든 분별이 사라진 (空)의 경지.
  • 9. 반본환원(返本還源):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 청정한 상태.
  • 10. 입전수수(入鄽垂手): 깨달음을 얻은 후 중생 구제를 위해 속세로 나아가는 단계.


이 10수의 시는 한용운의 깊은 불교 사상과 구도 정신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병풍 자체는 한용운의 노년기(1933년 이후) 서풍을 보여주는 10폭의 대작이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1]

3. 2. 1. 1. 심우(尋牛)

'심우(尋牛)'는 불교에서 깨달음의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주제이다. 한용운(1879~1944)은 이 주제를 다룬 칠언절구 10수인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을 지었다. 이 시는 송나라 확암선사(廓庵禪師) 사원(師遠)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을 차운한 것으로, 한용운 자신이 불교 학도로서 처음 도를 구하는(初心求道) 뜻을 나타내고자 지었다고 밝혔다.[1] 한용운은 1933년 서울특별시 성북동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를 심우장(尋牛莊)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 역시 심우와 관련이 깊다.[1]

「차확암십우송운」은 1937년 『신불교』 제4집에 처음 발표되었으며[1],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심우(尋牛)'''

: 此物元非無處尋,(차물원비무처심) 원래 못 찾을 리 없긴 없어도

: 山中但覺白雲深.(산중단각백운심) 산 속에 흰 구름이 이리 낄 줄이야!

: 絶壑斷崖攀不得,(절학단애반부득) 다가서는 벼랑이라 발 못 붙인 체

: 風生虎嘯復龍唫.(풍생호소부용금) 호랑이 용 울음에 몸을 떠느니.

: '''2. 견적(見跡)'''

: 狐狸滿山凡幾多,(호리만산범기다) 여우니 삵괭이니 득실대는 산

: 回頭又問是甚麽.(회두우문시심마) 머리를 돌려 또 묻느니 「이것은 무엇?」

: 忽看披艸踏花跡,(홀간피초답화적) 문득 보니 풀 헤치고 꽃 밟은 자취!

: 別徑何須更覓他.(별경하수갱타멱) 다른 데 가 굳이 찾을 필요 있으랴.

: '''3. 견우(見牛)'''

: 至今何必更聞聲,(지금하필갱문성) 이젠 꼭 그 소리를 들어야 하랴.

: 揖白白兮踏靑靑.(읍백백혜답청청) 푸른 풀밭 딛고 선 희고 흰 모습!

: 不離一步立看彼,(불리일보입간피) 한 걸음을 안 옮긴 채 그를 보느니

: 毛角元非到此成.(모각원비도차성) 저 털 저 뿔 오늘에 됨은 아닐세.

: '''4. 득우(得牛)'''

: 已見更疑不得渠,(이견생의부득거) 보고는 못 붙들까 애태웠듯이

: 擾擾毛心亦難除.(요요모심역난재) 잃을세라 이 걱정 끊기 어려워……

: 頓覺其轡已在手,(돈각기비이재수) 깨달으니 그 재갈 손에 있는데

: 大似元來不離居.(대사원리불리거) 본디 같이 있는 듯함 이상도 해라.

: '''5. 목우(牧牛)'''

: 飼養馴致兩加身,(사양순치양가신) 기르고 길들이기 잊지 않음은

: 恐彼野性逸入塵.(공피야성일입진) 행여나 옛 버릇 나 달아날세라.

: 片時不待羈與絆,(편시부대기여반) 어느덧 굴레 씌워 끌지 않아도

: 萬事於今必須人.(만사여금필수인) 온갖 일 따르게 됨 신기하여라.

: '''6. 기우귀가(騎牛歸家)'''

: 不費鞭影任歸家,(불비편영임귀가) 채찍질 함도 없이 돌아가는 것

: 溪山何妨隔烟霞.(계산하방격연하) 안개 늘 끼었은들 상관 있으랴.

: 斜日吃盡長程艸,(사일흘진장정초) 긴 길가 그 많은 풀을 먹어치울 제

: 春風未見香入牙.(춘풍미견향입아) 봄바람의 향기도 입에 씹히네.

: '''7. 망우존인(忘牛存人)'''

: 自任逸蹄水復山,(자임일제수복산) 빠른 걸음 소에 받겨 산이며

: 綠水靑山白日間.(녹수청산백일간) 물을 달리느니 세월은 한가롭기만……

: 雖然已在桃林野,(수연아재도림야) 도림桃林을 휘돌던 일 잊고 난 뒤로

: 片夢猶在小窓間.(편몽유재소창간) 간간이 창 밖으로 꿈은 달리네.

: '''8. 인우구망(人牛俱忘)'''

: 非徒色空空亦空,(비도색공공역공) 색만이 공 아니라 공도 또한 공이기에

: 已無塞處又無通.(이무색처우무룡) 막힘도 없으려니 통함인들 있을 줄이……

: 纖塵不立依天劍,(섬전불립의천검) 하늘 높이 빼어 든 칼 먼지 하나 못 않거니

: 肯許千秋有祖宗.(긍허천추유조종) 천추에 조종祖宗 있음 그 어찌 용납하리.

: '''9. 반본환원(返本還源)'''

: 三明六通[2]元非功,(삼명육통원비공) 삼명이라 육통이라 별것 없거니

: 何似若盲復如聾.(하사약맹복여릉) 소경인 양 벙어린 양 됨만야 하랴.

: 回首毛角未生外,(회수모각미생외) 돌아보니 털도 뿔도 나지 않은 곳

: 春來依舊百花紅.(춘래의구백화홍) 봄이라 활짝 핀 꽃 붉기도 한 빛!

: '''10. 입전수수(入鄽垂手)'''

: 入泥入水任去來,(입니입수임거래) 어디에나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 哭笑無端不盈腮.(곡소부단불영시) 울고 웃고 그 볼엔 흔적도 못 내……

: 他日茫茫苦海裏,(타일망망고해리) 괴로움의 바닷속 언제인가는

: 更敎蓮花火中開.(경교연화화중개) 불길 중에 연꽃을 피게 하리라.[1]

3. 2. 2. 2. 견적(見跡)

: 狐狸滿山凡幾多,(호리만산범기다) 여우니 삵괭이니 득실대는 산

: 回頭又問是甚麽.(회두우문시심마) 머리를 돌려 또 묻느니 「이것은 무엇?」

: 忽看披艸踏花跡,(홀간피초답화적) 문득 보니 풀 헤치고 꽃 밟은 자취!

: 別徑何須更覓他.(별경하수갱타멱) 다른 데 가 굳이 찾을 필요 있으랴.

3. 2. 3. 3. 견우(見牛)

至今何必更聞聲,(지금하필갱문성) 이젠 꼭 그 소리를 들어야 하랴.

揖白白兮踏靑靑.(읍백백혜답청청) 푸른 풀밭 딛고 선 희고 흰 모습!

不離一步立看彼,(불리일보입간피) 한 걸음을 안 옮긴 채 그를 보느니

毛角元非到此成.(모각원비도차성) 저 털 저 뿔 오늘에 됨은 아닐세.

3. 2. 4. 4. 득우(得牛)

:已見更疑不得渠,(이견생의부득거) 보고는 못 붙들까 애태웠듯이

:擾擾毛心亦難除.(요요모심역난재) 잃을세라 이 걱정 끊기 어려워……

:頓覺其轡已在手,(돈각기비이재수) 깨달으니 그 재갈 손에 있는데

:大似元來不離居.(대사원리불리거) 본디 같이 있는 듯함 이상도 해라.

3. 2. 5. 5. 목우(牧牛)

: 5 牧牛(목우)

: 飼養馴致兩加身,(사양순치양가신) 기르고 길들이기 잊지 않음은

: 恐彼野性逸入塵.(공피야성일입진) 행여나 옛 버릇 나 달아날세라.

: 片時不待羈與絆,(편시부대기여반) 어느덧 굴레 씌워 끌지 않아도

: 萬事於今必須人.(만사여금필수인) 온갖 일 따르게 됨 신기하여라.

3. 2. 6. 6. 기우귀가(騎牛歸家)

: 不費鞭影任歸家,(불비편영임귀가) 채찍질 함도 없이 돌아가는 것

: 溪山何妨隔烟霞.(계산하방격연하) 안개 늘 끼었은들 상관 있으랴.

: 斜日吃盡長程艸,(사일흘진장정초) 긴 길가 그 많은 풀을 먹어치울 제

: 春風未見香入牙.(춘풍미견향입아) 봄바람의 향기도 입에 씹히네.

3. 2. 7. 7. 망우존인(忘牛存人)

: 自任逸蹄水復山,(자임일제수복산) 빠른 걸음 소에 받겨 산이며

: 綠水靑山白日間.(녹수청산백일간) 물을 달리느니 세월은 한가롭기만……

: 雖然已在桃林野,(수연아재도림야) 도림桃林을 휘돌던 일 잊고 난 뒤로

: 片夢猶在小窓間.(편몽유재소창간) 간간이 창 밖으로 꿈은 달리네.

3. 2. 8. 8. 인우구망(人牛俱忘)

: 非徒色空空亦空,(비도색공공역공) 색만이 공 아니라 공도 또한 공이기에

: 已無塞處又無通.(이무색처우무룡) 막힘도 없으려니 통함인들 있을 줄이……

: 纖塵不立依天劍,(섬전불립의천검) 하늘 높이 빼어 든 칼 먼지 하나 못 않거니

: 肯許千秋有祖宗.(긍허천추유조종) 천추에 조종祖宗 있음 그 어찌 용납하리.

3. 2. 9. 9. 반본환원(返本還源)

만해 한용운이 송나라 확암선사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을 차운하여 지은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 칠언절구 10수 중 아홉 번째 시이다.

:'''원문'''

::三明六通[2]元非功,(삼명육통원비공)

::何似若盲復如聾.(하사약맹복여릉)

::回首毛角未生外,(회수모각미생외)

::春來依舊百花紅.(춘래의구백화홍)

:'''번역'''

::삼명이라 육통이라 별것 없거니

::소경인 양 벙어린 양 됨만야 하랴.

::돌아보니 털도 뿔도 나지 않은 곳

::봄이라 활짝 핀 꽃 붉기도 한 빛!

3. 2. 10. 10. 입전수수(入鄽垂手)

: 入泥入水任去來,(입니입수임거래) 어디에나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 哭笑無端不盈腮.(곡소부단불영시) 울고 웃고 그 볼엔 흔적도 못 내……

: 他日茫茫苦海裏,(타일망망고해리) 괴로움의 바닷속 언제인가는

: 更敎蓮花火中開.(경교연화화중개) 불길 중에 연꽃을 피게 하리라.

3. 3. 문화재적 가치

이 병풍은 한용운(1879~1944)이 직접 지은 심우(尋牛)를 주제로 한 칠언절구 10수인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을 쓴 작품이다.[1] 이 시는 한용운이 1937년 『신불교』 제4집에 기고한 「심우장설(尋牛莊說)」에 실려 있으며, 송나라 확암선사(廓庵禪師)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을 차운(次韻)한 것이다.[1]

병풍의 내용은 한용운이 1933년 서울 성북동에 마련한 거처인 심우장(尋牛莊)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용운은 「심우장설」에서 불교 수행의 과정을 소(牛)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의 의미를 설명하고, 자신의 거처를 심우장이라 이름 지은 이유와 함께 이 차운시를 지었다고 밝혔다.[1] 이는 불교 수행자로서 구도의 의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심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1]

문화재로서 이 병풍은 다음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 희소성: 한용운의 필적으로는 보기 드문 10폭짜리 대작이다.[1]
  • 보존 상태: 현재까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1]
  • 서체: 필사 연대는 심우장을 마련한 1933년(한용운 55세) 이후로 추정되며, 그의 노년기 전형적인 서풍을 잘 보여준다.[1]
  • 인물 중요성: 한용운은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시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유묵(遺墨)은 그 자체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1]


이 병풍은 원래 한용운의 제자인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鏡峰, 1885~1969) 스님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후 경봉 스님의 상좌이던 전금주(錢金周)의 아들(현 소장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현재 대한민국에는 한용운과 관련된 여러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으며, 이 병풍 또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관련 문화재로는 만해한용운심우장(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구리 한용운 묘소(등록문화재 제519호), 한용운선생생가지(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부도 및 탑비(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제492호, 한용운 찬) 등이 있다.[1]

4. 명칭

이 문화재의 정식 명칭은 한용운이 송나라 확암선사의 '십우도송(十牛圖頌)'에 차운하여 지은 시의 제목을 따른 '한용운 차확암십우송운(次廓庵十牛頌韻) 병풍'이다. 하지만 이 명칭은 일반적이지 않으므로, 불교의 '심우(尋牛)' 또는 '십우(十牛)'라는 주제를 나타내는 '한용운 십우송(十牛頌) 병풍' 또는 '한용운 심우송(尋牛頌) 병풍'으로 줄여 부르는 것이 좋다.[1]

참조

[1] 간행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고시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18-10-18
[2] 문서 三明六通:불교 용어. 삼명은 天眼明ㆍ宿命明ㆍ漏盡明. 육통은 他心智證通(亦云他心通)ㆍ宿住隨念智證通(即宿 命智證通, 亦云宿命通)ㆍ漏盡智證通(亦云漏盡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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